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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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횡성 전투는 1951년 2월 11일부터 13일까지 한국 전쟁 중 중공군이 횡성을 공격하여 국군 제8사단이 붕괴된 전투이다. 유엔군은 서울을 포기한 후 북진을 재개하며 중공군의 동향을 주시했고, 정보 분석 결과 중공군의 공격 시기를 늦게 예측하는 오류를 범했다. 중공군은 횡성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했고, 국군 제8사단은 지휘 체계의 문제점, 정보 분석의 오류, 미군과 한국군 간의 협력 부족 등으로 인해 붕괴되었다. 횡성 전투 이후 유엔군은 지평리 전투에서 고립된 병력을 공격받았지만, 이를 저지했고 원주에서 중공군의 진격을 막아냈다. 횡성 전투의 책임 소재와 교훈에 대한 논란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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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성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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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정보 | |
교전 | 횡성 전투 |
분쟁 | 6.25 전쟁 |
![]() | |
날짜 | 1951년 2월 11일~1951년 2월 13일 |
장소 | 강원도 횡성군 |
결과 | 중국인민지원군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유엔 |
교전국 2 | 중국 북한 (1948) |
지휘관 | |
지휘관 1 | 더글러스 메가서 에드워드 알몬드 클라크 L. 러프너 최용희 마리누스 덴 아우덴 |
지휘관 2 | 펑더화이 리티엔유 |
부대 정보 | |
부대 1 | 제10군단 제2보병사단 제7보병사단 제187보병연대 제3보병사단 제5보병사단 제8보병사단 판 회츠 연대 |
부대 2 | 중국 13집단군 제39집단군 제40집단군 제66집단군 제5군단 |
사상자 | |
사상자 1 | 대한민국: 9,844명 사상자 미국: 1,900명 사상자 (726명 사망 포함) 총합: 11,862명 사상자 |
사상자 2 | 4,141명 사상자 |
2. 배경
1951년 1월 말, 유엔군은 서울을 탈환하고 북진을 재개했다. 매슈 리지웨이 제8군 사령관은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의 동향을 주시하며 신중한 진격을 명령했다.
리지웨이는 제10군단에게 작전 라운드업에 따른 추가 진격을 중단시키고, 제9군단이 한강 교두보를 축소할 때까지 정찰만 하도록 지시했다. 이는 중공군( 제39군, 제40군, 제42군, 제66군)이 집결하는 지역에서 제10군단의 좌측 부대가 고립될 위험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3]
리지웨이는 정보 참모 로버트 G. 퍼거슨 대령에게 적의 전략과 전술을 분석하도록 지시했다. 퍼거슨은 중공군이 북한강과 홍천 사이 24번 국도에 집중되어 있으며, 여주와 원주를 거쳐 충주를 목표로 공격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했다. 그러나 보급 문제로 인해 얕은 포위 기동을 반복할 것으로 예상했다.[3]
2. 1. 유엔군의 공세와 중공군의 집결
1951년 1월 말, 유엔군은 서울을 탈환하고 북진을 재개했다. 매슈 리지웨이 제8군 사령관은 중공군의 동향을 주시하며 신중한 진격을 명령했다. 2월 초, 정보 참모 로버트 G. 퍼거슨 대령은 중공군이 북한강과 24번 국도 일대에 집결하고 있다고 보고했다.[3]퍼거슨은 중공군이 한강 계곡과 29번 국도를 따라 여주와 원주 방면으로 공격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보급 문제로 인해 지속적인 공격보다는 재편성과 보급을 위한 중단이 번갈아 가며 발생하는 얕은 포위 기동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그는 중공군 제9집단군 주요 부대가 원산 지역에서 증원 범위 내로 이동할 때까지는 중공군이 공세를 시작하지 않을 것이며, 이들이 2월 15일 이전에 중앙 지역에 도달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보았다. 실제로 퍼거슨은 중공군의 공격 시기를 다소 늦게 예측하는 오류를 범했지만, 다른 예측에 있어서는 상당히 정확했다.[3]
2. 2. 리지웨이의 작전 제한
매슈 리지웨이 제8군 사령관은 동쪽으로 이동하는 중국 인민지원군의 보고와 서부-중앙 지역에서 중국 인민지원군의 공세가 임박했다는 징후를 포착했다. 이에 2월 11일, 에드워드 알몬드 제10군단장에게 제2보병사단 또는 대한민국 제8보병사단 구역에서 작전 라운드업 작전 하에 24번 국도 방향으로의 추가 진격을 중단하고 순찰만 하도록 지시했다.[3] 이는 제9군단이 양평군 아래 한강 교두보를 축소할 때까지 제10군단의 좌측 부대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제9군단이 여전히 막혀 있는 동안 전진하는 것은 제39군, 제40군, 제42군, 제66군이 집결하고 있는 지역에서 알몬드의 가장 좌측 부대를 고립시키고 과도하게 확장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3]3. 전투 경과
2월 11일 밤, 중공군 제13집단군이 횡성을 목표로 공격을 시작했다. 제66군은 29번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제39군과 제40군은 홍천과 지평리 사이 24번 국도 부근에서 동남쪽으로 공격해 횡성 공격에 합류했다. 이 공격 경로에는 국군 제8사단이 배치되어 있었다.[3]
미군 제38보병연대 제3대대는 북쪽과 북서쪽에서 약 5시간 동안 포격과 산발적인 공격을 받았다. 횡성에 있던 연대장 코플린과 협의 후, 제3대대장 해롤드 맥스너 중령은 방어선 강화를 위해 키스의 포병대와 켈러의 보병대를 배치했다. 그러나 중공군 제117사단의 병력이 29번 국도에 도달하여 횡성과 북쪽으로 약 4.83km 떨어진 도로 교차로 사이를 차단하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코플린은 중공군 진지에 박격포와 포격을 가하고 공습을 요청했으며, 사단 예비대인 제2대대의 복귀를 요청했지만, 러프너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3]
2월 12일 오전 11시경, 제2사단 사령부는 아몬드로부터 제38보병연대를 제2대대와 제3대대가 추가 명령이 있을 때까지 유지하는 연대 전투단으로 재편성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아몬드는 제2대대에 대한 제한을 해제했지만, 러프너는 이 부대를 직접 통제했다. 아몬드의 재편성 명령을 전달하면서 러프너는 지원 부대 21에게 횡성으로 철수하라고 지시했다. 코플린이 철수를 통제해야 했지만, 제2대대와 제3대대의 사용이 제한되어 지원 부대를 도울 수 없었다.[3]
한편, 지원 부대 7 사령관 바니 D. 화이트 중령은 29번 국도의 다리 서쪽으로 이어지는 경로 대신 트윈난물 강 동쪽으로 이동한 다음 트윈난물 계곡을 통과하는 미개척 도로를 따르겠다고 통보했다. 중공군의 방해 없이, 화이트는 오후 3시에 부대를 출발시켰고 약 2시간 후에 후위를 철수시켰다.[3]
키스는 정오 직전에 지원 부대 21을 남쪽으로 이끌었지만, 켈러의 부대는 거의 즉시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여 약 1.61km 지점에서 기세를 잃었다. 횡성 동쪽 약 4.83km 지점에 집결한 국군 제3사단 제18연대가 오후 2시에 29번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대대를 보내 길을 열도록 돕겠다는 소식이 코플린에게 전해졌다. 그러나 한국군 대대는 늦게 출발하여 횡성 북쪽 약 0.80km 지점에 있는 트윈난물 위의 첫 번째 언덕까지만 진격했다.[3]
2월 12일 오후 4시경, 코플린은 맥스너와 켈러에게 제1대대가 도로 동쪽을 공격하고, 제3대대가 서쪽을 공격하며, 차량 행렬이 그 사이에 있는 상태로 검문소를 돌파하라고 지시했다. 두 대대는 이동할 수 있었지만,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오후 6시 직후, 군단 장갑 장교인 윌름은 코플린에게 횡성 지역의 모든 미군을 지휘하라고 알렸다.[3]
오후 7시경, 지원 부대 7의 병력이 횡성을 통과하여 이동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때까지 코플린은 지원 부대 7의 트윈난물 계곡을 통한 철수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는 지원 부대 7을 사용하여 29번 국도를 통해 철수하는 부대를 도울 수 있었다.[3]
국군 제3사단과 제5사단은 횡성 동쪽 지역을 통과하여 새로 배정된 방어선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2월 13일 오후 10시 전에, 코플린의 부대는 횡성의 네덜란드 대대 위치 뒤로 지나가기 시작했다.[3]
코플린은 북쪽에서 오는 부대가 횡성을 통과하여 약 4.83km 지점에 있는 집결 지역에서 재편성한 다음 원주의 새로운 방어선으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중공군이 네덜란드 대대의 모든 전선을 공격하고, 29번 국도에서 여전히 흩어져 있는 철수 종대에 측면과 후방에서 강하게 압박하면서 코플린의 계획은 중단되었다.[3]
지원 부대 7은 화이트가 트윈난물 계곡에서 이탈하면서 소화기, 기관총, 박격포 사격을 받았고, 횡성 안에서 상당한 혼란이 발생했다. 그러나 베이커는 자신의 보병의 일부를 화이트를 향해 돌려 중공군이 화이트의 측면에서 멀리 떨어져 있도록 도왔고, 화이트 후방의 포병대는 종대를 굴리려는 중공군을 막아냈다. 지원 부대 7은 2월 12일 오후 11시 30분까지 네덜란드 대대 뒤를 통과할 수 있었다.[3]
29번 국도를 따라 횡성으로 향하는 코플린의 종대는 운이 좋지 않았다. 종대의 선두 부대가 횡성에 진입한 뒤, 박격포탄이 105mm 곡사포를 견인하는 톤 트럭에 명중했고, 두 대는 도로를 가로질러 잭나이프를 했다. 높은 논둑은 트럭이 잔해를 우회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한편 중공군은 종대를 측면과 후방에서 압박하기 시작했다. 장애물 뒤에 갇힌 부대는 차량과 총기를 포기하고 도보로 남쪽으로 이동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탈출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횡성을 우회한 다음 도시 아래 29번 국도로 돌아왔다.[3]
네덜란드군은 2월 13일 오후 1시 직전에 연락을 끊고 철수했다. 중공군은 네덜란드군이 철수한 후 횡성을 점령했지만 추격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고, 코플린의 부대는 더 이상 경쟁 없이 원주에 도달했다.[3]
3. 1. 국군 제8사단의 붕괴 (2월 11일 ~ 13일)
2월 11일 밤, 중공군 제13집단군은 횡성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했다. 제66군은 29번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제39군과 제40군은 홍천과 지평리 사이의 24번 국도 부근에서 동남쪽으로 공격하며 횡성 공격에 합류했다. 이 초기 공격 경로에는 국군 제8사단이 배치되어 있었다.[3]제198사단(66군)은 20시 30분경 국군 제21연대 정면에 충돌한 후 연대 측면으로 병력을 보내, 주로 제21연대와 제10연대 사이의 틈새를 통해 서쪽으로 진출했다. 제120사단(40군)이 제10연대 전선을 돌파했고, 제117사단(39군)은 제16연대 좌익을 돌파했다. 횡성의 국군 제8사단 사령부는 제21연대에 짧은 후퇴를 명령하고, 지원팀 B에게 29번 국도를 따라 후퇴하여 창봉리의 지원 부대와 합류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제198사단 병력 일부가 창봉리의 미군 진지를 우회하여 남쪽의 다리 근처에서 도로를 차단했다.[3]
거의 같은 시각, 제120사단은 국군 제10연대를 돌파하여 일부 병력은 제10연대와 제16연대 뒤쪽으로, 다른 병력은 29번 국도에서 서쪽으로 향하는 산길로 공격했다. 자정 무렵, 후자는 산길에 있는 제10연대와 제16연대 지휘소를 점령하고, 29번 국도에 있던 국군 제20 및 제50 야전 포병 대대와 지원팀 A를 고립시켰다. 제117사단은 제16연대에 대한 정면 공격을 강화하고, 횡성 방향으로 병력을 보내 연대 좌익 돌파를 심화시켰다.[3]
2월 12일 01:00까지, 국군 제8사단 사령부와 모든 연대 간, 그리고 각 연대와 예하 부대 간의 통신이 두절되었다. 정면 압박과 후방 위협에 갇힌 세 연대는 후퇴했지만, 통제력이 끊어지고 퇴로가 차단되면서 부대가 분리, 분산되었고 대부분 포위되었다. 제21연대 병력은 01:15경 창봉리의 지원 부대 경계선으로 흩어져 들어갔다. 그러나 미군 지원부대 지휘관은 로열 M. 헤인스 준장에게 보고는 하였으나, 클라크 L. 러프너 제2보병사단장의 승인 없이 후퇴를 허가하기를 망설였다. 명령 체계와 포병 지원 부대를 통제하는 문제로 인해, 작전 지휘 통일은 사단 이하가 아닌 군단 사령부에 부여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중공군이 국군 제8사단의 붕괴를 유도한 후, 군단의 통제는 신속하게 대응하는 지원 부대와 출발선 부대의 미국 사령관을 저해했다.[3]
지원팀 A는 차단된 산길을 통해 동쪽으로 제38보병연대를 향해 싸웠으나, 새벽 무렵 큰 손실을 입고 제38보병연대에 도착했다. 대부분의 국군 제8사단 병력은 산에 포위되어 사망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2월 13일, 낙오병을 정비하고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이 사단을 제천 서쪽의 추포리로 이동시킨 후, 사단 병력은 장교 263명과 3,000명이 조금 넘는 병력으로, 이 중 절반 정도가 사단 지원 병력이었다. 사상자는 장교 323명(그 중에는 제10연대 사령관과 전체 참모, 제16연대 행정 장교, 7명의 대대장, 30명의 중대장 포함)과 병사 7,142명이었다. 사단 장비 손실은 다음과 같다.[3]
장비 종류 | 손실량 |
---|---|
포 | 14문 |
대전차포 | 5문 |
트럭 | 68대 |
무전기 | 249대 |
박격포 | 87문 |
로켓 발사기 | 137문 |
기관총 | 164정 |
자동 소총 | 102정 |
카빈총 | 2,389정 |
소총 | 4,096정 |
3. 2. 미군 지원 부대 21의 고전 (2월 12일)
지원 부대 21은 창봉리에서 국군 제8사단의 후퇴를 지원했다. 존 W. 키스 주니어(John W. Keith, Jr.) 중령은 철수 허가를 요청했으나, 지휘 계통의 문제로 지연되었다.[3] 지원 부대는 29번 국도를 따라 철수하던 중 중공군의 매복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3]키스 중령은 철수 시작 1시간 반 만인 오전 2시 45분경 철수 허가를 받았다. 이 명령은 제10군단장 아몬드 소장이 직접 승인하여 여러 단계를 거쳐 전달되었다. 그러나 아몬드는 키스의 요청이 여러 단계를 거쳤기 때문인지 지원 부대 21이 횡성으로 철수할 것이라고 오해했다.[3]
키스는 오전 3시경 철수를 시작했다. 주력 부대보다 앞서 지원팀 B의 전차 2대와 보병 2개 소대가 남쪽으로 약 4.83km 떨어진 다리를 확보하기 위해 이동했다. 그러나 중공군은 이미 다리 근처 29번 국도를 봉쇄한 상태였다. 전차-보병 부대가 남쪽으로 이동하자 중공군 기관총 사수들이 공격을 가했다. 보병들은 전차를 보호하기 위해 바짝 붙었고, 한국군도 합류했다. 도로에서 약 1.61km 떨어진 곳에서 폭발이 일어나 소대장이 전차 밖으로 나왔지만, 전차는 계속 움직였다. 그러나 기관총 사격과 수류탄 공격으로 소대장은 전차에 다시 들어가지 못했다. 선두 전차는 로켓포에 맞아 전복되었고, 뒤따르던 전차도 엔진실에 수류탄이나 박격포탄이 맞아 도로 밖으로 넘어졌다. 두 전차 승무원들은 서쪽 언덕으로 도망쳐 미군 제38보병연대 제3대대를 향해 남쪽으로 이동했다.[3]
키스의 주력 부대는 흩어진 전차-보병 부대 뒤에서 29번 국도 동쪽 고지대에서 집중적인 사격을 받았다. 중공군 습격대가 도로로 돌진하여 포대장, 선임 상사, 병사 몇 명을 생포했다. 중공군 포병들은 차량에 집중 사격을 가해 많은 차량을 파손시키고 여러 운전병을 살상하거나 부상을 입혔다. 오전 4시까지 중공군은 키스의 부대가 완전히 출발하기도 전에 멈춰 세웠다.[3]
키스는 새벽 무렵에 몇몇 포병을 다시 배치하여 동쪽 능선에 직접 사격을 가했다. 지원 부대는 오전 6시 전에 움직였다. 부대 꼬리에서는 A중대가 후퇴했지만, 추격하는 중공군과 교전을 벌여야 했다. A중대는 엄청난 양의 무기, 포병 탄약, 차량을 중공군에게 넘겨주었다.[3]
키스는 다리 아래에서 사격을 받은 후 계획대로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제38보병연대 제3대대에 합류하기 위해 이동하여 오전 10시경 부대 꼬리를 제3대대 경계선 안으로 진입시켰다. 지원 부대 사상자는 400명을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키스는 155mm 곡사포 5문과 105mm 곡사포 1문이 버려진 것을 발견한 후, 이 무기에 대한 공습을 사단에 요청했다.[3]
3. 3. 횡성으로의 철수 (2월 12일 ~ 13일)
제38보병연대는 횡성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제2대대와 제3대대의 사용 제한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지원 부대 21은 2월 12일 오전 2시 45분경 철수 허가를 받았으나, 횡성으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3]269–70 지원 부대 21의 주력 부대는 29번 국도 동쪽 고지대에서 집중적인 소화기 및 기관총 사격을 받았고, 많은 차량이 파손되고 운전병이 사상당했다.[3]270–1 막대한 손실을 입고 횡성을 통과하여 원주로 철수한 지원 부대 21의 사상자는 400명을 넘어섰고, 특히 A중대는 장교 2명과 약 110명의 병력을 잃었다. 또한 155mm영어 곡사포 5문과 105mm영어 곡사포 1문을 포함한 많은 장비를 상실했다.[3]271–2지원 부대 7은 트윈난물 강 동쪽의 미개척 도로를 통해 철수하여 피해를 줄였다. 이들은 중공군의 방해 없이 오후 3시에 출발하여 약 2시간 후에 후위를 철수시켰다.[3]274
횡성 북쪽에서 국군 제3사단 제18연대가 지원을 시도했으나, 횡성 북쪽 약 0.80km 지점에 있는 트윈난물 위의 첫 번째 언덕까지만 진격하여 제한적인 성공만 거두었다.[3]274–5
결국, 지원 부대 21과 제38보병연대 일부는 횡성을 통과하여 원주로 철수했으나, 많은 병력과 장비를 잃었다.
4. 횡성 전투의 실패 원인
매슈 리지웨이 장군은 횡성 전투에서의 막대한 장비 손실을 지휘력 부재의 증거로 간주했다. 그는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에게 보낸 편지에서 "병사들의 생명을 잃는 것에 비하면, 포 한 문이 중요하지 않을 수 있지만,... 제503포병대대 A포대 155mm 곡사포 5문의 손실과 같은 손실에 대해서는 다시 듣고 싶지 않다. 이는 어떤 지휘 계통에서 중대한 문제점을 보이는 지휘력 부재의 명백한 징후이다."라고 경고했다.[3]
알몬드 역시 장비 손실, 특히 제15야전포병대대의 곡사포 14문과 제503포병대대의 곡사포 5문 손실, 그리고 제8사단을 지원했던 모든 제2사단 부대의 과도한 인명 피해에 대해 크게 우려했다. 그는 클라크 L. 러프너에게 그 근본적인 이유를 조사하고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그는 특히 지원 부대 21의 정지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만약 지원 부대가 횡성으로 직접 계속 진격했더라면 손실이 더 적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3]
그러나 이후 조사 결과, 횡성 전투의 실패는 제8사단의 갑작스럽고 완전한 붕괴와 중공군의 기습적인 공격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제8사단의 붕괴는 미 제10(X)군단 돌출부의 좌익을 노출시켰고, 중공군은 후방과 주 보급로를 따라 신속하게 진격하여 횡성 북서쪽에 갇힌 부대의 유일한 철수 경로를 차단했다.[3]
결론적으로, 막대한 피해는 적의 행동의 결과였으며 미군 지휘관들의 과실이나 태만은 아니었다. 리지웨이는 이러한 설명을 받아들였지만, "사용 가능한 상태의 무기와 장비를 적에게 잃거나 유기하는 것은 중대한 범죄"라며 "책임이 있는 지휘관에게 엄중하게 대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3]
4. 1. 국군 제8사단의 취약성
중공군의 2월 공세 이전부터 국군 제8사단은 전투력과 사기가 저하된 상태였다. 2월 11일, 중공군은 제8사단의 취약한 방어선을 집중 공격했다.[3]제198사단은 29번 국도를 따라 이동하여 국군 제21연대 정면에 충돌한 후 연대 측면으로 병력을 보냈고, 제21연대와 제10연대 사이의 틈새를 통해 서쪽으로 진출했다. 제120사단은 제10연대 전선을 돌파했고, 제117사단은 제16연대 좌익을 돌파했다.[3]
공격 소식이 횡성 주둔 국군 제8사단 사령부에 도착했을 때, 최용희 준장은 제21연대에 짧은 후퇴를 명령했다. 그러나 제198사단 병력 일부가 29번 국도를 차단하고, 제120사단은 제10연대와 제16연대 지휘소를 점령하고 지원 부대와 29번 국도 사이에 차단선을 구축했다. 제117사단은 제16연대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고 횡성 방향으로 병력을 보내 연대 좌익 돌파를 심화시켰다.[3]
2월 12일 01:00까지, 국군 제8사단 사령부와 모든 연대 간, 그리고 각 연대와 예하 부대 간의 통신이 두절되었다. 정면의 압박과 후방의 위협에 갇힌 세 연대는 후퇴를 시작했지만 통제 불능, 분산, 포위 등으로 대부분의 병력이 갇히거나 탈출을 위한 개별적인 노력을 해야 했다.[3]
미군 지원 부대 사령관들은 국군 제8사단의 붕괴에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작전 라운드업의 지휘 통일이 사단 이하가 아닌 군단 사령부에 부여되었기 때문에, 미군 사령관들은 지원 부대와 출발선 부대의 신속한 대응에 어려움을 겪었다.[3]
결국 국군 제8사단은 대부분 산에 포위되어 사망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2월 13일, 사단의 병력은 장교 263명과 3,000명이 조금 넘는 병력으로 줄었고, 사상자는 장교 323명과 병사 7,142명이었다. 사단 장비 손실도 막대했다.[3]
4. 2. 지휘 체계의 문제점과 혼선
중공군의 횡성 공세 초기, 작전 라운드업의 지휘 통제는 사단급이 아닌 군단 사령부에 주어져 신속한 대응을 어렵게 만들었다.[3] 지원 부대 21의 철수 허가 과정은 지휘 계통의 문제로 지연되었다. 헤인스(Haynes)는 러프너(Ruffner)의 지시에 따라 군단 포병 사령관인 윌리엄 P. 에니스(William P. Ennis) 대령과 상의했고, 에니스는 다시 군단 참모장인 윌리엄 J. 맥케프리(William J. McCaffrey) 대령에게, 맥케프리는 아몬드(Almond)에게 직접 철수를 요청했다. 아몬드는 철수를 승인했지만, 요청이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지원 부대 21이 횡성으로 철수할 것으로 오해했다.[3]횡성 지역 미군 부대의 지휘권도 여러 차례 변경되어 혼란을 야기했다. 지원부대 21은 철수 명령을 받은 직후 즉시 철수했지만, 제3대대, 제38보병연대에 합류하여 정지했을 때 횡성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아직 받지 못한 상태였다. 이후 명령을 받고 횡성으로 이동하려 했으나, 이미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큰 피해를 입었다.[3]
리지웨이는 이러한 상황을 지휘력 부재의 증거로 보았고, 아몬드에게 "병사들의 생명을 잃는 것에 비하면, 포 한 문이 중요하지 않을 수 있지만,... 제503포병대대 A포대 155mm 곡사포 5문의 손실과 같은 손실에 대해서는 다시 듣고 싶지 않다. 이는 어떤 지휘 계통에서 중대한 문제점을 보이는 지휘력 부재의 명백한 징후이다."라고 경고했다.[3] 이후 조사에서 이러한 피해는 적의 기습적인 공격과 제8사단의 급격한 붕괴로 인한 결과였으며, 미군 지휘관들의 과실이나 태만은 아닌 것으로 결론 내려졌다.[3]
4. 3. 정보 분석의 오류
매슈 리지웨이 제8군 사령관은 참모 본부의 정보 분석을 바탕으로 중공군의 공세가 임박했다고 판단했다. 정보 참모 대리 로버트 G. 퍼거슨 대령은 중공군의 긴 휴지기가 보급, 수송, 증원 문제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는 중공군이 물류 문제를 해결하면 유엔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기 위한 작전을 재개할 것이라고 예측했다.[3]퍼거슨 대령은 중공군이 북한강과 홍천 사이의 24번 국도에 접한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여기에는 제39군, 제40군, 제42군, 제66군 등 약 11만 명의 병력이 포함되었다. 그는 중공군의 주력이 한강 계곡을 따라 여주 방향으로, 그리고 29번 국도를 따라 원주 방향으로 진격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그러나 퍼거슨 대령은 중공군 제9집단군 주요 부대가 원산 지역에서 증원 범위 내로 이동할 때까지 중공군이 공세를 시작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이들이 2월 15일 이전에 중앙 지역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추정하여, 중공군의 공격 시기를 잘못 예측했다.[3]
4. 4. 미군과 한국군 간의 협력 부족
횡성에서 미군과 한국군 부대 간의 의사소통 및 협조는 원활하지 못했다. 대한민국 국군 제8사단의 붕괴에 대한 미군의 대응이 늦어진 것이 그 예이다.[3]헤인스 준장은 최용희 준장에게 연락했지만, 최 준장은 이미 제21연대와 통신이 두절된 상태였다. 또한 최 준장은 제21연대가 이미 후퇴를 시작했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헤인스는 클라크 L. 러프너 제2보병사단장의 승인 없이 키스 중령의 후퇴를 허가하는 것을 망설였다. 작전 라운드업의 지휘 통일은 사단 이하가 아닌 군단 사령부에 부여되었는데, 이는 진격 중에는 효과적이었지만, 중국군이 대한민국 제8사단을 붕괴시킨 후에는 신속한 대응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3]
이러한 지연과 분산된 이동은 후퇴 작전에 영향을 미쳤다. 지원팀 A의 사령관 셔먼 D. 존스 대위는 후퇴 허가를 기다리지 않고, 봉쇄된 산길을 통해 동쪽으로 이동하려다 큰 피해를 입었다. 대한민국 제8사단 병력 대부분은 산에 포위되어 사망하거나 포로가 되었다.[3]
5. 횡성 전투 이후
횡성 전투의 결과로, 특히 대한민국 제8사단의 경우, 사상자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웠다. 2월 11일 밤부터 13일 새벽까지 한국군 9,800~11,800명, 미군 1,900명, 네덜란드군 100명 등 총 11,800명에서 13,800명 사이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산된다.[3] 또한, 한국군과 미군, 네덜란드군은 상당한 양의 장비를 손실했다.[3]
이후 중국 인민지원군은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지평리 전투에서 유엔군을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2월 13일부터 18일까지 원주 제3차 전투에서 유엔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5. 1. 유엔군의 재편성과 반격
횡성 전투의 패배로 유엔군은 많은 사상자와 장비 손실을 겪었다. 2월 11일 밤부터 13일 새벽까지 한국군은 9,800명에서 11,800명, 미군은 1,900명, 네덜란드군은 1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산된다.[3] 장비 손실도 컸다. 대한민국 제3, 5, 8사단은 105mm 곡사포 14문, 기타 운용 화기 901문, 무전기 390대, 차량 88대를 잃었고, 미군 부대와 네덜란드 대대는 105mm 곡사포 14문, 155mm 곡사포 6문, 기타 운용 화기 277문, 전차 6대, 무전기 195대, 차량 280대를 잃었다.[3]이후 중공군은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지평리 전투에서 고립된 유엔군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중공군과 북한군은 계속 남쪽으로 진격했지만, 2월 13일부터 18일까지 벌어진 원주 제3차 전투에서 제10군단과 대한민국 제3군단에 의해 저지되었다.
5. 2. 횡성 전투에 대한 조사와 논란
리지웨이 장군은 횡성 전투에서 발생한 막대한 장비 손실이 지휘력 부재의 증거라고 처음에는 생각했다. 그는 1951년 2월 13일 아몬드 장군에게 보낸 편지에서 제503포병대대 A포대의 155mm 곡사포 5문 손실과 같은 사례는 지휘 계통의 심각한 문제를 보여준다고 지적했다.[3] 다음 날, 리지웨이는 감찰감에게 1951년 2월 12일 전후 X군단이 포병 장비 및 기타 주요 장비를 잃게 된 모든 상황을 조사하도록 지시했다.아몬드 장군 역시 막대한 장비 손실, 특히 제15야전포병대대의 곡사포 14문과 제503포병대대의 곡사포 5문의 손실, 그리고 제8사단을 지원했던 모든 제2사단 부대의 과도한 인명 피해에 대해 크게 우려했다. 그는 러프너 장군에게 그 근본적인 이유를 조사하고 보고하도록 지시했다.[3]
5일 후 제출된 미군 제2사단의 보고서는 지원 부대 21의 지휘 결함에 대한 책임은 없다고 결론지었다. 러프너 장군을 대신하여 조사를 수행한 스튜어트 장군은 모든 수준에서 "강하고 용감하며 공격적인" 지휘가 이루어졌다고 밝혔다. 지원 부대 지휘관 키스는 철수 명령을 받자마자 창봉리에서 철수했고, 제3대대, 제38보병연대에 합류하여 정지했을 때 횡성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아직 받지 못했으며, 그러한 명령을 받는 즉시 횡성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고 설명했다. 스튜어트는 제2사단 부대의 장비와 인명 피해의 원인이 제8사단의 갑작스럽고 완전한 패배였으며, 제2사단 병력에게 거의 또는 전혀 경고가 없었던 것이라고 증언했다. 그는 미래에 미군과 한국군 부대의 유사한 혼합을 금지할 것을 권고했다.[3]
육군 조사 결과는 스튜어트 장군의 결과를 확인했다. 병력과 물자 모두의 모든 손실은 "최소 4개의 [중공군] 사단과 2개의 [북한군] 사단이 수적으로 열세하고 광범위하게 배치된 제8사단과 제3사단 병력을 상대로 한 기습적이고 압도적인 공격"에서 비롯되었다고 밝혔다. 제8사단의 급격한 붕괴는 "[X군단] 돌출부의 좌익을 노출시켰고, 적군은 강력하게 후방과 [주 보급로]를 따라 신속하게 진격하여 횡성 북서쪽에 갇힌 전차, 포병, 차량 부대의 유일한 철수 경로를 차단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X군단 지휘관이나 제2미국보병사단 지휘관에게는 적의 노력을 격퇴하고 ... 북쪽에 위치한 아군 부대의 철수를 지연시킨 도로 차단을 해제할 수 있는 충분한 병력으로 태스크포스를 구성할 수 있는 충분한 미군 또는 기타 UN군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막대한 피해는 적의 행동의 결과였으며 "관련된 미군 지휘관들의 과실, 태만, 무능, 행위 또는 부작위"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3]
리지웨이는 이러한 설명을 받아들였지만, 모든 군단 지휘관과 KMAG 사령관 패럴 장군에게 "사용 가능한 상태의 무기와 장비를 적에게 잃거나 유기하는 것은 이 지휘부의 모든 구성원에 대한 중대한 범죄"라고 경고했다.[3]
5. 3. 대중 매체에서의 묘사
이 전투는 2007년 중국 영화 《집결호》에 묘사되었다.[5]참조
[1]
서적
The Korean War
Osprey Publishing
[2]
간행물
Ambush at Hoengsong
http://content.time.[...]
1951-05-12
[3]
서적
United States Army in the Korean War: Ebb and Flow November 1950-July 1951
https://history.army[...]
United State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4]
서적
Running with the Dogs: War in Korea with D/2/7, USMC
iUniverse
[5]
웹사이트
Ji Jie Hao (Assembly) (2007) Movie Script
https://www.springfi[...]
Springfield
2019-03-19
[6]
서적
United States Army in the Korean War: Ebb and Flow November 1950-July 1951
https://history.army[...]
United State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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