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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2 하나호 침몰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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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602 하나호 침몰 사고는 1990년 3월 1일, 오징어잡이 어선 602 하나호가 4m가 넘는 풍랑으로 침몰한 사건이다. 당시 선장 유정충은 선원들을 먼저 구명정에 태운 후, 구조 신호를 보내다 배와 함께 침몰했다. 선원 21명은 구조되었으나 유정충 선장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했다. 유 선장의 의로운 희생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대한민국 최초의 전국어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지고 국민훈장 목련장이 추서되었다. 이후 속초시에 그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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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2 하나호 침몰 사고
사고 개요
사고 명칭하나호 침몰 사고
발생 일시2014년 4월 16일
발생 위치대한민국 전라남도 완도군 청산면 여서도 남서쪽 13km 해상
선박 종류어선
선박 이름하나호
승선 인원6명
사망자5명
생존자1명
실종자0명
선박 정보7.93톤급 어선
선적항인천광역시
사고 원인
직접적인 원인높은 파도에 의한 침몰
기타 원인선박 노후화, 무리한 조업 강행
구조 활동
구조 주체해양경찰
구조 활동 내용헬기 및 경비정 동원, 주변 어선 협조
관련 인물
선장유정충
선원5명
기타
후속 조치실종자 수색 종료, 사고 원인 조사

2. 사고 경위

1990년 2월 26일, 602 하나호는 기장군 대변항을 출발하여 오징어잡이에 나섰다. 3월 1일 13시 51분경, 4m가 넘는 높은 파도로 인해 기관실이 침수되어 배가 침몰할 위기에 처하자, 선장 유정충은 나머지 선원들에게 구명동의를 입히고 퇴선을 지시했다.[2]

2. 1. 602 하나호 선장 유정충

유정충은 1946년 함경남도 북청 출신으로, 한국 전쟁 중 부모를 따라 월남하여 부산에서 성장했다. 35세에 선장이 되었으며, 1988년부터 602 하나호의 선장으로 일했다. 그는 타고난 뱃사람으로 선원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후배 양성에도 힘썼다. 아들도 해양대학에 입학시켰다.[2]

2. 2. 침몰 과정

602 하나호는 1990년 2월 26일 기장군 대변항을 출발하여 오징어잡이에 나섰다. 3월 1일 13시 51분경, 4m가 넘는 높은 파도로 인해 기관실이 침수되어 배가 침몰할 위기에 처하자 선장 유정충은 나머지 선원들에게 구명동의를 입히고 퇴선을 지시했다.[2]

유정충 선장은 선원들이 구명정에 탄 후에도 조타실에 남아 2시간가량 구조 신호를 보내다가 배와 함께 침몰했다.[3] 선원들은 약 12시간 후 조난 신호를 받고 온 다른 선박들에 의해 구조되었다. 사고 해역은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망망대해였기 때문에 만일 유정충 선장도 같이 퇴선했다면 표류하다가 많은 사망자가 나올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2. 3. 구조 및 실종

1990년 2월 26일, 오징어잡이 어선인 602 하나호가 기장군 대변항을 출발하였다. 3월 1일 13시 51분경, 4m가 넘는 풍랑으로 인해 기관실이 침수되어 배가 침몰할 위기에 처하자, 선장 유정충(劉禎忠)은 나머지 선원들에게 구명동의를 입히고 퇴선을 지시했다.[2]

유정충 선장은 선원들이 구명정에 탑승한 후에도 조타실에 남아 2시간가량 구조 신호를 보내다가 배와 함께 침몰했다.[3] 다른 선원들은 조난 신호를 받고 온 선박에 의해 12시간 만에 구조되었다. 사고 해역은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망망대해였기 때문에, 만약 유 선장도 같이 퇴선했다면 표류하다가 많은 사망자가 나올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3. 사고 수습 및 수색

제주도 모슬포무선국을 통해 구조 신호가 전달되어 구조선단이 편성되었고, 파도 속에서 3월 2일 새벽 2시경 사고 현장에 도착하여 침몰하는 하나호를 발견하였다. 새벽 2시 20분경에는 표류하던 선원 21명이 구조되었으나, 유정충 선장은 배와 함께 가라앉았다. 선원들이 귀항을 미루고 사고 해역을 수색하였으나 유정충 선장의 시신은 수습하지 못하였다.[2][4]

4. 사회적 반향과 추모

602 하나호 침몰 사고는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유정충 선장의 희생은 언론에 의해 의로운 것으로 평가되었고,[5] 전국적인 추모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사고 이후 대한민국 최초의 전국어민장이 거행되었고, 국민훈장 목련장이 추서되었다.

4. 1. 언론의 평가

언론은 유정충 선장의 죽음을 의로운 희생으로 평가하였다.[5]

4. 2. 추서 및 기념

사고 8일 후인 3월 9일, 대한민국 최초로 전국어민장이 엄수되었으며, 유정충 선장에게는 국민훈장 목련장이 추서되었다.[5] 1991년 1월 9일에는 그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선적지인 속초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참조

[1] 뉴스 "<여객선침몰> 어선 하나호 유정충 선장 새롭게 조명" http://www.yonhapnew[...] 연합뉴스 2014-04-17
[2] 뉴스 칠흑바다에 등대가된 船長 경향신문 1990-03-02
[3] 뉴스 의협심강한 타고난船長 동아일보 1990-03-03
[4] 뉴스 선원21명 탈출뒤 홀로"SOS"배와 함께 최후맞은 어느선장 동아일보 1990-03-02
[5] 뉴스 어떤 船長의 거룩한 죽음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90-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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