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2002년 아르헨티나 경제 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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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아르헨티나 경제 침체는 군사정권의 경제 정책 실패, 태환 정책의 폐해, 그리고 국제통화기금(IMF)의 개입 등 복합적인 요인으로 발생했다. 군사정권은 외채 급증과 노동 시장 개악을 초래했으며, 1990년대 도밍고 카바요 경제부 장관의 태환 정책은 페소화의 안정을 가져왔으나 산업 경쟁력을 약화시켰다. 1998년 라틴 아메리카 경제 위기와 브라질 헤알화 가치 하락, 그리고 1999년 페르난도 데 라 루아 대통령 당선 이후에도 경제는 악화되어, 2001년에는 뱅크 런 사태와 예금 동결 조치인 "코랄리토"가 발생했다. 2001년 12월, 아돌포 로드리게스 사아 임시 대통령은 채무불이행을 선언했고, 2002년 에두아르도 두알데 정부는 태환 정책을 폐지하고 페소화를 평가 절하했다. 이후 아르헨티나는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대통령 집권 하에 경제 회복을 이루었으며, 외채 재조정과 IMF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아르헨티나 경제는 1970년대 중반까지 비교적 안정적이었으나, 이후 누적된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1998년부터 심각한 경제 침체에 빠졌다.
2002년 1월 5일 에두아르도 두알데 정부는 '환율체계의 개혁 및 국가비상사태 법안'이라는 경제개혁안을 발표했다. 이 개혁안은 10년간 시행되며 아르헨티나 경제를 파탄에 이르게 한 태환정책(태환법)을 폐지하고, 페소화의 평가절하를 통해 경제난 극복과 사회 질서 안정을 목표로 했다. 이에 따라 태환정책은 폐지되었고 페소화의 가치는 30~40% 평가절하되어, 2002년 1월 당시 공식적인 달러당 페소화 환율은 1.4가 되었다.[20]
2. 원인
근본적인 원인은 1976년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일명 국가 재건 과정) 시기부터 누적된 구조적 문제에서 찾을 수 있다. 군사정권의 무리한 경제 정책과 외채 도입은 국가 부채를 급증시켰고(1975년 78억달러에서 1983년 450억달러로 증가), 노동 탄압과 임금 하락은 사회 양극화를 심화시켰다.[1][2][3] 1983년 민주화 이후 들어선 라울 알폰신 정부는 막대한 외채 부담과 하이퍼인플레이션(1989년 연 5000% 상승)으로 경제 안정에 실패했다.[4]
1990년대 카를로스 메넴 정부는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극복하기 위해 도밍고 카바요 경제부 장관 주도로 미국 달러에 페소 가치를 1:1로 고정하는 태환법을 도입하고 대규모 민영화를 추진했다.[7][8][9][10] 이러한 정책은 초기 물가 안정과 외자 유치(400억달러 규모)에 일부 성공했으나,[5][6] 고평가된 페소화는 아르헨티나 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수출 부진을 초래했다. 또한, 민영화 과정에서 공공요금이 인상되어 서민 부담이 커졌으며, 외채는 오히려 계속 증가하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11]
이러한 취약한 경제 구조 속에서 1998년 이후 외부 충격이 연이어 발생했다. 아시아 금융위기의 여파로 라틴아메리카 전반의 경제 신뢰도가 하락하며 외국 자본 유입이 끊겼고, 1999년 주요 교역국인 브라질의 헤알화 평가절하와 미국 달러 강세는 아르헨티나의 수출 경쟁력에 치명타를 가했다.
결국 누적된 외채 부담과 태환 정책의 한계, 외부 경제 충격이 맞물리면서 아르헨티나 경제는 1999년부터 3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는 깊은 침체에 빠졌다.[4] 국제통화기금(IMF)은 2000년 140억달러 규모의 구제금융을 제공했으나, 함께 요구된 긴축 재정 정책은 경기 위축을 더욱 심화시키고 사회적 불안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12] 당시 페르난도 데 라 루아 정부는 높은 실업률과 경제 위기 속에서 효과적인 대응책을 마련하기 어려웠으며, 태환 정책 폐지와 같은 근본적인 해결책은 정치적 부담으로 인해 쉽게 선택되지 못했다.
2. 1. 군사정권의 경제정책 실패
1970년대 중반까지 아르헨티나는 비교적 경제 사정이 안정적이었다. 곡물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가 풍부했고, 유럽 등지에서 유입되는 투자 이민 자금도 상당했다.
그러나 1976년 아르헨티나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일명 국가 재건 과정)은 여러 복잡한 경제 문제를 남겼다. 군사정권은 중화학 공업 육성 정책을 추진하며 성급하게 자본 및 수입 자유화를 단행했다. 이로 인해 외채는 1975년 78억달러에서 1983년에는 450억달러로 급증했다. 외채 상환을 위해 다시 외채를 끌어들이는 악순환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1]
또한 군사정권은 노동법 개정, 더러운 전쟁으로 대표되는 노조 탄압, 최저임금 폐지 등을 통해 기업의 해고를 용이하게 하고 노동자들의 임금을 대폭 삭감했다. 1970년 실질 임금을 100으로 보았을 때, 1975년에는 124까지 상승했지만 군사정권 집권 첫해인 1976년에는 30년 만에 최저 수준인 79까지 추락했다. 이러한 정책은 국민의 생활 수준을 급격히 하락시켜 군사정권 말기에는 빈곤율이 40%, 실질실업률은 18%에 달하는 심각한 상황을 초래했다.[2][3]
2. 2. 태환정책의 폐해
1990년 말, 카를로스 메넴 신정부의 경제부 장관으로 도밍고 카바요가 취임했다.[5][6] 카바요 장관은 1992년 1월 1일, 기존 통화인 아우스트랄을 10000:1 비율로 페소화로 변경하는 화폐 개혁을 단행하면서, 동시에 미국 달러화 대비 페소화의 환율을 1:1로 고정시키는 태환 정책(Convertibility Plan)을 시행했다.[7] 이 정책은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언제든 은행에서 페소화를 달러로 쉽게 교환할 수 있도록 보장했으며, 이를 위해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은 시중에 유통되는 페소화의 양을 보유한 미국 달러 외환보유고와 동일하게 유지해야 했다. 극심한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겪으며 자국 통화 대신 미국 달러를 선호하게 된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하고 환율을 안정시키는 것이 태환 정책의 주요 목표였다.
태환 정책은 초기에 물가 상승률을 빠르게 안정시키는 성과를 거두었고, 페소화의 가치가 보장되면서 국민들은 이전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수입품을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페소화 가치가 고평가되면서 아르헨티나 상품의 가격 경쟁력이 약화되었고, 이는 수출 부진과 수입 증가로 이어져 달러가 지속적으로 해외로 유출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아르헨티나 산업의 경쟁력 약화는 실업률의 지속적인 상승으로 이어졌다.
한편, 막대한 외채 부담을 안고 있던 아르헨티나 정부는 태환 정책 유지를 위해서도 외화 확보가 절실했다. 메넴 정부는 '자유시장 경제정책'을 내세우며 통신, 전기, 가스, 수도, 철도, 방송, 석유 등 거의 모든 부문의 국영기업을 민영화했다. 이를 통해 약 400억달러의 외화를 유치하는 데 성공했지만,[8][9][10] 급격한 민영화는 전기, 전화, 수도 등 공공요금의 급등을 초래하여 서민들의 생활을 압박했으며, 민영화에도 불구하고 외채는 줄어들지 않고 계속 증가했다.[11]
1998년 아시아 금융위기의 여파가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로 확산되면서 지역 전체의 경제 신뢰도가 하락했고, 아르헨티나로 유입되던 외국 자본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설상가상으로 1999년에는 주요 교역 상대국이자 경쟁국인 브라질이 헤알화의 평가절하를 단행하면서 아르헨티나의 수출 경쟁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동시에 미국 달러화가 강세를 보이면서 달러에 고정된 페소화 가치 역시 동반 상승했고, 이는 아르헨티나의 수출액 급감으로 이어졌다.
1990년대를 거치며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불어난 외채는 결국 아르헨티나 정부를 상환 불능 상태로 몰아넣었고, 국제통화기금(IMF)은 2000년에 140억달러 규모의 구제금융을 제공하며 외채 상환 일정을 연기해주었다. 더욱이 당시 아르헨티나 사회에 만연했던 탈세와 해외 자본 유출 문제도 경제 상황을 악화시켰다.
1999년, 중도 성향의 급진시민연합 소속 페르난도 데 라 루아가 새로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가 집권했을 당시 아르헨티나는 이미 높은 실업률과 태환 정책의 부작용으로 심각한 경제 침체에 빠져 있었다. 1999년 아르헨티나의 GDP 성장률은 -4%를 기록했고, 이후 2001년까지 3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며 깊은 불황에 빠졌다. 데 라 루아 정부는 재정 적자 축소를 요구하는 IMF의 압력 속에서 긴축 정책을 지속할 수밖에 없었고, 집권 2년 동안 총 9차례의 긴축 조치를 발표했다.[4] 이러한 긴축 정책의 부담은 주로 근로자와 연금 생활자 등 서민층에게 돌아갔다. 당시 아르헨티나 사회 분위기 속에서 태환 정책 폐지나 페소화 평가절하와 같은 근본적인 해결책은 정치적 자살 행위이자 경제적 재앙으로 여겨져 쉽게 추진되지 못했다.[12]
3. 모라토리움 선언
아르헨티나 경제는 투자자들의 신뢰를 빠르게 잃었고, 해외로 자금 유출이 심화되었다. 2001년 한 해 동안 아르헨티나 시중은행에서는 약 200억달러에 달하는 예금이 빠져나가(전체 수신고의 23%) 뱅크 런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아르헨티나 정부는 실질적으로 12개월 동안 모든 은행 계좌를 동결하는 "코랄리토"(corralitoes) 조치를 단행했다.[13][14] 2001년 12월 3일, 페르난도 데 라 루아 정부는 은행 계좌에서의 인출액을 주당 250페소(당시 미화 250달러 상당), 월 1천 페소로 제한하고, 해외 송금액도 월 1천 페소로 제한했다. 또한 달러화 예금을 강제로 페소화로 전환시켰다.[15]
이러한 계좌 동결 조치에 분노한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주요 도시 거리에서 냄비와 프라이팬을 두드리며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카세롤라소, cacerolazoes)를 벌였다. 시위 과정에서 은행과 외국계 기업들이 공격받아 재산 손실이 발생했으며, 건물의 유리가 자주 파손되자 많은 기업들이 금속 장벽을 설치하기도 했다.
2001년 12월 19일, 페르난도 데 라 루아 대통령은 경제난으로 인한 시위가 격화되자 30일간의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그러나 비상사태 선포는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켜 12월 20일과 21일에는 더욱 격렬한 폭력 시위가 발생했다. 정부가 성난 민심을 수습하기보다 무력 진압을 시도한 것이 사태 악화의 원인이었다. 시위대가 대통령궁으로 몰려들자 경찰은 기마경찰대까지 투입했으나, 이 과정에서 5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군부마저 민간 시위대 진압을 위한 병력 투입 명령을 거부하자, 데 라 루아 대통령은 결국 사임을 결정했다.[16]
데 라 루아 대통령 사임 후, 2001년 12월 23일 임시 대통령으로 취임한 아돌포 로드리게스 사아는 1320억달러에 달하는 대외부채 상환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겠다는 모라토리움(채무 지불 유예)을 선언했다.[17] 로드리게스 사아 과도정부는 '아르헨티노'(Argentinoes)라는 제3의 통화를 발행할 계획을 발표했으나, 이 계획은 그가 곧 사임하면서 무산되었다. 로드리게스 사아는 경제 위기 수습 능력이 부족했고, 소속 정당인 정의당의 지지마저 얻지 못해 2001년 12월 31일 결국 사임했다.
데 라 루아와 로드리게스 사아의 연이은 사임으로 아르헨티나는 불과 2주 사이에 대통령이 4번이나 바뀌는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겪었다. 2002년 1월 1일, 아르헨티나 상하원 합동회의는 에두아르도 두알데를 새 대통령으로 선출했고, 그는 데 라 루아의 잔여 임기를 맡게 되었다.[18]
한편, 초긴축 정책에 따른 대규모 정리해고와 높은 실업률, 예금 동결, 페소화 평가 절하, 월급 및 연금의 공채 지급, 소득 감소 등으로 아르헨티나의 빈민층은 사상 최고 수준으로 급증했다. 아르헨티나 통계청(INDEC) 발표에 따르면, 2001년 10월부터 2002년 3월까지 5개월 동안 빈민층 인구는 154만 7천 명 증가하여 총 1,534만 5천여 명에 달했다. 이는 당시 아르헨티나 전체 인구의 42.6%에 해당하는 수치였다.[19]
4. 태환정책 폐지
4. 1. 태환정책 폐지 영향
태환정책 폐지 직후 일반 상점에서는 일부 상품 가격이 폭등하거나 품귀 현상을 빚기도 했다.[21] 2002년 연말까지 달러 당 페소화의 환율은 빠르게 80% 하락해 4페소 이상으로 치솟았다.[22]
그러나 태환정책 폐지와 페소화 평가 절하는 아르헨티나의 수출 경쟁력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 인해 2002년 이후 아르헨티나는 지속적으로 무역 흑자를 기록했다. 또한 아르헨티나 공업이 성장할 발판이 마련되어, 2003년에는 월 20%씩 공업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수입 대체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페소화 가치 하락으로 관광 비용이 예전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해지면서 관광객이 크게 늘어나, 2004년에는 약 770만 명의 관광객이 아르헨티나를 찾았다.[23]
5. 경기 회복
2003년 5월 25일 치러진 대선에서 네스토르 키르치네르가 당선되었다. 키르치네르는 2002년 4월 취임한 로베르토 라바냐 경제부장관을 유임시켰다.[24] 키르치네르 정부는 IMF의 경제 긴축 요구와는 다른 방향의 정책을 추진했다. 세금을 인하하고, 일자리 창출을 위해 건설 경기를 진작시켰으며, 각종 공공요금 인상을 억제하고 투자를 유도했다. 또한 최저임금을 대폭 인상하는 등 경기 부양책을 통해 아르헨티나 경제를 위기에서 벗어나게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25] 키르치네르 집권 이후 2003년부터 아르헨티나 경제는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26]
연도 | 2003 | 2004 | 2005 | 2006 | 2007 | 2008 | 2009 | 2010 |
---|---|---|---|---|---|---|---|---|
경제성장률(%) | 8.8 | 9.0 | 9.2 | 8.5 | 8.7 | 6.8 | 0.9 | 9.7 |
키르치네르 정부는 페소화 평가절하 이후 고환율 정책을 유지했다. 이는 중국의 대두 소비 증가와 대두 국제가격 상승과 맞물려 수출 확대로 이어졌다.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은 지속적으로 달러를 매입하여 외환보유고가 증가했다.[27] 또한 키르치네르 정부는 수입을 억제하고 국내 산업을 보호하며, 수입 대체 공업을 활성화하여 고용 창출을 이끌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2006년 1월 3일 IMF 차관 95억달러를 전액 조기 상환했다.[28]
구분 | 2004 | 2005 | 2006 | 2007 | 2008 | 2009 | 2010 |
---|---|---|---|---|---|---|---|
수출 | 34,358 | 40,352 | 46,456 | 55,933 | 70,020 | 55,750 | 68,134 |
수입 | 22,447 | 28,689 | 34,150 | 44,780 | 57,422 | 38,770 | 56,501 |
수지 | 11,911 | 11,663 | 12,306 | 11,154 | 12,598 | 16,980 | 11,633 |
6. 외채 재조정
아르헨티나 정부는 2001년 말 디폴트 선언 이후 지불이 중단된 채권 1030억달러에 대해 약 3분의 1만 상환하는 부채 탕감안을 제시했다.[29] 2005년 3월 2일, 당시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대통령은 1030억달러에 달하는 국가 채무 문제가 해결되었으며, 전 세계 채권자들과의 외채 재조정에 성공했다고 선언했다.[30] 아르헨티나 정부 발표에 따르면, 채권자의 76%가 외채의 금리 인하와 만기를 최장 42년까지 연장하는 안에 동의했다.[31]
7. IMF에 대한 비판
IMF의 권고에 따라 1992년 메넴 정부가 시행한 태환 정책이 인플레이션을 낮추는 효과는 있었지만, 지속적인 성장을 이끌지는 못했다는 비판이 있다. 또한 IMF는 아르헨티나에 긴축적 재정정책을 강하게 요구했는데, 이 역시 경제 상황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3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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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아르헨티나의 눈물 '반복되는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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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2003-08-1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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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관된 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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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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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Sentencia dictada por el Juez Jorge Ballesteros en el juicio penal Olmos, Alejandro c/ Martinez de Hoz y otros s/ Defraudación, del 13 de junio de 2000 (Exte. 14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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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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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 비상사태 배경과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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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rmoil, Then Hope in Argent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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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gentina Economy Chi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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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n by New Argentine Economy Chief Raises Cautious Hope for Recov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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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 재벌들, 민영화 관련 첩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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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되는 건 모두 팔자-아르헨 민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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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산업 국가 통제 강화 여론 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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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되는 건 모두 팔자-아르헨티나 민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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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y of Peron Loses Its Hold On Argent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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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 'corralito' asfixia la economía argent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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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Corte Suprema dictó nuevas medidas en favor del corrali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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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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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위기속 `예금인출 제한'-아르헨 경제 또 `휘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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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실각한 아르헨 델라루아 정권을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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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 대외부채 상환중단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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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 새 대통령에 두알데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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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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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 경제위기로 빈민층 급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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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002-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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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 경제개혁안' 어떤 내용 담고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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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002-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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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아르헨 상거래 `혼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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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002-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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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아르헨 병원에 외국인환자 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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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002-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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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산업으로 활로찾는 아르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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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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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라바냐 아르헨 경제장관 경질..중폭 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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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005-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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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高 성장 아르헨 큰소리 ‘떵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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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아르헨티나 통계청(INDEC)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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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아르헨티나 통계청(INDEC)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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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아르헨티나 IMF차관 전액 조기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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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06-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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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아르헨티나 사상 최대 채무재조정 성공"
https://news.naver.c[...]
YTN
2005-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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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아르헨티나 대통령, 채무 재조정 성공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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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
2005-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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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아르헨티나에선 현재진행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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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신문
2005-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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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아르헨티나의 교훈
https://news.nave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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