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후한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후한은 신나라 멸망 후 한 왕조 부흥 운동 과정에서 광무제 유수가 건국한 왕조이다. 광무제는 선정을 펼쳐 왕조의 기틀을 다졌으나, 4대 황제 화제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 외척과 환관의 권력 다툼이 심화되었다. 이후 강족의 침입, 당고의 화, 황건적의 난 등을 겪으며 사회가 혼란해졌고, 군벌들의 할거로 삼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결국 동탁의 난과 조조의 권력 장악을 거쳐 헌제가 조비에게 선위하면서 220년에 멸망했다. 후한은 유학의 발전과 함께 불교와 도교가 유입되었으며, 로마 제국과의 교류가 있었고, 고구려, 부여, 왜 등 주변국과의 관계를 맺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후한 - 백마사
    백마사는 중국 뤄양에 있는 불교 사찰로, 68년에 불경과 불상을 흰 말에 싣고 온 두 승려의 전설에 따라 이름 붙여졌으며, 중국 불교 초창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현장이 순례를 시작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 후한 - 후한의 행정 구역
    후한의 행정 구역은 주 아래 군, 왕국, 속국이 있고 그 아래 현, 향, 정, 리로 구성되었으며, 주에는 주자사가 감찰 및 행정, 군사적 권한을 행사하며 지방을 통치했다.
  • 한나라 - 낙랑군
    낙랑군은 기원전 108년 한무제가 위만조선 멸망 후 설치한 한나라의 군현으로, 주변 소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고구려에 의해 멸망했다.
  • 한나라 - 초한전쟁
    초한전쟁은 진나라 멸망 후 항우와 유방 세력 간에 벌어진 전쟁으로, 유방의 승리로 끝나 한나라가 건국되었으며, 신분 질서의 변화와 민본주의 정치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 중국의 옛 나라 - 청나라
    청나라는 만주족이 세운 중국 최후의 통일 왕조로, 후금에서 국호를 변경하여 시작되었고 명나라를 멸망시킨 후 중국 대륙을 통일하여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시대에 전성기를 맞았으나, 서구 열강의 침략과 내부 반란, 근대화 개혁 실패 후 신해혁명으로 멸망,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하고 다민족 국가로서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 중국의 옛 나라 - 한나라
    한나라는 유방이 기원전 206년에 건국하여 220년에 멸망할 때까지 400년 이상 지속되었으며 전한과 후한으로 나뉘어 문화, 경제, 유교, 실크로드, 과학기술 등 중국 역사와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왕조이다.
후한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지도
기본 정보
약칭후한
한국어 국명후한
공식 국명한(漢)
건국 시기25년
멸망 시기220년
이전 국가
계승 국가위 (삼국), 촉한,
후한의 영역
후한의 영역
공용어상고 한어
수도낙양 → 장안 → 허
면적6,500,000km² (100년 기준)
정치
정치 체제황제
역대 황제광무제 유수 (25년 ~ 57년)
명제 유장 (57년 ~ 75년)
헌제 유협 (189년 ~ 220년, 14대)
역사
건국25년
멸망220년

2. 역사

신나라 말기의 혼란 속에서 한조 부흥 운동이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황족의 방계 혈통인 광무제(유수)가 곤양 전투 등에서 활약하며 세력을 키웠다. 그는 왕망 세력과 여러 군웅을 격파하고 적미군을 제압한 뒤, 25년 낙양을 수도로 삼아 후한을 건국하고 왕조의 기틀을 마련했다.

초기 후한은 채륜이 실용적인 종이인 채후지를 만들고, 장형이 혼천의와 지동의를 발명하는 등 문화와 과학 기술 면에서 발전을 이루었다. 또한 반초서역과의 교역로인 실크로드를 다시 개척하여 동서 교류를 활발하게 했다.

그러나 제4대 화제 이후 여러 황제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 황태후섭정하는 경우가 잦아졌고, 이로 인해 황태후의 친족인 외척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후 성장한 황제가 친정을 위해 자신의 측근인 환관 세력을 이용하면서, 외척과 환관 간의 치열한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은 극심한 뇌물 정치와 부정부패로 이어졌고, 유능한 인재들이 탄압받는 당고의 금 사건까지 발생하며 조정의 자정 능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정치 혼란과 관리들의 수탈이 계속되면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고, 안제 시기부터는 서쪽 강족의 침입까지 잦아졌다. 결국 184년, 장각을 중심으로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 반란은 정부군과 지방 군벌들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후한 조정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고 각지 군벌들의 힘은 더욱 강해졌다.

이후 양주의 군벌 동탁이 수도 낙양을 장악하고 황제를 마음대로 폐위시키는 등 전횡을 일삼으면서 후한은 사실상 통치 기능을 상실하고 군웅할거 시대로 접어들었다. 여러 군웅들 가운데 조조가 헌제를 확보하고 북중국 지역을 장악하며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결국 220년, 조조의 아들 조비가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위나라를 세우면서 후한 왕조는 멸망하고, 삼국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 1. 건국과 초기 발전

신나라 말기, 왕망의 통치에 반대하는 여모의 난을 시작으로 전국적인 반란이 일어났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한조 부흥 운동이 전개되었고, 이 과정에서 남양(현재의 허난성 난양시) 출신의 황족 방계이자 지방 호족인 유수(광무제)가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명목상의 황제였던 경시제 휘하에 있던 유수는 곤양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며 명성을 떨쳤다.

이후 유수는 왕망 세력을 격파하고 하북 지역의 여러 군웅 세력을 차례로 평정하였다. 그의 능력과 명망을 바탕으로 여러 장수들의 추대를 받은 유수는 점차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며 무능한 경시제로부터 독립했다. 결국 경시제를 무너뜨린 적미군마저 굴복시키고 25년 낙양에서 황제에 즉위하여 후한 왕조를 창업하였다.

광무제는 선정을 베풀어 전한 말기와 신나라 시기의 혼란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안정시키고 후한 왕조의 기틀을 다졌다. 민중의 부담을 덜기 위해 지방의 주둔군을 폐지하고, 기존의 징병제를 소수의 정예 병력으로 구성된 용병제로 전환했다. 또한, 본래 황제의 비서 역할에 가까웠던 상서의 권한을 강화하여 삼공 등 고위 대신들의 권력을 견제하고 황제 중심의 통치 체제를 확립했다.

후한 초기에는 문화적으로도 상당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채륜은 기존의 서사 재료들을 개량하여 실용적인 종이인 채후지를 만들어 지식 보급에 크게 기여했으며, 이는 세계 최초의 종이로 평가받는다. 또한 장형은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혼천의지진을 감지하는 지동의를 발명하여 당시 과학 기술의 발전을 보여주었다. 대외적으로는 반초서역으로 파견되어 여러 국가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교역로를 다시 확보함으로써, 끊어졌던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 교류가 재개되었다.

광무제와 그의 아들인 제2대 명제 시대까지는 비교적 안정적인 통치가 이어졌으나, 이후 황제들은 대부분 어린 나이에 즉위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생후 100일 만에 즉위한 황제도 있었다. 이로 인해 황제의 어머니인 황태후섭정을 하게 되고, 황태후의 친족인 외척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특히 제4대 화제 이후 외척의 권력 남용은 점차 심화되어 후한 정치 혼란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2. 2. 중흥과 번영

신나라 말기, 한조 부흥 운동 과정에서 경시제(更始帝)의 휘하에 있었던 유수는 곤양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며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유수는 왕망과 하북의 여러 세력을 차례로 격파하고, 제장들의 추대를 받아 당시 황제였던 경시제로부터 독립했다. 경시제를 무너뜨린 적미군마저 굴복시킨 유수는 마침내 후한 왕조를 세우고 광무제로 즉위하여 선정을 베풀며 후한 왕조의 기틀을 닦았다.

후한 시대에는 문화적으로도 큰 발전이 있었다. 채륜(蔡倫)은 세계 최초의 종이로 평가받는 채후지를 발명했으며, 장형(張衡)은 천체의 움직임을 관측하는 혼천의와 지진을 감지하는 지동의를 만들어 과학 기술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반초(班超)는 서역의 여러 나라와의 교역로를 다시 열어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 문화 교류를 촉진했다.

2. 3. 외척과 환관의 발호

후한 시대에는 황제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는 경우가 많았다. 초대 광무제와 2대 명제를 제외한 모든 황제가 20세 미만에 즉위했으며, 심지어 생후 100일 만에 즉위한 경우도 있었다. 황제들의 평균 수명도 짧아 여러 황제가 30대에 사망했고,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렇게 어린 황제가 즉위하면, 예법이나 혈연상 모후(母后)인 황태후(皇太后)가 임조칭제(臨朝稱制)하며 섭정을 하게 되었다. 이는 자연스럽게 황태후의 친정 가문인 외척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특히 4대 화제 이후 외척의 권세가 강해졌다.

황제가 성장하여 친정을 시도할 때는 자신을 꼭두각시로 만들려는 외척 세력을 견제해야 했다. 이때 황제는 자신의 최측근 세력인 환관을 이용하여 외척에 맞섰다. 예를 들어, 제11대 환제는 환관의 도움을 받아 외척 양기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는 외척 대신 환관이 권력을 장악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후한 정치는 외척 세력과 환관 세력 간의 끊임없는 권력 다툼으로 얼룩졌다. 이 과정에서 정치는 극도로 타락하여 뇌물 정치가 만연했다. 관료들은 출세를 위해 윗사람에게 뇌물을 바치는 것이 당연시되었고, 그 비용은 고스란히 백성들에 대한 착취로 이어졌다.

환관 세력은 자신들에게 비판적인 청류파 사대부들을 탄압했는데, 이것이 바로 당고의 금이다. 환제와 영제 시기에 두 차례 발생한 당고의 화로 유능한 선비들이 대거 정계에서 축출되거나 살해되면서, 조정은 자정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정치 혼란과 가혹한 수탈 속에서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고, 안제 치세부터는 서쪽 강족(羌族)의 잦은 침입으로 변경 지역까지 불안정해졌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대규모 민중 반란으로 이어졌다. 184년 장각이 일으킨 황건적의 난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후한 조정을 크게 뒤흔들었다.

황건적의 난은 정부군과 군벌 세력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후한 조정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지방 군벌들의 힘만 강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양주(凉州) 군벌 동탁(董卓)이 수도 낙양에 입성하여 소제 변을 폐위하고 헌제를 옹립하면서 후한은 사실상 통치 기능을 상실하고 군웅할거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외척과 환관의 발호는 후한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2. 4. 쇠퇴와 멸망

광무제와 제2대 명제 시기의 안정을 지나, 4대 화제부터 여러 황제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 외척환관 세력이 번갈아 권력을 장악하며 후한은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어린 황제를 대신해 황태후임조칭제를 하면서 외척이 권력을 잡았고, 성장한 황제가 친정을 위해 측근인 환관을 이용하면서 외척과 환관 간의 치열한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

화제 이후 외척의 세력이 강해졌으나, 제11대 환제가 환관의 도움을 받아 외척 양기를 제거한 뒤로는 환관이 권력을 장악했다. 환관 세력은 매관매직을 일삼고 극단적인 뇌물 정치를 펼쳤으며, 이에 반발한 청류파 사대부들은 당고의 금과 같은 탄압을 받아 정계에서 축출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 관료들의 수탈은 심해졌고 민중의 삶은 피폐해져 갔다. 안제 시기부터는 서쪽 강족의 침입이 잦아지는 등 외부의 위협도 거세졌다.

결국 184년, 장각을 중심으로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 난은 조정과 지방 군벌들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중앙 정부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고 각지 군벌들의 세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십상시로 대표되는 환관 세력은 이 혼란 속에서 대부분 제거되었다.

양주의 군벌이었던 동탁이 수도 낙양에 입성하여 소제를 폐위하고 헌제를 꼭두각시 황제로 내세우면서 후한 조정은 사실상 통치 기능을 상실하고 군웅할거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조조가 헌제를 자신의 세력 하에 두고 보호하며 원소 등 경쟁자들을 격파하고 화북 지역을 장악했다.

비록 후한 왕조는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헌제는 조조의 영향력 아래 있는 허수아비 황제에 불과했다. 220년, 조조의 아들 조비가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는 형식으로 황제 자리를 빼앗아 위나라를 건국하면서 후한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한편, 헌제가 살해되었다는 잘못된 소식을 들은 유비한나라의 정통성을 잇는다는 명분으로 촉한을 세웠고, 손권 역시 오나라를 세우면서 삼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멸망 후, 헌제는 위나라로부터 산양공으로 봉해졌으며, 사후에는 손자 유강이 작위를 계승했다. 이러한 대우는 서진 시대까지 이어졌으나, 유강의 손자 유추 대에 일어난 영가의 난전조(흉노 한나라)에 의해 살해되었다. 위나라에서는 후한의 제후왕들을 일률적으로 숭덕후로 강등시켰으며[2], 한나라 종실은 금고(공직 추방) 처분을 받았으나 서진 건국 후인 266년에 해제되었다.

3. 정치

후한의 정치 체제는 기본적으로 전한의 제도를 계승했다. 그러나 전한 말기의 혼란을 거치며 인구는 크게 감소하여, 2년 5,767만 명에서 57년에는 2,100만 명으로 줄었다. 이후 점차 회복하여 157년에는 5,648만 명 수준에 이르렀으나, 황건적의 난과 같은 대혼란과 빈번한 천재지변으로 다시 급감하여 서진통일280년에는 1,616만 명에 불과했다. 이러한 인구 감소는 단순한 사망자 증가뿐 아니라, 국가 통제력 약화로 인한 호적 파악의 어려움과 세금 회피를 위한 도망(도산)이 많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인구가 다시 6,000만 명 수준으로 회복된 것은 나라 때였다.

세금 납부 방식에서는 전한 시대와 달리 화폐 대신 비단으로 납부하는 경우가 늘어났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반면, 노역은 화폐로 대체되거나 고용 노동이 확산되면서 민간에 화폐 유통이 활발해졌다.[3]

명제 이후 영제 시대까지 자연재해와 변경 민족과의 전쟁이 계속되면서 국가 재정은 악화되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증세뿐만 아니라 관직이나 작위를 돈으로 파는 매관매직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조치는 당장의 재정 부족을 메울 수는 있었으나, 장기적으로는 재정 부담을 가중시키고 금전 만능주의와 부정부패를 심화시켜 정치적 혼란을 야기했으며, 결국 황건적의 난과 같은 대규모 민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5]

후한 시대는 호족 세력이 지방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시기이기도 하다. 호족들은 각지에서 세력을 넓히며 강남이나 사천 지역 개발을 촉진하기도 했으며, 이는 훗날 나라와 촉한이 성립하는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호족들은 토지를 겸병하고 궁핍해진 농민을 예속시켜 장원을 경영하며 지방 경제를 장악했고, 이는 중앙 정부의 통제력 약화로 이어졌다. 또한 장원 내부의 치수 사업 등에 대한 중앙 정부의 관여가 줄어들면서 재해 발생 시 적절한 대응이 어려워지는 문제점도 나타났다. 중앙 정치에서는 외척환관의 대립이 격화되어 정치적 불안정을 심화시키는 주요 요인이었다.

3. 1. 중앙 정치

후한의 정치 체제는 기본적으로 전한의 제도를 계승하였다. 삼공태위, 사도, 사공(초기에는 대사마, 대사도, 대사공)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는 각각 전한의 태위, 승상, 어사대부에 해당한다. 그러나 후한에서는 환관을 중용하는 측근 정치가 강화되어, 황제의 비서 역할을 하던 상서가 실질적인 정치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삼공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축소되어 집행 기관의 성격이 강해졌다.

지방 제도에서는 군(郡)의 장관인 태수를 감찰하던 자사의 지위에 변화가 있었다. 본래 자사는 태수보다 낮은 녹봉(600석)을 받았으나, 원제 때 2,000석의 주목으로 격상되기도 했다. 자사와 주목 제도는 여러 차례 변경되었고 때로는 병립하기도 했으나, 점차 주(州)가 지방 행정의 최고 단위가 되었다. 후한 말기에는 지방 반란이 빈번해지자, 기존에 군사 지휘권이 없었던 자사와 달리 군권을 겸비한 주목이 지방 행정의 최고 책임자로 자리 잡았다. 민정과 군권을 모두 장악한 주목은 강력한 권한을 바탕으로 점차 지방의 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했으며, 황건적의 난 이후 등장한 군웅들 대부분이 주목 출신이었다.

후한 시대에는 세금 납부 방식에도 변화가 나타나, 전한 시대와 달리 화폐 대신 비단으로 세금을 납부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그러나 노역의 경우 화폐 납부로 대체되거나 고용 노동이 확산되면서 민간에도 화폐 유통이 활발해졌다. 《후한서》 유총전에는 관리가 거의 방문하지 않는 산간 지역 민족조차 돈을 가지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화폐 유통이 활발했다.[3]

카키누마 요헤이는 후한의 화폐 및 재화 사용 특징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카키누마 요헤이 분석: 후한의 화폐 및 재화 사용[4]
용도주로 사용된 재화
대외 교역금, 포백 (비단, 삼베) - 화폐 유출 금지 추정
국가 하사 (일반)백 (비단) > 포 (삼베)
국가 하사 (장례)포 (삼베), 돈
속죄금겸 (縑, 견직물) - 군수 물자 전용
관료 퇴직금돈 (일부 백) - 전한의 금 지급 관례에서 변화
사민(徙民)·적술(谪戌) 대상자돈 - 이동 중 사용 편의성 고려
구상(購賞)
군공 포상돈 또는 금
병든 관리 문병백 (비단), 돈 - 전한의 비단 사용 관례에서 변화
모범 백성 표창 (삼로·효제 등)백 (비단)
곤궁자 구휼 (환과고독 등)백 (비단) 또는 포 (삼베)
인재 초빙속백 (束帛, 폐백용 비단)
혼례속백 (비단), 금/돈 사용 시 비단과 함께 사용
국가 경사 (황후·황태자 책봉 등)백 (비단), 금 (전국적 하사)



명제부터 영제 시대에 이르기까지 자연재해와 서강, 흉노와의 전쟁이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국가 재정은 악화되었다. 안제 이후에는 증세뿐만 아니라 관직이나 작위를 돈으로 파는 매관매직이 자주 행해졌다. 이는 장기적으로 하사액 증가와 봉록 지출 증가를 유발하여 재정을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이었지만, 당장의 재정 위기 속에서 억제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은 금전 만능주의를 조장하고 뇌물 수수와 청탁 등 규범의 해이를 심화시켰다. 특히 영제는 자신의 사치와 더불어 군사력 및 황실 재정 강화를 통한 황제권 확립을 명분으로 증세와 매관매직을 더욱 강화했고, 이는 극심한 정치 부패로 이어져 결국 황건적의 난을 비롯한 대규모 혼란을 초래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5]

3. 2. 지방 제도

전한 무제 시기에 군(郡)의 장관인 태수를 감찰하기 위해 설치된 자사는 후한 시대에 중요한 변화를 겪었다. 초기에 자사의 녹봉은 600석으로, 2,000석의 태수보다 낮았다. 이러한 불합리함 때문에 원제 때에는 2,000석의 주목으로 격상되기도 했다. 자사와 주목 제도는 여러 차례 변경되었으며, 때로는 두 직책이 함께 존재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주(州)는 점차 지방 행정의 최고 단위로 자리 잡았다. 본래 자사에게는 군사 지휘권(군권)이 없었으나, 후한 말기에 황건적의 난과 같은 지방 반란이 빈번해지자 군권을 겸비한 주목이 지방 행정의 최고 관직이 되었다. 민정과 군권을 모두 장악한 주목의 권한은 매우 강력했으며, 이는 이후 주목들이 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는 기반이 되었다. 황건적의 난 이후 등장한 여러 군웅들은 대부분 주목을 역임한 경험이 있다.

후한의 주요 지방 행정 구역은 다음과 같다.

행정 구역비고
사례
유주
기주
병주
청주
연주
서주
예주
양주
형주
익주
량주
교주
옹주194년부터 213년까지 설치



중앙 정부에서는 환관의 세력이 강했지만, 지방에서는 호족의 영향력이 압도적이었다. 호족들은 토지를 사유화하는 겸병을 통해 세력을 확장했으며, 몰락한 농민들을 동원하여 장원을 경영하며 지방 경제를 실질적으로 지배했다. 이 과정에서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은 약화되었고, 장원 내부의 치수 사업 등 공공 문제에 대한 중앙 정부의 개입도 줄어들었다. 이는 후한 시대에 잦았던 재해에 대한 적절한 대응을 어렵게 만든 요인 중 하나로 여겨진다.

3. 3. 외척과 환관의 정치 개입

후한에서는 어린 황제가 즉위하는 경우가 많아 황태후수렴청정을 통해 권력을 행사하는 일이 잦았고, 이는 자연스럽게 황태후의 친족인 외척 세력의 발호로 이어졌다. 외척에 의한 정치적 전횡이 여러 차례 나타났으며, 후한 말기에는 외척 세력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운 환관들이 다시 어린 황제를 내세워 정치를 농단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환관 세력의 증가는 황후 세력의 강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후한 황제들은 유난히 단명한 경우가 많았다. 여러 황제가 30대에 사망했으며, 젊은 나이에 후사 없이 사망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어린 황제가 연이어 즉위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즉위 당시 20세를 넘긴 황제는 초대 광무제와 제2대 명제뿐이었고, 15세를 넘긴 황제도 장제(19세 즉위)와 소제 변(17세 즉위) 단 두 명에 불과했다. 참고로 가장 장수한 황제는 초대 광무제(63세)였다.

정치 구조적으로 후한의 삼공(태위, 사도, 사공)은 전한의 태위, 승상, 어사대부에 해당했지만, 환관 세력이 중용되면서 황제의 측근 정치가 강화되었다. 황제의 비서 역할을 하던 상서(尚書)가 실질적인 정치 권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삼공은 점차 집행 기관으로 역할이 축소되었다.

지방 제도에서는 전한 무제 때 설치된 자사의 지위 변화가 주목할 만하다. 본래 군(郡)의 태수를 감찰하는 역할이었던 자사는 녹봉이 태수보다 낮아(600석 vs 2,000석) 문제가 제기되었고, 원제 때 2,000석의 주목으로 격상되기도 했다. 자사와 주목 제도는 여러 차례 변경되었고 때로는 병립하기도 했으나, 점차 주(州)가 지방 행정의 최고 단위가 되었다. 초기 자사에게는 군사 지휘권이 없었으나, 후한 말기에 지방 반란이 빈번해지자 군권을 겸비한 주목이 지방 행정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민정과 군권을 모두 장악한 주목의 권한은 막강했으며, 이들은 훗날 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는 기반이 되었다. 황건적의 난 이후 등장한 군웅들 대부분이 주목 출신이었다.

후한은 건국 초기부터 호족 세력의 연합체적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호족들은 황실과의 혼인을 통해 외척으로서 막강한 정치적, 군사적 권력을 누렸다. 장제 때까지는 황제가 비교적 권력을 유지했지만, 88년 제4대 화제가 10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황태후 두씨가 수렴청정을 하고 그녀의 오빠인 두헌이 대장군으로서 실권을 장악하면서 외척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92년, 화제는 환관 정중의 도움을 받아 두헌 일파를 숙청했다. 이를 기점으로 후한 말까지 외척과 환관 간의 치열한 권력 다툼이 계속되었다. 정중 이후 환관들은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며 후(侯)에 봉해지고, 사후에는 양자를 통해 봉지를 세습하기까지 했다.

제6대 안제 때에는 환관 강경, 이윤 등의 모함으로 외척 등씨 일족이 숙청되었고(121년), 제8대 순제 즉위 시에는 외척 염씨 일족이 손정 등 19명의 환관(모두 후(侯)에 봉해져 19후라 불림)에 의해 제거되는 등(125년), 외척과 환관 사이에서 황제 옹립을 둘러싼 암투가 끊이지 않았다. 충제, 질제, 환제 등 어린 황제들을 연이어 옹립하며 권세를 누렸던 외척 양기마저 환관 단초 등(오후)에 의해 몰락하면서(159년), 환관 세력이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환관들이 권력을 사유화하고 전횡을 일삼자, 이에 대한 비판과 저항의 목소리가 지식인 사회를 중심으로 높아졌다. 이들은 스스로를 '청류'(淸流)라 칭하고 환관 세력을 '탁류'(濁流)라 비난하며 개혁을 요구했는데, 이를 '청의'(淸議)라고 한다. 환관 측은 이들 청류파를 '당인'(黨人)이라 부르며 탄압했다. 일부 호족 세력도 청류파와 연대하여 환관에 맞섰다.

166년, 사례교위 이응이 환관의 비리를 적발한 사건을 계기로 제1차 당고의 금이 발생했다. 이응을 포함한 200여 명의 청류파 인사들이 체포되었으나, 호족 세력의 구명 운동 등으로 석방되어 금고(관직 임용 금지) 처분을 받는 데 그쳤다. 오히려 이응 등은 절개를 지킨 선비로 칭송받으며 명성이 높아졌고, 삼군(三君)·팔준(八俊)과 같은 인물 평가가 유행하기도 했다.

이후 영제를 옹립했던 외척 두무(두헌의 사촌)가 168년 청류파 진번 등과 함께 환관 세력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자, 환관들은 169년 제2차 당고의 금을 일으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다. 이번에는 단순한 관직 추방을 넘어 이응 등 핵심 인물들이 옥중에서 살해되었고, 사망자가 100명이 넘었다. 또한 당인의 친족과 연루자들까지 금고 처분을 받았으며, 태학의 학생들까지 체포되는 등 탄압의 강도가 훨씬 심해졌다.

황건적의 난이 발발하자, 조정은 황건적에 맞서기 위해 외척 세력을 다시 중용하고, 지식인들이 황건적에 동조하는 것을 막기 위해 당고의 금을 해제했다. 그러나 외척과 환관의 대립은 그치지 않았고, 189년 외척의 수장인 대장군 하진이 환관 십상시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분노한 원소 등이 군사를 이끌고 궁궐에 난입하여 십상시를 비롯한 환관 세력을 몰살함으로써, 오랜 기간 후한 정치를 혼란에 빠뜨렸던 외척과 환관 세력은 모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황제를 보호할 세력마저 사라졌음을 의미했고, 이후 후한 황제는 실권 없는 허수아비로 전락하여 군웅할거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3. 4. 관료 제도와 인재 등용

후한의 정치 체제는 기본적으로 전한에서 계승했으므로 전한 항목도 참조할 것.

4. 사상

후한 시대 사상의 큰 특징은 유학이 국가 통치 이념으로 확고히 자리 잡는 과정에서 참위설 등과 결합하며 신비화되는 경향을 보인 것과, 동시에 이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왕망이 전한의 정권을 차지하거나 광무제가 한 왕조를 부흥시키는 과정에서 부명(符命)이나 도참(圖讖)[7]과 같은 예언설이 정치적으로 활용되었고, 이는 유교 경전 해석에 음양오행설과 결합된 신비주의적 색채를 더하는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금문학과 고문학의 논쟁 속에서도 이어졌으며, 후한 말 정현 등에 의해 종합되었다.

한편, 국교인 유학이 신비화되는 것에 대한 반동으로, 지배 권력의 의사와는 별개로 천인감응설이나 음양오행설에 기반한 통념들을 비판하는 지식인들도 등장했다. 환담을 시작으로 왕충, 왕부, 중장통 등은 경험과 이성을 중시하며 합리주의적, 무신론적 사유를 전개하며 당대 사회와 사상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했다.[12] 또한 이 시기에는 불교도교가 사회 불안 속에서 민중에게 수용되며 교단을 형성하는 등 본격적으로 뿌리내리기 시작하여, 이후 중국 사상 지형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4. 1. 유학의 발전과 변화

왕망이 전한 정권을 찬탈하거나 광무제가 한 왕조를 부흥시키는 과정에서 부명(符命)이나 도참(圖讖)[7]과 같은 예언설이 활용되었는데, 이는 유교 경전에서 근거를 찾아 권위를 세우려 한 시도였다. 이미 전한 말기부터 음양오행설과 천인감응 사상을 바탕으로 유교 경전을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일부 유학자들은 권력에 영합하기 위해 공자의 저작으로 위장한 위서(緯書)[9]를 만들어 경학을 신비주의적으로 포장하기도 했다.

기원후 56년 광무제는 도참을 천하에 공포했고, 장제79년 백호관(白虎觀)에 학자들을 모아 오경(五經)의 국가 공인 해석을 논의하게 하여 전한 시대부터 이어져 온 금문학(今文學)의 우위를 공식화했다. 그러나 왕망의 신(新)나라 때 활용되었던 고문학(古文學)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유지하며 권력에 접근하고 있었다. 금문학과 고문학의 주요 차이는 다음과 같다. 금문학은 《춘추공양전》을 중심으로 한 왕조의 정책 운영에 필요한 이론을 제공하며 학관(學官)[10]을 독점해왔다. 반면, 고문학은 복고주의를 내세우며 고대 성현의 이상 정치를 구현하는 방법으로, 오경 전체 텍스트의 언어 분석에 기반한 해석학을 발전시켰다. 유흠, 가규, 반고 등은 고문 경전이 도참설의 부족함을 보완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춘추좌씨전》, 《모시(毛詩)》 등을 국가 공인 경전으로 삼으려는 운동을 벌였으나, 고문학의 진정한 영향력은 주로 민간 학계에서 발휘되었다.

후한 시대에는 관리가 될 수 있는 길('녹리(祿吏)의 도'[11])이 비교적 열려 있었기 때문에, 많은 유생들이 관직 진출을 위해 경학을 공부하여 금문과 고문에 두루 능통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사회적으로 신분 질서를 강조하는 사상과 그 실천 덕목인 예(禮)를 중시하는 명절(名節) 존중의 풍조가 확산되었다. 특히 광무제는 왕망과 같은 찬탈자가 다시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유교의 영향력을 더욱 강화하고자 했다. 관료 선발 제도인 향거리선에서는 '''효렴'''(효성이 지극하고 청렴한 인물)을 특히 중시했으며, 낙양에 태학(太學)을 설립하고 오경박사를 두어 유교 경전을 가르쳤다. 또한 공자의 고향인 취푸(曲阜)에서 국가 주관으로 성대한 제사를 지냈다. 민간에도 유교 윤리를 확산시키기 위해 효행을 실천한 백성을 표창하고, 법률적으로도 자식이 부모를 고발하는 것을 금지하거나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한 살인을 정당방위로 인정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정책 결과, 명제, 장제, 화제 재위 기간(58년~105년) 동안에는 예교 국가(禮敎國家) 체제가 정비되었고, 지식인들의 언행은 점차 관료 후보로서의 자격을 갖추기 위한 성격을 띠게 되었다. 후한 사회 전반에 걸쳐 유교적 가치관이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금문학과 고문학 간의 논쟁은 국가 체제 교학 강화에 기여하는 한편, 학문적 경향은 전한 시대처럼 하나의 경전에만 집중하는 방식(일경 전문, 一經專門)에서 벗어나 오경을 함께 공부하는 방식(오경 겸학, 五經兼學)으로 발전했다. 나아가 금문과 고문 양쪽을 모두 익혀 절충하고 종합하려는 학자들도 등장했는데, 가규와 허신 등이 대표적이다. 후한 말에는 하휴(何休, 129년~182년)가 훈고학적 방법으로 춘추학을 집대성했고, 정현은 참위설까지 포용하며 금문과 고문의 예학(禮學)을 통합하여 이후 위진(魏晋) 시대 경학의 중요한 토대를 마련했다.

4. 2. 비판적 지식인의 등장

국교인 유학이 참위설 등과 결합하며 신비주의적 성격이 깊어지는 가운데, 일부 지식인들은 지배 권력의 의사에 얽매이지 않고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천인감응설이나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한 당시의 지배적인 사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경험과 이성을 중시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비판적 지식인의 흐름은 환담에서 시작되어 왕충, 왕부, 중장통 등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무신론적 관점에서 출발하여, 당시 널리 퍼져 있던 미신적이고 신비주의적인 학설들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특히 왕충은 경험주의와 예리한 이성을 바탕으로 이러한 사상들을 체계적으로 공격했다.
왕부는 그의 저서 《잠부론》(潛夫論)에서 빈부 격차와 같은 사회 문제의 근본 원인을 파헤치고, 유학법가 사상의 관점에서 당대 사회의 모순을 비판했다. 중장통은 《창언》(昌言)이라는 글을 통해, 왕조의 흥망성쇠가 신의 뜻에 따라 결정된다는 식의 신권적인 왕조 순환사관을 비판하며 지배층의 통치 철학에 정면으로 도전했다.[12] 이들 비판적 지식인들의 활동은 당시 사회와 사상계에 새로운 질문을 던지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4. 3. 불교와 도교의 수용

중국으로 불교가 전래된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가장 이른 설은 기원전 2년이며 가장 늦은 설은 67년이다. 이 시기 불교는 붓다를 음역하여 '''부도'''(浮屠)라고 불렸다. 초기에는 주로 상류 계층의 이국적인 취미로 여겨졌으나, 점차 사회 불안이 심화되면서 민중 사이에서도 신자가 증가하여 교단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불교의 '무'(無) 개념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국인들에게는 노장사상의 '무위'(無爲) 개념이 중요한 통로 역할을 했다. 이 과정에서 불교는 노장사상의 영향을 받아 변화하는 모습을 보였고, 반대로 노장사상 역시 불교의 자극을 받아 도교 교단이 성립되는 배경이 되었다.

제11대 환제는 도교에 깊은 관심을 보여 노자에게 여러 차례 제사를 지냈다. 불교와 마찬가지로 도교 역시 사회 불안 속에서 신자를 늘려갔으며, 태평도오두미도라는 두 개의 주요 교단이 형성되었다. 이들 교단은 민간의 질병 치료 등을 통해 신자를 모았으며, 특히 오두미도는 '의사'(義舍)라는 건물을 세워 내부에 식량을 비치하고 무료로 숙박을 제공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황건의 난으로 인해 태평도의 조직은 와해되었으나, 신자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조조의 청주군 등 각지의 군웅 세력에 흡수되었다. 반면 오두미도는 후한 왕조가 멸망한 이후에도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하며 후대의 정일교로 이어졌다.

5. 대외 관계

2세기 후한

5. 1. 북방 민족과의 관계



왕망 정권이 무너진 후, 흉노의 호도이시도고약제선우는 중국에 대해 오만한 태도를 보였고, 북쪽 변방에 대한 침입과 약탈이 더욱 심해졌다. 광무제는 국내를 평정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외국 문제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기에, 이러한 상황에 종종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부노가 새로운 선우로 즉위한 뒤, 흉노에는 가뭄과 메뚜기 피해가 연이어 발생했고, 이는 결국 흉노 인구의 3분의 2가 사망했다고 전해지는 대기근으로 이어졌다. 선우 부노는 이러한 피폐한 상황을 틈타 후한이 공격해 올 것을 우려하여 먼저 화친을 제안했다.

이와 동시에, 흉노의 우유건일축왕이었던 비는 독자적으로 후한과 접촉했다. 건무 24년(48년), 비는 호한야선우라 칭하며 자립하여 남흉노를 건국했다. 이후 남흉노는 후한에 신하로서 복속하였고, 장성 안으로 이주하여 기존의 북흉노와 대립하게 되었다. 한편, 동쪽에서는 오환족이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는데, 건무 25년(49년)에 오환족 역시 후한에 귀순하였다. 광무제는 이들도 장성 안으로 이주시켜 북방의 위협에 대비하도록 했다. 이때 후한은 남흉노와 오환족을 관리하고 보호하기 위해 사흉노중랑장과 호오환교위라는 관직을 설치했다.

후한은 점차 국력이 안정되자 대규모 원정을 감행할 수 있게 되었다. 화제의 영원 원년(89년), 차기장군 두헌이 이끄는 후한과 남흉노 연합군은 북흉노를 공격했다. 2년 뒤에는 북선우를 멀리 우손의 땅까지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로 인해 몽골 고원은 일시적으로 주인이 없는 상태가 되었고, 북방의 위협은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동쪽의 선비족이 점차 세력을 키워 환제 시대에 이르러서는 단석괴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나타나 과거 흉노에 버금가는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 후한은 처음에는 사흉노중랑장 장환을 파견하여 토벌을 시도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다음으로 회유책을 사용했으나 이 역시 통하지 않았다. 결국 단석괴가 살아있는 동안 후한은 선비족에 대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그러나 단석괴 사후 선비족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나면서 세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중평 원년(184년), 후한에서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면서 중국은 삼국 시대라는 혼란기에 접어들었다. 이러한 내란 상황 속에서 북방 민족들은 당시 중국의 여러 권력자들과 협력하거나 중국 문화를 받아들이며 변화를 겪었다. 이 혼란 속에서 부상한 조조는 먼저 남흉노를 자신의 지배하에 두었고, 건안 11년(206년)에는 오환을 토벌했으며, 동시에 선비족도 복속시켰다. 이렇게 북방 민족들은 점차 중국의 지배 질서 안으로 편입되었고, 이러한 상황은 위나라 시대까지 이어지게 된다.

5. 2. 서역과의 관계

전한 시대에 활발했던 서역 경영은 왕망의 실정으로 인해 중단되었고, 후한 건국 이후에도 한동안 재개되지 못했다. 그 사이 서역에서는 사차국이 강성해져 주변 나라들을 복속시키고 흉노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강국으로 성장했다.

건무 14년(38년), 사차왕 현(賢)이 후한에 조공을 바치면서 서역과의 국교가 다시 열렸다. 그러나 후한은 아직 서역을 본격적으로 경영할 여력이 부족하여 서역도호조차 파견하지 못했다. 서역의 여러 나라들이 사차왕 현의 압제에 시달리며 후한에 서역도호 파견을 요청했지만, 후한이 이를 들어주지 못하자 결국 이들은 흉노에 귀부하고 말았다.

후한이 본격적으로 서역 경영에 나선 것은 명제 영평 16년(73년)이었다. 명제는 북흉노를 토벌한 후, 가사마(假司馬) 반초를 서역 여러 나라에 파견하여 서역 경영을 성공적으로 다시 시작했다.

이후 서역에서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새로 서역도호가 된 반초의 활약으로 안정적인 경영이 이루어졌고, 한동안 타림 분지 일대는 후한의 영향력 아래에 놓였다. 또한 반초는 부하 감영을 서쪽으로 더 멀리 파견하여 현재의 시리아 근방까지 도달하게 했다.

연희 9년(166년)에는 대진국왕 안돈(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로 추정)을 자칭하는 사절이 후한의 일남군에 도착하여[6] 로마 제국의 사정이 전해지기도 했다. 이를 통해 당시 후한과 로마 제국 사이에 비록 미약하나마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5. 3. 한반도와의 관계

동쪽으로는 고구려부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들은 왕망 정권 시기 한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으나, 광무제가 후한을 건국하자 관계를 회복하고 조공을 바치기도 했다.

그러나 후한의 중앙 통제력이 점차 약해지면서 고구려는 독자적인 세력 확장에 나섰다. 고구려는 후한의 현도군을 공격하여 서쪽으로 밀어냈으며, 나아가 낙랑군 지역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며 한반도 북부 및 만주 일대에서 패권을 다져나갔다. 이러한 당시 한반도 상황은 후한서 동이전 등의 기록을 통해 엿볼 수 있다.

5. 4. 일본과의 관계

한왜노국왕 금인


후한서 동이전 기록에 따르면, 후한 시대에는 일본 열도의 사람들이 후한과 직접 교섭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유물로 후쿠오카현 시카노시마에서 발견된 "한왜노국왕" 금인이 있다.

6. 역대 황제

묘호시호성명재위연호
1세조광무제유수23년 - 57년건무 25년-56년
건무중원 56년-57년
2현종명제유장57년 - 75년영평 58년-75년
3숙종장제유탑75년 - 88년건초 76년-84년
원화 84년-87년
장화 87년-89년
4목종화제유조88년 - 105년영원 89년-105년
원흥 105년
5 상제유륭105년 - 106년연평 106년
6공종안제유호106년 - 125년영초 107년-113년
원초 114년-120년
영녕 120년-121년
건광 121년-122년
연광 122년-125년
7  유의125년 
8경종순제유보125년 - 144년영건 126년-132년
양가 132년-135년
영화 136년-141년
한안 142년-144년
건강 144년
9 충제유병144년 - 145년영희 145년
10 질제유찬145년 - 146년본초 146년
11위종환제유지146년 - 167년건화 147년-149년
화평 150년
원가 151년-152년
영흥 153년-155년
영수 155년-158년
연희 158년-167년
영강 167년
12 령제유굉168년 - 189년건녕 168년-172년
희평 172년-178년
광화 178년-184년
중평 184년-189년
13  유변189년광희 189년
소녕 189년
14 헌제유협189년 - 220년영한 189년
중평 189년
초평 190년-193년
흥평 194년-195년
건안 196년-220년
연강 220년



대부분의 황제 시호는 머리에 "효(孝)"가 붙지만 (예: 명제의 시호는 "효명황제") 일반적으로 생략하여 표기한다.

참조

[1] 웹사이트 後漢(ごかん)の意味 https://dictionary.g[...] goo国語辞書 2019-12-09
[2] 서적 三國志 文帝紀
[3] 논문 後漢貨幣経済の展開とその特質 早稲田大学 2009-12
[4] 논문 後漢貨幣経済の展開とその特質 早稲田大学 2009-12
[5] 논문 後漢時代における金銭至上主義の台頭
[6] 문서 대진과 안둔에 대한 설명
[7] 문서 신비적인 언어
[8] 문서 금문학자
[9] 문서 비서
[10] 문서 오경박사
[11] 문서 사관 등용
[12] 웹사이트 한·당의 사상 http://donation.enc.[...]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