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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다 다다토모 (158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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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혼다 다다토모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중신 혼다 타다카츠의 차남으로, 1582년에 태어났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활약한 공로로 가즈사 국 오타키 번의 영주가 되었으며, 스페인 선원들을 보호하고, 신전 개발을 장려했다. 1614년과 1615년 오사카 전투에 참전하여, 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는 "술을 봉하는 신"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그의 묘는 잇신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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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다 다다토모 (1582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혼다 다다토모 (세키가하라 전투 그림 병풍)
혼다 다다토모 (세키가하라 전투 그림 병풍)
시대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출생덴쇼 10년 (1582년)
사망게이초 20년 5월 7일 (1615년6월 3일)
통칭나이키 (통칭)
계명삼광원전운주안예양현대거사(三光院殿前雲州岸譽良玄大居士)
묘소잇신지 (오사카시 덴노지구)
료겐지 (지바현 오타키정)
관위종5위하, 이즈모노카미
막부에도 막부
주군도쿠가와 이에야스 → 히데타다
가즈사 오타키번 제2대 번주
씨족혼다 씨
가족 관계
아버지혼다 다다카쓰
어머니아치와 우에몬 겐테쓰의 딸, 미보시인
형제자매고마쓰히메 (사나다 노부유키의 부인)
모리히메 (오쿠다이라 이에마사의 부인)
다다마사
배우자히토쓰야나기 나오모리의 딸
자녀마사카쓰
지요 (혼다 마사토모의 정실)
딸 (야마구치 모 씨의 부인)
이즈모노카미
생애
전임/후임전임: (혼다 다다카쓰)
후임: 혼다 마사토모
직책오타키번 번주 (혼다 가문)
대수2
임기1601년 ~ 1615년

2. 생애

1600년 가즈사 국 오타키에서 10만 고쿠의 영지를 받았다.[2] 1609년 스페인 총독 돈 로드리고를 보호했다.[2] 오사카 전투에서 술 때문에 실수를 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꾸중을 들었으나, 덴노지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했다.[6] 그는 "금주의 신"으로 숭배받고 있다.[6]

2. 1. 초기 생애와 활약

덴쇼 10년(1582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중신 혼다 타다카츠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못지않은 용장이었으며,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 아버지와 함께 종군하여 활약했다.[2] 전투 후, 그 공으로 아버지 이세 쿠와나 번으로 이봉되자, 아버지의 옛 영지인 가즈사 오타키 번 5만 석을 받았다.[2]

게이초 14년(1609년), 돈 로드리고 일행의 스페인 배 산 프란시스코호가 항해 중 난파하여 50여 명이 익사하고, 300여 명이 가즈사 국 이와와다 촌(현 온주쿠정) 타지리의 해변에 상륙했을 때, 그들을 보호하고 환대했다.[2] 로드리고는 『돈 로드리고 일본 견문록』에서 일행이 약 40일간 체류했는데, 그 동안 마을 사람들이 헌신적으로 대응해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3] 다다토모 역시 300여 명의 가신을 이끌고 로드리고를 방문하여 막부에 보고할 것을 약속하고 온정 있는 조치를 취했다.[3]

신전 개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게이초 14년(1609년)에 쿠니요시하라, 게이초 16년(1611년)에 만키하라의 개발을 장려했다.[4]

게이초 15년(1610년), 아버지 타다카츠가 죽기 전에 군비로 15,000냥을 타다토모에게 넘겨주려 유서를 남겼지만, 타다토모는 형 타다마사가 영지도 넓고 소용되는 곳도 많을 것이라고 하며 이 돈을 받지 않았다. 타다마사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명을 거스를 수 없다며 서로 돈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형제끼리 반분하게 되었다(『도쿠가와 실기』).[5]

게이초 19년(1614년), 아와 국의 사토미 타다요시 개역 때, 사누키 성주 나이토 마사나가와 함께 타테야마 성의 파각과 근처의 수비를 맡았다.[4]

잇신지의 묘소

2. 2. 돈 로드리고와의 만남

1609년, 다다토모는 스페인 총독이었던 돈 로드리고 일행을 보호하고 환대했다.[2] 당시 돈 로드리고 일행의 산 프란시스코호가 항해 중 난파되어 50여 명이 익사하고, 300여 명이 가즈사 국 이와와다 촌(현 온주쿠정) 타지리의 해변에 상륙했다.[2] 로드리고는 『돈 로드리고 일본 견문록』에서 일행이 약 40일간 체류했는데, 그 동안 마을 사람들이 헌신적으로 대응해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3] 다다토모 역시 300여 명의 가신을 이끌고 로드리고를 방문하여 막부에 보고할 것을 약속하고 온정 있는 조치를 취했다.[3]

2. 3. 신전 개발

게이초 14년(1609년) 구니요시하라, 게이초 16년(1611년) 만키하라 개발을 장려하는 등 신전 개발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4]

2. 4. 오사카 전투와 죽음

오사카 전투의 겨울 전투에서 다다토모는 훌륭하게 싸웠지만,[6] 술을 마시고 있던 탓에 방심하여 적의 맹공격을 받고 패퇴했다.[6] 이 실수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꾸중을 들었으나,[6] 이 사건은 다다토모의 운명을 바꾸었다.

다음 해인 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의 덴노지·오카야마 전투에서 다다토모는 겨울 전투의 치욕을 씻고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매우 용감하게 싸웠다.[6] 모리 가쓰나가의 죽음을 초래한 공격을 이끌었으나, 다다토모 자신도 전투에서 전사했다.[6] 향년 34세였다.[6]

다다토모는 죽기 전에 술버릇으로 인한 치명적인 실수를 후회했다고 전해진다.[6] 그의 마지막 말은 "술 때문에 몸을 망치는 자를 구원하리라"(酒のために身をあやまる者を救おう일본어), "내가 해야 할 일은 술을 끊는 것이었다. 내 무덤을 방문하는 자는 반드시 술을 싫어하고 술을 끊어야 한다."(戒むべきは酒なり、今後わが墓に詣でる者は、必ず酒嫌いとなるべし일본어)였다. 그의 죽음 이후, 다다토모는 대중들 사이에서 "금주의 신"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술을 끊고 싶어 하거나, 가족이 술을 끊기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이 다다토모의 무덤을 방문하여 기도한다.

2. 5. 사후

혼다 다다토모는 1600년 이후 가즈사 국의 오타키에서 10만 고쿠의 영지를 받았다.[2] 1609년, 다다토모는 스페인 총독인 돈 로드리고를 보호하고 환대했다.[2]

오사카 전투의 겨울 전투에서 다다토모는 훌륭하게 싸웠지만, 술을 마시고 방심하여 적의 공격에 패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꾸중을 들은 다다토모는 1615년 오사카 전투의 여름 전투, 덴노지 전투에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용감하게 싸웠다. 모리 가쓰나가를 죽음으로 몰고 간 공격을 이끌었으나, 다다토모 자신도 전투에서 전사했다. 향년 34세였다.[6]

다다토모는 죽기 전에 술버릇으로 인한 실수를 후회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마지막 말에는 "술 때문에 몸을 망치는 자를 구원하리라"(酒のために身をあやまる者を救おう일본어), "내가 해야 할 일은 술을 끊는 것이었다. 내 무덤을 방문하는 자는 반드시 술을 싫어하고 술을 끊어야 한다."(戒むべきは酒なり、今後わが墓に詣でる者は、必ず酒嫌いとなるべし일본어)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다. 그의 죽음 이후, 다다토모는 대중들 사이에서 "금주의 신"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술을 끊고 싶어 하거나, 가족이 술을 끊기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이 다다토모의 무덤을 방문하여 기도한다.

이에야스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다다토모의 유자 마사카츠를 야마토 고리야마 번의 번주로 봉했다. 다다토모의 묘는 잇신지 경내에 있다.[6] 후에 다다토모의 유골은 분골되어 료신지(료겐지)에 안장되었다.[7]

3. 묘소

오사카 전투 당시 도쿠가와 군의 진영과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한 정토종 사찰인 잇신지 안에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Honda Tadatomo https://kotobank.jp/[...] Asahi Shinbun 2017-11-07
[2] 서적 千葉県の歴史 通史編 近世1 2007
[3] 서적 千葉県の歴史 通史編 近世1 2007
[4] 서적 千葉県の歴史 通史編 近世1 2007
[5] 서적 大多喜町史 1991
[6] 서적 日本一の兵 真田幸村 KADOKAWA 2015
[7] 서적 大多喜町史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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