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델 카스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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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델 카스트로는 1926년 쿠바에서 태어나 2016년 사망한 쿠바의 혁명가이자 정치가이다. 그는 하바나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며 학생 운동에 참여했고, 1950년대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권에 대항하여 무장 투쟁을 시작했다. 1959년 쿠바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쿠바를 사회주의 국가로 변모시켰으며, 이후 쿠바의 최고 권력자로서 사회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반제국주의와 민족주의를 강조하며 미국과의 갈등을 겪었고, 소련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카스트로는 교육, 의료 등 사회 복지 분야에서 성과를 거두었으나, 일당 독재와 인권 탄압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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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델 카스트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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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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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피델 알레한드로 카스트로 루스 |
별칭 | 볼라 데 추레 엘 카발로 엘 코만단테 엘 과히로 엘 로코 피포 피스톨리타 |
출생일 | 1926년 8월 13일 |
출생지 | 비란, 오리엔테 주, 쿠바 |
사망일 | 2016년 11월 25일 |
사망지 | 아바나, 쿠바 |
안장 장소 | 산타 이피헤니아 묘지, 산티아고 데 쿠바 |
국적 | 쿠바 |
직업 | 변호사 정치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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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력 | |
쿠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재임 시작: 1965년 10월 3일 재임 종료: 2011년 4월 19일 부서기: 라울 카스트로 전임자: 블라스 로카 칼데리오 후임자: 라울 카스트로 |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 재임 시작: 1976년 12월 2일 재임 종료: 2008년 2월 24일 부의장: 라울 카스트로 전임자: 오스발도 도르티코스 토라도 후임자: 라울 카스트로 |
쿠바 각료평의회 의장 | 재임 시작: 1976년 12월 2일 재임 종료: 2008년 2월 24일 부의장: 라울 카스트로 전임자: 자신 (총리로서) 후임자: 라울 카스트로 |
쿠바 총리 | 대통령: 마누엘 우루티아 레오 오스발도 도르티코스 토라도 재임 시작: 1959년 2월 16일 재임 종료: 1976년 12월 2일 전임자: 호세 미로 카르도나 후임자: 자신 (각료평의회 의장으로서) |
비동맹 운동 사무총장 | 재임 시작: 2006년 9월 16일 재임 종료: 2008년 2월 24일 전임자: 압둘라 아흐마드 바다위 후임자: 라울 카스트로 재임 시작: 1979년 9월 10일 재임 종료: 1983년 3월 6일 전임자: J. R. 자야와르데네 후임자: 닐람 산지바 레디 |
소속 정당 | |
소속 정당 | 쿠바 공산당 (1965년부터) |
기타 정당 | 정통당 (1947–1952) 7월 26일 운동 (1955–1962) 쿠바 사회주의 혁명 통합당 (1962–1965)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앙헬 카스트로 이 아르기스 |
친척 | 라울 및 라몬을 포함한 형제 5명 후아니타를 포함한 자매 7명 |
배우자 | 미르타 디아스-발라르트 (1948–1955) 달리아 소토 델 바예 (1980–사망) |
파트너 | 나탈리아 레부엘타 클레우스 (1955–1959) |
자녀 | 피델리토와 알리나를 포함하여 11명 |
학력 | |
모교 | 아바나 대학교 |
군사 정보 | |
소속 | 혁명군 |
복무 기간 | 1953–2016 |
계급 | 최고 사령관 |
부대 | 7월 26일 운동 |
참전 전투 | 쿠바 혁명 에스캄브라이 반란 피그스 만 침공 쿠바 미사일 위기 마추루쿠토 사건 앙골라 내전 오가덴 전쟁 미국 그레나다 침공 |
수상 및 훈장 | |
수상 및 훈장 | 전체 목록 |
기타 | |
존칭 접두사 | 엘 코만단테 |
참고 | |
각주 | a. 대통령 권한은 2006년 7월 31일부터 건강상의 이유로 부통령에게 이양되었다. |
2. 생애
피델 카스트로는 1947년 6월, 미국의 동맹국인 라파엘 트루히요(Rafael Trujillo)의 우익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카요 콘피테스 원정(Cayo Confites expedition)에 참여했다.[23] 도미니카 공화국 민주주의를 위한 대학 위원회 회장이었던 그는 주로 쿠바인과 도미니카 망명자들로 구성된 약 1,200명의 군대에 합류했으나, 미국의 압력으로 그라우 정부가 침략을 저지하면서 무산되었다. 카스트로와 많은 동지들은 체포를 피했다.[24] 하바나로 돌아온 그는 정부 경호원에 의해 고등학생이 살해된 것에 항의하는 학생 시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1948년 2월 활동가들과 경찰 간의 격렬한 충돌 과정에서 심하게 구타당했다. 이 시점부터 그의 공개 연설은 쿠바의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비난하는 뚜렷한 좌익 성향을 띠게 되었다.
1948년 4월, 카스트로는 후안 페론(Juan Perón) 아르헨티나 대통령의 후원을 받는 쿠바 학생 그룹을 이끌고 콜롬비아 보고타(Bogotá)로 갔다. 그곳에서 좌익 지도자 호르헤 엘리에세르 가이탄 아얄라(Jorge Eliécer Gaitán Ayala)의 암살은 광범위한 폭동과 군대의 지원을 받는 집권 콜롬비아 보수당(Colombian Conservative Party)과 좌익 콜롬비아 자유당(Colombian Liberal Party) 간의 충돌로 이어졌다.[25] 카스트로는 경찰서에서 총기를 훔쳐 자유당에 합류했지만, 이후 경찰 조사에서는 그가 살인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25] 쿠바로 돌아온 그는 버스 요금 인상 시도에 반대하는 시위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27] 같은 해, 미르타 디아스-발라트(Mirta Diaz-Balart)와 결혼하여 쿠바 엘리트의 생활 방식을 접하게 되었다.[28][29]
카스트로는 칼 마르크스(Karl Marx),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의 마르크스주의(Marxism) 저술의 영향을 받아 더욱 좌익으로 이동했다. 그는 쿠바의 문제를 "부르주아지(bourgeoisie)의 독재"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해석했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해서만 의미 있는 정치적 변화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하바나의 가장 가난한 지역을 방문하면서 그는 학생들의 반인종차별주의(anti-racism)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33] 1949년 9월, 미르타는 아들 피델리토(Fidelito)를 출산했다.[34] 카스트로는 도시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1950년 9월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37]
1950년부터 1952년까지 변호사로서 빈곤층을 위해 활동한 후, 1952년 의회 선거에 정통당 후보로 출마했지만, 풀헨시오 바티스타 장군이 이끄는 쿠데타로 카를로스 프리오 소카라스 정부가 무너지면서 선거는 무효화되었다. 이후 바티스타를 헌법재판소에 고발했지만 기각되었다. 1953년 7월 26일, 몬카다 병영(산티아고데쿠바)을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었다.[46] 재판에서 가톨릭 주교의 중재로 사형은 면했지만, 징역 15년이 선고되었다. 옥중에서 호세 마르티 등을 탐독하며 「역사는 나에게 무죄를 선고할 것이다」를 출판했다. 1955년 5월 사면으로 석방되어 2개월 후 멕시코로 망명했고, 이후 미국으로 이주하여 활동을 계속했다. 멕시코 망명 시절에는 바티스타의 의중을 받은 멕시코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지만, 전 대통령 라사로 카르데나스의 탄원으로 석방되었다.[306]
1955년 특사로 석방된 피델 카스트로는 멕시코로 망명하여 혁명 동지인 체 게바라를 처음으로 만났다.[306] 1955년에서 1956년까지 멕시코에서 게릴라 훈련을 받고, 게릴라 전술을 탐독했다.
중남미, 쿠바에서 망명한 사회주의자 및 좌파민족주의자들을 모아 약 800명의 혁명무력을 모았다. 1956년 12월 2일 그란마호(Granma)를 타고 쿠바에 상륙, 바티스타 정부군과 내전을 치루었다.[306] 상륙 도중 쿠바 공군의 공격을 받아 대부분의 병사를 잃었지만, 밀림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펼치며 마을 단위로 민중의 지지를 받는데 성공하여 혁명무력의 수는 급증하였다. 시에라 마에스트라에 게릴라 기지를 구축하고, 주기적으로 도시에 혁명 참가 전단지를 돌리면서 혁명무력 병사들의 수를 증가시켰다.
1958년 후반기쯤 쿠바는 경제난으로 인해 바티스타 정부는 신뢰를 잃었고, 대다수의 쿠바 민중들은 피델 카스트로의 혁명무력에 가담했다. 1959년 1월 1일 풀헨시오 바티스타는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망명하였고, 쿠바 혁명이 완수되었다.
카스트로는 1959년 쿠바 총리에 취임하여 토지 개혁, 산업 국유화, 교육 및 의료 무상 제공 등 사회주의 개혁을 추진했다.[375] 은행 금리가 동결되고 고리대금업자가 소각되었으며, 미국과 관련된 사유 기업 및 산업체가 강제 국유화되면서 미국은 쿠바를 경제 봉쇄하게 되었다. 1961년 미국과의 국교를 단절하고, 피그스 만 침공을 격퇴했다. 소련 국가보안위원회의 도움으로 침공 계획을 사전에 알게 되어 방어에 성공하였고, 이는 미국이 국제적 망신을 당하는 큰 사건이 되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겪으며 미국과 소련 사이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1976년 국가평의회 의장에 취임하여 국가 원수 겸 정부 수반이 되었다.[376] 앙골라, 에티오피아 등 제3세계 국가들의 사회주의 혁명을 지원했다. 1975년부터 앙골라 내전에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비동맹 운동을 주도하며 제3세계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소련 붕괴 이후 '특별 시기'를 선포하고 경제난 극복을 위해 노력했다. 1991년 소련 붕괴로 쿠바는 큰 어려움을 겪었으나, 자립 경제 체제 구축 및 외교 전략을 통해 경제를 회복하고 복지 제도를 유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Fidel Alejandro Castro Ruzes는 2006년 7월 건강 악화로 인해 정계에서 은퇴하였고,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가 권력을 대행하였다.[377] 정계 은퇴 후 외신은 피델 카스트로가 게실염으로 투병하고 있다고 보도했지만, 쿠바 정부는 이를 부인했다. 은퇴 후에도 카스트로는 칼럼을 쓰고, 트위터를 통해서 쿠바 인민들과 교류했다.
쿠바 국영 방송은 카스트로가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현지 시간 2016년 11월 25일 자정 직후에 발표했다. 라울 카스트로는 피델 카스트로가 현지시간 22시 29분에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피델 카스트로의 시신은 11월 26일 화장되었다.[377]
2. 1. 유년 시절과 교육 (1926년 ~ 1945년)
피델 카스트로는 1926년 8월 13일 쿠바 동부 비란(Birán)에서 태어났다.[2] 아버지 앙헬 카스트로 이 아르히스(Ángel Castro y Argiz)는 스페인 북서부 갈리시아(Galicia) 출신 이민자로, 스페인-미국 전쟁 참전 용사였다.[3][4] 그는 비란의 라스 마나카스 농장에서 사탕수수 재배로 경제적 성공을 거두었다.[5] 앙헬은 첫 번째 결혼에 실패한 후, 가정부였던 카나리아 제도 출신 리나 루스 곤살레스(Lina Ruz González)를 두 번째 아내로 맞이하여 피델을 포함해 일곱 명의 자녀를 낳았다.[6]어린 시절 피델은 형제들과 함께 가정교사에게 맡겨졌으나, 가정교사가 생활비를 횡령하여 불우한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356][357][358][359][360] 8세에 가톨릭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지만,[8] 후에 무신론자가 되었다. 그는 가톨릭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문제를 일으켜, 산티아고의 라살 기숙학교, 돌로레스 학교를 거쳐 1945년에는 하바나의 예수회 학교인 엘 콜레히오 데 벨렌(El Colegio de Belén)으로 전학했다.[9][10] 벨렌에서 역사, 지리, 토론에 관심을 가졌으나 학업 성적은 뛰어나지 않았고, 대신 스포츠에 많은 시간을 쏟았다.[11] 1944년에는 최우수 고교 운동 선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1945년, 카스트로는 하바나 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정치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12] 그는 반제국주의에 대한 열정을 갖고 카리브해 지역에 대한 미국의 개입[15]에 반대했다. 스스로 "정치적으로 문외한"이라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 운동[13]과 대학 내 폭력적인 갱단 문화(갱스터리즘)[14]에 휘말리기도 했다.
2. 2. 정치 활동과 반정부 투쟁 (1945년 ~ 1953년)
피델 카스트로는 법에 흥미를 느껴 변호사가 되려는 꿈을 가졌다. 그는 벨렌 학교에서 높은 성적을 받고 아바나 대학교에 입학하여 법학을 공부했다. 그는 쿠바 정권에 항의하는 학생 운동에 연루되어 배후자로 지목받았다. 라몬 정권은 그를 학생 운동 대표자로 지목했고, 피델 카스트로는 라몬의 정치 패거리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라몬의 학생 운동 탄압은 피델 카스트로가 학생 운동에 더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그러나 당시 쿠바 대학가의 학생 운동은 갱스터 문화와 유사했고, 부패가 만연했다. 부패한 학생 운동은 라몬 정권에 대항하기에 역부족이었고 결국 실패했다. 이 당시 피델 카스트로는 학생 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전이었다. 1946년 대학생 연맹 회장이 된 피델 카스트로는 대학의 학생 운동 문화를 반부패적이고 청렴하게 이끌겠다고 다짐했으며, 라몬 정부의 친미적 태도와 미국의 제국주의적 태도를 비판하며 푸에르토리코의 자주독립을 위한 국제적인 학생 운동 조직을 만들었다.[361][362]그는 학생 운동 중 사회주의에 경도되었는데, 당시 라몬&라우 정부의 친미적 태도를 비판하던 좌익 단체인 쿠바의 사회주의 혁명 운동(Movimiento Socialista Revolucionaria - MSR), 반정부 혁명 연합(Insurrecional Revolucionaria - UIR), 그리고 당시 쿠바의 사회당이었던 (PSP Partido Socialista)을 알게 되어 그들과 연합하여 거대한 국제적인 좌익 학생 운동 조직망을 갖추었다. 후에 카스트로는 여러 신문의 첫 페이지에 등장했고, 1946년 11월 주제에 관한 공개 연설을 신문사에 전달하여 라몬&라우 정권의 부패와 폭력을 전국적으로 알렸다. 이는 좌익 학생 운동에 중요한 일이었고, 피델 카스트로는 부패한 라몬&라우를 지지하지 않았던 쿠바 국민에게 큰 지지를 얻었다. 그는 사회주의 학생 운동을 하면서도 법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363][364][365][366][367]
이에 라몬&라우 정권은 경찰력으로 학생 운동 임원을 체포하고, 쿠바의 유명한 갱 지도자를 고용하여 학생 운동가들을 청소하는 등 압제적인 모습을 보였다. 카스트로는 정치 무대를 떠나 음지에 숨거나, 우익 갱스터에게 암살당하는 인물로 취급당했다. 실제로 카스트로는 갱스터들에게 협박 편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피델 카스트로는 도망가지 않고 강경하게 대응하여 자신을 따르는 좌익 학생 운동가들을 무장시켜 위협에 맞섰다. 그 때부터 학생 운동가 의장이었던 피델 카스트로는 본격적으로 폭력 투쟁에 참여했다. 후에 정치권에서는 피델 카스트로 추종 세력을 집중 검토하도록 정책을 바꾸었고, 그 중에는 UIR 중견 간부였던 라이오넬 고메즈, MSR 지도자 마놀로, 쿠바 경찰국장 오스카 페르난데즈 등이 포함되었으나 증거 부족으로 체포되지 않았다.[368][369][370][371]
1947년 6월, 피델 카스트로는 도미니카 공화국을 해방시킬 계획을 세운다. 도미니카의 극우 대통령 라파엘 트루히요는 카리브 해에서 억압과 착취를 일삼는 독재자로 간주되었다. 그는 도미니카 공화국을 시찰하려 온 감사관들을 암살하고 고문, 폭력 및 비밀 경찰을 동원하여 반체제 인사들을 살해하는 등 혹독한 독재자로 평가받았다. 그는 또한 아이티에서 온 3만 명의 가난한 이민자들을 살해한 악독한 살인마였다. 이에 카스트로는 트루히요 정권에 대한 비판 강도를 높였다. 트루히요 정권은 피델 카스트로의 행위가 도미니카 인민들의 민주주의 의식을 증폭시켜 폭력 투쟁을 부를 것임을 알고 있었다. 피델 카스트로는 곧 도미니카 공화국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며, 도미니카 좌익 성향 대학 위원회의 국제 의장으로 승격되었다. 라파엘 트루히요는 폭동을 우려하여 쿠바 정부군과 연합하여 피델 카스트로의 혁명 군대를 제압하는 등 반정부 투쟁의 원인을 제거하려 했다. 당시 피델 카스트로의 도미니카 해방에 참여한 도미니카 공화국 인민은 약 1,200명이었으며, 그들의 쿠바 혁명군 편입은 1947년 7월 29일에 실시되었다. 그러나 도미니카 공화국은 미국과 정보 협약을 맺어 피델 카스트로 혁명군의 위험 요인을 철저히 방어했다. 때문에 피델 카스트로의 혁명군은 작전 실행 전에 실패했고, 대부분의 멤버들은 도미니카 정부군에 검거되었다. 피델 카스트로는 해안에서 수영으로 도미니카 정부군을 피해 가까스로 검거를 피했다.[372][373][374]
1948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피델 카스트로는 같은 해부터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쫓겨난 이민자들의 생존권 및 주거권 침탈에 대한 변호를 무료로 해주면서 사회적 경험을 쌓았다.

인민정통파가 다수당이 되면서 피델 카스트로는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정치권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MSR과 인민정통파는 오래가지 못했다. 1952년 3월 풀헨시오 바티스타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쿠바의 11대 대통령 카를로스 프리오 소카라스를 죽이고 혁명 정부를 세워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이다. 풀헨시오 바티스타는 급진주의자이면서도 친미주의적이고 반공주의적이었다. 때문에 좌파민족주의자들은 피델 카스트로를 중심으로 풀헨시오 바티스타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맑스레닌주의자인 피델 카스트로는 반공주의를 따르는 바티스타를 적으로 둘 수밖에 없었고, 반미 좌파민족주의자였기에 더욱 명백했다.
피델 카스트로는 바티스타 집권기 도중에 바티스타의 도덕적 문제를 비판했고, 그가 세운 장관들의 파렴치한 일상, 그리고 바티스타 정부가 노동조합을 탄압하는 것을 비판했다. 하지만 이 방법은 바티스타 정부에 의해 내용이 왜곡되거나 무산되어 여론 형성이 불가능하게 되거나, 여론 형성이 되더라도 바티스타 정부가 논거를 부적합하게 판단하여 강제 해산시켰다. 이 때문에 피델 카스트로는 인민정통파에 무력 봉기를 제안했지만, 인민정통파는 비폭력 저항을 고수했다. 인민정통파의 비폭력 저항은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피델 카스트로와 그를 따르는 MSR은 무장 봉기를 준비했다. 그들은 쿠바의 한 라디오 방송국을 접수하여 폭력 혁명론을 공표했고, 1953년 7월 26일 몽카다 병영을 습격했다. 당시 피델 카스트로는 몽카다 병영 습격 전 MSR 대원들에게 연설을 했다.
그러나 이 공격은 바티스타 독재 정권을 종식시킬 만큼 큰 행위가 되지 못했다. 몽카다 병영 습격에 실패한 MSR 대원들은 모두 체포되었으며, 피델 카스트로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 민족주의자들의 지지를 받게 된다. 당시 체포된 피델 카스트로는 변호사 출신이었기 때문에 자체 변호를 할 수 있었다.
이외에 피델 카스트로의 노선을 따르는 단체도 생겼는데, 대표적으로 인민정통파 핵심 당원이었던 가르시아 라파엘 교수가 창단한 국립혁명전선(약칭, MNR)이 있었다. 이처럼 MSR의 폭력 혁명 노선을 추구하는 여러 반란군 단체들이 증가했다. 특히 반란군들은 쿠바의 병원을 점령하여 자체 의료 시설을 구축하고 부상당한 동료를 의사들을 인질로 삼아 치료시키는 등 여러 방법으로 반군 활동을 했다. 바티스타는 이들에 대한 완벽한 탄압 계획을 구상했고, 결국 작전에 성공하여 숲 속에 잠복하고 있던 122명의 반란군들이 모두 산티에고 북쪽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다.
1947년 6월, 카스트로는 미국의 동맹국인 라파엘 트루히요의 우익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원정인 카요 콘피테스 원정에 대해 알게 되었다.[23] 도미니카 공화국 민주주의를 위한 대학 위원회 회장이었던 카스트로는 이 원정에 참여했다.[24] 주로 쿠바인과 도미니카 망명자들로 구성된 약 1,200명의 군대는 1947년 7월 쿠바에서 출항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라우 정부는 미국의 압력 하에 침략을 저지했지만, 카스트로와 많은 동지들은 체포를 피했다. 하바나로 돌아온 카스트로는 정부 경호원에 의해 고등학생이 살해된 것에 항의하는 학생 시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공산주의자로 간주되는 사람들에 대한 단속과 함께 진행된 이 시위는 1948년 2월 활동가들과 경찰 간의 격렬한 충돌로 이어졌고, 카스트로는 심하게 구타당했다. 이 시점부터 그의 공개 연설은 쿠바의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비난하는 뚜렷한 좌익 성향을 띠게 되었다. 이는 이전 그의 공개 비판이 부패와 미국의 제국주의를 비난하는 데 집중되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1948년 4월, 카스트로는 후안 페론 아르헨티나 대통령의 후원을 받는 쿠바 학생 그룹을 이끌고 콜롬비아 보고타로 여행했다. 거기서 인기 있는 좌익 지도자 호르헤 엘리에세르 가이탄 아얄라의 암살은 광범위한 폭동과 군대의 지원을 받는 집권 콜롬비아 보수당과 좌익 콜롬비아 자유당 간의 충돌로 이어졌다.[25] 카스트로는 경찰서에서 총기를 훔쳐 자유당의 대의에 합류했지만, 이후 경찰 조사에서는 그가 살인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25] 1948년 4월, 보고타 정상회의에서 미주기구가 설립되었고, 카스트로가 참여한 시위가 발생했다.[26]
쿠바로 돌아온 카스트로는 버스 요금 인상 시도에 반대하는 시위에서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27] 같은 해, 그는 부유한 가정 출신의 학생인 미르타 디아스-발라트와 결혼하여 쿠바 엘리트의 생활 방식을 접하게 되었다. 양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랑으로 이루어진 결혼이었지만, 디아스-발라트의 아버지는 바티스타와 함께 수만 달러를 주어 3개월간의 뉴욕 신혼여행에 사용하도록 했다.[28][29]
같은 해, 그라우는 재선을 포기하기로 결정했고, 대신 그의 정통당의 새로운 후보인 카를로스 프리오 소카라스가 당선되었다.[31] 프리오는 MSR 구성원들이 카스트로의 사회주의자 친구인 후스토 후엔테스를 암살하면서 광범위한 시위에 직면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프리오는 갱단을 진압하기로 동의했지만, 그들을 통제하기에는 너무 강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32] 카스트로는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블라디미르 레닌의 마르크스주의 저술의 영향을 받아 더욱 좌익으로 이동했다. 그는 쿠바의 문제를 부패한 정치인들의 실패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 또는 "부르주아지의 독재"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해석하게 되었고, 의미 있는 정치적 변화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마르크스주의적 견해를 채택했다. 하바나의 가장 가난한 지역을 방문하면서 그는 학생들의 반인종차별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33]
1949년 9월, 미르타는 아들 피델리토를 출산했고, 부부는 하바나의 더 큰 아파트로 이사했다.[34] 카스트로는 도시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공산주의자와 정통당 구성원을 모두 포함하는 9월 30일 운동에 가입하면서 계속해서 위험을 감수했다. 이 단체의 목적은 대학 내 폭력적인 갱단의 영향력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프리오는 약속과 달리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고 많은 고위 간부들에게 정부 부처의 일자리를 제공했다.[35] 카스트로는 11월 13일 운동을 위해 연설을 할 자원을 제공하여 정부의 갱단과의 비밀 거래를 폭로하고 주요 구성원을 지목했다. 전국 언론의 주목을 받은 이 연설은 갱단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카스트로는 시골, 그리고 미국으로 도피했다.[36] 몇 주 후 하바나로 돌아온 카스트로는 조용히 지내면서 대학 공부에 집중하여 1950년 9월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37]
카스트로는 주로 가난한 쿠바인들을 위한 법률 파트너십을 공동 설립했지만, 재정적으로 실패했다.[38] 돈이나 물질적인 것에 무관심했던 카스트로는 청구서를 지불하지 않았고, 가구는 압류되었고 전기도 끊겨 아내를 괴롭혔다.[39] 그는 1950년 11월 시엔푸에고스에서 고등학교 시위에 참여하여 교육부의 학생 협회 금지에 항의하며 경찰과 싸웠고, 폭력 행위로 체포되어 기소되었지만, 판사는 기소를 기각했다.[40] 그의 쿠바에 대한 희망은 여전히 치바스와 ''Partido Ortodoxo''에 집중되어 있었고, 그는 1951년 치바스의 정치적으로 동기가 부여된 자살 현장에 있었다.[41] 그는 자신을 치바스의 후계자로 여기고 1952년 6월 선거에서 의회에 출마하려고 했지만, 고위 ''Ortodoxo'' 당원들은 그의 급진적인 평판을 우려하여 그를 지명하기를 거부했다. 대신 하바나 최빈곤 지역의 당원들에 의해 하원 의원 후보로 지명되어 선거운동을 시작했다. ''Ortodoxo''는 상당한 지지를 받았고 선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것으로 예상되었다.[42]
선거 운동 기간 동안 카스트로는 단일 행동당과 함께 정계에 복귀한 전 대통령 풀헨시오 바티스타 장군을 만났다. 바티스타는 그가 성공한다면 자신의 행정부에 자리를 제안했지만, 둘 다 프리오 행정부에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만남은 예의상의 일반적인 대화를 넘어서지 못했다.[43] 1952년 3월 10일, 바티스타는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했고, 프리오는 멕시코로 도피했다. 바티스타는 자신을 대통령으로 선포하고 계획된 대통령 선거를 취소하고 자신의 새로운 체제를 "규율 있는 민주주의"라고 묘사했으며, 카스트로는 바티스타의 조치로 선거에 출마할 기회를 박탈당했고,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일인 독재로 간주했다.[44] 바티스타는 우익으로 이동하여 부유한 엘리트와 미국 모두와의 관계를 강화하고, 소련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노동 조합을 탄압하고, 쿠바 사회주의 단체를 박해했다.[45] 바티스타에 반대할 의향이 있던 카스트로는 정부에 대해 여러 건의 소송을 제기했지만, 이는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했고, 카스트로는 정권을 축출하기 위한 대안적인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46]
졸업 후 1950년부터 1952년 사이에 변호사로서 빈곤층을 위해 활동했다. 이후 피델은 정통당 후보로 1952년 의회 선거에 출마했지만, 풀헨시오 바티스타 장군이 이끄는 쿠데타로 카를로스 프리오 소카라스 정부가 무너지면서 선거 결과는 무효화되었다. 이후 피델은 헌법재판소에 바티스타를 고발했지만, 청원은 기각되었고 피델은 법원을 비판했다.
이후 피델은 무장 세력을 조직하여 1953년 7월 26일, 130명의 동료들과 함께 몬카다 병영(산티아고데쿠바)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공격자 80명 이상이 사망했고, 피델은 체포되었다. 재판에서는 가톨릭 주교의 중재로 사형은 면했지만, 징역 15년이 선고되어 투옥되었다. 옥중에서는 호세 마르티 등을 탐독하며 「역사는 나에게 무죄를 선고할 것이다」를 출판했다. 1955년 5월 사면으로 석방되어 2개월 후 멕시코로 망명했고, 이후 미국으로 이주하여 활동을 계속했다. 멕시코 망명 시절에는 바티스타의 의중을 받은 멕시코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지만, 피델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한 멕시코 혁명의 완성자였던 전 대통령 라사로 카르데나스의 탄원으로 석방되었다.[306]
2. 3. 쿠바 혁명 (1953년 ~ 1959년)
1955년 특사로 석방된 피델 카스트로는 남미를 순방하여 동료를 모을 것을 다짐하고 멕시코로 망명한다. 그곳에서 같은 해 7월에 혁명 동지인 체 게바라를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306] 멕시코에서 쿠바의 바티스타 정권을 뒤엎고 혁명을 일으키기 위한 과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풀헨시오 바티스타는 멕시코에 피델 카스트로 체포를 요청하여, 카스트로는 멕시코에서 수감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멕시코의 혁명주의자인 라사로 카르데나스의 도움으로 곧 사면을 받는다.[306] 1955년에서 1956년까지 멕시코에서 게릴라 훈련을 받고, 게릴라 전술을 탐독했다.중남미, 쿠바에서 망명한 사회주의자 및 좌파민족주의자들을 모아 약 800명의 혁명무력을 모았다. 이 과정에서 쿠바 민중들의 지지를 얻어 금전적 도움을 받아 군사를 유지할 수 있었다. 1956년 12월 2일 그란마호(Granma)를 타고, 쿠바에 상륙, 바티스타 정부군과 내전을 치루었다.[306] 상륙 도중 쿠바 공군의 공격을 받아 대부분의 병사를 잃었지만, 밀림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펼치며 마을 단위로 민중의 지지를 받는데 성공함으로써, 쿠바 혁명무력의 수는 급증하였다. 피델 카스트로의 혁명무력은 시에라 마에스트라에 게릴라 기지를 구축하고, 주기적으로 도시에 혁명 참가 전단지를 돌리면서 혁명무력 병사들의 수를 증가시켰다.
1958년 후반기쯤 쿠바는 경제난으로 인해 바티스타 정부는 신뢰를 잃었고, 대다수의 쿠바 민중들은 피델 카스트로의 혁명무력에 가담했다. 1959년 1월 1일 풀헨시오 바티스타는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망명하였고, 쿠바 혁명이 완수되었다.
2. 4. 쿠바 혁명 이후 (1959년 ~ 2006년)
카스트로는 1959년 쿠바 총리에 취임하여 사회주의 개혁을 추진했다. 토지 개혁, 산업 국유화, 교육 및 의료 무상 제공 등 사회주의 정책을 시행했다.[375] 은행 금리가 동결되고 고리대금업자가 소각되었으며, 미국과 관련된 사유 기업 및 산업체가 강제 국유화되면서 미국은 쿠바를 경제 봉쇄하게 되었다. 1961년 미국과의 국교를 단절하고, 피그스 만 침공을 격퇴했다. 소련 국가보안위원회의 도움으로 침공 계획을 사전에 알게 되어 방어에 성공하였고, 이는 미국이 국제적 망신을 당하는 큰 사건이 되었다.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겪으며 미국과 소련 사이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1976년 국가평의회 의장에 취임하여 국가 원수 겸 정부 수반이 되었다.[376] 앙골라, 에티오피아 등 제3세계 국가들의 사회주의 혁명을 지원했다. 1975년부터 앙골라 내전에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비동맹 운동을 주도하며 제3세계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소련 붕괴 이후 '특별 시기'를 선포하고 경제난 극복을 위해 노력했다. 1991년 소련 붕괴로 쿠바는 큰 어려움을 겪었으나, 자립 경제 체제 구축 및 외교 전략을 통해 경제를 회복하고 복지 제도를 유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2. 5. 은퇴와 사망 (2006년 ~ 2016년)
Fidel Alejandro Castro Ruzes는 2006년 7월 건강 악화로 인해 정계에서 은퇴하였고,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가 권력을 대행하였다.[377] 정계 은퇴 후 외신은 피델 카스트로가 게실염으로 투병하고 있다고 보도했지만, 쿠바 정부는 이를 부인했다. 은퇴 후에도 카스트로는 칼럼을 쓰고, 트위터를 통해서 쿠바 인민들과 교류했다.쿠바 국영 방송은 카스트로가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현지 시간 2016년 11월 25일 자정 직후에 발표했다. 사인은 바로 발표되지 않았다. 형인 피델 카스트로에게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직을 물려받은 라울 카스트로는 피델 카스트로가 현지시간 22시 29분에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피델 카스트로의 시신은 11월 26일 화장되었다.[377]
3. 정치 및 이념
피델 카스트로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신봉했으며, 호세 마르티의 정신을 이어받아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 민주주의를 열망했다.[374] 그는 7월 26일 운동을 이끌며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권에 맞서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1953년 7월 26일, 몬카다 병영 습격은 실패했지만, 이 사건을 통해 쿠바 민족주의자들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66]
1955년 멕시코로 망명하여 혁명 동지인 체 게바라를 만났고, 1956년 그란마 함선을 타고 쿠바에 상륙하여 바티스타 정부군과 내전을 치렀다. 1958년 후반, 경제난으로 바티스타 정부의 신뢰가 하락하고 쿠바 민중 대다수가 카스트로의 혁명군에 가담하면서 전세가 기울었다. 1959년 1월 1일, 바티스타가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망명하면서 쿠바 혁명이 완수되었다.
혁명 후, 카스트로는 쿠바 공산당에 의한 일당제를 실시하고 국가 최고 지도자 겸 국가평의회 의장으로서 마르크스주의에 근거하여 국가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1959년부터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정책을 시행하여 은행 금리 동결, 고리대금업자 소각, 미국 관련 사유기업 국유화를 단행했다. 이는 미국의 쿠바 경제 봉쇄를 야기했다.
3. 1. 마르크스-레닌주의
카스트로는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서, 쿠바 공산당에 의한 일당제를 실시했다. 쿠바 공산당의 당수이자 제1서기 지위에 있던 피델은 국가 최고 지도자로 군림했다. 1976년부터는 국가평의회 의장으로서 공식적으로 국가원수 지위에 올랐다.[307] 혁명 직후,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피델을 “친공적”이라고 멀리한 미국과의 관계를 단념하고 소련과 접근했다. 동시에 유나이티드 후르츠(현: 치키타) 등의 대기업 농장과 하바나에 즐비한 카지노, 호텔(그 대부분이 미국의 정치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마피아 소유물이었다) 등 미국 기업 자산을 몰수하고 국유화를 추진했기 때문에, 미국은 쿠바와 단교하고 금수 조치를 발동했다. 이에 대항하듯 소련은 사탕수수와 석유의 바터 무역(사실상 경제 지원) 등을 통해 쿠바를 지원했다.이 관계는 1991년 소련 붕괴까지 계속되었지만, 소련 붕괴로 냉전이 종식되면서 바터 무역도 경제 지원도 중단되었기 때문에 최근에는 심각한 경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그 때문에 뗏목 등을 사용하여 망명하는 사건이 끊이지 않아, 카스트로 형제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의 고민거리가 되고 있다. 이러한 경제적 실정으로 인해 “혁명가는 연금을 받으면서까지 사는 일은 하지 않는다. 나는 지옥에 떨어져, 거기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와 레닌을 만날 것이다. 지옥의 열기 따위는, 실현될 수 없는 이상을 기다린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한 적도 있다.[307]
다른 사회주의 정권 최고 지도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자신의 거대한 초상 사진이나 동상을 일절 만들지 않았다. 이는 전 정권 독재자 바티스타와 동일시되는 것을 회피하기 위해서였다고 알려져 있다.[307] 실제로 카리브 해 위기 후 피델은 소련의 흐루쇼프를 두 번 방문하여, 둘이서 사건을 냉정하게 되돌아본 후, 자기 비판까지 했다.[334]
공산주의에 대해 매우 진지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미국의 포브스의 세계 부호 순위, 군주·독재자 부문에 9억 달러 재산을 가진 것으로 7위에 랭크인된 것에 격분하여, “기분 나쁜 보도다. 왜 이런 바보 같은 기사에 대해 자신을 변호해야 하는가”, “만약 누군가 내 계좌가 해외에 있고 1달러라도 예치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면, 나는 의장직을 사임하겠다”라고 말했다. 미국 언론은 거의 모두 반(피델) 카스트로이기 때문에 자주 심한 병을 앓았다거나 큰 부상을 입었다는 등으로 보도되었다.
3. 2. 반제국주의와 민족주의
카스트로는 쿠바 민족주의 전통에 기반하여 반제국주의, 특히 미국의 패권주의에 강력히 저항했다. 그는 학생 운동 시절부터 라몬&라우 정권의 친미적 태도와 미국의 제국주의적 태도를 비판했다.[362] 1946년 대학생 연맹 회장이 된 카스트로는 푸에르토리코의 자주독립을 위해 국제적인 학생 운동 조직을 만들었다.[361]1947년 6월, 카스트로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극우 독재자 라파엘 트루히요를 타도하기 위한 원정에 참여했다. 트루히요는 미국의 지원을 받는 독재자로, 카리브 해에서 억압과 착취를 일삼았다.[372] 카스트로는 트루히요 정권에 맞서 도미니카 인민들의 민주주의 의식을 고취시키려 했으며, 도미니카 좌익 성향 대학위원회의 국제 의장으로 추대되기도 했다.[373] 그러나 이 원정은 미국과 도미니카 공화국의 정보 협력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374]
카스트로는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했으며, 호세 마르티의 정신을 이어받아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 민주주의를 열망했다.[374] 그는 7월 26일 운동(MR-26-7)을 이끌며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권에 맞서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1953년 7월 26일, 몬카다 병영 습격은 실패했지만, 카스트로는 이 사건을 통해 쿠바 민족주의자들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66]
카스트로는 집권 이후에도 반제국주의 노선을 견지하며 제3세계 국가들의 민족 해방 운동과 연대했다. 그는 1960년 유엔 총회에서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비난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168][169]
3. 3. 사회주의 개혁
카스트로는 1959년 쿠바 혁명 이후 토지 개혁, 산업 국유화, 교육 및 의료 무상 제공 등 사회주의 정책을 통해 사회 불평등 해소와 복지 증진을 추구했다. 혁명 직후 미국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피델을 “친공적”이라고 멀리한 미국과의 관계를 단념하고 소련과 접근했다. 동시에 유나이티드 후르츠(현: 치키타) 등의 대기업 농장과 하바나에 즐비한 카지노, 호텔(그 대부분이 미국의 정치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마피아의 소유물이었다) 등 미국 기업의 자산을 몰수하고 국유화를 추진했기 때문에, 미국은 쿠바와의 단교와 금수 조치를 발동했고, 그에 대항하듯 소련은 사탕수수와 석유의 바터 무역(사실상의 경제 지원) 등을 통해 쿠바 지원을 실시했다.[307]"사회주의 쿠바"를 강화하면서 카스트로는 레닌주의 원칙인 민주집중제에 기반한 통치 정당인 7월 26일 운동(MR-26-7), 인민사회당(PSP), 혁명 지도부를 통합했고, 이는 1962년 쿠바 사회주의 혁명 통일당(PURSC)으로 개명된 통합 혁명 조직(Organizaciones Revolucionarias Integradas – ORI)이다.[185] 1962년까지 쿠바 경제는 열악한 경제 관리와 낮은 생산성, 그리고 미국의 무역 금수 조치로 인해 급격히 쇠퇴했고, 식량 부족으로 인해 배급이 실시되었으며, 카르데나스에서 시위가 발생했다.[192]
ORI는 소련 모델을 사용하여 쿠바를 형성하기 시작했고, 매춘부와 동성애자와 같은 정치적 반대자와 인식된 사회적 일탈자들을 박해했다. 카스트로는 동성애 행위를 부르주아적 특성으로 간주했다.[191] 동성애자들은 생산 지원 군사 부대(Unidades Militares de Ayuda a la Producción – UMAP)에 강제로 배치되었으나, 많은 혁명 지식인들이 이러한 조치를 비난한 후, 1967년 UMAP 수용소가 폐쇄되었지만, 동성애자들은 계속 투옥되었다.
3. 4. 일당 독재와 인권 탄압
카스트로는 쿠바 혁명 이후 쿠바 공산당에 의한 일당제를 실시했다. 쿠바 공산당의 당수이자 제1서기였던 피델은 국가 최고 지도자로 군림했다. 1976년부터는 국가평의회 의장으로서 공식적인 국가원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회주의 국가 지도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개인 숭배를 하지 않았다. 이는 전 정권의 독재자 바티스타와 동일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알려져 있다.[376]4. 외교 관계
1959년 쿠바 혁명 이후, 피델 카스트로는 외교 관계에서 다양한 변화를 겪었다. 미국과는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경제 제재를 받았고, 소련과는 긴밀한 동맹 관계를 맺어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제3세계 국가들과는 비동맹 운동을 통해 연대를 강화했으며, 대한민국과는 오랫동안 단절되었다가 2024년에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미국과의 관계는 쿠바 혁명 직후부터 악화되었다. 1960년대 초 피그스 만 침공과 쿠바 미사일 위기를 거치며 양국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1970년대 후반 지미 카터 대통령 시기에 관계 개선의 움직임이 있었으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기에 다시 강경 노선으로 회귀했다. 카스트로는 미국의 대 쿠바 정책을 나치 독일에 비유하거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시 방문에 대해 비판하는 등 미국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유지했다.
소련은 쿠바의 주요 동맹국이었다. 1961년 피그스만 침공 당시 소련 KGB는 카스트로에게 정보를 제공하여 침공을 막는 데 기여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는 양국 관계에 긴장을 초래하기도 했지만, 소련은 쿠바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지속했다. 1972년 쿠바는 상호경제원조회의(코메콘)에 가입하여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경제 협력을 강화했다. 그러나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쿠바는 심각한 경제난을 겪었다.
카스트로는 비동맹 운동을 주도하며 제3세계와의 연대를 강화했다. 1973년 알제에서 열린 비동맹운동(NAM) 제4차 정상회의에서 이스라엘과의 단교를 선언하고 팔레스타인 지지를 표명하여 아랍 세계의 지지를 얻었다. 앙골라 내전과 욤 키푸르 전쟁 등에도 군대를 파견하여 제3세계 국가들을 지원했다.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등 라틴 아메리카 좌파 지도자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대한민국과는 1959년 쿠바 혁명 이후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다가, 2024년 2월 14일 양국 간 대사급 외교 관계를 수립하며 새로운 관계를 시작했다.
4. 1. 미국과의 관계
1959년 쿠바 혁명 성공 이후, 미국과 쿠바는 공식적으로 국교를 단절했다. 미국은 쿠바에 대한 경제 봉쇄를 시작했고, 이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피그스 만 침공과 쿠바 미사일 위기 등 냉전 시기 미국과의 갈등은 국제적인 긴장을 고조시켰다.[161]1960년 3월, 아바나 항구에서 프랑스 선박 라 쿠브레가 폭발한 사건 이후, 쿠바와 미국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카스트로는 미국 정부가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비난했다.[162] 1954년 과테말라 쿠데타에서의 성공에 고무된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1960년 3월 CIA에 카스트로 정부를 전복하도록 승인했다.[163]
1960년 10월 13일, 미국은 쿠바에 대한 대부분의 수출을 금지하며 경제 제재를 시작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쿠바는 미국 기업들을 국유화했다.[164] 12월 16일, 미국은 쿠바의 주요 수출품인 설탕에 대한 수입 할당량을 종료했다.[165]
1960년 9월, 카스트로는 유엔 총회 참석차 뉴욕을 방문했다. 그는 할렘의 호텔 테레사에 머물며 말콤 X 등과 교류했다. 그는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총리와 회담하고, 미국 내 빈곤과 인종차별을 비난했다.[166] 카스트로는 유엔 총회에서 4시간 반 동안 연설하며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비판했다.[168][169]
1961년 2월 18일, 뉴욕에서 쿠바인, 푸에르토리코인, 대학생 등 400여 명이 카스트로 지지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케네디 씨, 쿠바는 팔리지 않습니다.", "만세 피델 카스트로!", "미국 제국주의 타도!" 등의 구호를 외쳤다.[175]
1970년대 후반,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집권 기간 동안 쿠바와 미국의 관계 개선 움직임이 있었다. 카터는 쿠바의 인권 문제를 비판하면서도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고, 카스트로는 이에 호응하여 일부 정치범을 석방하고 쿠바 망명자들의 친척 방문을 허용했다.[177]
1980년, 로널드 레이건이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미국은 다시 강경 노선으로 돌아섰다.[176] 1981년 말, 카스트로는 미국이 뎅기열 유행을 조장하여 쿠바에 대해 생물학전을 벌였다고 비난했다.[210]
1983년 10월, 미국은 그레나다를 침공했다. 카스트로는 이를 비난하며 미국을 나치 독일에 비유했다.[211]
2016년 8월 13일, 카스트로는 90세 생일을 맞아 당 기관지 “그란마”에 기고한 글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히로시마시 방문 당시 원폭 투하에 대한 사과가 없었던 것을 비판했다.[321]
4. 2. 소련과의 관계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 혁명 이후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소련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소련은 쿠바의 주요 무역 파트너이자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는 동맹국이 되었다.[307] 1980년대까지 소련은 쿠바의 농산물을 높은 가격으로 수입하고, 석유를 낮은 가격으로 수출하는 등 쿠바 경제에 큰 도움을 주었다.1961년 피그스만 침공 당시, 소련 KGB는 이 계획을 사전에 입수하여 카스트로에게 알렸고, 이는 침공을 실패로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소련은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하려 했으나 미국의 반발로 철회해야 했다. 이 사건은 양국 관계에 일시적인 긴장을 초래하기도 했다.
1970년대 초, 소련 경제학자들은 쿠바 경제 재편에 참여했고, 양국 간 경제 과학 기술 협력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1972년 쿠바는 상호경제원조회의(코메콘)에 가입하여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경제 협력을 강화했다.
1979년 아프가니스탄-소련 전쟁에서 쿠바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개입을 비난하지 않아서 비동맹 운동내에서 쿠바의 입지가 손상되기도 하였다.
1991년 소련 붕괴로 인해 쿠바는 경제적 지원이 중단되면서 심각한 경제난을 겪게 되었다.
4. 3. 제3세계와의 관계
카스트로는 비동맹 운동을 주도하며 제3세계 국가들과의 연대를 강화했다. 앙골라, 에티오피아 등 아프리카 국가들의 사회주의 혁명을 지원했다.[376]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등 라틴 아메리카 좌파 지도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특히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는 피델을 스승처럼 존경했으며, 볼리비아의 에보 모라레스 대통령과도 우호적인 관계였다.1973년 9월, 알제에서 열린 비동맹운동(NAM) 제4차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회의에서 그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중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지지를 이유로 이스라엘과의 관계 단절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이로써 카스트로는 아랍 세계, 특히 리비아 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로부터 존경을 얻었다.[376]
1973년 10월 이스라엘과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끄는 아랍 연합 간에 욤 키푸르 전쟁이 발발하자 쿠바는 시리아를 돕기 위해 4,000명의 병력을 파병했다.[376]
1975년부터 앙골라 내전에 군대를 파견했다.[376]
4. 4. 대한민국과의 관계
대한민국과는 1959년 쿠바 혁명 이후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다. 북한과는 전통적인 우호 관계를 유지해 왔으나, 천안함 사건 이후 북한의 군사 도발을 비판하기도 했다.[316] 2024년 2월 14일, 대한민국과 쿠바는 양국 간 대사급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5. 유산과 평가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 혁명을 통해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국가를 건설했다는 긍정적 평가와, 장기간 집권하며 일당 독재 체제를 구축하고 인권을 탄압하여 민주주의를 훼손했다는 부정적 평가를 동시에 받는다.[335][284][285][286]
그는 1976년 쿠바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지만, 다른 공산주의 국가 지도자들과 달리 개인 숭배를 하지 않았다.[334]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미국의 경제 봉쇄 속에서도 자립 경제 체제와 순환형 사회를 구축하고, 유럽, 남미, 아프리카의 자본주의 국가들과 협력하여 외교 전략을 펼쳐 쿠바 경제 회복을 꾀했다.
정치적 반대는 허용되지 않았으며,[287][288] 정보 검열과[291][292] 독립 언론 탄압이 이루어졌다.[293] 경제 정책 실패와 미국의 경제 봉쇄는 쿠바 경제를 장기간 침체시켰다. 수많은 쿠바인들이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해외로 망명하기도 했다.
2006년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 부록지 '퍼레이드'는 카스트로를 '세계 최악의 독재자' 15위로 선정했다. 미국과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에서는 그를 "사회주의 광신적 독재자"로 비판하는 경우가 많지만, "라틴 아메리카를 식민지처럼 다루는 미국에 저항하는 영웅"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5. 1. 긍정적 평가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 혁명을 통해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국가를 건설했다는 평가를 받는다.[335] 그는 1976년 쿠바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지만, 다른 공산주의 국가 지도자들과 달리 개인 숭배를 하지 않았다.[334] 이는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권의 독재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미국의 경제 봉쇄 속에서도 자립경제체제와 순환형 사회를 구축했다. 유럽, 남미, 아프리카의 자본주의 국가들과 협력하여 외교 전략을 펼쳐 쿠바 경제를 회복시켰다.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복지 제도를 유지하고 개선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는 1976년부터 2005년까지 쿠바 최고 지도자로 재임하다 2006년 7월 건강 악화로 은퇴했다.
정치인 이외에는 축구 선수 디에고 마라도나와 친분이 있었다. 그는 체 게바라와 함께 좌파적 발언의 기반을 만들었다고 평가받는다.
카스트로는 공산주의에 대해 매우 진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의 포브스지가 선정한 세계 부호 순위에서 자신의 재산이 9억 달러로 7위에 랭크된 것에 대해 "만약 누군가 내 해외 계좌에 1달러라도 예치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면, 나는 의장직을 사임하겠다"라고 격분하며 반박했다.
그는 권력 유지에 집착하는 다른 독재 국가 지도자들과 달리, 자신의 정치 지도가 어렵다고 판단되면 권력 이양을 선언하는 유연성을 보여주었다. 그는 자신이 미화되는 것에 매우 신경질적이었으며, 독재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공공 장소에서의 지도자 찬양 선전이 전혀 없었다. 쿠바에서는 특정 정치 지도자가 우상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생존 인물의 기념물을 공공 장소에 장식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5. 2. 부정적 평가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 혁명 이후 장기간 집권하며 일당 독재 체제를 구축하고 인권을 탄압하여 민주주의를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는다.[284][285][286] 정치적 반대는 허용되지 않았으며,[287][288] 정보 검열과[291][292] 독립 언론 탄압이 이루어졌다.[293] 그는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다른 독재 국가 지도자들과는 달리, 친족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유연성을 보였다는 평가도 있지만, 동시에 친족 중심의 권력 승계라는 비판도 존재한다.경제 정책 실패와 미국의 경제 봉쇄는 쿠바 경제를 장기간 침체시켰다. 1963년부터 1980년대까지는 남미 국가들과 비교하여 뒤지지 않는 경제력을 보였으나, 동구권 붕괴와 미국의 경제 봉쇄 강화로 1980년대에 경제가 악화되었다.[376]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쿠바는 자립 경제 체제와 순환형 사회 구축을 시도했고, 유럽, 남미, 아프리카의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외교를 통해 경제 회복을 꾀했다.
수많은 쿠바인들이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해외로 망명했다. 1980년에는 망명 희망자들이 페루 대사관으로 피신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카스트로는 마리엘 항구를 통해 이들의 출국을 허용했다. 1992년 피델 카스트로는 기독교인에 대한 화해책을 도입했고, 1998년에는 요한 바오로 2세가 쿠바를 방문하기도 했다.
2006년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 부록지 '퍼레이드'는 카스트로를 '세계 최악의 독재자' 15위로 선정했다. 미국과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에서는 그를 "사회주의 광신적 독재자"로 비판하는 경우가 많지만, "라틴 아메리카를 식민지처럼 다루는 미국에 저항하는 영웅"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카스트로는 마오쩌둥을 비판하고, 카리브 해 위기 당시 자신과 상의 없이 미사일 철거에 합의한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분노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334] 실제로는 흐루쇼프를 두 번 방문하여 사건을 냉정하게 되돌아보고 자기 비판까지 했다.
그는 자신의 개인 숭배를 일체 허용하지 않았으며, 공공장소에 자신의 초상화나 동상을 세우는 것을 금지했다. 이는 바티스타 정권과의 동일시를 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335]
6. 기타
피델 카스트로는 친일 인사로 알려져 있다. 2003년 일본 방문 당시 원폭 돔을 찾아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이곳을 방문하여 위령할 의무가 있다"는 말을 남겼고,[336][337] 1989년 쇼와 천황 서거 시에는 조문했다. 2015년에는 자택에 일본 정원을 조성하기도 했다.[338]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 결승전에서 일본과 쿠바 대표팀이 맞붙었을 때, 피델은 쿠바 선수단에게 "최선을 다하라"고 격려했다. 쿠바는 일본에 패배하여 준우승을 차지했지만, 피델은 "금이든 은이든 상관없다. 결승에 진출한 것이 훌륭하다"라며 선수들을 칭찬하고 일본 선수들을 언급했다.
2009년 WBC에서 일본 팀을 비판했다는 오보가 있었으나, 일본이 연패를 달성하자 하라 다츠노리 감독의 투수 기용을 칭찬하고 이치로를 "세계 최고의 타자"라고 칭찬했다.[340]
일본 야구 연맹 회장이었던 야마모토 에이이치로와 매우 친했으며, 야마모토 사망 시에는 조전을 보냈다.
6. 1. 암살 시도
미국의 CIA는 피델 카스트로의 독재가 미국에 위협이 된다는 판단에 따라 카스트로 암살을 꾸준히 계획하고 시도했다. 카스트로가 집권한 48년 동안 무려 638건의 암살 시도가 있었으나 모두 실패했다.[378] 암살 방법은 담배에 독을 묻히거나, 카스트로가 자주 마시던 밀크쉐이크에 독약을 타거나, 연인 관계를 가장한 여성을 매수하는 등 다양했다. 카스트로는 자신과 닮은 사람을 행사에 내보내거나, 20여 곳의 은신처를 만드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암살 시도를 피했다. 훗날 카스트로는 "내 생애 최고의 업적은 수많은 암살 시도에도 살아남은 것"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378]2006년, 카스트로는 국가평의회 의장 겸 각료평의회 의장 권한을 라울에게 임시로 이양하기 전까지 638회의 암살 계획이 있었다고 알려졌으며, 이는 기네스북에 등재될 정도였다.[329][330] 이 중 대부분은 CIA의 암살 계획으로, 147회의 계획이 있었다고 한다. 혁명 이후 미국 마피아가 경영하던 카지노를 몰아낸 것으로 인해 마이어 랜스키 등 마피아도 암살 표적으로 삼았다. 2007년 문서 공개를 통해 1960년 CIA가 마피아에 150000USD를 주고 카스트로 암살을 의뢰했던 사실이 밝혀졌다.[331][332]
1979년 10월, 뉴욕에서 열리는 유엔총회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미국 언론인 존 알퍼트가 "뉴욕에는 당신을 죽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다"라고 질문하자, 피델은 "사람은 죽을 때 죽는 것이다. 그것이 운명이다"라고 답했다. "당신은 항상 방탄조끼를 입고 있다"라는 질문에는 셔츠 단추를 풀고 피부를 드러내 방탄조끼를 입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며 "나는 도덕적 조끼를 입고 있다. 이것이 있으면 강하다"라고 답했다.[333]
6. 2. 개인적 특징
피델 카스트로는 장시간 연설과 카리스마 넘치는 언변으로 유명했다. 1960년 유엔 총회에서는 4시간 29분간 연설하여 국제 사회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379] 그는 연설이 길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었으며, 한 파티에서는 "괜찮아요, 오늘은 빨리 끝낼 테니까"라는 농담으로 참석자들을 웃게 만들기도 했다.그는 쿠바의 대표적인 특산품인 시가를 즐겨 피웠으며, 시가는 그의 상징과도 같았다. 혁명 투쟁 중에는 파리 등 벌레로부터 얼굴을 보호하기 위해 시가를 피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1986년, 건강을 위해 금연을 선언하고 국민들에게 금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336][337]
스포츠, 특히 야구에 대한 열정이 깊었다.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 결승전에서 쿠바 대표팀에게 "최선을 다하라"고 격려했으며, 경기 후에는 "금이든 은이든 상관없잖아! 결승에 진출한 것이 훌륭한 거야!"라며 선수들을 칭찬했다. 또한 일본 대표팀 선수들의 이름을 언급하며 일본 야구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기도 했다.[340]
카스트로는 친일 인사로 알려져 있다. 2003년 일본 방문 당시 원폭 돔을 찾아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이곳을 방문하여 위령할 의무가 있다"는 말을 남겼다. 2015년에는 자택에 일본 정원을 조성하기도 했다.[338]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게는 대한민국을 향한 군사 도발 자제를 촉구하기도 했다.[379] 천안함 침몰 사건에 대해서는 일본의 주일미군 철폐 여론을 되돌리려는 미국의 자작극이라고 주장했다.
6. 3. 가족 관계
피델 카스트로는 공식적으로 두 번 결혼했으나, 여러 여성들과의 관계를 통해 많은 자녀를 두었다. 그는 쿠바에서 섹스 심벌로 여겨질 정도로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며, "바람둥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275][3]배우자 | 관계 | 자녀 | 비고 |
---|---|---|---|
미르타 디아스-발라트(Mirta Díaz-Balart) | 1948년 결혼, 1955년 이혼 | 아들: 피델 안헬 "피델리토" 카스트로 디아스-발라트(Fidel Ángel "Fidelito" Castro Díaz-Balart) (1949년생, 2018년 사망) | 미르타는 유력한 쿠바 정치인의 딸이자 바티스타 내무장관의 여동생이었다. 피델리토는 소련에서 핵물리학을 공부했으며, 쿠바 원자력 위원회에서 일했으나 해임되었다.[276] |
마리아 라보르데(Maria Laborde) | 첫 번째 결혼 중 관계 | 아들: 호르헤 앙헬 카스트로(Jorge Ángel Castro) (1949년생) | 카스트로의 열렬한 팬 |
나탈리아 "나티" 레부엘타 클루스(Natalia "Naty" Revuelta Clews) | 첫 번째 결혼 중 관계 | 딸: 알리나 페르난데스 레부엘타(Alina Fernández Revuelta) (1956년생) | 나탈리아는 하바나의 사교계 명사. 알리나는 1993년 쿠바를 떠나 미국으로 망명하여 아버지의 정책을 비판했다.[280] |
달리아 소토 델 바예(Dalia Soto Del Valle) | 1961년경 관계 시작, 1980년 결혼 추정 | 아들 다섯: 알렉시스, 알렉스, 알레한드로, 안토니오, 앙헬리토 (모두 이름이 A로 시작) | 달리아는 교사 출신. 이들의 관계는 오랫동안 비밀로 유지되었다.[275] 알렉스 카스트로 델 바예(Alex Castro Del Valle)는 그란마의 사진가이자 쿠바비시온(Cubavisión)의 촬영 감독, 아버지의 공식 사진작가. |
후아니타 베라(Juanita Vera) | 1970년대 이후 관계 | 아들: 아벨 카스트로 베라(Abel Castro Vera) (1983년생) | 후아니타는 외국 정보부 대령 출신, 카스트로의 영어 통역관. |
프란시스카 푸포(Francisca Pupo) | 짧은 관계 | 딸: 프란시스카 푸포(1953년생) | [281] |
불명 | 짧은 관계 | 아들: 시로(Ciro) (1960년대 초 출생) | [278] |
카스트로는 자녀들에게 무관심한 아버지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가 피델리토와 알리나 등 카스트로의 자녀들에게 대리 아버지 역할을 했다.[70]
카스트로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는 혁명 동지이자 정치적 후계자였다. 피델과 라울은 매우 가까운 사이였으며, 라울은 피델의 성격을 보완하는 역할을 했다.[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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