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1년 나환자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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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321년 나환자 공포는 1321년 프랑스와 아라곤 왕국에서 나환자들이 우물에 독을 넣어 기독교인을 살해하려 한다는 음모가 퍼지면서 발생한 사건이다. 프랑스에서는 나환자들이 고문을 받고 유대인과 무슬림의 사주를 받아 음모를 꾸몄다는 자백을 강요받았으며, 필리프 5세는 나환자들을 투옥하고 화형에 처하도록 명령했다. 아라곤 왕국에서도 유사한 공포가 확산되어 나환자들에 대한 체포와 추방, 고문과 처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음모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고, 교황 베네딕토 12세는 나환자들의 무죄를 인정하고 재산 반환을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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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21년 나환자 공포 | |
|---|---|
| 사건 개요 | |
| 사건명 | 1321년 나환자 음모 사건 |
| 발생 시기 | 1321년 |
| 발생 지역 | 프랑스 왕국 |
| 관련 인물 | 프랑스의 나환자, 유대인, 이슬람교도 |
| 음모 내용 | |
| 음모 내용 | 나병을 퍼뜨리기 위한 공모 |
| 사건 배경 | |
| 배경 | 당시 유럽 사회의 나병 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 |
| 사건 전개 | |
| 전개 | 나병 환자들이 우물과 수원지에 독을 풀었다는 혐의로 체포됨 유대인과 이슬람교도들이 나병 환자들을 선동했다는 주장 제기 프랑스 왕 필리프 5세는 나병 환자, 유대인, 이슬람교도에 대한 박해 명령을 내림 |
| 사건 결과 | |
| 결과 | 많은 나병 환자, 유대인, 이슬람교도들이 고문, 처형, 추방 등의 박해를 받음 재산 몰수 및 소각 이 사건으로 인해 사회적 불안과 종교적 갈등이 심화됨 |
| 역사적 평가 | |
| 평가 | 근거 없는 사회적 공포와 편견이 만들어낸 마녀사냥이라는 비판 존재 당시 사회의 소외 계층에 대한 억압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 |
2. 프랑스에서의 나환자 음모 사건
1321년 봄, 남부 프랑스에서 나환자들이 우물과 샘에 독을 풀어 기독교인들을 몰살하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큰 공포를 불러일으켰다.[4] 이 소문은 이전 해에 있었던 목동 십자군 사건과 연관되어 있었는데, 당시 일부 "십자군"은 나환자들이 썩은 빵으로 독을 만들어 우물을 오염시키려 했다고 주장했다.[7]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스 왕 필리프 5세는 소문을 용납하거나 비난할 수 없는 어려운 입장에 처했다. 그는 베르나르 기에게 광범위한 조사를 지시했다.[9]
2. 1. 나환자들에 대한 고문과 자백
1321년 봄, 남부 프랑스에서 나환자들이 우물에 독을 넣어 사람들을 죽이거나 나병에 걸리게 하려 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나환자들에 대한 고문과 강요된 자백이 이어졌다.[4] 1321년 5월 16일, 나환자 요한 드 보스코는 레갈 빌의 관리들에게 알테르크의 나병 환자 수용소 대리인 제랄두스가 가루가 든 자루를 주며 샘과 강에 넣어 그 물을 마시는 사람을 죽이거나 나병에 걸리게 하려 했다고 자백했다.[5]자크 푸르니에(후에 교황 베네딕토 12세로 선출됨) 파미에 주교의 기록에는 1321년 6월 9일 파미에 나환자 수용소 책임자 기욤 아가스의 증언이 담겨 있다. 아가스는 프랑스 전역의 나환자 수용소 대표, 지도자 및 관리 "50~60명"이 모여 그라나다의 무슬림 왕의 도움을 받아 대중을 독살하려 공모했다고 말했다. 수용소 수장들은 '그리스도의 믿음과 그의 법'을 부인하고, 그 대가로 수용소가 봉사하는 지역의 주인이 될 예정이었다고 주장했다.[6]
처음에는 나환자들만이 비난을 받았으나, 이후에는 나환자들이 스페인 무슬림에게 뇌물을 받은 유대인들의 명령을 받고 "유럽의 기독교인들을 독살"하려 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4]
2. 2. 목동 십자군과의 연관성
1320년에 발생한 목동 십자군 사건은 1321년 나환자 음모론이 퍼지게 된 배경 중 하나였다.[7] 목동 십자군은 교황 요한 22세, 프랑스 왕 필리프 5세, 아라곤 왕 하이메 2세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 아라곤 왕국에서 유대인들을 공격했다.[7] 이 과정에서 체포되어 처형된 일부 "십자군"은 나환자 집단 거주지를 약탈하던 중 썩은 빵이 가득 찬 통을 발견했고, 나환자들이 이 빵을 사용하여 우물을 오염시키는 독을 만들려 했다고 주장했다.[7] 1321년의 나환자 박해는 시 당국이 주도했는데, 이는 왕의 특권인 사법권을 침해한 불법적인 행위였다.2. 3. 필리프 5세의 대응과 칙령
필리프 5세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을 때 이 지역을 순방하고 있었는데, 이 소문을 용납하거나 비난할 수 없는 어려운 입장에 처했다. 전자는 더 많은 폭력으로 이어질 것이고, 후자는 그의 권위를 훼손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6월 21일, 필리프는 칙령을 통해 모든 나환자를 투옥하고 고문하여 조사하도록 명령했다. 유죄 판결을 받은 자는 화형에 처해질 예정이었고, 그들의 범죄는 국사범으로 선포되었으므로, 나환자들의 재산은 왕실에 몰수될 예정이었다.[10]많은 지방 영주들이 이미 나환자를 처형하고 재산을 몰수했기 때문에, 필리프 5세는 불행한 상황에 놓였다. 그는 봉건 영주, 성직자, 귀족들에게, 그들이 옛 관습에 따라 나병 환자 수용소를 관리하고 음모자들에 대해 즉각적인 조치를 취할 권리가 있다고 설득당하여, 8월 18일 두 번째 칙령을 통해 그들의 행동을 받아들였다.[10]
3. 아라곤 왕국에서의 나환자 음모 사건
프랑스에서 발각된 나환자 음모에 대한 소식은 빠르게 인접 국가인 아라곤 왕국으로 퍼져나갔다. 하이메 2세는 이 사건과 관련된 소식을 마요르카의 산초 왕에게서 전달받았다.
3. 1. 하이메 2세의 초기 대응
마요르카의 산초 왕은 6월 2일자 서한을 통해 프랑스의 상황을 하이메 2세에게 알렸다. 산초가 하이메 2세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또한 주님께, 아비뇽에서 나환자들이 붙잡혀 고문을 받았고, 그들이 집 밖에 있는 우물과 샘의 모든 물을 독살하려 했다고 자백했다고 합니다. 이 점을 추정해야 합니다. 아비뇽에서는 이미 밖의 샘에서 물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칙령이 내려졌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이 모든 것에 동의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귀하의 존엄하신 분께 이 사실을 알려, 이러한 행위나 유사한 행위로 인해 귀하의 백성에게 해가 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시기를 바랍니다." |
하이메 2세는 이 소식을 듣고 거의 일주일을 숙고했다. 이후 관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정의의 채찍"에서 도망치는 프랑스 나환자들이 이미 그의 영토에서 피난처를 찾고 있다고 언급하며, 유대인에 대한 언급 없이 모든 나환 외국인의 체포와 추방을 명령했다. 그러나 6월 27일, 하이메 2세는 더 가혹한 접근 방식을 택했다. 그는 병든 자들의 압수, 그들의 가루 파괴, 고문을 통한 심문을 명령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사람들을 식별하는 것은 정말 어렵고 불가능하기 때문에" 비나환 외국인의 체포와 추방도 명령했다. 만레사, 에헤아 데 로스 카바예로스, 우에스카, 몽블랑, 타라소나, 바르셀로나에 지역 심문이 설치되었고, 자백한 사람들은 불태워졌다. 나환자 집단은 공격을 받았고, 세르베라의 성 마리아 교회에 부속된 고대 나병 환자 치료소를 포함하여 그들의 재산이 압수되었다.
3. 2. 하이메 2세의 강경 대응
아라곤의 제임스 왕은 이 음모와 관련된 폭력에 대해 거의 즉시 알게 되었다.[1] 마요르카의 산초 왕은 6월 2일자 서한을 통해 프랑스의 상황을 그에게 알렸지만, 제임스는 거의 일주일을 숙고했다. 제임스가 관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정의의 채찍"에서 도망치는 프랑스 나환자들은 이미 그의 영토에서 피난처를 찾고 있었다. 그는 유대인에 대한 언급 없이 모든 나환자 외국인의 체포와 추방을 신중하게 명령했다. 6월 27일까지 제임스는 더 가혹한 접근 방식을 선호하는 쪽으로 마음을 바꿨다.[2] 그는 병든 자들의 압수, 그들의 가루 파괴, 고문을 통한 심문을 명령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사람들을 식별하는 것은 정말 어렵고 불가능하기 때문에" 비나환 외국인의 체포와 추방도 명령했다.[2] 만레사, 에헤아데로스카바예로스, 우에스카, 몽블랑, 타라소나, 바르셀로나에 지역 심문이 설치되었다. 자백한 사람들은 불태워졌다.[1] 나환자 집단이 공격을 받고 세르베라의 성 마리아 교회에 부속된 고대 나병 환자 치료소를 포함하여 그들의 재산이 압수되었다.[2]3. 3. 나병 진단과 의사 아마노나트의 사례
나환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은 경험이 풍부한 의사보다는 겁에 질린 일반인들에 의해 검사를 받고 질병 진단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1322년, 공포가 있은 지 1년 후, 아마노나트라는 의사가 가스코뉴에서 아라곤으로 이주하기로 결정했지만, 우에스카에서 체포되어 물을 독살하려는 나환자 혐의를 받았다. 그 의사는 제임스 왕의 아들 알폰스에게 호소했고, 알폰스는 그가 감염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해준 지역 의사들의 검진을 받도록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겁에 질린 아마노나트는 아라곤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이 사건은 나병에 대한 의학적 진단을 촉진하는 데 도움이 된 많은 사건 중 하나였을 것이다.4. 사건의 여파와 진실 규명 노력
1321년 프랑스에서 나환자 박해가 일어난 직후, 나환자 음모가 실제로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유대인에 대한 박해는 계속되었지만, 나환자가 식수를 오염시켰다는 주장은 점차 회의적으로 다루어졌고, 공식 기록에는 '~라고 한다'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했다. 1338년, 교황 베네딕토 12세는 툴루즈의 나환자들의 재산 반환 요청에 대한 교서를 발표했는데, 교황은 나환자들이 이미 법정에서 무죄를 인정받았다고 언급했다. 이 교황은 20년 전 아가사를 심문했던 조사관 중 한 명인 자크 푸르니에였다.[11]
4. 1. 리모주 나환자들의 석방
1321년 프랑스에서 나환자 박해가 일어난 직후인 1321년 6월, 7월, 8월에 나환자 음모가 실제로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왕의 칙령에 따라 8월 27일에 낙인찍혀 감금되었던 리모주의 나환자들은, 원래 영구적인 감금을 의도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달 만에 석방되었다. 최초의 혐의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11]4. 2. 공식 기록의 변화와 회의론 확산
1321년 프랑스에서 나환자 박해가 일어난 직후인 그해 6월, 7월, 8월에 나환자 음모가 실제로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왕의 칙령에 따라 8월 27일에 낙인찍혀 감금되었던 리모주의 나환자들은 원래 영구적인 감금을 의도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달 만에 석방되었다. 최초의 혐의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한 것이다. 유대인에 대한 박해는 계속되었지만, 나환자가 식수를 오염시켰다는 언급은 점차 더 회의적으로 다루어졌고, 공식 기록에는 '~라고 한다'라는 문구가 더 자주 나타났다. 1338년, 교황 베네딕토 12세는 음모 당시 압수된 재산과 토지를 포함한 재산 반환을 돕기 위한 툴루즈의 나환자들의 간청에 응답하여 교서를 발표했다. 교황은 나환자들이 이미 법정에서 그들이 혐의를 받은 범죄에 대해 '무죄'로 인정받았으며, 따라서 정식으로 배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 이 교황은 20년 전 아가사를 심문했던 조사관 중 한 명이었던 자크 푸르니에였다.[11]4. 3. 교황 베네딕토 12세의 교서
교황 베네딕토 12세는 1338년에 교서를 발표하여, 음모 당시 압수된 재산을 툴루즈 나환자들에게 반환하도록 도왔다. 교황은 나환자들이 이미 법정에서 혐의에 대해 '무죄'로 인정받았으며, 따라서 정식으로 배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 베네딕토 12세는 20년 전 아가사를 심문했던 조사관 중 한 명인 자크 푸르니에였다.[11]참조
[1]
서적
Medicine Before the Plague: Practitioners and Their Patients in the Crown of Aragon, 1285–1345
Cambridge University Press
[2]
서적
Leprosy in Medieval England
Boydell
[3]
논문
Medieval leprosy reconsidered
2006
[4]
서적
A History of the Jews: From the Babylonian Exile to the End of World War II
Jewish Publication Society of America
[5]
서적
Communities of violence : persecution of minorities in the Middle Ages
Princeton University Press
[6]
논문
Lepers, Jews and Moslems: The Plot to Overthrow Christendom in 1321
[7]
서적
The Great Famine: Northern Europe in the early Fourteenth Century
Princeton University Press
[8]
서적
Communities of Violence: Persecution of Minorities in the Middle Ages
Princeton University Press
[9]
서적
The Science of Conjecture: Evidence and Probability Before Pascal
Taylor & Francis
[10]
논문
Lepers,Jews and Moslems: The Plot to Overthrow Christendom in 1321
[11]
서적
Ecstasies deciphering the witches' Sabbath
https://archive.org/[...]
Pantheon Books
1991
[12]
서적
Medicine Before the Plague: Practitioners and Their Patients in the Crown of Aragon, 1285–1345
https://archive.org/[...]
Cambridge University Press
[13]
서적
A History of the Jews: From the Babylonian Exile to the End of World War II
https://archive.org/[...]
Jewish Publication Society of Ame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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