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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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천택은 1903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1905년 멕시코 유카탄으로 이민을 간 한국계 쿠바인 독립운동가이다. 쿠바에서 대한인국민회 서기로 활동하며 민성국어학교, 진성 국어학교, 천도교 쿠바종리원, 청년학원 등을 설립하여 한인 사회의 교육과 민족 의식을 고취했다. 1934년부터 상해 임시정부와 연락하며 독립 자금을 모금하여 지원했으며, 김구의 백범일지에도 그의 독립 자금 송금 기록이 언급되어 있다. 1953년에는 《쿠바 한인 이민 역사》를 저술했다. 해방 이후 조국과의 연결을 시도했으나, 분단과 전쟁, 쿠바 혁명 등의 이유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85년 사망했다. 1997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으며, 유해는 2004년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임천택은 1903년 경기도 광주시에서 태어나 1905년 두 살 때 어머니와 함께 멕시코로 이민을 갔다. 멕시코에서 16년을 보낸 뒤 1921년 쿠바에 정착하여, 1922년부터 대한인국민회 서기, 학교 설립, 천도교 종리원 설립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쿠바 한인 사회와 독립운동에 기여했다. 김귀희 여사와 결혼 후에는 '재쿠바 한족단'을 결성하고 상해 임시정부와 연락하며 독립운동을 후원했다.[1] 1953년에는 《쿠바 한인 이민 역사》를 저술했다.
2. 생애
해방 후 조국과의 연결을 시도했으나 한국 전쟁과 쿠바 혁명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좌절되었다.[4] 1985년 별세 후 1997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2004년 유해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5]
2. 1. 초기 생애와 이민
1903년 경기도 광주시에서 태어나 1905년 3월 두 살 때 어머니와 함께 멕시코 유카탄으로 이민을 갔다.[1] 1921년 쿠바 마탄사스에 정착했다.[1]
2. 2. 쿠바 한인 사회 활동과 독립운동
1903년 경기도 광주시에서 태어나 두 살 때인 1905년 어머니와 함께 멕시코 유카탄으로 이민을 갔다. 이곳에서 16년을 보낸 뒤 1921년 쿠바에 들어가 마탄사스에 정착했다. 1922년 대한인국민회 서기로 활동하며 마탄사스 지역에 민성국어학교를 세웠다. 1923년에는 카르데나스 지역에 진성 국어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서 쿠바 한인들에게 조국의 언어와 풍습을 잊지 않도록 노력했다. 1930년 카르데나스 지역에 천도교 쿠바종리원을 열고 교리사업과 민족혼 심기에 힘썼다. 1932년에는 청년학원을 설립했다.[1]
김귀희 여사와 결혼 후 생활이 안정되자 본격적인 광복운동을 시작했다. 쿠바의 3개 지방에 흩어진 한인지방회를 규합해 수도 아바나에 '재쿠바 한족단'을 만들었고, 1934년부터 상해 임시정부와 직접 연락하며 독립자금 모금 등 광복운동 후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1]
한족단은 당시 쿠바 정부로부터 정식으로 정치활동 인가를 받은 뒤 임시정부 후원, 쿠바 거주 한인들의 안전 보장, 한국독립 승인 선전 작업, 독립후원금 모금 등에 관한 공식 활동을 시작했다. 어려운 형편에도 1937년부터 1944년까지 국민회 의무금과 광복군 후원금, 독립자금 등으로 상당액을 보내며 임시정부의 후원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1] 1938년엔 대한여자애국단 쿠바지부 창설에 앞장서 쿠바에서의 조국 독립운동에 이바지했다.[1]
대한인국민회 쿠바지회 회장이자, 독립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전달하며 한인을 위해 살아온 그의 독립자금 송금 기록은 김구의 백범일지에도 기록돼 있다. 성금은 천도교 방식이었다. 중노동에 시달리면서도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으며, 끼니마다 식구 수대로 한 숟가락씩 성미(誠米)를 모아 마련한 돈을 임정에 보냈다.[2]
2. 3. 독립자금 모금과 임시정부 지원
임천택은 쿠바의 3개 지방에 흩어진 한인지방회를 규합해 수도 아바나에 '재쿠바 한족단'을 만들었고, 1934년부터 상해 임시정부와 직접 연락을 주고받으며 독립자금 모금 등 광복운동 후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1]
한족단은 당시 쿠바 정부로부터 정식으로 정치활동 인가를 받은 뒤 임시정부 후원, 쿠바 거주 한인들의 안전 보장, 한국 독립 승인에 대한 선전 작업, 독립후원금 모금 등에 관한 공식 활동을 시작했다.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1937년부터 1944년까지 국민회 의무금과 광복군 후원금, 독립자금 등으로 상당액을 임시정부에 보내며 후원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1] 1938년엔 대한여자애국단 쿠바지부 창설에 앞장서 쿠바에서의 조국 독립운동에 이바지했다.
대한인국민회 쿠바지회 회장이자 독립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전달하며 한인을 위해 살아온 그의 독립자금 송금 기록은 김구의 백범일지에도 기록돼 있다. 성금은 천도교 방식이었다. 중노동에 시달리면서도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다. 끼니마다 식구 수대로 한 숟가락씩 성미(誠米)를 모아 마련한 돈을 임정에 보냈다.[2]
2. 4. 《쿠바 한인 이민 역사》 저술
임천택은 1953년 《쿠바 한인 이민 역사》를 썼다. 국판 32면 분량의 이 책은 1953년 여름 쿠바 마탄사스의 자택에서 집필되었으며, 이듬해 2월 미국 하와이의 한인 소식지인 《하와이 태평양주보》에서 발행되었다.[3] 이 책은 1995년 8월 12일, 42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일제 강점기부터 임천택과 교류했던 계연집 선생의 아들 계훈모 씨가 소장해 오던 것을, 광복 50주년 기념 한민족 축전 참가를 위해 방한한 임천택의 장남 임은조 씨에게 전달하면서 공개되었다.[3]
2. 5. 해방 이후와 사망
해방 후 임천택은 조국과의 연결을 다시 시도했지만, 분단과 전쟁, 지리적 어려움, 그리고 1959년 쿠바 혁명 등의 요인이 겹치면서 그 끈은 끊어지고 말았다.[4]
1953년에는 《쿠바 한인 이민 역사》를 썼다. 국판 32면 분량의 이 책은 1953년 여름에 임천택이 쿠바 마탄사스 자택에서 쓴 것으로, 이듬해 2월 미국 하와이의 한인 소식지인 《하와이 태평양 주보》에서 발행되었다. 1995년 8월 12일, 42년 만에 처음 공개되었는데, 일제 시대부터 임천택과 교류했던 계연집 선생의 아들 계훈모 씨가 소장해 오던 것을 광복 50주년 기념 한민족 축전 개최에 참가하기 위해 방한한 임천택의 장남 임은조 씨에게 전달하면서 공개되었다.[3]
1985년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쿠바에서 생을 마친 그를 대신해 한국을 방문한 딸 마르타 림 씨에게 199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고, 그의 유해는 2004년 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5]
3. 가족 관계
이름 설명 헤로니모 임(임은조) 장남, 쿠바 산업식량부 차관 역임[6] 마르타 임(임은희) 3녀, 마탄사스 종합대학 철학교수[7] 이르마 림 킴 4녀, 아들 넬슨 임은 쿠바 아바나 상대 학장 역임
3. 1. 장남 임은조 (헤로니모 임)
임천택의 장남 헤로니모 임(임은조)은 김귀희씨와의 사이에 9남매를 두었으며,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에 동참하였다.[6] 헤로니모 임은 쿠바 산업식량부 차관을 역임했으며,[6] 한인 최초로 국립 아바나 법대에 입학하여 1959년 동기인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 혁명에 참여하였다.[6] 이후 경찰청 인사담당관, 산업부 차관, 동아바나 인민위원장 등을 역임하고 1988년 퇴임하였다.[6] 퇴임 후에는 택시 운전을 하며 한인회를 이끌었고, 2006년 1월 19일 별세했다.[6] 그의 장남 넬슨 장 림은 쿠바 동방대학 경제학 교수이다.[6]
3. 2. 3녀 임은희 (마르타 임)
임은희(마르타 임)는 국립 아바나 대학 출신으로 마탄사스 종합대학에서 33년간 철학교수로 재임했다. 역사학자인 쿠바인 남편과 함께 10년간 《쿠바의 한인들》이라는 책을 펴냈고, 현재 1천명 정도로 파악되는 한인 후손들을 규합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7]
3. 3. 기타 자녀
부인 김귀희 씨와의 사이에 9남매를 두었다. 장남 헤로니모 임(임은조)은 쿠바의 산업식량부 차관을 역임했다. 한인 최초로 국립 아바나 법대를 졸업했으며, 1959년 동기인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에 가담하였다.[6] 경찰청 인사담당관, 산업부 차관, 동아바나 인민위원장 등을 역임하고 1988년 퇴임했다. 퇴임 이후 택시 운전을 하며 한인회를 이끌었으며 2006년 1월 19일 별세했다. 그의 장남은 쿠바 동방대학 경제학 교수인 넬슨 장 림이다.[6]
3녀 마르타 임(임은희)은 국립 아바나 대학 출신으로 마탄사스 종합대학에서 철학교수로 33년을 재임했다. 역사학자인 쿠바인 남편과 함께 10년의 공을 들여 《쿠바의 한인들》이라는 책을 펴내고 현재 1천 명 정도로 파악되는 한인 후손들을 규합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7]
4녀 이르마 림 킴의 3세 넬슨 임은 쿠바 아바나 상대 학장으로 역임 중이다.
참조
[1]
저널
<"선친께서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겁니다">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04-04-26
[2]
저널
말로만 듣던 나의 조국…짧지만 행복했다
https://news.naver.c[...]
경향신문
2017-03-24
[3]
저널
광복 50주년맞아 쿠바 韓人이민사, 42년만에 공개
https://sports.news.[...]
연합뉴스
1995-08-12
[4]
저널
[미래를 여는 역사의 門 해방 70년 京畿] 27. 임천택(林天澤)과 쿠바에서의 항일운동
http://www.kyeonggi.[...]
경기일보
2015-10-04
[5]
저널
[역사 속의 인물] 일제 때 쿠바에서 민족 혼 일깨운 임천택
https://news.naver.c[...]
매일신문
2013-02-18
[6]
저널
쿠바 한인회 회장 임은조씨 별세
https://news.naver.c[...]
부산일보
2006-01-24
[7]
저널
<광복70년> 쿠바 독립운동가 임천택 선생 3녀 마르타 임의 '아리랑'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15-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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