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와 세이
1. 개요
후와 세이는 일본의 축구 선수이다. 도쿄부립 제5중학교, 제1 와세다 고등학원을 거쳐 와세다 대학 아식 축구부에 재적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축구 일본 대표로 선출되었으나, 출전 기회는 없었다. 와세다 대학 재학 중 전일본 족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과 준우승에 기여했다.
| 이름 | 불파 정 |
|---|---|
| 원어 이름 | 不破 整 |
| 로마자 표기 | Fuwa Sei |
| 출생일 | 1915년경 |
| 출생지 | 도쿄부 |
| 사망일 | 2004년 이전 |
| 신장 | 175cm |
| 체중 | 65kg |
| 포지션 | 골키퍼 |
| 소속팀 | 와세다 대학WMW |
| 국가대표 데뷔 | 1936년 |
| 국가대표 출장 | 0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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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출생 -
패트리샤 엘리스
패트리샤 엘리스는 1932년 영화 데뷔 후 1930년대 할리우드에서 활발히 활동한 미국의 배우로, WAMPAS 베이비 스타에 선정되기도 했으며 21세 은퇴 후에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무대에서 활동했다. -
1910년대 출생 -
준 해벅
준 해벅은 캐나다 출신의 배우, 작가, 연출가로, 보드빌에서 활동을 시작하여 브로드웨이 뮤지컬, 영화, 텔레비전 등 다양한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으며, 2003년 그녀의 이름을 딴 극장이 개관되었고 2010년에 자연사했다. -
1936년 하계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 -
다케우치 데이조
다케우치 데이조는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로 활약하며 1930년 극동 선수권 대회 우승과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일본 첫 승리를 이끌었고, 사후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그의 업적을 기려 '다케우치 데이조상'이 제정되었다. -
1936년 하계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 -
김용식 (축구인)
김용식은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 대한민국 축구 선수, 지도자, 행정가로 활동하며 일본 국가대표로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했고,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 겸 감독으로 런던 올림픽에 출전했으며, 1954년 FIFA 월드컵에서는 감독으로서 대한민국의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끌었고, 은퇴 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을 역임하며 한국 축구 발전에 기여했다. -
일본의 남자 축구 선수 -
교토쿠 고지
교토쿠 고지는 일본의 축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다양한 클럽과 국가대표팀을 지휘하며, 2008년 부탄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남아시아 축구 연맹컵 준결승 진출, 2003년 시미즈 에스펄스 감독으로 J리그컵 준결승과 천황배 준결승 진출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
일본의 남자 축구 선수 -
스가마타 데쓰오
스가마타 데쓰오는 일본의 전 축구 선수로, 수비수로 활약하며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23경기에 출전했고, 히타치 제작소 축구부에서 선수 생활을 하며 1980년과 1982년 일본 사커 리그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는 등 다양한 국제 대회에 출전했다.
2. 선수 경력
후와 세이는 도쿄부립 제5중학교(현 도쿄도립 고이시카와 중등교육학교)를 졸업하고, 제1 와세다 고등학원을 거쳐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여 아식 축구부에서 활동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일본 대표로 선출되었으나, 사노 리헤이에게 주전 자리를 내주며 출전하지 못했다. 1938년과 1939년에는 전일본 족구 선수권 대회(제18회 천황배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 제19회 천황배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와세다 대학의 우승과 준우승에 기여했다. 1941년 봄 태평양 전쟁으로 징집되어 만주에 배속되었다.
2.1. 학창 시절
도쿄부립 제5중학교(현 도쿄도립 고이시카와 중등교육학교)를 졸업하고, 제1 와세다 고등학원을 거쳐 와세다 대학에 입학했다. 아식 축구부에 재적했다。
21세였던 1936년 4월에 베를린 올림픽 일본 대표로 선출되었지만, 같은 와세다 대학의 사노 리헤이가 주전으로 출전했기 때문에 출전 기회는 없었다。
와세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38년에 전일본 족구 선수권 대회(제18회 천황배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 1939년에는 같은 대회(제19회 천황배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준우승했다.
2.2. 베를린 올림픽
후와는 1936년 4월, 21세의 나이로 베를린 올림픽 일본 대표팀 선수로 선발되었다. 그러나 같은 와세다 대학 출신의 사노 리헤이가 주전으로 기용되면서, 후와는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2.3. 천황배
후와는 와세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38년에 전일본 족구 선수권 대회(제18회 천황배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고, 1939년에는 같은 대회(제19회 천황배 전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준우승했다.
3. 징집과 사망
후와는 도쿄부립 제5중학교(현 도쿄도립 고이시카와 중등교육학교)를 졸업하고, 제1 와세다 고등학원을 거쳐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여 아식 축구부에서 활동했다. 1941년 봄, 태평양 전쟁으로 징집되어 만주에 배속되었다.
사망 연도는 불분명하지만, 2004년 3월 시점에서 고인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 후와 사마타는 후에 일본 전보 통신사(현 덴츠)의 전무 이사가 되었다. 그의 형 이키는 1941년 6월 중국 산둥 성에서 전사했다.
4. 가족 관계
아버지는 덴츠의 전무 이사를 지낸 후와 사마타不破 遆일본어이다. 형 이키는 1941년 6월에 중국 산둥성에서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