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7년 헝가리 전역
1. 개요
1527년 헝가리 전역은 모하치 전투 이후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에서 철수한 틈을 타, 페르디난트 1세가 헝가리 국왕으로서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시작한 군사 작전을 의미한다. 페르디난트 1세는 1527년 서포여이 야노시를 몰아내고 1528년까지 부더, 죄르, 코마롬, 에스테르곰, 세케슈페헤르바르를 점령했다. 헝가리 왕위 계승 분쟁과 내전으로 이어졌고, 헝가리는 페르디난트 1세의 헝가리, 서포여이의 동부 헝가리 왕국, 오스만령 헝가리로 분할되었다. 이후 쉴레이만 1세의 반격으로 페르디난트 1세가 점령한 영토 대부분이 오스만 제국에 넘어갔고, 빈 공방전으로 이어졌다.
| 분쟁 명칭 | 페르디난트 1세의 헝가리 장악 |
|---|---|
| 분쟁 시기 | 1527년~1528년 |
| 분쟁 장소 | 헝가리 |
| 분쟁 결과 | 합스부르크가의 승리 |
| 분쟁의 일부 | 오스만-합스부르크 전쟁 |
| 교전국 1 | 보헤미아 왕국 |
|---|---|
| 교전국 2 |
| 교전국 1 지휘관 | 페르디난트 1세 조반 네나드 요한 카치아네르 |
|---|---|
| 교전국 2 지휘관 | 페트루 라레스 |
| 전투 목록 | 설뢰시 쇠드펄버 털찰 시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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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8년 분쟁 -
나폴리 공성전 (1528년)
1528년 나폴리 공성전은 프랑스가 나폴리 왕국을 점령하려 했으나 앙드레아 도리아의 변절과 전염병으로 패배하며 프랑스의 이탈리아 정책에 차질을 빚고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강화시킨 군사 작전이다. -
1527년 분쟁 -
로마 약탈 (1527년)
1527년 5월 6일, 코냑 동맹 전쟁의 결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군대가 로마를 침공하여 약탈한 로마 약탈은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 로마를 궤멸시키고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종말을 가져왔으며, 교황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이탈리아를 카를 5세의 영향력 아래 두게 되었다. -
페르디난트 1세 (신성 로마 황제) -
세상이 망할지라도 정의를 행하라
세상이 망할지라도 정의를 행하라는 정의를 옹호하는 격언으로, 다양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나타나 사회에 긍정적, 부정적 영향을 미치며 관련 논쟁이 존재한다. -
페르디난트 1세 (신성 로마 황제) -
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 (1526년~1568년)
16세기 합스부르크 왕가와 오스만 제국 간의 전쟁인 오스트리아-튀르크 전쟁(1526년~1568년)은 헝가리 영토 분쟁을 배경으로 헝가리 분열, 오스만 제국의 서유럽 진출 시도, 유럽 열강 외교 관계 변화 등의 영향을 미치며 에디르네 조약으로 종결되었다.
2. 전개
모하치 전투 이후 헝가리 왕위를 둘러싼 분쟁은 합스부르크 가문과 오스만 제국 간의 갈등으로 이어졌고, 헝가리 내부 분열을 심화시켰다. 오스만 군대가 헝가리에서 철수하자, 페르디난트 1세는 헝가리 왕위를 차지하고자 서포여이 야노시를 몰아내고 여러 도시를 점령하는 등 군사 작전을 개시했다.
헝가리 루이 2세가 사망하고 오스만군이 부더 시를 포위 공격하면서, 헝가리는 내전 상황에 돌입했다. 헝가리는 페르디난트 1세, 서포여이, 오스만 제국 세력으로 나뉘어 대립했다. 서포여이 측은 영지 의회의 결정을, 페르디난트 1세 측은 제1차 빈 회의에서 확인된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혈연 관계를 명분으로 내세웠다.
2.1. 헝가리 왕위 계승 분쟁
모하치 전투 이후 오스만 제국은 제국 내 다른 지역 상황에 집중하기 위해 헝가리에서 군대를 철수하였다. 오스만 군대가 철수한 틈을 타 페르디난트 1세는 헝가리 국왕으로서의 지위를 굳히기 위해 공격을 시작했다. 1527년 페르디난트 1세는 오스만 제국의 신하인 서포여이 야노시를 몰아내고, 이듬해인 1528년까지 부더, 죄르, 코마롬, 에스테르곰, 세케슈페헤르바르를 점령했다. 이때 오스만 제국의 술탄 쉴레이만 대제는 서포여이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2.2. 헝가리 내전
모하치 전투 이후 오스만 제국은 다른 지역의 문제에 집중하기 위해 헝가리에서 군대를 철수하였다. 오스만군이 철수하자, 페르디난트 1세는 이 기회를 틈타 헝가리 국왕으로서의 지위를 굳히기 위한 군사 작전을 시작했다. 1527년 페르디난트 1세는 오스만 제국의 가신인 서포여이 야노시를 몰아내고, 1528년까지 부더, 죄르, 코마롬, 에스테르곰, 세케슈페헤르바르를 점령했다. 쉴레이만 대제는 서포여이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이 시점에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후 헝가리의 루이 2세가 사망하고 오스만군이 부더를 포위하면서 헝가리 내전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 헝가리는 페르디난트 1세의 헝가리, 서포여이의 동부 헝가리 왕국(서포여이 왕국), 오스만령 헝가리의 세 지역으로 나뉘었다. 서포여이 측은 영지 의회의 결정을 자신들의 정당성의 근거로 삼은 반면, 페르디난트 1세 측은 제1차 빈 회의에서 아르파드 왕조와 합스부르크 가문 사이의 혈연 관계가 확인되었으므로 헝가리를 다스릴 정당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