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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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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금성 전투는 1953년 7월, 한국 전쟁 휴전 협정 체결 직전에 중화인민공화국군이 대한민국군을 공격하여 벌어진 전투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으로 휴전 협정이 지연된 상황에서, 중화인민공화국군은 대한민국군에 타격을 가하고 휴전 협상에서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려 했다. 전투 결과 대한민국군은 막대한 인명 피해와 영토 상실을 겪었으며, 이승만 정부의 대응과 대한민국군의 작전 수행 능력, 중화인민공화국군의 과도한 인명 피해 등 다양한 논란을 낳았다. 이 전투는 한국 전쟁의 상흔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영화 "고지전"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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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분쟁6.25 전쟁
날짜1953년 7월 10일 – 1953년 7월 20일 (일부 자료는 7월 13일 ~ 27일)
장소강원도 김화군 근동면, 화천군 간동면, 당시 금성지구
결과중국 인민지원군의 승리
이유반공 포로 석방 문제
교전 세력 1유엔군 (UNC)
대한민국
미국
교전 세력 2중국
지휘관 1마크 클라크
맥스웰 테일러
아이작 D. 화이트
정일권
지휘관 2덩화
양용
병력 규모
유엔군187,000명 (전투 병력)
중국군240,000명 (전투 병력)
1,360문 (포병)
유엔군
참가 부대 (미국)제8군
제9군단
제3보병사단
제2보병사단
참가 부대 (한국)제2군단
수도사단
제3보병사단
제5보병사단
제6보병사단
제7보병사단
제8보병사단
제11보병사단
항공 지원L-20 경비행기 30대
중국군
참가 부대제9병단
제24군
제20병단
제54군
제60군
제67군
제68군
산하 12개 사단
피해 규모
미국305명 전사
대한민국2,689명 전사
7,548명 부상
4,136명 실종
중국 (중국 측 추정)47,661명 사상 (미국인 2,286명 포함)
2,766명 포로 (미국인 70명 포함)
중국9,187명 전사
12,391명 부상
대한민국 (한국 측 추정)66,000명 사상
262명 포로
한국 측 자료
사상자14,373명
중국군 사상자 추정약 66,000명
전사: 27,126명
전상: 약 38,700명
포로: 166명
로마자 표기
금성 전투Geumseong Jeontu

2. 배경

지지부진하던 정전 협상은 1953년 6월, 유엔군조선인민군, 중국인민지원군 간 포로 문제 합의에 이르렀다. 6월 16일에는 판문점에서 실제 접촉선을 기준으로 군사분계선이 새로 설정되었다. 앞서 1953년 3월 이오시프 스탈린의 급사 이후 공산 측의 태도 변화도 휴전 협상 진전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협정 조인을 위해 펑더화이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이 베이징에서 평양으로 향하던 중, 6월 18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의 단독 결정으로 반공포로 석방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조인 직전이던 휴전 회담은 중단되었고, 한반도는 다시 긴장 상태에 놓였다.

6월 20일 평양에 도착한 펑더화이는 이승만의 행동에 대한 대응으로 휴전 협정 조인을 미루고, 한국군에 약 1만 5천 명 규모의 추가적인 군사적 타격을 가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중국인민지원군은 이전과 달리 공격 목표를 한국군에 집중하기로 하고, 4개 군 산하 12개 사단 병력을 동원하여 당시 한국군 5개 사단이 방어하던 금성 지역 돌출부에 대한 공세를 계획했다.

이 금성 돌출부는 1953년 봄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공세로 인해 유엔군 전선에서 돌출된 지역이었다. 김화읍 북동쪽 약 약 4.83km 지점에서 시작하여 금성 남쪽 언덕을 지나 동쪽으로 약 약 16.09km, 다시 남동쪽으로 약 약 20.92km 꺾여 문등리 마을까지 이어지는 험준한 지형이었다.[9] 이 지역 방어는 한국군 제2군단(군단장: 정일권 중장)을 중심으로 서쪽부터 수도기계화보병사단, 제6사단, 제8사단, 제5사단, 제20사단 등이 맡고 있었다.[9]

당시 한국군 제2군단은 군단장의 건강 문제와 일부 사단장의 경험 부족 등의 문제를 안고 있었으며, 포로 심문이나 정찰을 통해 중공군의 집결을 감지하고 있었음에도 대규모 공세보다는 국지적 도발로 판단하여 충분한 대비를 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있다. 중공군이 이러한 대규모 공세를 감행한 이유에 대해서는 한국군의 위신을 실추시키고 전후 정치적 입지를 유리하게 하려 했다거나, 화천댐을 점령하여 한국의 부흥을 방해하려 했다는 분석 등이 제기된다.

3. 전투 과정

7월 13일, 중국인민지원군은 금성 돌출부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시작했다. 이 공격으로 국군 5개 사단의 방어선 양측이 돌파되었고, 특히 수도사단의 후방 지휘소가 기습당하는 등 큰 혼란이 발생했다.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미 8군 사령관 테일러 대장은 국군 방어선을 금성천 남쪽으로 조정하도록 명령했고, 국군은 백암산, 주파령, 적근산 부근으로 후퇴했다.

7월 15일, 국군 제2군단은 6사단과 3사단을 예비대로 전환하고 5사단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강화하여 화천저수지 방향으로 진격하는 중공군을 저지했다. 이후 폭우로 중공군의 공세가 주춤한 사이, 국군 제2군단(제5, 8, 11사단)은 반격을 개시하여 미 제8군이 설정한 공격 목표선인 아이슬랜드선(간진현-금성천-462고지)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금성 돌출부의 원래 방어선이었던 금성천 북쪽 지역까지 회복하지는 못한 채 이 선에서 전선이 형성되었다. 이 과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문단에서 다룬다.

3. 1. 초기 공세 (6월 10일 ~ 18일)

1953년 6월, 정전 협상이 포로 문제 합의로 진전을 보였으나,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단행으로 중단되었다. 이에 중국인민지원군(PVA) 사령관 펑더화이는 휴전 협정을 미루고 대한민국 국군에 대한 군사적 타격을 결정했으며, 금성 돌출부의 대한민국군 방어선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준비했다.

6월 10일 저녁, PVA는 중부 전선에서 포격을 강화하며 대한민국 제5사단 방어 지역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다.[9] PVA 제68군과 제60군 부대가 투입되어 전초 기지를 돌파하고, 주요 방어선의 일부인 973고지와 882고지를 점령했다.[9] 대한민국 제2군단은 PVA의 진격을 막기 위해 6월 11일 제3사단 제22연대를 제5사단에 배속시켰다.[9] 국군 제35연대가 973고지 탈환을 위해 반격했으나 부분적인 성공에 그쳤고, PVA의 반격으로 다시 1000m 후퇴했다.[9] 제22연대도 882고지 탈환을 시도하여 능선 접근 및 참호 구축에는 성공했다.[9] 그러나 6월 12일, 제22, 27, 35연대를 동원한 제5사단의 대대적인 반격에도 불구하고 PVA의 강력한 저항으로 고지 탈환에 실패했다.[9]

6월 12일, PVA는 제5사단 좌측의 제8사단 지역으로 공격을 확대했다.[9] 973고지 북서쪽 약 9.66km 지점의 캐피톨 힐(Capitol Hill)을 방어하던 국군 제21연대는 PVA의 공격으로 전초선과 주 저항선 일부가 돌파당했다.[9] 6월 13일 새벽, 국군 제10연대의 반격은 실패했고, 오후에는 PVA의 추가 공격으로 더 후퇴했다.[9] 6월 14일 아침, PVA는 공세를 지속하여 제21연대를 압박했다.[9] 저녁에는 제21연대 제3대대가 PVA 증강된 대대에 포위되어 분산되었고, 제1대대와 제2대대도 각각 공격받아 후퇴하거나 포위되었다.[9] 제21연대 잔여 병력은 후방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했으나 오래 버티지 못했다.[9]

한편, 제5사단 우측에서는 미 제10군단 소속의 제20사단이 방어하던 크리스마스 힐(Christmas Hill) 지역(882고지 남동쪽 약 6.44km)도 공격받았다.[9] 6월 10일, PVA 제33사단이 1220고지 인근 전초 기지를 점령했고, 국군 제61연대가 잠시 탈환했으나 다시 빼앗겼다.[9] PVA가 973고지와 882고지를 점령하며 1220고지로 향하는 능선을 위협하자, 제10군단장 아이작 D. 화이트 중장은 군단 예비대인 대한민국 제7사단을 제20사단 좌측에 투입했다.[9] 제7사단이 북진하는 동안 제61연대는 제5사단의 압박을 덜기 위해 여러 차례 공격을 시도했으나 PVA에 의해 저지되었다.[9]

6월 14일, PVA 제33사단은 제5사단과 제20사단을 상대로 공세를 재개하여 제5사단을 북한강 남쪽으로 후퇴시켰다.[9] 이 후퇴로 인해 막 방어선을 구축한 대한민국 제7사단의 측면이 노출되었다. 이번에는 중국군이 공격 부대를 충분히 빠르게 재편성하는 데 실패했다.[9] 제10군단 포병과 제5공군의 근접 항공 지원이 대한민국 제5사단을 마주한 PVA 부대에 집중되었고, 대한민국 제7사단은 대한민국 제5사단이 구축한 새로운 방어선에 맞춰 전선 위치를 재조정했다.[9] 제5사단의 다른 측면에서 대한민국 제8사단 또한 약 1.61km 이상 후퇴하여 6월 15일 주요 저항선을 인접 사단과 연결해야 했다.[9] 대한민국 제3사단의 남은 2개 연대는 6월 15일 북한강 남쪽 강변을 따라 제8사단 동쪽 지역을 담당하여 대한민국 제5사단의 좌익을 강화하라는 명령을 받았다.[9] 대한민국 제3사단이 방어 위치를 인수하면서, 대한민국 제22연대는 본 부대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9] 동시에 대한민국 제5사단은 제10군단에 배속되었고, 제10군단은 북한강 동쪽 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다.[9] 제10군단은 즉시 대한민국 제5사단에 물자와 장비를 신속히 지원하고 인명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노력했다.[9] 측면 도로가 부족했기 때문에, 12대의 H-19 헬리콥터가 할당되어 25만 파운드의 물자를 전선으로 수송했다.[9] 6월 16일, 대한민국 제11사단은 대한민국 제1군단 지역에서 이동하여 대한민국 제2군단의 예비대가 되었다.[9]

다음 며칠 동안 작전은 잦아들었다. 북한강 서쪽의 대한민국 제8사단 지역에서 6월 16일, PVA는 캐피톨 힐 동쪽 약 3.22km에 있는 핑거 능선(Finger Ridge)의 대한민국 제10연대 전초 기지를 점령했지만, 중국군은 접촉을 끊고 그날 저녁 철수했다.[9] 대한민국 제21연대는 그날 중대 규모의 여러 공격을 격퇴했다.[9] 이후 대한민국 제6사단 제19연대의 지원을 받아 제21연대가 반격을 가해 PVA가 물러났다.[9] PVA 2개 중대가 핑거 능선 남동쪽에 있는 대한민국 제16연대, 제8사단의 주요 방어선을 돌파했지만 돌파를 시도하지 않았다.[9] 6월 16일 저녁까지, 제8사단 전선에서 PVA의 작전은 산발적으로 변했다.[9] 다음 이틀 동안 PVA는 대한민국 제20사단과 제8사단에 몇 차례 소규모 공격을 가해 약간의 침투를 시도했다.[9] 6월 18일까지 상황이 안정되기 시작했고, 제8군은 9일간의 공세로 인한 피해를 조사할 기회를 얻었다.[9]

PVA는 대한민국 군대를 평균 3km 후퇴시켰고, 13km 전선에 걸쳐 북한강 동쪽의 일련의 고지들을 점령했다.[9] 중국군의 공세로 인해, 대한민국 3개 사단이 증원 및 반격 역할로 재배치되었다.[9] 작전 중 대한민국 부대는 총 7,3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고, PVA의 손실은 6,600명 이상으로 추정되었다.[9] 유엔군 방어를 근접 지원하기 위해 공군, 해군 및 해병대 항공기가 9일 동안 810회 출격했고, 전략 공군 프로그램이 지연되었다.[9]

3. 2. 전선 조정 및 재정비 (6월 19일 ~ 7월 12일)

유엔군(UNC)은 이 기간 동안 피해를 입은 대한민국 육군 제5사단을 재편성했다. 6월 26일까지 제5사단은 작전 준비를 마쳤다고 판단되어 제2군단의 지휘 하에 복귀했다. 그 사이 제7사단은 제5사단의 우측에서 기존 제20사단의 위치를 인수했다.

6월 26일 밤, 중국인민지원군(PVA) 제60군 제179사단은 북한강 동쪽의 제5사단 지역에 1개 연대를, 1220고지로 이어지는 주 능선상의 제7사단 지역에 2개 연대를 투입하여 공격을 시작했다. 격렬한 포격과 박격포 지원 하에 PVA는 맹렬히 공격했고, 양측 한국군 사단은 완강히 저항했으나 제5사단은 점차 다음 방어선으로 물러났으며, 이에 따라 제7사단 역시 좌측 방어를 위해 후퇴해야 했다. PVA는 공세를 지속하여 1220고지 북서쪽의 938고지에 있던 제7사단 진지를 돌파했다. 제7사단은 며칠간 938고지를 탈환하려 반격했으나, PVA는 점령지를 내주지 않았다. PVA는 소규모 병력으로 고지를 방어하다가 한국군이 진입하면 강력한 포격과 박격포 사격을 가한 뒤 대규모 반격을 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이러한 상황과 늘어나는 한국군 사상자를 고려하여, 화이트 장군은 7월 3일 방어 위주 정책으로 전환했다. 후방 지역에 방어 준비를 강화하고, 헬리콥터를 이용해 추가 진지 구축을 위한 자재와 탄약을 수송했다. 중국군은 7월 4일 1220고지에 접근하려 두 차례 시도했으나, 제7사단에 의해 모두 격퇴되었다.[9]

PVA의 작전 강화와 화천 저수지화천댐을 목표로 한 대규모 공세 준비 첩보(포로 진술 포함)에 따라, 화이트 장군은 제2군단의 우익 강화를 위해 병력 재배치를 결정했다.

  • 7월 1일부터 미국 제45보병사단을 서쪽으로 이동시켜 대한민국 제20사단과 제7사단 1개 연대를 교대시켰다. 제7사단은 축소된 구역을 담당하며 제2군단에 배속되었다.
  • 7월 10일에는 대한민국 제20사단이 단장의 능선 지역에서 미국 제40보병사단과 교대했고, 제40사단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제45사단의 우익을 보강했다.
  • 미국 제10군단 역시 7월 1일 제9군단으로부터 미국 제5연대전투단을 배속받아 증강되었다. 군단 병력 이동 중 전선 작전은 재배치에 지장을 주지 않는 수준으로 유지되었다.
  • 후방 지역 및 포로수용소 경비 강화를 위해, 6월 말 마크 W.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은 미국 제24보병사단의 일본에서 한국으로의 임시 이동을 명령했다. 제34연대전투단은 7월 3일, 제19보병연대는 7월 11일 한국에 도착했으며, 제21보병연대는 7월 12일 부산에서 하역을 완료했다.[9]


7월 초 며칠간 PVA/KPA의 대규모 공격은 뜸했지만, 제8군은 PVA/KPA가 후방에서 병력 이동, 수송량 증가, 물자 비축 등을 통해 다시 강력한 공격을 준비 중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PVA의 대정찰 활동으로 정확한 규모 파악은 어려웠으나, 병력 집결은 금성 돌출부 주변 중부 전선에서 가장 활발했다.

그러나 첫 공세는 금성 지역이 아닌 철원 부근에서 시작되었다. 7월 6일, PVA 제73사단 병력이 애로우헤드(화살머리고지)에 위치한 대한민국 제2보병사단의 전초 기지 두 곳을 공격했다. 30시간 이상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으며, 종종 근접전 양상을 띠었다. PVA는 7월 8일 재정비를 위해 잠시 물러났다가, 그날 밤 6,500발의 포격 및 박격포 지원 하에 다시 공격하여 능선 중 하나의 북쪽 사면을 점령했다. 7월 9일 한국군의 반격은 성공하지 못했고, 이후 간헐적인 교전이 이어졌다. 7월 11일 새벽, 약 3시간의 전투 끝에 한국군 2개 중대가 PVA를 격퇴했다. 애로우헤드 전투 기간 동안 한국군 사단장은 공격 부대를 교체 투입했으며, 7월 11일 교전에서는 4개 대대를 동원하여 지속적으로 압박했다. 6일간의 애로우헤드 전투로 대한민국 제2사단은 5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고, 중국군 손실은 750명 이상으로 추정되었다.[9]

중국 측 기록에 따르면, 제2전차사단 제4전차연대 소속의 T-34 전차 215호는 1953년 7월 6일부터 8일까지의 전투에서 유엔군 전차 4대를 파괴하고 M46 패튼 전차 1대에 손상을 입혔다고 한다. 또한 벙커 26개, 포 9문, 트럭 1대를 파괴했다고 주장된다.[10] 이 전차는 현재 중국인민혁명군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3. 3. 중국인민지원군의 재공세 (7월 13일 ~ 20일)

7월 13일 저녁, 중국인민지원군(PVA)은 5개 군 규모의 병력을 금성 돌출부를 포함한 중부 전선에 집결시켜 대규모 공세를 준비했다. 서쪽부터 미 제9군단 소속의 대한민국 제9사단과 수도사단, 그리고 대한민국 제2군단 소속의 제6사단, 제8사단, 제3사단, 제5사단이 이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날 포병 및 박격포 사격 빈도가 증가하며 포로, 탈영병, 정보 보고 등을 통해 예견되었던 PVA의 대규모 공세가 임박했음이 확인되었다. 특히 대한민국 국군 부대를 주 목표로 삼을 것이라는 징후가 뚜렷했다.[9]

어둠이 내리자 PVA 부대는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PVA 제72사단의 증강된 연대(제24집단군)는 대한민국 제9사단의 우측을, 제203사단(제68군)은 금성 돌출부 좌측 어깨를 방어하던 수도사단을 맹렬히 공격했다. 수도사단 제1연대는 중공군의 돌파를 막기 위해 예비대까지 투입했으나 저지에 실패하고 부대가 흩어지는 피해를 입었다.[9] 수도사단 제26연대 역시 주 저항선이 붕괴되어 7월 14일 새벽 남대천 남쪽으로 철수했다. 수도사단은 큰 혼란 속에서도 117번 도로 북쪽 능선에서 중공군의 돌파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지만, 많은 병력이 포위되거나 고립되었고 기갑연대장 육근수 대령이 전사하는 등 피해가 컸다.[9]

수도사단 동쪽의 대한민국 제6사단 지역에서는 PVA 제204사단의 4개 대대가 대한민국 제19연대의 초소를 공격하여 7월 14일 아침까지 주 방어선을 돌파하고 1개 대대를 포위했다. 제204사단의 일부는 제6사단 지역을 통과해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수도사단 공격에 가담하기도 했다.[9]

동시에 금성 돌출부 우측 어깨를 방어하던 대한민국 제3사단과 제5사단도 공격을 받았다. 7월 13일 밤, PVA는 제3사단 좌측 제22연대 정면에 2개 대대를 투입하고, 제23연대에는 견제 공격을 가하는 한편, 제5사단 좌측 배후로 침투하여 제23연대의 후방을 차단했다. 포격과 기습으로 제22연대 제3대대의 진지가 돌파되었고, 제23연대 역시 후방 침투 부대에 의해 연대 지휘소가 습격당하는 등 혼란에 빠졌다.[9] 7월 14일 아침, PVA는 제3사단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여 주 방어선까지 진입했다. 제22, 23연대는 제18연대의 지원으로 버텼으나, PVA 4개 중대가 인접한 제5사단 지역을 통해 제23연대 뒤로 침투하면서 이중 포위 위협에 직면하자 결국 후퇴를 시작했다.[9]

PVA의 공세로 중부 전선 곳곳이 돌파되고 대한민국 국군 부대들이 고립되면서 극심한 혼란이 발생했다. 제6, 8, 수도사단 병력은 뒤섞여 거점을 방어해야 했고, 통신망 마비로 지휘 체계가 무너졌다. 보고 지연과 정보 부족 속에서도 PVA가 6개 사단 주력을 투입해 수도사단과 제3사단 지역에 심각한 돌파구를 형성했으며, 돌출부 중앙의 제6, 8사단이 포위될 위험이 명백해졌다.[9]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미 제8군 사령관 맥스웰 D. 테일러 대장은 7월 14일, 수도사단, 제6사단, 제8사단, 제3사단, 제5사단에 금성 돌출부 기저부의 금성천 남쪽으로 후퇴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방어선을 직선화하고 방어 정면을 축소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혼란 속에서 일부 부대는 지휘 통제를 벗어나 금성천 남쪽 방어선보다 더 남쪽으로 후퇴하여 전선에 돌출부 대신 함몰부가 생기기도 했다.[9] PVA 공세의 강도에 놀란 마크 W.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과 테일러 장군은 일본에 주둔 중이던 미 제187공수연대 전투단을 급파하여 미 제2보병사단에 배속시켰다. 미 제2사단은 미 제3보병사단의 방어 구역을 인수했고, 제187공수연대는 대한민국 제9사단을 지원하여 전선 안정을 도왔다. 미 제3사단은 수도사단 후방으로 이동하여 PVA의 진격을 저지했으며, 7월 15일에는 수도사단의 방어 구역을 공식 인수했다. 대한민국 제2군단 지역에서는 예비대였던 대한민국 제11사단이 제3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투입되었고, 제6사단은 제3사단과 함께 후방으로 철수하여 재편성에 들어갔다. 이로써 7월 15일까지 미 제8군은 서쪽부터 대한민국 제9사단, 미 제3사단(수도사단 잔류 병력 포함), 대한민국 제11, 8, 5사단을 전선에 배치하여 PVA의 공세를 저지하는 데 주력했다.[9]

7월 16일, 폭우로 PVA의 공세가 주춤해진 사이, 대한민국 제2군단(제5, 8, 11사단으로 재편)은 금성천 선을 회복하기 위한 반격을 시작했다. 대한민국 제11, 8, 5사단은 나란히 공격하여 PVA의 저항을 격퇴하며 금화 동쪽의 금성천을 향해 전진했다. 7월 16일부터 7월 19일까지 이들 3개 사단은 금성천 남쪽 고지군을 탈환했으며, 이 과정에서 제6, 3, 7사단이 예비대로 후방에 배치되었다. 7월 19일에는 대한민국 제6사단이 제5사단을 교대하여 해당 지역 방어를 맡았다. 그러나 금성천을 건너 북안의 원래 진지를 회복하려는 시도는 PVA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7월 20일 이후 중단되었다.[9] 결과적으로 대한민국 국군은 반격을 통해 빼앗겼던 지역의 일부를 회복했으나, 금성천 북쪽의 원래 방어선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채 전선이 고착되었다.

4. 전투 결과

한국군은 이 전투에서 사망 1,701명, 부상 7,548명이라는 큰 인명 피해를 입었으며, 약 2,000명이 포로로 잡히거나 실종되었다. 실종자 대부분은 전쟁 포로가 되었으나, 반공포로 석방에 대한 보복 성격의 전투였기 때문에 포로 교환 원칙 합의 이후에도 별개로 취급되어 대다수가 돌아오지 못했다. 또한 공세 초반 6사단 부사단장 임익순 대령이 포로가 되고, 지원을 나온 기갑연대장 육근수 대령이 전사하는 등 지휘관 손실도 있었다.

중국인민지원군(중공군) 측은 한국군 52,783명을 섬멸하고 2,836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발표했다. 반면, 유엔군 측은 중공군이 전사 27,216명, 부상 38,700명, 포로 186명 등 총 66,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으며, 1,428점의 무기를 노획했다고 집계했다. 중공군은 한국군보다 2~3배 우세한 병력을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인명 피해는 한국군보다 3~4배 더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투 결과, 중공군은 금성천 북안의 주요 고지를 점령하고 금성 돌출부를 제거하여 중부 전선을 정리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의 침투는 약 약 9.66km에 달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한국군 부대가 고립되고 혼란에 빠졌다. 비록 화천 지역까지 진출하려던 당초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중공군은 자신들의 승리를 선전했다.

반면, 한국군은 아이슬랜드 선 전방의 전초선만을 확보한 상태에서 휴전을 맞이했다. 결과적으로 정전 협정 조인 직전 이승만 정부의 반공포로 석방은 정전 협정을 지연시켰고, 이는 금성 전투를 촉발하여 한국군이 금성 전역 약 40km 정면에서 평균 4km를 남하하고 170km2의 영토를 상실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수천 명의 국군 포로가 귀환하지 못하게 되는 비극을 낳았다. 1953년 6월 8일 이미 포로 송환 협정이 합의된 상태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불필요한 희생을 키웠다는 비판이 있다. 중국 측 기록 역시 이승만 정부가 중국/북한 출신 포로를 억류하고 휴전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 전투의 원인이었으며, 전투 이후 정전 협정이 조속히 체결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당시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는 중공군의 공세가 이승만 정부의 '북진 통일' 주장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9] 유엔군과 한국군은 신속한 반격을 통해 잃었던 땅의 절반가량을 회복했으나, 중국과 북한 측이 휴전 회담 재개를 희망함에 따라 반격은 중단되었다. 이때 형성된 전선이 현재의 군사 분계선의 기초가 되었다.

5. 한국의 시각과 영향

금성 전투는 정전 협정 조인 직전,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강행으로 인해 중공군이 대규모 공세를 감행하면서 발생한 전투로 평가된다. 이 결정은 결과적으로 정전 협정을 지연시켰고, 막대한 인명 피해와 영토 상실이라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이 전투에서 대한민국 국군은 사망 1,701명, 부상 7,548명이라는 큰 인명 손실을 입었으며, 약 2,000명이 포로가 되거나 실종되었다. 특히 실종자 대부분은 전쟁 포로가 되었으나, 이 전투 자체가 국제법을 어겨가며 단행된 반공포로 석방에 대한 보복 성격이 짙었기 때문에, 포로 교환 논의에서 별개로 취급되어 대다수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아픔을 겪었다. 당시 국군은 공세 초반 부사단장 임익순 대령이 포로로 잡히고, 지원을 나온 기갑연대장 육근수 대령이 전사하는 등 지휘관 손실도 겪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측은 이 전투에서 한국군 52,783명을 섬멸하고 2,836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주장했으며, 유엔 측은 중공군 사상자를 약 6만 6천 명(전사 27,216명, 부상 38,700명)으로 집계했다.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은 금성 전역 약 40km 정면에서 평균 4km를 남하하여 약 170km2에 달하는 영토를 상실했으며, 아이슬랜드 선 전방의 전초선만을 확보한 상태에서 휴전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는 1953년 6월 8일, 이미 포로 개개인의 자유의사에 따라 송환을 결정하기로 합의한 상태에서 발생한 전투였기에 더욱 안타까운 희생으로 평가된다. 중국 측 기록 역시 이승만 정부가 중국/북한 출신 포로를 강제 억류하고 휴전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인 것에 대한 대응으로 금성 전투가 발생했으며, 이 전투 이후 정전협정이 조속히 체결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전투를 북진통일을 위한 정당한 과정으로 의미를 부여하려 했으나, 전쟁 막바지에 외교적 해결 대신 독단적 결정을 내림으로써 불필요한 인명 손실과 군사적 후퇴를 초래했다는 비판이 주로 진보 진영을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다. 금성 전투는 한국 전쟁의 마지막 대규모 전투이자, 전쟁의 상흔과 분단의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기억되고 있다.

6. 논란과 비판

정전 협정 조인 직전,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결정은 논란의 중심에 있다. 이 조치는 정전 협정 체결을 지연시켰으며, 중국인민지원군이 이를 명분 삼아 금성 전투를 일으키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중화인민공화국 측 기록에서도 이승만 정부의 포로 석방과 휴전 비협조에 대한 대응으로 전투가 발생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 전투를 통해 대한민국 국군은 약 40km의 전선에서 평균 4km를 후퇴하여 170km2에 달하는 영토를 상실했다. 인명 피해 역시 막심하여, 국군은 1,701명 사망, 7,548명 부상 외에 약 2,000명의 포로 및 실종자가 발생했다. 특히 공세 초반 6사단 부사단장 임익순 대령이 포로가 되고, 지원을 나온 기갑연대장 육근수 대령이 전사하는 등 국군의 작전 수행 능력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다.

더욱 비극적인 점은 이 전투에서 발생한 국군 포로들이다. 반공포로 석방에 대한 보복 성격 때문에 이들은 포로 송환 협정 논의에서 제외되어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미 1953년 6월 8일, 포로 개개인의 자유의사에 따른 송환 협정이 합의된 상태였기에, 불필요하게 희생자만 늘렸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한편, 중국인민지원군 역시 소기의 목표였던 화천댐 점령에는 실패했으며, 국군보다 2~3배 우세한 병력을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국군 피해의 3~4배에 달하는 심각한 인명 손실(유엔군 추산 사상자 약 6만 6천여 명)을 입었다는 점에서 과도한 희생을 치렀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결론적으로 금성 전투는 정전 협정 직전에 발생하여 막대한 인명 피해와 영토 상실을 초래했으며, 특히 반공포로 석방 문제와 얽혀 국군 포로들의 비극적인 미귀환 사태를 낳았다는 점에서 불필요한 전투였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7. 기타

2020년 영화 장진호는 금성 전투를 배경으로 하며, 중국 인민지원군이 전선을 강화하기 위해 사수해야 하는 교량과 미국 공군 및 포병대가 도하를 막으려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4] 웹사이트 The Battle for New China http://blog.ifeng.co[...] 2015-04-23
[5] 서적 Korean Battle Chronology: Unit-by-unit United States Casualty Figures and Medal of Honor Citations https://books.google[...] McFarland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서적 United States Army in the Korean War: Truce Tent and Fighting Front https://history.army[...] United State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10]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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