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 리헤이
1. 개요
사노 리헤이는 1912년 시즈오카현에서 태어난 일본의 축구 선수이다. 와세다 대학교 선수로 활동했으며,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골키퍼로 출전하여 스웨덴과의 경기에서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 이 경기는 "베를린의 기적"으로 불리며, 사노는 이탈리아와의 경기에도 출전했다. 1937년 와세다 대학교 축구부 주장을 역임하고, 1938년 졸업 후 미쓰이 광산에 입사했으나 태평양 전쟁으로 징집되었다. 은퇴 후에는 1956년 멜버른 올림픽 축구 일본 대표팀 코치를 맡았으며, 1992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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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축구 골키퍼 -
마크 슈워처
마크 슈워처는 독일계 호주인 골키퍼로, 호주 국가대표팀에서 109경기에 출전했고, 미들즈브러에서 최다 출전 기록을 세웠으며, 첼시에서 UEFA 챔피언스리그 최고령 출전 기록을, 레스터 시티에서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경험했다. -
남자 축구 골키퍼 -
나이절 마틴
나이절 마틴은 1987년 브리스톨 로버스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하여 크리스털 팰리스, 리즈 유나이티드, 에버턴 등에서 골키퍼로 활약하며 크리스털 팰리스와 리즈 유나이티드 시절 팀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에서 23번의 A매치에 출전한 잉글랜드의 전 축구 선수이다. -
와세다 대학 동문 -
최남선
최남선은 1890년에 태어나 1957년에 사망한 대한민국의 문인이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역사학자이며, 《소년》을 창간하고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여 현대 한국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3·1 운동 독립선언서 기초, 친일 행적, 단군 연구, 《단군론》, 《불함문화론》 저술 등의 활동을 했다. -
와세다 대학 동문 -
김성수 (언론인)
김성수는 인촌이라는 호를 사용한 언론인이자 기업인, 정치인으로, 경성방직 설립, 동아일보 창간, 보성전문학교 인수 및 발전에 기여했으며 제2대 부통령을 역임했으나 친일 논란이 있다. -
1936년 하계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 -
다케우치 데이조
다케우치 데이조는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로 활약하며 1930년 극동 선수권 대회 우승과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일본 첫 승리를 이끌었고, 사후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그의 업적을 기려 '다케우치 데이조상'이 제정되었다. -
1936년 하계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 -
김용식 (축구인)
김용식은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 대한민국 축구 선수, 지도자, 행정가로 활동하며 일본 국가대표로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했고,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 겸 감독으로 런던 올림픽에 출전했으며, 1954년 FIFA 월드컵에서는 감독으로서 대한민국의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끌었고, 은퇴 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을 역임하며 한국 축구 발전에 기여했다.
2. 클럽 경력
사노는 1912년 9월 21일 시즈오카현에서 태어났다. 그는 와세다 대학교 선수와 졸업생들로 구성된 와세다 WMW에서 선수로 뛰었다.
시즈오카 중학교(현 시즈오카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포지셔닝 능력과 민첩한 움직임이 특징인 골키퍼였지만, 공중전이나 몸싸움에 약했다. 당시 일본 국내에서는 키퍼 차지를 반칙으로 간주하지 않았기 때문에, 골키퍼를 고의로 노리는 것이 상투적인 수단이었다. 그 때문에, 와세다 대학교 시절에는 신체 능력이 뛰어난 후와 세이와 병용되거나, 후와가 출전 기회를 얻는 경우가 많았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출전을 위해 유럽의 클럽 팀과 연습 경기를 했을 때, 본고장 유럽에서는 골키퍼에 대한 파울을 엄격하게 적용하고, 심판으로부터 보호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본래의 장점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같은 해 8월 7일 베를린 올림픽 1회전, 스웨덴 대표팀과의 경기에서는 우승 후보를 상대로 선방을 연발하며, "베를린의 기적"의 주역 중 한 명이 되었다. 일본 대표팀에서는 게이오기주쿠 대학의 쓰다 사치오 등의 활약으로 출전은 2경기에 그쳤다.
1937년에는 와세다 대학교 축구부의 주장을 맡았고, 1938년에 대학을 졸업한 후, 미쓰이 광산(현: 일본 코크스 공업)에 입사했다. 1939년 11월에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징집되었다.
3. 국가대표팀 경력
1936년 사노는 와세다 대학 학생이었을 때, 1936년 하계 올림픽 베를린에 출전하는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다. 이 대회에서 8월 4일, 그는 스웨덴을 상대로 데뷔했다. 일본은 스웨덴을 상대로 역전승을 거두었다. 올림픽에서의 일본의 첫 승이자 강호팀을 상대로 거둔 역사적인 승리는 나중에 일본에서 "베를린의 기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2016년, 이 팀은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에 선정되었다. 8월 7일, 그는 이탈리아를 상대로도 경기에 출전했다. 그는 1936년 일본 대표팀으로 2경기에 출전했다.
같은 해 8월 7일 베를린 올림픽 1회전, 스웨덴 대표팀과의 경기에서는 우승 후보를 상대로 선방을 연발하며, "베를린의 기적"의 주역 중 한 명이 되었다. 일본 대표팀에서는 게이오기주쿠 대학의 쓰다 사치오 등의 활약으로 출전은 2경기에 그쳤다.
베를린의 기적 (1936년 올림픽 1라운드 v 스웨덴 8월 4일)
=== 국가대표팀 통계 ===
| 일본 | ||
|---|---|---|
| 연도 | 출전 | 골 |
| 1936 | 2 | 0 |
| |2||0 |
국제 A매치 2경기 0득점 (1936)
=== 출전 대회 ===
| | 개최일 || 개최 도시 || 경기장 || 상대팀 || 결과 || 감독 || 대회 | |||||||
|---|---|---|---|---|---|---|---|
| 1. | 1936년 8월 4일 | 베를린 | 스웨덴 | ○3-2 | 스즈키 시게요시 | 1936년 베를린 올림픽 | |
| 2. | 1936년 8월 7일 | 베를린 | 이탈리아 | ●0-8 | 1936년 베를린 올림픽 |
3.2. 출전 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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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은퇴 이후
1937년에는 와세다 대학교 축구부의 주장을 맡았고, 1938년에 대학을 졸업한 후, 미쓰이 광산(현: 일본 코크스 공업)에 입사했다. 1939년 11월에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징집되었다.
1956년 5월에는 멜버른 올림픽 축구 일본 대표팀의 코치로 취임했다. 그 후 미쓰이 미이케 제작소의 상무 등을 역임했으며, 1992년 3월 26일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