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시리아 총파업
1. 개요
1936년 시리아 총파업은 1936년 1월 국민블록 지도자 이브라힘 하나누의 추모식에서 프랑스 점령을 비난하는 연설 이후 발생했다. 프랑스 당국이 국민블록 사무실을 폐쇄하고 지도자를 체포하자 국민블록은 총파업을 촉구했고, 이는 다마스쿠스를 시작으로 시리아 주요 도시로 확산되었다. 국민블록 지도부와 민족주의 행동 연맹은 시위에 적극 참여하여 프랑스 점령 반대, 1930년 시리아 헌법 부활 등을 요구했다. 프랑스는 군대를 투입하여 시위 진압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국내외 압력에 굴복하여 국민블록과 협상을 시작했다. 그 결과, 파업 중단과 프랑스-시리아 독립 조약 체결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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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칭 | 1936년 시리아 총파업 |
|---|---|
| 아랍어 명칭 | (알이드리브 앗시티니) |
| 부분 | (정보 없음) |
| 날짜 | 1936년 1월 20일 – 1936년 3월 6일 |
| 장소 | 프랑스 위임통치령 시리아 |
| 좌표 | (정보 없음) |
| 원인 | 국민블록 사무실 폐쇄 및 민족주의 지도자 2명 체포 |
| 목표 | 독립 |
| 방법 | 폭동, 파업, 시위 |
| 결과 | 1936년 프랑스-시리아 독립 조약 형태로 프랑스의 양보 |
| 교전 세력 1 | 프랑스 위임 통치 당국 |
|---|---|
| 교전 세력 2 | 국민블록 민족주의 행동 연맹 |
| 교전 세력 3 | (정보 없음) |
| 지도자 1 | 다미앙 드 마르텔 샤를 윙지거 타즈 알딘 알하사니 |
| 지도자 2 | 슈크리 알쿠와틀리 칼릴 마르담 베이 파리스 알쿠리 루트피 알하파르 나시브 알바크리 |
| 지도자 3 | (정보 없음) |
| 규모 1 | (정보 없음) |
| 규모 2 | (정보 없음) |
| 규모 3 | (정보 없음) |
| 사상자 1 | 사망자: 수십 명 체포자: 최소 3,000명 |
| 사상자 2 | (정보 없음) |
| 사상자 3 | (정보 없음) |
| 사상자 라벨 | (정보 없음) |
| 참고 사항 | (정보 없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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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프랑스 -
1936년 르망 24시
1936년 르망 24시는 프랑스 파업으로 인해 연료와 인력 부족 문제로 취소된 르망 24시 레이스이다. -
1936년 프랑스 -
제2차 런던 해군 군축 협정
제2차 런던 해군 군축 협정은 해군력 증강 경쟁을 제한하기 위해 1935년 런던에서 개최되었으나 일본과 이탈리아의 불참으로 실효성이 제한되었고, 전함 톤수 제한, 잠수함 작전 규칙 제정 등의 내용을 담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효력을 상실하며 동아시아 안보 불안을 심화시켰다. -
총파업 -
9월 총파업
9월 총파업은 1946년 9월 미군정의 좌익 탄압에 반발하여 조선공산당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가 주도한 대규모 파업으로, 쌀 배급, 임금 인상, 노동 운동의 자유 등을 요구하며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나 미군정의 강경 진압으로 1946년 가을 항쟁으로 이어진 사건이다. -
총파업 -
원산 총파업
1929년 1월 함경남도 원산에서 영국계 석유 회사의 차별 대우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된 원산 총파업은 원산노동연합회 주도하에 2천여 명의 노동자가 참여한 식민지 시대 조선 최대 규모의 쟁의였으나, 일제의 탄압과 자금 부족으로 실패했다.
2. 배경
1936년 1월 11일, 국민블록은 1935년 11월 사망한 지도자 이브라힘 하나누 추모식을 열었다. 추모식에서는 애도와 함께 프랑스 점령을 비난하는 연설이 이어졌다. 이 추모식 직후 프랑스 당국은 다마스쿠스에 있는 국민블록 사무실을 폐쇄하고, 파흐리 알-바루디, 세이프 알딘 알-마문 등 저명한 민족주의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이에 국민블록은 프랑스의 점령 정책에 맞서 총파업을 열기로 결의한다. 1월 20일부터 다마스쿠스, 홈스, 하마, 알레포에서 학생 시위와 총파업이 열렸으며, 총파업은 곧 시리아의 거의 주요 도시로 확대되었다.
나시브 알바크리, 자밀 마르담 베이, 루프티 알하파르, 파리스 알쿠리와 같은 국민블록 지도부는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조직화하여 프랑스의 점령과 프랑스가 내세워 선출시킨 시리아 대통령인 타즈 알딘 알하사니에 대한 반대, 1933년 효력이 정지된 1930년 시리아 헌법의 부활 등을 요구하였다. 민족주의 행동 연맹도 파업을 지지하고 다마스쿠스에서 시가 행진과 시위에 조직적으로 참여했다. 이러한 일련의 시민 불복종 운동으로 경제가 마비되었고 시리아 국가는 사실상 '완전한 마비' 상태에 빠졌다.
3. 총파업과 시위의 전개
1936년 1월 20일, 다마스쿠스, 홈스, 하마, 알레포 등지에서 파업과 학생 시위가 시작되었다. 파업은 곧 시리아 전역의 주요 도시로 확산되었다. 나시브 알-바크리, 자밀 마르담 베이, 루프티 알-하파르, 파리스 알-쿠리 등 국민블록 지도자들은 시위에 적극 참여하고 조직했다. 시위대는 프랑스 점령에 반대하고, 프랑스가 임명한 대통령 타지 알딘 알-하사니에 항의하며, 1933년 중단된 1930년 헌법의 복원을 요구했다. 국민 행동 연맹도 파업을 지지하며 다마스쿠스에서 시위를 조직했다. 시민 불복종 운동으로 경제가 마비되고 국가는 '완전한 폐쇄 직전'에 이르렀다.
4. 프랑스의 대응
시리아 및 레바논 고등판무관 다미앙 드 마르텔은 상황을 처리하기 위해 베이루트에서 다마스쿠스로 긴급 소환되었고, 레반트 군 사령관 샤를 앙치제르 장군은 질서 회복 임무를 맡았다. 나시브 알-바크리와 마르담 베이 등 여러 국민블록 지도자들이 추방되었고, 3,000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프랑스군은 시위대를 해산하기 위해 발포하여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들은 봉기를 진압하는 데 실패했고, 이라크, 레바논, 팔레스타인, 요르단 등 다른 아랍 국가들에서 시리아 국민을 지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프랑스 정부는 또한 프랑스 내 좌익 언론과 인민전선으로부터 시리아 및 레바논 정책을 완전히 재검토하라는 압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