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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니모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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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헤로니모 임은 1926년 쿠바에서 태어난 한국계 쿠바인으로, 쿠바 혁명에 참여하여 사회주의 혁명가로 활동했다. 아바나 대학교 법대 중퇴 후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혁명에 참여했으며, 혁명 후에는 경찰 공무원과 산업부 차관을 역임했다. 1988년 퇴직 후에는 키테라스 시장과 동아바나 인민위원장을 지내며 쿠바 정부로부터 여러 훈장을 받았다. 1995년 한국 방문을 계기로 쿠바 한인 사회 재건에 힘썼으며, 한글학교 건립, 한인회 설립을 추진했으나, 한인회 설립은 쿠바 정부의 불허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는 쿠바 한인 사회의 리더로 활동하며, 2006년 1월 19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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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니모 임
기본 정보
헤로니모 임
헤로니모 임
본명임에르네스토 (Lim Ernesto)
한국어 이름임경수 (林敬洙)
출생1926년 9월 30일, 마탄사스 주 카르데나스
사망2006년 1월 15일 (향년 79세), 아바나
국적쿠바
민족한국인
직업정치인, 게릴라
경력
소속 정당7·26 운동 → 쿠바 공산당
주요 활동쿠바 혁명 참여
가족 관계
배우자마르가리타 아길레라
자녀임 마르가리타, 임 아나, 임 일리아나, 임 타니아
기타 정보
서훈체 게바라 훈장

2. 초기 생애

헤로니모 임은 1926년 쿠바 마탄사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임천택은 1997년 국민훈장 동백장에 추서되었으며, 1921년 멕시코에서 쿠바로 건너가[3][1] 에네켄 농장에서 일했다.[1] 헤로니모는 6남매 중 장남이었다.[3]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헤로니모는 쿠바 최초의 한인 대학생으로 아바나 대학교 법대에 진학했다.[3][4] 1946년 아바나대 법대에 진학하여 5년제 법대 졸업을 1년 앞둔 1949년 학업을 접고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진보 정당 '오르토독소(Ortodoxo)'에 입당하여 바티스타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직업 혁명가의 길을 걸었다.

1995년 광복 50주년 세계한민족축전에 쿠바 한인 대표로 초청되어 한국을 방문한 헤로니모는 쿠바 한인 사회 재건을 결심한다. 귀국 후 쿠바 한인들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한글 학교 건립과 한인회 설립에 헌신하였다.

2001년 쿠바 이주 80주년을 맞아, 헤로니모는 'FRENTE HACIA EL OESTE, 전면을 고향이 있는 서쪽을 향하도록 하라'는 뜻에서 서쪽을 향해 '한인 이주기념비'를 세웠다.[10]

2. 1. 쿠바 이민과 성장 배경

헤로니모 임은 1926년 쿠바 마탄사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임천택은 1921년 멕시코에서 쿠바로 이주하여[3][1] 에네켄 농장에서 일했다.[1] 헤로니모는 6남매 중 장남이었다.[3]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헤로니모는 쿠바 최초의 한인 대학생으로 아바나 대학교 법대에 진학했다.[3][4]

2. 2. 혁명 참여와 정치 활동

1949년, 헤로니모 임은 학업을 중단하고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진보 정당 '오르토독소(Ortodoxo)'에 입당하여 바티스타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직업 혁명가의 길을 걸었다.[6] 이후 10년 동안 마탄사스 지역에서 카스트로와 함께 도시 게릴라 활동을 펼치는 등 사회주의 직업 혁명가로 활동했다.[6] 1959년 혁명 이후에는 경찰 공무원으로 입문하여 산업부 차관을 역임했고, 1988년 퇴직 후에는 아바나 인근의 소도시 키테라스 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기도 했다.[6]

1963년 산업부 인사담당관으로 옮겨 쿠바의 혁명 영웅인 체 게바라가 산업부 장관을 지낼 당시 차관으로 4년 동안 함께 일했다.[6] 1988년 식량구매국장을 끝으로 정부에서 물러난 뒤에도 아바나 근교 키테라스 시장에 선출되었고, 차관급인 동아바나 인민위원장으로 선출되어 한인으로서는 최고위직에 올랐다. 쿠바 정부는 헤로니모 임에게 최고 훈장 등 10여 개의 훈장을 수여했다.[7]

3. 쿠바 혁명과 정부 활동

헤로니모 임은 1959년 혁명 이후 경찰 공무원으로 공직을 시작하여 산업부 차관, 키테라스 시장, 동아바나 인민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쿠바 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산업부 차관 시절에는 체 게바라와 함께 일하기도 했다.[6] 쿠바 정부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최고 훈장을 포함한 10여 개의 훈장을 수여했다.[7]

1980년대 말 쿠바의 경제난 속에서도 헤로니모는 은퇴 후 택시 운전을 하며 한인 후손들을 모아 한인회를 조직하고 한글과 한국 문화를 가르치는 등 한인 사회를 위한 활동을 이어갔다. 1995년 광복 50주년 세계한민족축전에 초청되어 한국을 방문한 후, 쿠바 내 한인 사회 재건을 결심하고 한인회 설립, 한글 학교 건립, 역사책 발간 등을 추진했다.

그는 쿠바 한인들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헌신했으며, 2001년에는 한인 이주 80주년을 맞아 마나티 항구와 엘볼로 지역에 한인 이주 기념비를 건립했다. 이 기념비들은 조국을 그리는 마음을 담아 서쪽을 향해 세워졌다.[8][10] 그의 여동생 마르타 림김(한국 이름 임은희)은 남편과 함께 쿠바 한인들의 역사를 담은 책 '쿠바의 한인들(코레아노스 엔 쿠바)'을 펴내기도 했다.[9]

3. 1. 혁명 참여

헤로니모 임은 1949년 아바나 대학교 법대 졸업을 1년 앞두고 학업을 중단하고,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진보 정당 '오르토독소(Ortodoxo)'에 입당하여 바티스타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직업 혁명가가 되었다.[6] 그는 마탄사스 지역에서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도시 게릴라 활동을 펼치는 등 사회주의 직업 혁명가로 활동했다.[6]

1963년 산업부 인사담당관으로 옮긴 후에는 쿠바 혁명 영웅 체 게바라가 산업부 장관을 지낼 당시 차관으로 4년간 함께 일했다.[6]

3. 2. 쿠바-북한 관계 증진

헤로니모 임은 체 게바라와 함께 쿠바 혁명에 참여했으며, 북한과의 관계 증진에 기여하여 양국 간 강력한 동맹 관계를 구축하는 데 일조했다.[3]

3. 3. 정부 요직 역임

헤로니모 임은 1959년 쿠바 혁명 이후 경찰 공무원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혁명정부 경찰청에서 인사·법무담당관을 지내다가 1963년 산업부 인사담당관으로 자리를 옮겼다.[6] 체 게바라가 산업부 장관으로 재임하던 시절, 헤로니모는 차관으로서 4년간 그와 함께 일했다.[6]

1988년 식량구매국장을 끝으로 정부에서 물러난 뒤, 아바나 근교 키테라스 시장에 선출되었고, 이후 차관급인 동아바나 인민위원장으로 선출되어 한인으로서는 최고위직에 올랐다. 쿠바 정부는 그에게 최고 훈장을 포함하여 10여 개의 훈장을 수여했다.[7]

4. 한인 사회 활동과 업적

헤로니모 임은 쿠바 혁명 영웅이자 한인 사회의 리더였다. 1980년대 말부터 경제난이 닥치자, 택시 운전을 하며 한인 후손들을 모아 한인회를 조직하고 한글과 한국 문화를 가르치는 등 한인 사회 재건에 힘썼다. 1995년 광복 50주년 세계한민족축전에 초청되어 한국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쿠바 내 한인 사회 재건을 결심하였다. 쿠바 정부는 최고 훈장 등 10여 개의 훈장을 수여하며 그의 업적을 기렸다.[7]

4. 1. 한인 사회 재건 노력

1995년, 헤로니모 임은 광복 50주년 세계한민족축전에 쿠바 한인 대표로 초청되어 한국을 방문했다. 이 방문을 계기로 쿠바 한인 사회 재건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는 쿠바 한인들을 위해 세 가지 목표를 세웠다. 첫째는 여동생 마리타(한국 이름 임은희)를 도와 쿠바 최초 한인들의 역사를 담은 '쿠바의 한인들'이라는 역사책을 발간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쿠바 내에서 한국의 문화, 역사, 언어를 배울 수 있는 한글 학교를 운영하는 것이었다. 셋째는 쿠바 내 한인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쿠바 한인회'를 설립하는 것이었다.[8]

귀국 후, 헤로니모 임은 쿠바 한인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11년간 헌신했다. 한글 학교를 건립하고, 한인회 설립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한인회 설립을 위해 쿠바 정부에 한인의 존재를 입증해야 했고, 이를 위해 자신의 차를 몰고 쿠바 전역을 다니며 한인들을 만나고 현지 신문에 광고를 내는 등 열정을 쏟았다.[8]

2001년은 쿠바 이주 80주년이 되는 해였다. 헤로니모 임은 'FRENTE HACIA EL OESTE, 전면을 고향이 있는 서쪽을 향하도록 하라'는 뜻에서 서쪽을 향해 한인 이주기념비를 세웠다.[10] 한인들의 첫 정착지였던 마나티와 엘볼로 지역에 세워진 이 기념비들은 조국을 그리는 마음을 담아 서쪽을 향하고 있다.[8] 같은 해 3월, 마나티 항구에서는 미국 한인장로회의 도움으로 이민 80주년 기념식과 함께 기념비 제막식이 열렸다.[10]

'쿠바의 한인들'(코레아노스 엔 쿠바)은 2001년 헤로니모 임의 여동생 마르타 림김(한국 이름 임은희)이 남편과 함께 펴낸 책이다. 이 책은 임천택이 남긴 자료와 고령의 한인 2세들의 증언을 토대로 만들어졌다.[9]

하지만 헤로니모 임의 숙원이었던 한인회 설립은 쿠바 정부의 불허로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8]

4. 2. 한글 학교 설립과 교육 활동

헤로니모 임은 쿠바 한인들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한글 학교를 건립하고 운영하는 데 힘썼다.[8] 1988년 은퇴 후에는 정부에서 선물 받은 소련제 라다 승용차로 택시 운전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면서, 한인 후손들에게 한글과 한국 문화를 가르쳤다.[8]

1995년 광복 50주년 세계한민족축전에 쿠바 한인 대표로 초청되어 한국을 방문한 후, 쿠바 내 한인 사회 재건을 결심했다.[8] 귀국 후, 쿠바 한인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한글 학교를 건립하고 한인회 설립을 위해 헌신했다.[8]

쿠바 이주 80주년인 2001년에는 한인들이 첫발을 들였던 마나티와 초기 정착지인 엘볼로 지역에 한인들의 이주와 정착을 알리는 기념비를 세웠다.[8] 이 기념비들은 조국을 그리는 마음에 서쪽을 향해 지어졌다.[8][10]

4. 3. 한인 이주 기념비 건립

1995년, 헤로니모는 쿠바 한인 대표로 '정부 광복 50주년 세계 한민족축전'에 초청받았다. 부친 임천택이 그토록 갈망하던 한국 땅을 밟으며, 쿠바 한인들을 위한 여러 가지 꿈을 꾸게 되었는데, 그중 하나는 쿠바 내 한인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쿠바 내 한인회'를 설립하는 것이었다.[8]

쿠바 이주 80주년이던 2001년, 헤로니모는 'FRENTE HACIA EL OESTE, 전면을 고향이 있는 서쪽을 향하도록 하라'는 뜻에서 서쪽을 향해 '한인 이주기념비'를 세웠다.[10] 한인들이 첫발을 들였던 마나티, 초기 정착지인 엘볼로 지역에 한인들의 이주와 정착을 알리는 기념비를 세웠는데, 두 기념비는 모두 조국을 그리는 마음에 서쪽을 향해 지었다.[8] 그해 3월, 한인들의 최초 도착지였던 마나티 항구에서 미국 한인장로회의 도움으로 이민 80주년 기념식과 함께 기념비 제막식을 가졌다.[10]

4. 4. '쿠바의 한인들' 출간

2001년 헤로니모 임의 여동생 마르타 림김(한국 이름 임은희)과 남편 라울 루이스는 아버지 임천택이 남긴 38쪽 분량의 '쿠바이민사' 등 자료와 고령의 한인 2세들의 증언을 토대로 '쿠바의 한인들'(코레아노스 엔 쿠바)을 출간했다.[9]

4. 5. 한인회 설립 노력과 좌절

헤로니모 임은 1995년 광복 50주년 세계한민족축전에 쿠바 한인 대표로 초청되어 한국을 방문하면서 쿠바 한인 사회 재건을 결심했다. 귀국 후 쿠바 한인들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한글학교를 건립하고 한인회 설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헤로니모는 쿠바 정부에 공식 한인회 설립을 요청하였으나, 쿠바 정부는 한인의 존재를 입증해야 한다는 이유로 이를 불허하였다. 이에 헤로니모는 직접 차를 몰고 쿠바 전역을 돌며 한인들을 만나고, 현지 신문에 광고를 내는 등 한인회 설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쿠바 이주 80주년인 2001년에는 한인들의 첫 정착지인 마나티와 엘볼로 지역에 한인 이주와 정착을 알리는 기념비를 세웠다. 이 기념비들은 조국을 그리는 마음에 서쪽을 향해 지어졌다.[8]

그러나 헤로니모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쿠바 정부의 불허로 한인회 설립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8] 이는 쿠바 독재 정권의 억압으로 인해 재외국민의 권익 보호를 위한 노력이 좌절된 안타까운 사례로 볼 수 있다.

5. 유산과 평가

헤로니모 임은 쿠바 혁명에 참여한 사회주의 혁명가이자, 쿠바 한인 사회의 지도자였다. 쿠바 정부는 그에게 최고 훈장 등 10여 개의 훈장을 수여하며 그의 공로를 인정했다.[7]

1995년 광복 50주년 세계한민족축전에 초청되어 한국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쿠바 한인 사회 재건을 결심하였다. 귀국 후 쿠바 한인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한글학교를 건립하고 한인회 설립을 위해 헌신했다. 그의 여동생 마르타 림김(한국 이름 임은희)은 남편과 함께 '쿠바의 한인들'(코레아노스 엔 쿠바)이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9]

쿠바 이주 80주년인 2001년에는 한인들이 첫발을 들였던 마나티와 초기 정착지인 엘볼로 지역에 한인들의 이주와 정착을 알리는 기념비를 세웠다. 이 기념비는 조국을 그리는 마음에 서쪽을 향하도록 건설되었다.[10]

5. 1. 쿠바 한인의 안창호

일부에서는 헤로니모 임을 쿠바의 안창호라고 칭한다. 이는 한국의 중도진보적 관점에서, 독립운동가이자 민족 지도자인 안창호에 비견되는 인물로 평가함을 의미한다. 헤로니모는 1995년 광복 50주년 세계한민족축전에 쿠바 한인 대표로 초청되어 한국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쿠바 한인 사회 재건을 결심했다.[8] 귀국 후 쿠바 한인들의 정체성을 수립하기 위해 한글학교를 건립하고, 한인회 설립을 위해 헌신했다.[8]

쿠바 이주 80주년인 2001년에는 한인들이 첫발을 들였던 마나티와 초기 정착지인 엘볼로 지역에 한인들의 이주와 정착을 알리는 기념비를 세웠다.[8] 두 기념비는 모두 조국을 그리는 마음에 서쪽을 향해 지었다.[8][10]

5. 2. 다큐멘터리 영화

다큐멘터리 영화 Jerónimo: la historia no contada de los coreanos de Cubaes의 주인공이다.[5]

5. 3. 가족

Cristina Chunes과 결혼하여 슬하에 1남을 두었다. 장남 넬슨 장 임(Nelson Chang Lim)은 쿠바 동방대학 경제학 교수이다.[11]

5. 4. 별세

Gerónimo Limes은 2006년 1월 19일에 별세했다.[11] 그의 아버지 임천택은 1997년 국민훈장 동백장에 추서되었다. 헤로니모는 쿠바 한인 사회의 리더로서 1995년 광복 50주년 세계한민족축전에 초청받아 한국을 방문한 후, 쿠바 내 한인 사회 재건을 위해 노력했다. 귀국 후 한글학교를 건립하고 한인회 설립을 위해 헌신했으나, 쿠바 정부의 불허로 한인회 설립은 이루어지지 않았다.[8] 그는 쿠바 이주 80주년인 2001년, 한인들의 첫 정착지인 마나티와 엘볼로 지역에 한인 이주 기념비를 세웠다.[8]

참조

[1] 웹사이트 Tracing Korean diaspora through unsung hero http://www.koreahera[...] 2019-04-03
[2] 웹사이트 The ASI plays with its own history; 11th Minnesota Cuban Film Festival opens https://www.minnpost[...] 2020-02-27
[3] 웹사이트 Korean Cubans grapple with the legacy of a divided country https://www.upi.com/[...]
[4] 웹사이트 Documentary About Koreans in Cuba - Fundraising for Post-pro https://www.kickstar[...]
[5] 웹사이트 Jeronimo: The Untold Tale of Koreans in Cuba https://jeronimothem[...]
[6] 저널 "한국말 아는 동포 없어 `문화 계승` 도와줬으면" https://news.naver.c[...] 문화일보 2005-03-14
[7] 저널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쿠바 혁명의 주역 임은조를 아십니까?"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18-12-28
[8] 저널 지구 반대편 섬나라 쿠바서 노사연 ‘만남’ 함께 부르는 이들 https://news.naver.c[...] 동아일보 2019-03-22
[9] 저널 "<`쿠바의 한인들'-억척스런 삶과 함께 80년>"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01-04-08
[10] 저널 "'KBS스페셜' 쿠바의 숨은 영웅 헤로니모 임은조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https://news.naver.c[...] 아이뉴스24 2019-08-15
[11] 저널 쿠바 한인회 회장 임은조씨 별세 https://news.naver.c[...] 부산일보 2006-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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