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1고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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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M-1고지 전투는 1953년 6월 10일부터 22일까지 한국 전쟁 중 M-1 고지를 두고 대한민국 국군 제20사단과 중국인민지원군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전투이다. 중공군은 5월 5일부터 전 전선에 공격을 시작하여, 5월 13일부터 6월 23일까지 1, 2차 공세를 통해 국군의 전초 기지와 방어 거점을 탈취하려 했다. 6월 10일, 중공군의 공격으로 M-1고지를 지키던 국군 제20사단 제61연대는 고지 정상을 빼앗겼고, 이후 10일 이상 고지를 탈환하기 위한 국군의 반복적인 공격과 중공군의 역습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한용택 일병의 활약이 있었으나, 고지는 여러 번 주인이 바뀌는 격전을 거쳤다. 결국, 국군 제60연대가 투입되어 항공 지원과 포병 화력 지원을 받으며 중공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고지를 사수하는 데 성공했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20사단은 신병 위주였음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인접 부대의 방어선 형성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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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1고지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 전투 개요 | |
| 분쟁 | 한국 전쟁 |
| 날짜 | 1953년 6월 10일 ~ 6월 22일 |
| 장소 | 강원도 양구군 문등리 어은산 일대 |
| 결과 | 국군의 승리. 고지 탈취 |
| 교전 세력 | |
| 지휘관 및 병력 | |
| 지휘관 1 | 송석하 |
| 병력 1 | 국군 제20사단 |
| 병력 2 | 중공군 제33사단 |
| 사상자 | |
| 사상자 1 | ? |
| 사상자 2 | 2개 연대 이상의 병력 손해 |
2. 중공군의 공세
1953년 봄, 중공군은 휴전을 앞두고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기 위해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했다. 중공군은 서부지역에서 3월부터 전초전을 실시했고, 이를 바탕으로 5월 5일을 기해 전 전선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
2. 1. 중공군의 1, 2차 공세
1953년 5월, 중공군은 전 전선에 걸쳐 공격을 개시했다. 5월 13일~5월 26일에 실시한 1차 공세는 대부분 중대급 이하의 공격으로 전초기지를 목표로 했고, 5월 27일~6월 23일의 2차 공세는 주로 국군의 주 전초진지와 일부 방어 거점을 목표로 대대급 이상의 공격을 실시했다.3. M-1 고지 쟁탈전
6월 10일 21시, 국군 제5사단 우측 방어를 맡은 국군 제20사단은 공격준비사격에 이어 중공군의 공격을 받았다. 중공군이 점령하고 있던 어은산 남쪽 1,090고지 동남쪽 M-1고지를 지키던 제61연대 제6중대는 약 1개 대대 규모의 중공군 공격으로 고지 정상의 주 진지(M-1고지의 '나'고지)를 포기하고 서쪽 제1소대 진지로 퇴각했다.
이에 제2대대는 23시에 수색중대를 주저항선에 투입해 제5중대 진지를 인수받게 하고, 제5중대는 M-1고지를 탈환하도록 했다.
3. 1. 국군 제20사단의 방어
1953년 6월, 중공군의 공격으로 국군 제20사단 제61연대는 M-1 고지를 일시적으로 상실했다. 그러나 끈질긴 역습과 방어로 고지를 재탈환하고 방어선을 유지했다.6월 10일부터 6월 20일까지 국군 제20사단 제60, 62연대는 1,090고지와 938고지 일대에서 중공군과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격전을 반복했다. 이 고지를 빼앗기면 중공군의 휴전선이 확장되므로 국군 제20사단장과 미군 제10군단장은 M-1고지 사수를 다짐했다.
6월 22일, 제60연대가 제61연대의 주 진지와 M-1고지 인수를 완료하고, 항공 지원과 포병의 화력 지원으로 중공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이로써 M-1고지에서 6월 10일 이후 국군 제20사단 제61연대 3개 대대가 모두 투입되어 18번의 공격으로 16번 고지를 탈취하고, 22번의 중공군 역습으로 16번 고지를 빼앗기는 쟁탈전이 종료되었다.
3. 1. 1. M-1 고지 1차 퇴각
6월 10일 21시, 국군 제5사단 우측의 방어를 맡은 국군 제20사단은 공격준비사격에 이어 중공군의 공격을 받았다. 중공군이 점령하고 있던 어은산 남쪽 1,090고지 동남쪽 M-1고지를 지키고 있던 제61연대 제6중대는 약 1개 대대 규모의 중공군의 공격으로 고지 정상의 주 진지(M-1고지의 '나'고지)를 포기하고 서쪽 제1소대의 진지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3. 1. 2. 국군의 반복적인 공격과 중공군의 역습
6월 11일 06시, 제5중대가 제6중대 제1소대의 동쪽 후사면에 도착하여 역습을 실시하였으나, 고지를 탈취당한 지 약 8시간이 지나 적이 고지 주변 지형을 파악하고 화기 배치를 완료하는 등 역습 시기가 너무 늦었고, 적의 수류탄과 직사화기 저항으로 고지를 탈환하지 못했다. 연대장은 연대 예비인 제1대대를 투입하여 고지를 탈환하기로 결심하고 명령을 내렸다.6월 12일 03시, 제1대대의 제2, 3중대가 역습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비가 내려 기동이 어려웠고, 야간인데 안개와 포연으로 작전은 더욱 어려운 상태였다. 공격 부대는 CAR 소총과 20발의 수류탄을 휴대했다.
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중공군은 만만치 않았다. 고지 정상을 공격한 제3중대는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면서 돌파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한용택 일병이 수류탄 집중 투척으로 적군의 방어 진지를 뚫고 고지를 다시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13시경 중공군의 포격과 1개 중대 규모의 역습으로 고지를 다시 빼앗겼다.
6월 13일 03시, 제1중대가 다시 고지를 공격하여 탈취하였지만, 중공군의 역습으로 다시 빼앗겼다. 제1중대는 군단 및 사단의 지원 사격을 동원하여 재역습, 고지를 다시 점령했다. 하지만, 북사면에 매복 중이던 중공군과 백병전이 벌어져 중대장이 중상을 입어 고지를 다시 빼앗겼다.
제1, 3중대가 반복적인 역습에도 고지를 계속 빼앗기자 제1대대장 조재준 중령이 직접 제2중대를 이끌고 14:30에 역습을 시작했다. 30분간의 포병 지원 사격을 퍼부으면서 돌격을 감행하여 고지를 탈환했다.
6월 14일 01시부터 계속된 중공군의 포격과 파상 공격으로 고지를 다시 빼앗겼다. 일출 무렵 지원된 사단 수색 중대를 동원하여 역습을 실시했지만, 중공군의 강력한 포격과 공격으로 6월 15일 00시, 고지를 다시 내주어야 했다.
이후 6월 20일까지 국군 제20사단 제60, 62연대는 1,090고지와 938고지 일대에서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격전이 반복되었다. 공산군에게 이 고지를 빼앗기면 공산군의 휴전선이 확장되므로 국군 제20사단장과 미군 제10군단장은 M-1고지 사수를 다짐했다. 사단장은 제61연대가 10일간의 혈전으로 전투력을 거의 상실하여 제60연대로 교체했다. 제60연대 제1대대가 주 진지 및 M-1고지를 맡았다.
6월 21일, 중공군의 제파식(단순히 병사를 나누어 계속 공격하게 하는 방식) 공격으로 고지를 상실하였다가 국군은 제10중대 병력을 투입, 제11중대와 합동으로 공격하여 고지를 탈환하고, 피탈과 재탈환을 반복하며 10시간 동안 고지의 주인이 세 번이나 바뀌었다.
6월 22일, 제60연대가 제61연대의 주 진지와 M-1고지 인수를 완료하고, 항공 지원과 포병의 화력 지원으로 중공군의 공격도 중단되었다. 6월 10일 이후 국군 제20사단 제61연대 3개 대대가 모두 투입되어 18번의 공격으로 16번 고지를 탈취하고, 22번의 적 역습으로 16번 고지를 빼앗기는 쟁탈전이 종료되었다.
3. 1. 3. 한용택 일병의 활약
6월 12일 새벽 3시, 제1대대의 제2, 3중대가 역습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비가 내려서 기동이 어려웠고, 밤인데다 안개와 포연 때문에 작전은 더욱 어려운 상태였다. 그리하여 공격부대는 CAR소총에다 각각 수류탄 20발을 휴대했다.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중공군은 만만치 않았다. 고지 정상을 공격한 제3중대는 중공군의 공격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면서 돌파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용택 일병이 수류탄을 집중 투척하여 적군의 방어진지를 뚫고 고지를 다시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3. 1. 4. 제60연대의 투입과 고지 사수
6월 20일까지 국군 제20사단 제60, 62연대는 1,090고지와 938고지 일대에서 적과 뺏고 뺏기는 치열한 격전을 반복했다. 이 고지를 빼앗기면 중공군의 휴전선이 확장되므로, 국군 제20사단장과 미군 제10군단장은 M-1고지 사수를 다짐했다. 사단장은 제61연대가 10일간의 혈전으로 전투력을 거의 상실하여 제60연대로 교체했다. 이에 제60연대 제1대대가 주진지 및 M-1고지를 맡았다.6월 21일, 중공군은 병력을 계속 투입하는 제파식 공격을 계속하여 국군은 고지를 상실하였다. 그러나 국군은 제10중대 병력을 투입하여 제11중대와 합동으로 공격하여 고지를 탈환했다. 이처럼 고지를 뺏고 뺏기는 과정이 반복되어 10시간 동안 고지의 주인이 세 번이나 바뀌었다.
6월 22일, 제60연대가 제61연대의 주진지와 M-1고지 인수를 완료하고 원활한 항공지원과 포병의 화력지원으로 중공군의 공격도 중단되었다. 이로써 M-1고지에서 6월 10일 이후 국군 제20사단 제61연대 3개 대대가 모두 투입되어 18번의 공격으로 16번 고지를 탈취하고 22번의 적의 역습으로 16번이나 고지를 뺏기는 반복적인 쟁탈전이 종료되었다.
4. 국군 제20사단의 의의
1953년 2월 9일에 창설된 국군 제20사단은 대부분 신병으로 구성되었지만, 지휘관의 솔선수범과 진두지휘로 중공군에 막대한 피해를 주고 국군 제5사단의 방어선 구축에 기여했다.
4. 1. 부대 개편
1953년 2월 9일 창설된 국군 제20사단은 대부분 신병으로 구성되었지만, 지휘관의 솔선수범과 진두지휘를 바탕으로 중공군 제33사단의 2개 연대 이상 병력을 상실케 했다. 또한, 사단 좌측 국군 제5사단이 새로운 방어선을 점령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현재 제20사단은 제20기계화보병사단으로 개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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