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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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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문은 후한 헌제 시기의 인물로, 자는 문림이며 병주 태원군 중도현 사람이다. 사공 종구의 문하생으로, 흥평 원년 삼보에 기근이 들자 헌제의 명으로 태창의 곡식을 풀어 백성을 구휼하려 했다. 그러나 제대로 시행되지 않아 헌제에게 책망받고 곤장 50대의 벌을 받았다. 이후 헌제의 구휼 사업이 제대로 진행되었다.

2. 생애

후문(侯汶)은 후한 말기의 인물로, 자는 문림(文林)이며 병주 태원군 중도현 출신이다. 헌제 시기에 시어사(侍御史)를 지냈으며, 사공(司空) 종구(宗俱)의 문하생이었다.[1]

侯汶|후문중국어

2. 1. 시어사 시절과 기근 구휼

후한 헌제 시기, 사공(司空) 종구(宗俱)의 문하생으로, 스승을 기리는 비석 뒷면에 이름을 기록했다.[1]

흥평 원년(194년) 4월에서 7월까지 삼보(三輔)[2]에 큰 기근이 발생했다. 헌제는 정사를 중단하고 기우제를 지냈으며, 죄인들을 사면하고 형벌을 가볍게 했다.[3]

당시 쌀 한 섬에 50만 전, 콩과 보리는 한 섬에 20만 전까지 가격이 치솟아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상황에 이르렀다. 헌제는 시어사(侍御史) 후문에게 명하여 태창(太倉)의 곡식을 풀어 죽을 쑤어 굶주린 백성들에게 제공하도록 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굶어 죽는 사람이 줄지 않자, 헌제는 이를 의심하여 직접 죽을 쑤는 과정을 감독했다.

결국 일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음을 알게 된 헌제는 시중(侍中) 유애(劉艾)를 보내 담당 관리를 꾸짖었다. 상서령(尙書令) 이하 모든 관원들이 궐문을 나와 사죄하고 후문을 잡아들여 조사할 것을 요청하자, 헌제는 조서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후문에게 벌을 내린 후, 기근 구휼이 철저하게 진행되었다.[3]

참조

[1] 비석 한사공종구비(漢司空宗俱碑)
[2] 문서 장안
[3] 서적 후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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