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파드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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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파드 왕조는 9세기부터 1301년까지 헝가리를 다스린 왕조이다. 이 왕조는 헝가리 대공 알모스에서 시작되어 헝가리 왕국의 건국을 이끌었으며, 1301년 마지막 국왕 헝가리의 언드라시 3세의 사망으로 단절되었다. 아르파드 왕조는 헝가리 역사에서 중요한 시기를 이끌었으며, 이슈트반 1세, 라슬로 1세 등 여러 성인을 배출하여 "성스러운 왕의 혈통"으로 불렸다.
아르파드 왕조의 역사는 9세기 말, 마자르족이 알모스와 그의 아들 아르파드의 지도 아래 카르파티아 분지를 정복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헝가리 대공국을 세우고 주변 지역으로 활발히 진출했으나, 10세기 중반 레흐펠트 전투 패배 이후 정착 생활로 전환하게 된다.
아르파드 왕조의 군주들은 초기 헝가리 대공 시대와 1000년 이슈트반 1세의 기독교 개종 및 헝가리 왕국 건국 이후의 왕 시대로 나눌 수 있다. 895년경 아르파드가 헝가리인을 이끌고 판노니아 평원에 정착한 이후부터 1301년 언드라시 3세의 사망으로 남계 후손이 단절될 때까지 왕조가 이어졌다. 일부 군주는 할리치-볼히니아 지역의 통치자를 겸하기도 했다.
2. 역사
게자 대공 시기부터 서방과의 교류를 모색하며 기독교 수용의 기반을 마련했고, 그의 아들 이슈트반 1세는 1000년 혹은 1001년에 헝가리 왕국을 건국하고 초대 국왕이 되었다. 이슈트반 1세는 기독교를 국교로 삼고 국가 체제를 정비하여 중세 헝가리의 기틀을 다졌다.
이후 약 3세기 동안 아르파드 왕조는 헝가리를 통치하며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부 갈등, 신성 로마 제국 및 비잔틴 제국과의 관계, 크로아티아 병합 등 영토 확장, 귀족 세력과의 대립 등 다양한 역사적 사건을 겪었다. 특히 앤드루 2세 시대에는 귀족들의 요구로 왕권 제한 내용을 담은 1222년 금인칙서가 반포되었고, 벨라 4세 때는 몽골의 침략으로 국토가 황폐화되는 큰 위기를 맞기도 했다.
13세기 후반, 라슬로 4세의 혼란스러운 통치를 거치며 왕권은 더욱 약화되었고, 귀족들의 세력이 강성해졌다. 결국 1301년, 앤드루 3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아르파드 왕조의 남계는 단절되었고, 헝가리는 새로운 왕조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2. 1. 기원
최근 Y-STR 및 Y-SNP 고고유전학 연구에 따르면, 아르파드 왕조의 남성 계통은 Y-염색체 하플로그룹 R1a의 희귀한 하위 분류인 R-Z2125 > R-Z2123 > R-Y2632 > R-Y2633 > R1a-SUR51에 속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왕조의 후손인 헝가리의 벨라 3세와 세케슈페헤르바르 왕립 대성당에서 발견된 신원 미상의 아르파드 가문 구성원("II/52" / "HU52") 유골 분석을 통해 확인되었다.[5][6]
이 하위 분류는 현재 러시아 바슈코르토스탄 공화국의 부르잔스키 구 및 압젤릴로프스키 구에 거주하는 48명의 바시키르인과 세르비아 보이보디나 지역의 한 개인에게서도 발견되었다. 아르파드 가문 구성원과 이 세르비아 개인은 추가적인 고유 단일 핵산 염기 다형성(SNP)을 공유하여 새로운 하위 분류인 R1a-SUR51 > R-ARP를 형성한다. 또한, 언급된 세르비아 개인은 추가적인 고유 SNP를 가져 중세 아르파드 가문에서 약 900년 전에 분화되어 R-ARP > R-UVD를 형성한 것으로 추정된다.[5][6]
R-Y2633 하위 분류의 분포, 출현 시기, 응집 추정 데이터를 바탕으로, 이 계통은 약 4500년 전 북부 아프가니스탄 인근 지역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볼가-우랄 지역의 가장 가까운 친족으로 여겨지는 바시키르인과의 분리 시기는 약 2000년 전으로 추정된다.[6] 헝가리인과 바시키르인 사이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하플로그룹인 N-B539의 분리 시기 또한 약 2000년 전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헝가리인의 조상이 약 2000년 전에 볼가-우랄 지역을 떠나 카르파티아 분지의 헝가리 정복으로 이어지는 이주를 시작했음을 시사한다.[6][7][8]
2. 2. 9세기와 10세기
중세 연대기 작가들은 아르파드 왕조의 조상이 고대 헝가리어로 "거룩한"을 의미하는 ''igy''에서 유래한 위에게크라고 기록했다.[9] 케자의 시몬이 쓴 "훈족과 헝가리인의 업적"(''Gesta Hunnorum et Hungarorum'')은 아르파드 왕조가 투룰 씨족에서 유래했다고 언급했으며,[10] 아노니무스가 쓴 "헝가리인의 업적"(''Gesta Hungarorum'')은 아르파드 왕조의 토템 조상이 ''투룰''(매, 아마도 송골매)이었다고 기록했다.[10][11][12] 케자의 시몬은 아르파드를 "엘뢰드의 아들이자 위에게크의 아들인 알모스의 아들이며, 투룰 씨족 출신으로, 부와 전쟁에서 더 강력했다"고 묘사했다.[13] 또한 그는 게자 공작 역시 투룰 씨족 출신이며, 기독교 신앙과 세례를 받은 최초의 헝가리인 중 하나였다고 덧붙였다.[14]
중세 연대기에는 아르파드 왕조가 훈족의 왕 아틸라의 후손이라는 전승도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게스타 헝가로룸"의 익명 저자는 아르파드가 "다뉴브 강과 티사 강 사이의 땅은 나의 조상인 강력한 아틸라의 소유였다"고 말했다고 적었다.[15]
아르파드 왕조 구성원 중 동시대 기록에서 처음 언급된 인물은 알모스이다. 비잔틴 황제 콘스탄티누스 7세는 그의 저서 "제국 통치에 관하여"(''De Administrando Imperio'')에서 알모스가 일곱 마자르 부족 연맹의 첫 번째 대공(''megas Turkias arkhon'')이었다고 기록했다.[16] 알모스는 초기에는 하자르 카간의 지배를 받았을 가능성이 있으나, 862년경 마자르 부족 연맹은 하자르로부터 독립했다.[17] 알모스는 부족 연맹의 영적 지도자인 ''켄데'' 또는 군사 지휘관인 ''귈라''였을 것으로 추정된다.[18]
헝가리인들은 862년부터 895년 사이에 장기간에 걸쳐 계획적으로 카르파티아 분지를 점령했다.[19][20] 헝가리 대공국의 신성한 지도자로 여겨졌던 알모스는 판노니아에 도달하기 전 트란실바니아에서 희생 의식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21][22]
알모스의 아들 아르파드가 그의 뒤를 이은 것으로 여겨지며, 899년부터 970년까지 마자르족은 현재의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스페인 영토와 비잔틴 제국 영토를 빈번하게 약탈했다.[23] 이러한 서쪽으로의 약탈은 955년 레흐펠트 전투에서 독일 왕 오토 1세에게 대패하면서 중단되었고, 비잔틴 제국에 대한 약탈은 970년에 끝났다.[24]
917년 이후 마자르족이 여러 지역을 동시에 약탈한 것은 부족 연맹이 해체되기 시작했음을 시사할 수 있다.[25] 기록에 따르면 당시 부족 연맹 내에는 최소 3개에서 최대 5개의 부족 집단이 있었으며, 그중 아르파드 왕조가 직접 통솔한 것은 하나뿐이었다.[26]
10세기 전반기 마자르 대공의 계보는 불분명한데, 이는 중앙 집권적인 통치 체제가 부족했음을 보여줄 수 있다.[27] 중세 연대기는 아르파드의 뒤를 아들 졸탄이 이었다고 기록하지만, 동시대 자료에서는 950년경 대공 파이즈만이 언급된다.[28] 레흐펠트 전투 패배 이후 대공 타코소니(955년 또는 그 이후 ~ 972년 이전)는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고립 정책을 펼쳤다.[29]
타코소니의 아들인 대공 게자(972년 이전 ~ 997년)는 아버지와 달리 서방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여 973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1세에게 사절을 보냈을 가능성이 있다.[29] 게자는 972년에 세례를 받았으나, 독실한 기독교 신자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기독교 신앙이 헝가리인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했다.[30] 그는 다뉴브 강과 가람 강(오늘날 슬로바키아의 ''흐론'') 서쪽 지역까지 지배력을 확장했지만, 카르파티아 분지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지역 부족 지도자들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31]
게자의 뒤를 이은 아들 이슈트반(원래 이름은 바이크)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32] 이슈트반은 마자르의 전통적인 계승 방식인 장의 계승을 내세워 게자의 자리를 노린 친척 코파니의 도전에 직면했다.[33] 이슈트반은 아내인 바이에른의 기젤라가 데려온 독일 기사들의 도움으로 코파니를 물리치고 권력을 공고히 했다.[34]
2. 3. 11세기
대공 이슈트반은 1000년 12월 25일 혹은 1001년 1월 1일에 대관식을 치르고 초대 헝가리 왕(재위 1000년–1038년)이 되어 헝가리 왕국을 세웠다.[35][36] 그는 1030년까지 카르파티아 분지를 통일하였으며, 흑마자르족의 영토와 프로쿠이, 아이토니 등 반독립적인 지역 지도자들이 다스리던 지역을 정복했다.[37][38] 이슈트반 1세는 코미타투스를 기반으로 한 행정 체계를 도입하고, 2개의 대주교구와 다수의 주교구로 이루어진 교회 조직을 세웠다.[39]
1031년 9월 2일 아들 에머리크가 사망하자, 이슈트반 1세는 조카인 베네치아 출신 페테르 오르세올로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이는 사촌 바줄 공작의 반발을 샀고, 바줄은 니트라에서 투옥된 후 이슈트반 1세의 명으로 두 눈을 잃었다. 바줄의 세 아들 레벤테, 안드라스, 벨라는 국외로 추방되었다.[40][41]
이슈트반 1세가 1038년 8월 15일에 사망한 후 페테르 오르세올로가 왕위를 이었으나, 이슈트반 1세의 매형인 사무엘 아바(재위 1041년–1044년)와 왕위를 두고 다투었다.[42] 페테르의 통치는 1046년 대규모 이교도 반란으로 막을 내렸다.[43]
이교도들의 지지를 얻어, 키예프 루스로 추방되었던 바줄의 아들 안드라스가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다(재위 1046년–1060년). 이로써 아르파드 왕조의 방계가 왕위를 잇게 되었다.[44][45] 안드라스 1세는 이교도 반란을 진압하고 기독교의 지위를 회복시켰다.[46] 1048년 안드라스 1세는 동생 벨라를 불러들여 왕국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영지(테르치아 파르스 레그니, 공작령)를 분봉령으로 주었다.[47] 이러한 왕국의 분할 통치 방식은 ''연대기 그림''에서 prima regni huius divisiola라고 처음 언급되었으며,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아르파드 왕족들이 왕국의 일부를 다스리는 형태로 여러 차례 나타났다.[48] 11세기 공작령은 별도의 지방을 이루기보다는 두세 개의 중심지를 축으로 조직되었다.[47] 공작령을 다스리는 왕족(공작)들은 헝가리 왕의 권위를 인정했지만, 벨라, 게저, 알모스 등 일부는 왕위를 노리고 반란을 일으키거나 주변국과 동맹을 맺기도 했다.[49]
안드라스 1세는 아들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1057년 생전에 대관식을 치렀는데, 이는 헝가리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50] 하지만 장자 상속 원칙은 당시의 종주 상속(형제 상속) 관습을 넘어서지 못했고, 안드라스 1세 사후 동생 벨라 1세(재위 1060년–1063년)가 어린 솔로몬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다.[51]
1063년부터 1080년까지 솔로몬 왕(1057년–1080년)과 공작령을 통치하던 그의 사촌 게저, 라슬로, 람페르트 사이에는 빈번한 갈등이 있었다.[52] 게저 공작은 1074년에 사촌에게 반란을 일으켰고, 종주 상속 원칙에 따라 그의 지지자들에 의해 왕으로 선포되었다.[53] 게저 1세 왕(재위 1074년-1077년)이 1077년 4월 25일 사망하자, 그의 지지자들은 어린 아들을 무시하고 그의 동생 라슬로를 왕으로 선포했다.[54][47]
라슬로 1세 왕(재위 1077년–1095년)은 일부 서부 군에서 통치하고 있던 솔로몬 왕을 설득하여 왕위를 포기하도록 했다.[55]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헝가리 왕국은 강화되었고 라슬로 1세는 인접한 크로아티아 왕국 (1091)을 정복하여 지배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56] 그는 새로 점령한 영토의 통치를 조카인 알모스에게 위임했다.[57]
1083년 8월 20일, 왕조의 두 구성원인 이슈트반 1세 왕과 그의 아들 에머리크 공작은 라슬로 1세 왕의 주도로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시성되었다.[58][59] 그의 딸 이레네는 비잔티움 제국 황제 요안니스 2세 콤니노스의 아내로서 동방 정교회에서 존경받고 있다.[60]
라슬로 1세 왕이 사망하자, 그의 조카인 칼만이 왕으로 선포되었지만(재위 1095년–1116년), 그는 동생 알모스에게 ''테르치아 파르스 레그니''(공작령)를 분봉령으로 양도해야 했다.[61] 칼만 왕은 고즈드 산 전투 (1097)에서 페타르 스나치치가 이끄는 크로아티아군을 격파하고 1102년 비오그라드에서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의 왕으로 대관했다.
2. 4. 12세기
콜로만 왕은 1107년 동생 알모스에게서 공작령(''Tercia pars regni'')을 빼앗았다.[62] 그는 두 번째 아내 키예프의 에우페미아가 간통한 것을 알게 되자 이혼하고 1114년경 키예프 루스로 돌려보냈다.[63] 에우페미아는 키예프에서 보리스라는 아들을 낳았으나, 콜로만은 그를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다.[64] 1115년경, 콜로만은 자신의 아들 이슈트반 2세(1116년–1131년 재위)의 왕위 계승을 확실히 하기 위해 공작 알모스와 알모스의 아들 벨라의 눈을 멀게 했다.[47]
이슈트반 2세는 아들이 없었기에 누이의 아들인 사울을 눈먼 공작 벨라 대신 후계자로 지명했다.[65] 그러나 이슈트반 2세가 1131년 3월 1일에 사망하자, 눈먼 사촌 벨라가 왕위에 올랐다.[66] 벨라 2세(1131년–1141년 재위)는 콜로만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며 외국 군대의 지원을 받아 왕위를 노린 보리스 칼라머노스를 격파하며 통치를 강화했다.[67] 벨라 2세는 보스니아 일부 지역을 점령하고, 어린 아들 라슬로에게 새로운 영토를 공작령으로 주었다.[68] 이후 아르파드 왕조의 왕족들은 전통적인 공작령(''Tercia pars regni'') 대신 슬라보니아나 트란실바니아와 같은 왕국의 남부 또는 동부 지역을 다스렸다.[47]
게자 2세(1141년–1162년 재위) 시대에는 프라이징의 오토 주교가 헝가리인들이 "군주에게 너무 순종적이어서 공개적인 반대는 물론, 은밀한 속삭임으로 불쾌하게 하는 것조차 중죄로 여긴다"고 기록할 정도로 왕권이 강했다.[69] 게자 2세의 아들 이슈트반 3세(1162년–1172년 재위)는 왕위를 지키기 위해 삼촌들과 싸워야 했다. 비잔틴 제국의 지원을 받은 라슬로 2세(1162년–1163년 재위)와 이슈트반 4세(1163년–1165년 재위)가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70] 이 시기 비잔틴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노스는 이슈트반 3세의 동생 벨라(비잔틴 궁정에서는 '데스포테스 알렉시우스'로 불림)가 자신의 궁정에 있다는 것을 빌미로 헝가리 왕국의 남부 지역을 점령했다.[71] 벨라는 마누엘 1세의 외동딸과 약혼하여 잠시(1165년–1169년) 비잔틴 제국의 추정 상속인이 되기도 했다.[72]
이슈트반 3세가 사망한 후, 동생 벨라 3세(1173년–1196년 재위)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자신의 통치를 안정시키기 위해 형제인 게자를 감옥에 가두었다.[73] 비잔틴 제국에서 교육을 받은 벨라 3세는 "이중 십자"를 헝가리 왕국의 상징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첫 번째 왕이다.[74] 1188년, 벨라 3세는 보야르들에 의해 공작이 쫓겨난 갈리치를 점령하고, 둘째 아들 언드라시에게 공국을 맡겼다. 하지만 언드라시의 통치는 인기를 얻지 못했고, 1189년 헝가리 군대는 갈리치에서 철수해야 했다.[75]
1192년 6월 27일, 아르파드 왕조 출신의 라슬로 1세 왕이 바라드(현재 루마니아의 오라데아)에서 시성되었다.[76]
벨라 3세는 왕국을 장남 임레(1196년–1204년 재위)에게 온전히 물려주었으나, 임레는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동생 언드라시에게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를 공작령으로 나누어 주어야 했다.[77]
2. 5. 13세기
13세기는 아르파드 왕조에게 내부 갈등과 외부 침략으로 인한 격동의 시기였다. 임레 (1196–1204)는 바르셀로나 가문 출신의 아라곤의 콘스탄스와 결혼했으며, 아르파드 왕조의 상징이 될 문장을 채택할 때 카탈루냐의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이 문장은 8개의 빨강과 은색 가로줄무늬로 이루어진 방패 형태였다.[78] 임레의 아들 라슬로 3세 (1204–1205)가 어린 나이에 사망하자, 그의 삼촌인 앤드루 2세 (1205–1235)가 왕위를 계승했다.[79]
앤드루 2세의 통치는 끊임없는 내부 갈등으로 특징지어진다. 귀족들의 음모로 왕비 메라니아의 게르트루드가 암살당했고(1213), 불만을 품은 귀족들은 왕에게 1222년 금인칙서 발행을 강요하여 자신들의 권리를 보장받았다. 이 금인칙서에는 왕에게 복종하지 않을 권리까지 포함되어 왕권 약화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한, 앤드루 2세는 왕실 영지를 되찾으려 한 맏아들 벨라와도 갈등을 겪었다.[80] 앤드루 2세는 과거 할리치 공작(1188–1189)이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공국의 내부 문제에 자주 개입했으며, 자신의 아들들(콜로만, 앤드루)을 할리치의 통치자로 세우려 여러 차례 시도했다(1188–1189, 1208–1209, 1214–1219, 1227–1229, 1231–1234).[81] 그의 딸 엘리자베스는 그의 생전인 1235년 7월 1일에 성인으로 추대되어 아르파드 왕조의 네 번째 성인이 되었다.[82] 앤드루 2세 사후, 그의 맏아들들은 그의 사후에 태어난 아들 스티븐을 인정하지 않았고, 스티븐은 페라라에서 교육받았다.[83]
벨라 4세 (1235–1270)는 아버지 시대에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려 노력했지만, 그의 통치 초기에 몽골의 침략 (1241–1242)으로 왕국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84] 몽골군이 물러간 후, 벨라 4세는 국가 재건에 힘썼다. 그는 여러 곳에 요새를 건설하거나 강화하도록 명령했으며[85], 부다, 나지솜바트(오늘날 슬로바키아의 트르나바), 셀메츠바냐(현재 슬로바키아의 반스카 슈티아브니차), 페슈트 등 여러 도시에 도시 특권을 부여하여 도시 발전을 장려했다.[86]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벨라 4세는 슈타이어 공국을 잠시 점령(1254–1260)했으나 보헤미아의 오토카르 2세에게 빼앗겼고[87], 말년에는 아들 스티븐과의 갈등으로 왕국의 동부 지역을 아들에게 넘겨주어야 했다.[83] 벨라 4세의 딸 중 마가렛과 킹가는 후에 성인으로 추대되었고(각각 1943년, 1999년)[88][89], 욜란다는 복녀로 추대되었다(1827년).[88][89] 또 다른 딸 콘스탄스는 리비우에서 존경받았다.[90]
스티븐 5세 (1270–1272)가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 벨라 4세의 지지자 상당수가 보헤미아로 망명했다.[91] 그의 아들 쿠만족의 라슬로 4세 (1272–1290)의 통치 기간 동안 이들은 돌아왔지만, 라슬로 4세의 시대 역시 귀족 파벌 간의 끊임없는 내부 갈등으로 점철되었다.[92] 어머니가 쿠만족 출신이었던 라슬로 4세는 유목민 생활 방식을 유지하던 쿠만족을 가까이하여 기독교 귀족들과 갈등을 빚었고, 여러 차례 파문당했다. 결국 그는 쿠만족 암살자들에게 살해당했다.[93]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여러 귀족들이 왕실 영지를 차지하려 하면서 왕국의 분열이 가속화되었다.[94]
라슬로 4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많은 사람들은 아르파드 왕조가 끝났다고 여겼다. 유일하게 남은 부계 후손인 앤드루는 앤드루 2세의 사후 아들인 스테판 공작의 아들로, 그의 정통성에 의문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95]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네치아인" 앤드루는 헝가리의 성스러운 왕관으로 즉위했고(1290–1301), 대부분의 귀족들이 그의 통치를 인정했다.[96] 앤드루 3세는 차크 가문이나 쾨쇠기 가문과 같은 강력한 귀족들과 맞서 싸워야 했다.[97] 1301년 1월 14일, 앤드루 3세가 사망하면서 아르파드 왕조의 남계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마지막 황금 가지'"라고 불렀다.[98] 아르파드 가문의 마지막 구성원인 그의 딸 엘리자베스는 1338년 5월 6일에 사망했으며, 그녀는 존경받는 인물이다.[99]
앤드루 3세의 죽음 이후, 여러 인물들이 왕위를 놓고 경쟁하는 혼란기가 시작되었으나, 결국 스티븐 5세의 외손자인 찰스 1세가 1310년경 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100] 이후 마차시 코르비누스 왕을 제외한 모든 헝가리 왕들은 아르파드 왕조의 모계 또는 방계 후손들이었다. 비록 부계 아르파드 왕조는 막을 내렸지만, 그 혈통은 유럽의 여러 귀족 가문을 통해 이어지고 있다.
3. 역대 군주
자세한 군주 목록은 아래를 참고하라.
3. 1. 헝가리 대공
아르파드의 손자인 탁쇼니 이전까지는 아르파드의 혈통을 이은 가장 나이가 많은 남자가 대공 자리를 계승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선대 대공의 장남이 자리를 잇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변화 때문에 아르파드와 탁쇼니 사이의 대공 계승은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특히 아르파드의 막내아들이자 탁쇼니의 아버지인 졸트의 재위는 기독교화 이후에 기록된 것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3. 2. 헝가리 왕
wikitext왕 | 별칭 | 재위 기간 |
---|---|---|
이슈트반 1세 | 성왕 | 997년 – 1038년 |
페테르 | 1038년 – 1041년 | |
사무엘 | 1041년 – 1044년 | |
페테르 | (복위) | 1044년 – 1046년 |
언드라시 1세 | 1046년 – 1060년 | |
벨라 1세 | 1060년 – 1063년 | |
살라몬 | 1063년 – 1074년 | |
게저 1세 | 1074년 – 1077년 | |
러슬로 1세 | 성왕 | 1077년 – 1095년 |
칼만 | 문인왕 | 1095년 – 1116년 |
이슈트반 2세 | 1116년 – 1131년 | |
벨라 2세 | 맹목왕 | 1131년 – 1141년 |
게저 2세 | 1141년 – 1162년 | |
이슈트반 3세 | 1162년 – 1172년 | |
러슬로 2세 | 대립왕 | 1162년 – 1163년 |
이슈트반 4세 | 대립왕 | 1162년 – 1165년 |
벨라 3세 | 1172년 – 1196년 | |
임레 | 1196년 – 1204년 | |
러슬로 3세 | 1204년 – 1205년 | |
언드라시 2세 | 1205년 – 1235년 | |
벨라 4세 | 1235년 – 1270년 | |
이슈트반 5세 | 1270년 – 1272년 | |
러슬로 4세 | 1272년 – 1290년 | |
언드라시 3세 | 1290년 – 1301년 | |
카로이 마르텔 | 대립왕 | 1290년 – 1295년 |
3. 3. 할리치-볼히니아의 왕과 공
4. 가계도
아르파드 왕조의 주요 통치자 및 관련 인물은 다음과 같다. 이름 옆의 숫자는 헝가리 왕으로서의 즉위 순서를 나타낸다.
- '''이슈트반 1세''' (1)
- '''페테르''' (2, 4)
- '''사무엘''' (3)
- '''언드라시 1세''' (5)
- '''벨러 1세''' (6)
- '''살라몬''' (7)
- '''게저 1세''' (8)
- '''러슬로 1세''' (9)
- '''칼만''' (10)
- '''이슈트반 2세''' (11)
- '''벨러 2세''' (12)
- '''게저 2세''' (13)
- '''이슈트반 3세''' (14)
- * '''러슬로 2세''' (14 - 대립왕)
- * '''이슈트반 4세''' (14 - 대립왕)
- '''벨러 3세''' (15)
- '''임레''' (16)
- '''러슬로 3세''' (17)
- '''언드라시 2세''' (18)
- '''벨러 4세''' (19)
- '''이슈트반 5세''' (20)
- '''러슬로 4세''' (21)
- '''언드라시 3세''' (22)
- '''벤체슬''' (바츨라프 3세) (23)
- '''오토''' (24)
- '''카로이 1세''' (25)
숫자는 즉위 순서.
5. 성인
아르파드 왕조의 여러 구성원은 가톨릭 교회 또는 동방 정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되거나 시복되었다. 이로 인해 중세 시대부터 이 왕조는 종종 "성스러운 왕의 혈통"이라고 불렸다. 아르파드 왕조는 한 가문에서 가장 많은 성인과 복자를 배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익명의 연대기 ''게스타 헝가로룸''에는 아르파드 왕조의 기원에 대한 다음과 같은 신화적 설명이 기록되어 있다.
''주님의 화신 819년에, 위에서 말했듯이, 마고그 왕족 출신인 위예크는 한참 후에 스키티아의 가장 고귀한 공작이 되어, 덴투모게르에서 에우네두벨리안 공작의 딸인 에메세와 결혼하여 아들 알모시를 낳았다. 그는 알모시라고 불리는데, 이는 신성한 사건 때문이다. 임신했을 때 그의 어머니는 꿈속에서 매의 모습으로 나타난 신성한 환영을 보았는데, 마치 그녀에게 와서 그녀를 임신시키고 그녀의 자궁에서 급류가 쏟아져 나오고 그녀의 허리에서 영광스러운 왕들이 태어날 것이지만 그들은 자신의 땅에서 증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러므로 꿈을 헝가리어로 "알롬"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그의 탄생이 꿈에서 예언되었으므로 그는 알모시라고 불렸다. 또는 그는 알모시라고 불리는데, 즉 성스러운 왕과 공작이 그의 혈통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102]
아르파드 왕조의 남성 혈통은 1301년에 단절되었지만, 여성 혈통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헝가리의 앙주 왕가(카로이 1세, 러요시 1세)와 룩셈부르크 왕가의 지기스문트 황제 등 후대의 군주들은 스스로를 "성스러운 왕의 가문"의 일원으로 여기며 자부심을 나타냈다.[101]
다음은 아르파드 왕조 출신의 성인 또는 복자 목록이다.
초상화 | 이름 | 출생 | 사망 | 성인/시복 | 아르파드 왕조와의 관계 |
---|---|---|---|---|---|
![]() |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1세 헝가리 국왕 | 약 975년 | 1038년 8월 15일 | 1083년 가톨릭 교회에서 성인으로 추대 2000년 동방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추대[103] | 헝가리 대공 게저의 아들 |
헝가리의 성 임레 헝가리 공작 | 1007년 | 1031년 9월 2일 | 1083년 가톨릭 교회에서 성인으로 추대 | 헝가리 국왕 성 이슈트반 1세의 아들 | |
![]() | 헝가리의 성 라슬로 1세 헝가리 국왕 | 약 1040년 | 1095년 7월 29일 | 1192년 6월 27일 가톨릭 교회에서 성인으로 추대 | 헝가리 국왕 벨러 1세의 아들 |
![]() | 헝가리의 성 이레네 헝가리 공주 동로마 제국 황후 | 1088년 | 1134년 8월 13일 | 동방 정교회에서 성인으로 추대 | 헝가리 국왕 성 라슬로 1세의 딸 |
헝가리의 성 엘리자베스 헝가리 공주 튀링겐 방백 부인 | 1207년 7월 7일 | 1231년 11월 17일 | 1235년 5월 27일 가톨릭 교회에서 성인으로 추대 | 헝가리 국왕 언드라시 2세의 딸 | |
![]() | 폴란드의 성 킹가 헝가리 공주 폴란드 공작 부인 | 1224년 3월 5일 | 1292년 7월 24일 | 1690년 6월 11일 시복 1999년 6월 16일 성인 추대 (가톨릭 교회) | 헝가리 국왕 벨러 4세의 딸 |
![]() | 헝가리의 복녀 욜란 헝가리 공주 폴란드 공작 부인 | 1235년 | 1298년 | 1827년 가톨릭 교회에서 시복 | 헝가리 국왕 벨러 4세의 딸 |
![]() | 헝가리의 성녀 마르가리타 헝가리 공주 | 1242년 1월 27일 | 1270년 1월 18일 | 1789년 7월 28일 시복 1943년 11월 19일 성인 추대 (가톨릭 교회) | 헝가리 국왕 벨러 4세의 딸 |
![]() | 헝가리의 복녀 엘리자베스 헝가리 공주 세르비아 왕비 | 1255년 | 1322년 | 복자로 추대됨 (가톨릭 교회) | 헝가리 국왕 이슈트반 5세의 딸 |
align="center" | | 헝가리의 복녀 엘리자베스 헝가리 공주 | 1292년 | 1336년 10월 31일 또는 1338년 5월 6일 | 공식적으로 시복되지는 않았으나 지역적으로 공경받음 | 헝가리 국왕 언드라시 3세의 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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