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양진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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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갑양진무대는 1868년 도바·후시미 전투 패배 후, 신선조의 곤도 이사미가 고후성 지배를 요청하여 편성된 부대이다. 곤도 이사미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고후성을 점령하여 요시노부를 옮기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주장과, 당시 육군 총재였던 가쓰 가이슈가 신정부군과의 재전을 위해 고후 출병을 인정했다는 상반된 주장이 존재한다. 부대 편성 과정에서 도쿠가와 가문은 신선조에게 갑양진무를 명하고, 무기와 자금을 지원했다. 부대 규모는 신선조를 중심으로 아이즈번, 히코네번 병사, 탄 나오키 휘하의 총대 등을 포함하여 200명 미만으로 추정된다. 부대 명칭인 "갑양진무대"는 당시 사료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메이지 시대에 처음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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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양진무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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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명칭 | 갑양진무대 (甲陽鎮撫隊) |
다른 이름 | 고요친부타이 (こうようちんぶたい) |
창설 시기 | 게이오 4년 (1868년) 3월 |
해체 시기 | 게이오 4년 (1868년) 4월 |
소속 | 구 막부군 |
지휘관 | 콘도 이사미 |
상세 정보 | |
결성 배경 | 고슈 가도 방어, 고후성 접수 |
주요 전투 | 고슈 가도 전투 |
결과 | 신정부군에 패배, 해산 |
관련 인물 | 콘도 이사미 히지카타 도시조 오키타 소지 나가쿠라 신파치 사이토 하지메 하라다 사노스케 도도 헤이스케 이토 가시타로 |
2. 편성 배경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패배하여 에도로 돌아온 신선조의 곤도 이사미가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고후성 지배를 일임받도록 요청한 것이 시초였다. 그 시기에 대해 나가쿠라 신파치는 "에도 도착 직후"[1]라고 언급했으며, 그 의도에 대해서는 "고슈성을 자신의 힘으로 손에 넣어 여기에 요시노부를 옮기려는 계획을 세웠다"[2]고 적고 있다. 또한 당시 육군 총재 (1월 23일부터 2월 25일까지. 같은 날 육군 총재 직에서 물러났지만, 새롭게 군사 취급을 명령받았으므로, 계속해서 군사 부문의 책임자였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의 요직에 있던 가쓰 가이슈는 메이지 17년에 편찬한 『해난록』에서 "후시미의 변에서 한 번 패배하여 모두 동쪽으로 돌아가 곤도, 히지카타 그 무리들을 이끌고 돌아와 재전을 요청하며 크게 그 무리를 모았다"라고 하여 곤도 등이 "재전"을 꾀했다고 한 후, 고후 출병에 대해서도 "겉으로는 공순을 표하고 음으로는 일전을 포함하여 고후로 간다"라며 신정부군과의 "일전"을 기획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를 제시했다.[3]
하지만, 이러한 가쓰가 곤도 등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듯한 말에는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이시이 다카시는 『유신의 내란』에서 "도쿠가와 정권의 육군 총재 가쓰가 곤도, 히지카타, 후루야[4] 등의 탈주를 공인한 것은,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책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지지만, 병사와 병기까지 공급하고, 심지어 직함을 주어 임지까지 지정한 것은, 너무 세심한 조치이다. 그래서 가쓰의 탈주 공인 정책은, 단지 소극적인 골치 아픈 문제 해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내버려두고 게릴라전을 하게 하여, 정부군과의 교섭을 유리하게 이끌려는 속셈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5]라고 적고 있으며, 가쓰가 곤도 등의 의도를 충분히 알고서 일부러 고후로의 출병을 인정했다고 주장한다.
2. 1. 곤도 이사미의 의도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패배하여 에도로 돌아온 신선조의 곤도 이사미가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고후성 지배를 일임받도록 요청하였다.[1] 나가쿠라 신파치는 곤도가 고슈성을 자신의 힘으로 손에 넣어 요시노부를 옮기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증언했다.[2] 당시 육군 총재였던 가쓰 가이슈는 곤도 등이 재기를 노리고 고후로 출병했다고 주장했다.[3]하지만, 이시이 다카시는 가쓰가 곤도 등의 의도를 알고서 일부러 고후 출병을 인정했다고 주장하며, 가쓰가 곤도 등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듯한 말에는 의문을 제기했다.[5]
2. 2. 가쓰 가이슈의 역할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패배하여 에도로 돌아온 신선조의 곤도 이사미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고후성 지배를 요청하였다.[1] 당시 육군 총재였던 가쓰 가이슈는 훗날 『해난록』에서 곤도 등이 "재전"을 꾀했으며, 고후 출병 또한 신정부군과의 "일전"을 위한 계획이었다고 주장했다.[3]그러나 이시이 다카시는 『유신의 내란』에서 가쓰가 곤도 등의 탈주를 공인하고 병사와 병기까지 공급한 것은, 게릴라전을 통해 정부군과의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5] 가쓰가 곤도 등의 의도를 알고도 고후 출병을 의도적으로 인정했다고 본다.
3. 편성 과정
1868년 2월 28일, 도쿠가와 가문은 신센구미에게 '갑양진무'를 명하고, 대포 6문, 개량 소총 25정, 미니에 소총 200정을 지급했다.[6] (다만, "낭사 분큐 보고 기사"[7]에서는 대포 8문, 개량 소총 300정으로 기록되어 있어 차이가 있다.) 또한 아이즈번에서 1200냥, 전 막부 어전의 마쓰모토 료준으로부터 3000냥을 지원받았다.[8]
에도 출발 시점에서 갑양진무대의 정확한 병력 규모는 불분명하다. 여러 자료를 통해 신센구미(약 70명[9]), 아이즈·히코네 번사, 탄 나이키 휘하의 총대(약 100명[2]) 등 총 200명 미만의 혼성군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6]
탄 나이키 휘하 총대의 갑양진무대 참가에 대해서는 고모자와 칸이 『신선조 말상기』에 쓴 것으로 알려지게 되었지만, 고모자와 칸이 쓴 내용과 그가 전거로 삼았다는 "나가쿠라 오키나 유담" 사이에는 총대 인원을 포함하여 약간의 불일치가 있다.[2] 나가쿠라 신파치가 다이쇼 2년에 『오타루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말한 내용에 따르면, 에도 아사쿠사의 신마치에 탄자에몬 개명 야지마 나이키는 에타의 우두머리였으나, 마쓰모토 료준의 주선으로 막부에 등용되었고, 건아 100명을 선발하여 프랑스식 조련을 받게 한 후 신센구미에 부속되었다고 한다.[2] 그러나 나가쿠라 신파치가 말하는 것처럼 에도의 에타 두령인 탄자에몬이 어전 이상으로 소환되었다는 사실은 확인되지 않으며, 사료로서 뒷받침되는 것은 탄자에몬이 게이오 4년 1월 29일 자로 "평인"으로 승격되어 이름도 탄 나이키로 고쳤다는 사실뿐이다.[10]
부대명 "갑양진무대"는 동시대의 사료에는 확인되지 않으며, 메이지 32년 발행된 『구 막부』 제3권 제7호에 게재된 "가시오의 전투"에서 처음 등장한다.[14] 그 후 고모자와 칸이 이를 전거로 『신선조 말상기』에 써서 알려지게 되었다. 다만, 사토 히고로가 기록한 "사토 히고로 일기"와 구 막부군의 진군 루트에 해당하는 숙장 역인의 서장, "낭사 분큐 보고 기사"에 "진무대"라고 기록되어 있어,[15][16][17] 적어도 "진무대"라고 칭했던 것은 확인된다.
3. 1. 부대 구성
에도 출발 시점에서 갑양진무대의 정확한 병력 규모는 불분명하다. 여러 자료를 통해 신센구미(약 70명[9]), 아이즈·히코네 번사, 탄 나이키 휘하의 총대(약 100명[2]) 등 총 200명 미만의 혼성군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6]탄 나이키 휘하 총대의 갑양진무대 참가에 대해서는 고모자와 칸이 『신선조 말상기』에 쓴 것으로 알려지게 되었지만, 고모자와 칸이 쓴 내용과 그가 전거로 삼았다는 "나가쿠라 오키나 유담" 사이에는 총대 인원을 포함하여 약간의 불일치가 있다.[2] 나가쿠라 신파치가 다이쇼 2년에 『오타루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말한 내용에 따르면, 에도 아사쿠사의 신마치에 탄자에몬 개명 야지마 나이키는 에타의 우두머리였으나, 마츠모토 료준의 주선으로 막부에 등용되었고, 건아 100명을 선발하여 프랑스식 조련을 받게 한 후 신센구미에 부속되었다고 한다.[2] 그러나 나가쿠라 신파치가 말하는 것처럼 에도의 에타 두령인 탄자에몬이 어전 이상으로 소환되었다는 사실은 확인되지 않으며, 사료로서 뒷받침되는 것은 탄자에몬이 게이오 4년 1월 29일 자로 "평인"으로 승격되어 이름도 탄 나이키로 고쳤다는 사실뿐이다.[10]
부대명 "갑양진무대"는 동시대의 사료에는 확인되지 않으며, 메이지 32년 발행된 『구 막부』 제3권 제7호에 게재된 "가시오의 전투"에서 처음 등장한다.[14] 그 후 고모자와 칸이 이를 전거로 『신선조 말상기』에 써서 알려지게 되었다. 다만, 사토 히고로가 기록한 "사토 히고로 일기"와 구 막부군의 진군 루트에 해당하는 숙장 역인의 서장, "낭사 분큐 보고 기사"에 "진무대"라고 기록되어 있어,[15][16][17] 적어도 "진무대"라고 칭했던 것은 확인된다.
4. 부대 명칭 논란
4. 1. '진무대' 명칭
참조
[1]
서적
新選組日記:永倉新八日記・島田魁日記を読む
PHP研究所
2003-06
[2]
서적
新撰組永倉新八:故杉村義衛の壮年時代
杉村義太郎
1927-07
[3]
서적
海舟全集
改造社
1928-11
[4]
문서
衝鋒隊를 조직하여 북관동, 에치고, 센다이, 하코다테와 전전한 [[후루야 사쿠자에몬]]의 일.
[5]
서적
維新の内乱
至誠堂
1968-0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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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選組日記:永倉新八日記・島田魁日記を読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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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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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編・新撰組流山始末:幕末の下総と近藤勇一件
崙書房
2004-07
[10]
웹사이트
旧幕府、長吏弾左衛門を編して平人と為す。弾左衛門、乃ち内記と改名す。
https://clioimg.hi.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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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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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本順自伝・長与専斎自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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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選組史料大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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調布の近世史料 上
調布市
1987-0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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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選組日記:永倉新八日記・島田魁日記を読む
PHP研究所
20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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