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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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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선조는 막부 말기 교토를 중심으로 활동한 무사 집단으로, 1863년 쇼군 경호를 위해 결성되었다. 존왕양이 세력에 대항하며, 이케다야 사건, 금문의 변 등에서 활약했으나, 보신 전쟁에서 패배하며 해산되었다. 국장 곤도 이사미, 부장 히지카타 도시조 등을 중심으로 엄격한 규율과 검술 훈련을 통해 조직을 유지했으며, 검은색 제복과 단다라 무늬 하오리로 유명했다. 신선조는 메이지 시대 이후 다양한 작품의 소재가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대중문화에서 널리 다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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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조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신센구미 깃발
국적교토, 일본
소속로시구미 (1863년 해산)
막부 육군
역할도쿠가와 막부 대표 및 교토 보호
규모302명
해산일1869년 6월 23일
별칭신선조 (新選組)
표어해당 정보 없음
기념일해당 정보 없음
장비해당 정보 없음
웹사이트해당 정보 없음
지휘부
현재 지휘관해당 정보 없음
주요 지휘관세리자와 카모 (1863년)
곤도 이사미 (1863년–1868년)
도노우치 요시오 (1863년)
히지카타 도시조 (1868년–1869년)
사이토 하지메 (1868년)
소마 카즈에 (1869년)
전투 및 사건
참여 전투이케다야 사건
금문의 변
젠자이야 사건
아케보노테이 사건
산조 세이사쓰 사건
아부라노코지 사건
덴마야 사건
보신 전쟁
도바-후시미 전투
고슈-가쓰누마 전투
우쓰노미야 성 전투
시라카와 전투
보나리 고개 전투
아이즈 전투
미야코 만 해전
후타마타 전투
하코다테 전투 (항복)
기타 정보
신선조 표기로마자 표기: Shinsen-gumi
가나 표기: しんせんぐみ
한자 표기: 新選組
한글 표기: 신센구미

2. 역사

1854년 일본이 서구 열강에 의해 강제로 개항을 하면서 무역을 허용하지 않으면 군사적 충돌에 직면하게 되어 내부 정치적 불안정이 심화되었다. 오랫동안 지속된 정치적 의견 중 하나는 존왕양이일본어(천황을 존경하고 오랑캐를 배척한다)였다.[3] 교토의 조슈 번을 중심으로 한 존왕파는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에 대응하여 도쿠가와 막부는 1862년 10월 19일 낭사조일본어를 결성했다. 낭사조일본어에도의 검술 도장에서 모집된 234명의 낭인일본어(주군이 없는 사무라이)으로 구성된 부대였다.[14]

부대의 명목상 지휘관은 하타모토 마쓰다이라 가타모리였고, 지도자는 쇼나이 번 출신의 낭인일본어 기요카와 하치로였다. 낭사조일본어의 임무는 고메이 천황과의 중요한 만남을 위해 교토로 향하는 14대 쇼군일본어 도쿠가와 이에모치를 보호하는 것이었다.[4] 군사 정부인 막부일본어의 수장인 도쿠가와 이에모치는 외국인 추방을 요구하는 최근의 천황 칙령을 일본이 어떻게 시행해야 할지 논의하기 위해 초청받았다.[5]

낭사조일본어는 도쿠가와 막부의 자금 지원을 받았지만, 지도자 기요카와 하치로와 다른 사람들은 천황에 대한 강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고, 반군으로부터 도시를 감시하기 위해 교토에서 다른 낭인들을 모을 계획을 세웠다. 1863년 3월 26일, 기요카와는 쇼군 이에모치의 교토 행렬의 선봉으로 낭사조를 에도에서 이끌었고, 1863년 4월 10일에 교토에 도착했다.

교토에서 기요카와의 계획이 드러나자, 그는 즉시 Rōshigumi일본어에게 에도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구성원들은 해산되어 에도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쇼나이 번의 후원 하에 신초구미를 결성하게 된다. 그러나 미토 번 출신을 중심으로 한 19명의 Rōshigumi일본어 대원들은 교토에 남아 미부 로시구미일본어를 결성했다.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교토의 정치 상황을 신중하게 평가한 후, 미부 로시구미의 임무 범위를 막부 보호에서 교토의 거리를 순찰하고 도쿠가와 막부의 이름으로 질서를 회복하는 것으로 변경해야 한다고 느꼈다. 1863년 8월 18일, 미부 로시구미는 신선조로 개명되었다.[7]

신선조는 세리자와 카모, 니이미 니시키, 곤도 이사미가 이끌었다. 신선조는 도쿠가와 정권을 지지하는 또 다른 강력한 단체인 아이즈 번에 교토를 치안하는 것을 허가해달라는 요청서를 제출했고, 요청은 받아들여졌다.

1863년 9월 30일, 조슈 번 (반 도쿠가와) 씨족은 도쿠가와, 아이즈, 사쓰마 번 씨족에 의해 황궁에서 쫓겨났다. 신선조는 아이즈를 돕고 황궁의 문을 지키기 위해 파견되었다.

교토에서 세리자와의 변덕스럽고 파괴적인 행동은 결국 아이즈의 마쓰다이라 가타모리가 신선조에게 세리자와와 그의 일당을 암살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했다. 1863년 10월 19일, 세리자와 파벌의 일원인 니이미 니시키는 야마나미 케이스케와 히지카타 도시조에 의해 규정 위반으로 할복을 강요당했다. 10월 30일, 히지카타가 이끄는 몇 명의 신선조 구성원은 야기 겐노조의 집에 들어가 세리자와, 그의 여자 오우메, 히라야마 고로를 암살했으며, 히라마 주스케는 그날 밤 도망친 유일한 생존자였다. 이 모든 내분으로 곤도가 지도자가 되었다. 3개월 후, 노구치 겐지는 알 수 없는 이유로 할복을 명령받았다.

1864년 이케다야 사건금문의 변에서의 활약 이후, 신선조는 더욱 성장하여 니시혼간지로 본거지를 옮겼다. 1867년에는 이토 가시타로 등이 고료에지를 결성하여 이탈하였고, 신선조는 막신(幕臣)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아부라노코지 사건을 통해 고료에지를 격퇴하고 이토 가시타로 등을 암살하였다.

1867년, 도쿠가와 요시노부대정봉환을 단행하자 신선조는 와카도시오리 나가이 나오유키의 감독 하에 평화롭게 교토를 떠났다.[4] 이는 보신 전쟁의 시작을 알렸다.[14]

교토를 떠난 후, 신선조는 1868년 1월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제국군에 맞서 싸운 막부 세력 중 하나였다. 제국군은 조슈 번, 사쓰마 번, 도사 번의 연합군으로 구성되었으며, 이 전투 중 곤도는 후시미에서 총상을 입었다.

신선조의 전술은 적보다 많은 인원으로 집단을 포위하여 습격하는 방식이었다. 예를 들어 산조 대사찰 사건에서는 8명의 적에게 34명의 아군을 준비했고, 아부라코지 사건에서는 7명의 적에게 35, 6명으로 습격했다.[49]

막부 말 교토정치의 중심지였으며, 여러 번에서 존왕양이・도막 운동의 지사들이 모여들었다. 기존의 교토 치안 유지를 담당하던 교토 소사다이와 교토 마치부교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한 에도 막부는, 기요카와 하치로의 헌책으로 낭사조의 결성을 계획했다.

신선조는 대부분 상인농민 출신의 낭사로 구성된 "아이즈번 맡김"이라는 비정규 조직으로, 대원 수는 최성기에 200명을 넘어섰다. 교토에서 양이파 탄압에 나섰으며, 상가에서 강제로 자금을 제공받거나, 대의 규칙 위반자를 차례차례 숙청하는 등 내부 항쟁을 반복했다.

1867년 6월에 막신으로 발탁되었다. 이듬해 보신 전쟁이 시작되자, 구 막부군을 따라 전전했지만,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패배한 후 흩어졌고, 고슈 가쓰누마에서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이끄는 진충대에게 격파되어 패주하여 해산했다. 국장 곤도 이사미는 체포되어 참수형에 처해졌다. 그 후, 부장 히지카타 토시조가 보신 전쟁 마지막 전투인 하코다테 전쟁에서 전사했다. 신선조는 신정부군에 항복하게 되었다.

메이지 유신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역적은 신선조라는 취급을 받게 된 풍평 피해도 있었다.

조직력을 강화하기 위해, 직책을 두고 지휘 명령 체계를 구축했다.

2. 1. 결성

분큐 2년(1862년), 에도 막부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교토 상경 경호를 위해 기요카와 하치로의 헌책을 받아들여 낭사들을 모집, '로시구미(浪士組)'를 결성했다.[3]

분큐 3년(1863년) 2월, 2백여 명의 낭사들은 '로시구미'를 이루어 나카센도를 따라 서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교토에 도착한 뒤, 기요카와 하치로가 근왕 세력과 내통하여 로시구미를 천황의 병력으로 만들려던 계획이 발각되었다.[32] 곤도 이사미, 히지카타 도시조 등 시위관파와 세리자와 가모를 중심으로 하는 미토파는 쇼군 경호를 위해 교토에 남을 것을 주장했다.[29]

우도노 규오는 로시구미의 도노우치 요시오와 이에사토 지로에게 잔류자를 모으도록 지시했고, 이에 시위관파, 미토파 등이 교토 미부 촌에 남았다. 이들은 '미부로시구미(壬生浪士組)'를 결성하고, 교토 수호직 마쓰다이라 가타모리의 비호 아래 불손한 낭사들의 체포 및 경비를 위임받았다.[30][31]

분큐 3년 8월, 미부로시구미는 8월 18일의 정변 경비에 출동하여 능력을 인정받고, '신센구미(新選組)'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32] 이후 곤도 이사미히지카타 도시조 등 시위관파가 세리자와 가모미토파를 숙청하고 조직을 장악했다.

2. 2. 발전

1864년 이케다야 사건에서 존왕양이파 지사들을 체포하거나 살해하고, 금문의 변 진압에도 참여하여 그 활약상을 인정받아 조정, 막부, 아이즈 번으로부터 포상을 받았다.[33] 조직 규모를 확대하여 200명이 넘는 대원을 확보하고, 본거지를 니시혼간지로 이전했다.[33] 1867년, 이토 가시타로 등의 일파가 고료에지를 결성하여 신센구미를 이탈했고, 신센구미는 막부의 신하로 인정받았다.[61] 아부라노코지 사건에서 고료에지를 격퇴하고 이토 가시타로 등을 암살했다.

2. 3. 보신 전쟁과 해산

1867년 10월,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대정봉환을 단행했다. 신센구미는 옛 막부군에 가담하여 보신 전쟁에 참전했으나, 첫 전투였던 도바 후시미 전투에서 신정부군에 패배했다.[14]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이끄는 막부 소유의 군함으로 에도로 물러났다. 이 시기 불리함을 깨달은 대원들이 잇따라 탈주하면서 전력이 저하되었다.

그 뒤 막부로부터 신정부군의 고후(甲府) 진군을 막는 임무를 맡아 갑양진무대(甲陽鎮撫隊)라 이름을 고치고 고슈 가도를 따라 고후 성으로 진군하였으나 도중에 고슈 가쓰누마 전투에서 신정부군에 다시금 패퇴하고 에도로 돌아온다. 이때 방침의 차이로 나가쿠라 신파치, 하라다 사노스케가 이탈해 정병대(靖兵隊)를 결성하였고, 곤도, 히지카타 등은 재기를 노리고 산으로 흩어져서 이동하였으나, 곤도 이사미가 신정부군에 체포되어 처형되고 오키타 소지도 지병이었던 폐결핵으로 에도에서 사망하였다. 여러 사정으로 에도에 돌아왔던 하라다는 창의대에 가입하여 우에노 전쟁에서 싸우다 전사하였다(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신센구미는 우쓰노미야 성 전투, 아이즈 전쟁 등에도 참가하였으나 아이즈에서는 사이토 하지메 등이 이탈해 잔류하였으며, 남은 대원들은 에조치를 향해 가서 에노모토 등에 합류, 후타마타구치 전투 등에서 활약하였다(에조 공화국 항목 참조). 신정부군이 하코다테로 진군해 오자 벤텐다이바(弁天台場)에서 신정부군과 싸우던 대원들을 돕고자 히지카타 등 여러 명이 나섰다가, 히지카타 도시조는 총탄에 맞아 전사하고 식량이나 물도 떨어져 결국 신센구미는 항복하였다. 옛 막부군은 하코다테의 고료가쿠에서 신정부군에 항복하였다(하코다테 전쟁).

메이지 신정부는 신센구미 대원의 유족들에게 유품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3. 조직

분큐 2년(1862년), 에도 막부는 쇼나이 번 출신 기요카와 하치로의 건의를 받아들여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교토로 상경할 때 경호를 명목으로 로시를 모집했다.

다음 해인 분큐 3년(1863년) 2월, 200명 정도의 로시들은 쇼군 상경에 앞서 "로시구미"라는 단체를 만들어 나카센도를 따라 서쪽으로 향했다. 마쓰다이라 가즈사노스케, 우노노 하토오, 구보타 시즈카쓰, 야마오카 뎃타로, 마쓰오카 반, 나카조 가네노스케, 사사키 다다사부로 등이 이들을 교토까지 인솔했다.

교토에 도착한 후, 기요카와가 존왕 세력과 내통하여 로시구미를 천황 휘하의 병력으로 삼으려는 계책이 발각되었다. 낭사취체역 간의 협의 결과, 기요카와의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 로시구미를 에도로 돌려보내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곤도 이사미, 히지카타 도시조를 중심으로 하는 시위관 파와 세리자와 가모를 중심으로 하는 미토 파는 쇼군 경호를 위해 교토에 남겠다고 주장했다.

우노노 하토오는 로시구미의 도노우치 요시오와 이에자토 지로에게 잔류자를 모으도록 지시했다. 이에 시위관 파, 미토 파, 도노우치 이하, 네기시 유잔 일파 등이 교토 미부 촌에 남았지만, 네기시 파는 직후 탈퇴했다. 도노우치와 이에사토는 배척되었고, 같은 해 3월 공무합체에 따른 양이 단행 실현을 돕기 위해 신센구미의 전신인 "미부 로시구미"(정충 로시구미)를 결성했다. 한편 에도로 돌아간 이들은 신초구미를 결성했다.

미부 로시구미는 미부 촌의 야기 저택과 마에카와 저택 및 주변 저택을 둔소로 삼고 제1차 대사 모집을 실시했다. 그 결과 36명 정도가 모였으며, 교토 수호직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로부터 불량 로시 단속과 시중 경비를 위임받았다.

4월 오사카의 환전상 히라노야 고헤에에게 100냥을 제공받아 대복과 대기를 갖추고 대규 제정에 착수했다.

6월 오사카 스모 스모 선수와 난투가 벌어져 여러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 미부 로시구미에도 부상자가 나왔다. 봉행소는 스모 선수 측에 잘못이 있다고 판단했고, 스모 선수 측은 미부 로시구미에 50냥을 보내 사과했다.

8월 세리자와 가모 등 약 30명의 대원이 교토의 생사도매상 야마토야 쇼헤이에 자금 마련을 거절당한 것에 분노하여 불을 질렀다. 이들은 칼을 뽑아 소방수의 접근을 막았고, 야마토야는 하룻밤 사이에 모두 타버렸다. 이 사건으로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분노하여 곤도 등을 불러 처벌을 명했다고 한다. 세리자와 및 미부 로시구미의 관여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도 있지만[29], 로시구미의 이름을 적은 풍설서가 많이 남아 불을 질렀다는 설도 있다.[30][31]

같은 달 미부 로시구미는 8월 18일의 정변 경비에 출동하여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새로운 대명 "신선조"를 하사받았다. 대명은 무가 전주[32]에서 받았다는 설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로부터 받았다는 설이 있다. 후자는 아이즈 번주 본진 경비 부대명을 가타모리에게 받았다는 의미이다.

9월 곤도와 히지카타 등 시위관 파가 야기 저택에서 세리자와 가모, 히라야마 고로를 암살했다. 히라마 시게스케는 탈주했고, 노구치 겐지는 12월 할복했다. 미토 파는 제거되었고, 시위관 파가 조직을 장악하여 곤도를 정점으로 하는 조직을 정비했다.

이케다야 터, 교토시나카교구 산조도리 가와라마치, 이름을 딴 이자카야로 운영되고 있다(2009년)


겐지 원년(1864년) 6월 5일 이케다야 사건에서 양이파 지사를 체포하거나 참살했다. 8월에는 금문의 변 진압에 참가했다.

이케다야 사건과 금문의 변에서의 공으로 조정, 막부, 아이즈 번으로부터 감상과 함께 200냥이 넘는 은상을 하사받았다. 같은 해 9월 제2차 대원 모집을 실시했다. 이케다야 사건으로 신센구미의 지명도가 높아졌기 때문에 히지카타, 사이토, 이토, 도도 헤이스케 등 간부가 직접 에도로 가서 검술 도장 등을 방문하여 이토 가시타로 일파를 영입하는 데 성공, 다음 해 5월에 32명으로 교토로 돌아온 것이 확인되었다.[33] 이러한 활동으로 신센구미는 200명까지 늘어났고, 대원을 수용하기 위해 미부 둔소에서 니시 혼간지로 본거지를 이전했다.

조슈 정벌에 대비하여 전장에서의 지휘 명령을 명확히 하기 위해 소대(1번대~8번대 및 소하물 잡구)로 개편했고, '군중 법도'도 제정했다. 그러나 신센구미에 출동 명령은 없었다.

게이오 3년(1867년) 3월 이토 가시타로 일파가 사상 차이 등으로 고료 에지를 결성하여 탈퇴했다. 같은 해 6월 신센구미는 막신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11월 고료 에지를 습격하여 이토, 핫토리, 도도, 모우치를 참살했고, 시노하라, 도야마, 스즈키, 가노는 도주했다(아부라노코지 사건).

게이오 3년(1867년) 10월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대정봉환을 단행했다. 신센구미는 구 막부군을 따라 보신 전쟁에 참가했지만, 첫 전투인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신정부군에 패배했다. 이때 이노우에 겐자부로가 전사했다. 에노모토 다케아키가 이끄는 막부 소유 군함으로 에도로 철수했다. 이 시기 전황의 불리함을 깨달은 대원들이 잇따라 탈주하여 전력이 저하되었다.

유산 본진 터(지바현나가레야마시)
콘도 이사미·히지카타 도시조의 이별지.


이후 구 막부 측으로부터 신정부군의 고후 진군을 저지하는 임무를 부여받아 고요 진무대로 이름을 바꾸고 고슈 가이도를

3. 1. 지휘 체계

신센구미는 국장을 최고 책임자로, 그 아래 부장, 총장, 참모 등의 직책을 두어 지휘 체계를 확립했다.[49] 부장 보좌는 조장으로서 평대사를 통솔했으며, 각 대는 1번대에서 10번대까지 편성되어 각 10명 전후의 인원으로 구성되었다. 조장 아래에는 오장을 두었다. 신센구미의 조직 편성은 직무의 복수제를 원칙으로 하는 에도 시대의 각 조직과는 달리 1인제이며, 서양식 군제의 영향이 있다는 지적이 있다.

조장(組長)은 다음과 같다.[49]

번대조장비고
1번대오키타 소지검술 사범
2번대나가쿠라 신파치검술 사범
3번대사이토 하지메검술 사범
4번대마츠바라 츄지유술 사범
5번대타케다 간류사이군사 전략 사범
6번대이노우에 겐자부로
7번대타니 산주로창술 사범
8번대도도 헤이스케
9번대스즈키 미키사부로
10번대하라다 사노스케


3. 2. 주요 간부

局長일본어 곤도 이사미는 텐넨리신류 4대 종가였다.

総長일본어야마나미 게이스케였다.

副長일본어히지카타 도시조였다.

参謀일본어이토 가시타로였다.[58]

첩자는 시마다 카이와 야마자키 스스무였다.

組長일본어은 다음과 같다.

최고 직책은 局長일본어이다. 바로 아래에는 국장을 보좌하는 副長일본어이 있으며, 그 아래에 副長補佐일본어, 勘察方일본어 (내무 감찰), 計定方일본어 (회계 담당) 등의 직책을 두었다. 부장보좌는 조장으로서 평대사를 통솔했다. 각 대는 1번대에서 10번대까지 있으며, 각 인원은 10명 전후이다. 조장 아래에 오장을 두었다. 신선조의 조직 편성은 직무의 복수제를 원칙으로 하는 에도 시대의 각 조직과는 달리 1인제이며, 서양식 군제의 영향이 지적되고 있다.

신선조의 이름을 사용하기 이전 (미부 로시구미)도 포함하여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3. 3. 부장 보좌 및 조장

신선조의 부장 보좌 및 조장은 다음과 같다.

1864년 편제 당시 조두는 다음과 같다.

  • 2번대 조두: 이토 카시타로
  • 5번대 조두: 오가타 슌타로
  • 히라야마 주스케
  • 노구치 겐지
  • 안도 사타로
  • 히라야마 고로
  • 사에키 마타사부로

3. 4. 감찰

야마자키 스스무곤도 이사미히지카타 도시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으며, 조사의 달인이었다고 한다.[61] 시노하라 다이노신은 유술사범을 겸했으며, 이토 가시타로 계파였으나 아부라노코지 사건에서 살아남아 후에 곤도를 저격했다.[61] 시마다 가이는 나가쿠라 신파치의 친구였다고 하며, 천수를 누렸다. 후에 다케다 간류사이가 암살당하자 5번대 대장이 되었다.[61] 요시무라 간이치로는 모리오카 번 출신으로 호쿠신잇토류, 가고시마 신토류 출신이며, 아사다 지로의 소설 '칼에 지다'의 주인공이다.[61]

신선조의 감찰 담당 대원은 다음과 같다.

이름역할 및 주요 활동
야마자키 스스무곤도의 신임을 받았으며, 조사의 달인[61]
시노하라 다이노신유술사범 겸임, 이토 계파, 곤도 저격[61]
시마다 가이나가쿠라의 친구, 5번대 대장[61]
요시무라 간이치로모리오카 번 출신, 소설 칼에 지다 주인공[61]
가와시마 가쓰지(新撰組)[61]
하야시 신타로(新選組)[61]
아사노 훈(新選組) (후지타로)[61]
핫토리 타케오[61]
아시야 노보루[61]
오가타 슌타로[61]
오이시 구와지로[61]
야스토미 사이스케[61]
키시지마 요시타로[61]
안도 유지로[61]
이바라키 츠카사[61]
무라카미 키요시(新選組)[61]
타니 슈헤이 (콘도 슈헤이)[61]
콘도 하야오[61]


3. 5. 검술 사범

이름비고
오키타 소지신센구미에서 가장 뛰어난 검객으로 알려져 있다. 천연이심류의 달인이며,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이케다 코사부로
나가쿠라 신파치신센구미에서 몇 안 되는 장수한 인물 중 하나이다. 오키타 소지, 사이토 하지메와 함께 검술의 달인으로 꼽힌다. 신도무념류의 달인이다.
다나카 토라조
아라이 타다오
요시무라 간이치로
사이토 하지메암살에 있어서는 신센구미 최고였다고 한다. 자신만의 독자적인 검술인 일도류를 사용했다. 이토 가시타로가 탈퇴할 때 함께 탈퇴했다가 다시 돌아왔다. 히지카타 도시조의 명을 받아 이토 가시타로를 감시했다는 설이 있다. 유신 이후 장수했다.


3. 6. 창술 사범

창술|そうじゅつ일본어 사범으로는 다니 산주로가 있었다. 그는 호조인류 창술의 달인이었다.[61]

3. 7. 대원

신센구미는 전성기에 약 300명의 대원을 보유했다.[36] 도쿠가와 시대에는 최초로 무사 계급뿐만 아니라 농민, 상인 등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의 입대를 허용했다.[36] 많은 이들이 사무라이가 되어 정치에 참여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신센구미에 합류했다. 그러나 신센구미 대원 대부분이 무사 계급 출신이 아니라는 것은 오해이다. 당시 총 302명의 대원 중 106명을 조사한 결과, 사무라이가 87명, 농민이 8명, 상인이 3명, 의사가 3명, 승려가 3명, 장인이 2명이었다. 오키타 소지, 사이토 하지메, 나가쿠라 신파치, 하라다 사노스케 등 여러 지도자는 무사 출신이었다.

신센구미는 나이와 신분에 따른 제한 없이 충성을 다해 나라에 보답하려는 뜻이 있는 건강한 사람이면 입대할 수 있었다.[36] 실기 시험도 없었다.[37][38] 단, 기혼자는 처자를 미부의 둔소에서 40km 이상 떨어진 곳에 거주하도록 하는 조건이 있었다. 이는 신센구미가 남자만의 합숙제를 실시하고, 처자가 가까이 있으면 목숨을 아끼게 될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간부로 승진하면 교토에 집을 소유하고, 처자나 첩을 맞이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신센구미와 교류가 있었던 가타 구니노리의 회고에 따르면, 입대 후 일정 기간은 "가동지(仮同志)"라는 시용 기간이 있어서, 선배 대원들이 밤에 밀어붙이는 등의 방법으로 담력을 시험했으며, 이때 겁쟁이 같은 행동을 한 자는 추방되었다고 한다.[39]

최고 직책은 '''국장'''이다. 바로 아래에는 국장을 보좌하는 '''부장'''이 있으며, 그 아래에 '''부장보좌''', '''감찰방''' (내무 감찰), '''계정방''' (회계 담당) 등의 직책을 두었다. 부장보좌는 조장으로서 평대사를 통솔했다. 각 대는 1번대에서 10번대까지 있으며, 각 인원은 10명 전후이다. 조장 아래에 오장을 두었다. 신센구미의 조직 편성은 직무의 복수제를 원칙으로 하는 에도 시대의 각 조직과는 달리 1인제이며, 서양식 군제의 영향이 지적되고 있다.

신센구미의 대원은 다음과 같다. 신센구미의 이름을 사용하기 이전 (미부 로시구미)도 포함한다.

파벌주요 인물
세리자와 파세리자와 카모, 니이미 니시키, 히라야마 고로, 히라마 주스케, 노구치 겐지, 아라야 신고로, 사에키 마타사부로
곤도곤도 이사미, 히지카타 토시조, 이노우에 겐자부로, 오키타 소지, 나가쿠라 신파치, 사이토 하지메, 하라다 사노스케, 토도 헤이스케, 야마나미 케이스케
토노우치 파토노우치 요시오, 이에사토 쓰구오,[4] 아비루 에이사부로, 네기시 유잔
기타오쿠사와 에이스케, 시마다 가이, 나카지마 노보루, 가와시마 가쓰지, 하야시 신타로, 구즈야마 부하치로, 마에노 고로, 아베 주로, 이토 데쓰고로, 누마지리 고분고, 곤도 요시스케, 구메베 마사치카, 가노 와시오, 나카니시 노보루, 오하라 고조, 도야마 야헤이, 나카무라 고사부로, 이케다 고사부로, 하시모토 가이스케, 이바라키 쓰카사, 오제키 마사지로, 시무라 무사시, 아리도오시 시메노스케, 사사키 구라노스케, 마즈메 류타로, 마즈메 류겐사이, 하마구치 기이치, 다도코로 히로토, 나카무라 긴고, 히지카타 쓰시마, 모리 로쿠로, 야마노 하치주하치, 아리도오시 간고, 슈쿠인 료조, 마고시 타로, 마고시 사부로, 마쓰자키 세이마, 시노즈카 미네조, 후지모토 히코노스케, 이토 요하치로, 야나기다 산지로, 우에다 긴고, 와다 하야토, 나카무라 규마, 칸노 로쿠로, 미시나 츄지, 이키 하치로, 기우치 미네타, 마쓰모토 기지로, 다케우치 겐타로, 니타 가쿠자에몬, 마쓰야마 이쿠노스케, 쓰카모토 젠노스케, 무로 다쿠노스케, 와다 쥬로, 마키노 겐시치로, 오가와 잇사쿠, 사노 시메노스케, 사나다 요메노스케, 나카니시 노보루, 시바타 히코사부로, 기노시타 야자부로, 기노시타 이와오, 누마지리 고분고, 우에사카 고타로, 미야가와 가즈마, 미즈구치 이치마쓰, 가네코 지로사쿠, 미우라 게이노스케, 와도 사다조, 이케다 시메사부로, 도미카와 쥬로, 나카무라 고로, 나카지마 노보루, 이치무라 데쓰노스케, 요코쿠라 진고로, 가토 히구마, 가토 다미야, 세야마 다키토, 다무라 긴노스케, 다나카 이오리, 미요시 팡, 기쿠치 오우, 사쿠라이 가즈마, 마쓰모토 스테스케, 이노우에 다이스케, 오오타니 료스케, 칸 이치로, 이치무라 다쓰노스케, 가가쓰메 가쓰노스케, 이토 겐스케, 기무라 고타, 가시오 이치로, 구사카베 도오토미, 구사카베 시로, 이와사키 이치로, 우에다 마노스케, 나카이 산야, 히라키 소스케, 야마노 야소하치, 사사키 아이지로, 마고시 사부로, 마쓰메 류타로, 구스노키 고주로, 오이시 소주조, 유우키 무니조, 오쿠다 마쓰고로, 야마우라 데쓰시로, 나가타 가쓰타다, 다나카 이오리, 국장 사이토 하지메



하코다테 신센구미의 주요 직책은 다음과 같다.

직책담당자
국장히지카타 토시조, 오노 우츄, 소마 카즈에
대장소마 카즈에
육군 봉행히지카타 토시조
육군 봉행 첨역오노 우츄
두토리 개역모리 츠네키치, 시마다 카이, 가쿠가야 타다시
개역 하역 회계 두토리아오치 겐타로
회계야마자키 하치조
히지카타 부속이치무라 테츠노스케, 노무라 리사부로


3. 8. 규율 (국중법도)

신센구미는 '국중법도'(局中法度)라고 불리는 엄격한 규율을 제정하여 조직을 통제했다. 이 규율은 '국중법도서'라고도 불리며, 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조항내용
제1조무사도에 어긋나는 행위 금지.[55]
제2조신센구미 탈퇴 금지.[55]
제3조무단 빚 금지.[55]
제4조무단 소송 관여 금지.[55]
제5조개인적인 싸움 금지.[55]



일본어으로 기능하기 시작한 것은 "신선조"로 이름을 고치고 곤도 이사미, 히지카타 도시조를 중심으로 하는 조직이 정비된 이후로, 이토 가시타로 등 일파의 암살 때에도 준용·유추 적용되었다고 한다. 제1조 "무사도에 어긋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등과 같이, 내용은 추상적이며, 법해석은 국장이나 부장의 일존에 위임되는 것이었다.[55]

이러한 규율을 위반할 시에는 할복 등의 처벌이 따랐다.[55] 신센구미는 규율을 엄격하게 운용하여 조직의 기강을 유지하려 했으며, 위반자는 가차없이 숙청되었다. 도바·후시미 전투 이전 5년간 신센구미 내부에서 숙청된 대원은 45명에 달한다.[55] 그중 전투로 인한 사망자는 6명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대부분 할복이나 암살 등 숙청과 관련된 것이었다.[56][57]

4. 실상

신센구미는 메이지 시대 초기에는 역적으로 간주되어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1928년 시모자와 간의 『신센구미 시말기』등을 통해 재평가되기 시작했다.[21] 태평양 전쟁 중에는 일본군 일부 부대가 '신센구미'로 불리기도 했다.[21]

단다라 하오리, 핫치킨


신센구미는 소맷부리에 산 모양 무늬(단다라 무늬)가 있는 아사기색(연청색) 하오리를 착용했으나, 이는 이케다야 사건 이후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50] 이후에는 검은색 복장을 주로 착용했다는 증언이 있다. 경비나 전투 시에는 핫치킨, 사슬 갑옷 등 방어구를 착용했다.[50] 무기는 다치단창을 사용했으며, 곤도 이사미는 긴 와키자시, 히지카타 도시조는 이즈미노카네사다 등을 사용했다.

곤도 이사미의 갑옷과 투구


1865년에는 검술, 유술 등 각 분야의 사범이 설치되었다.[44] 신센구미의 검술은 텐넨리신류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유파 출신 대원들이 있었다.[45] 훈련은 죽도를 사용한 찌르기 훈련에 집중되었으며 매우 격렬했다.[46] 보신 전쟁에서 신정부군에게 패배한 후, 히지카타 도시조는 "이제 무기는 대포가 아니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48] 신센구미는 프랑스식 군사 훈련을 받았으며, 대포소총 훈련도 실시했다.

신선조 훈련 사범
종류사범
검술오키타 소지, 이케다 코사부로, 나가쿠라 신파치, 다나카 토라조, 아라이 타다오, 요시무라 간이치로, 사이토 하지메
유술시노하라 야스노신, 야나기다 산지로, 마츠바라 타다시
문학이토 카시타로, 시바 료사쿠, 오가타 슌타로, 케나이 아리노스케, 타케다 간류사이
포술키요하라 키요시, 아베 쥬로
마술야스토미 사이스케
창술타니 산주로


4. 1. 평가의 변천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는 신센구미와 적대했던 삿초 출신 인사들이 정치 실권을 장악하고, 황국사관의 영향으로 메이지 신정부의 '적군'으로 찍힌 신센구미를 부정하는 풍조가 강해 사학적인 연구도 지지부진했다.[21] 다이쇼 시대오사라기 지로가 쓴 소설 『구라마텐구』에서도 신센구미는 악역으로 묘사되었다. 다만 고단의 영향으로 서민들에게는 어느 정도 인기가 있었으며, 『구라마텐구』 작중에서도 곤도 이사미만큼은 다른 신센구미 대원들과는 다른 인격자이자 호걸로 묘사되고 있다.

1928년(쇼와 3년) 시모자와 간의 『신센구미 시말기』, 히라오 미치오의 『신센구미 사록』 등이 간행되면서 신센구미는 재평가되기 시작하였다.[21] 1933년(쇼와 8년) 일본 경시청에 창설된 특별경비대(경시청 기동대의 전신)는 '쇼와의 신센구미'라는 통칭으로 익숙했다. 태평양 전쟁 중에는 일본 육군으로 편성된 비행 제47전대(초대 대장 시모야마 중좌, 2대 대장 오쿠다 소좌)와 해군으로 편성된 제343해군항공대 전투301비행대(대장 스가노 다다시 대위)도 '신센구미'라 불렸다.[21]

패전 후에는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로 신센구미가 주역으로 등장하는 작품도 늘어났으며, 대원들 면면에 대해서도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21] 1960년대에 방송되었던 시바 료타로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신센구미 혈풍록』, 『타올라라 검』은 신센구미 붐을 일으키기까지 하였다.[21]

4. 2. 복장

신선조는 초기에 소맷부리에 산 모양 무늬(단다라 무늬)를 하얗게 염색한 아사기색(연청색) 하오리를 착용했다.[50] 이 하오리의 단다라 무늬는 아코 낭인이 기라 저택에 침입할 때 입었던 하오리의 무늬에서 유래했으며,[50] 아사기색은 무사가 할복할 때 입는 옷 색깔로, 무사의 죽음을 상징하는 색이었다.[7] 하오리는 오몬지야(大文字屋) 옷가게(현재의 다이마루) 또는 시조의 옷가게 "히시야(菱屋)"에서 제작했다는 설이 있다.

단다라 하오리는 1년 정도 만에 폐지된 것으로 보이며,[50] 이케다야 사건 때 착용했다는 기록이 마지막으로 남아있다. 이케다야 사건 이틀 후 목격된 대원 복장은 기모노를 껴입은 주반, 가마다카 바지, 감색 각반, 뒤 머리띠, 흰 다스키였다.[50] 오무라 번사(藩士) 와타나베 승에 따르면, 검은 옷·검은 바지를 입은 사람은 신선조 대원이라고 바로 알 수 있었다고 한다. 메이지 말기에는 신선조가 검은 라사통소매의 진 하오리를 입고 있었다는 증언이 있어, 단다라 하오리가 폐지된 후에는 검은색 복장을 주로 착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비나 전투 시에는 핫치킨, 사슬 갑옷, 코테, 갑옷 등 방어구를 착용했다.[50] 무기는 시가지전을 상정하여 다치단창을 사용했다. 국장 곤도 이사미다치와 거의 같은 크기의 긴 와키자시를, 부장 히지카타 도시조는 칼날 길이 2 8촌의 이즈미노카네사다, 1척 9촌 5의 호리카와 쿠니히로를 사용했다.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패배한 직후, 히지카타 도시조가 아이즈 번으로부터 2000을 받아 신식 병기 장비에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51]

4. 3. 훈련

1865년(게이오 원년)에 검술, 유술, 문학, 포술, 마술, 창술 등 각 분야의 사범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어느 정도 활동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44]

곤도 이사미, 히지카타 도시조, 오키타 소지 등 신선조의 주요 인물들은 텐넨리신류 시위관 출신 검객이었기 때문에, 신선조의 검술은 텐넨리신류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다른 대원들은 신도무념류, 홋신잇토류 등 다양한 유파 출신이었으므로, 신선조 전체가 텐넨리신류를 따른 것은 아니다.[45] 실제로 격검 사범 7명 중 텐넨리신류는 오키타 소지 1명뿐이었다. 유파와 입대 시기가 다르면 형(形)稽古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훈련은 죽도를 사용한 찌르기 훈련에 집중되었다.[46] 훈련은 매우 격렬했던 것으로 보이며, 신선조가 주둔했던 야기 저택의 야기 타메사부로는 쓰러져 움직이지 못하는 대원들을 자주 목격했다고 한다. 곤도 이사미나 세리자와 카모는 주로 높은 곳에서 훈련을 지켜보았지만, 히지카타 도시조는 항상 갑옷을 입고 땀을 흘리며 "가볍다 가벼워"라고 대원들을 질책했다고 한다.[47]

보신 전쟁도바·후시미 전투에서 신선조는 신정부군에게 칼로 맞섰으나 패배했다. 히지카타는 "이제 무기는 대포가 아니면 안 된다. 나는 검과 창을 들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라고 말했다.[48] 고슈 가쓰누마 전투에서도 곤도가 이끄는 고요친부대가 진충대에게 불과 2시간 만에 패배했다. 이러한 사례들 때문에 신선조는 백병전에 특화된 집단이라는 인식이 있지만, 실제로는 막부 육군을 따라 프랑스식 군사 훈련을 받았다. 니시혼간지 경내에서 대포소총 훈련을 실시했으나, 총포 소음 피해를 입은 니시혼간지가 훈련 중지를 요청하여 아이즈 번에 진정하기도 했다. 이후 훈련 장소는 미부데라로 옮겨졌지만, 훈련이 참배객의 통행을 방해하고 포 소리로 인해 절이 파손되는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

신선조 훈련 사범
종류사범
검술오키타 소지, 이케다 코사부로, 나가쿠라 신파치, 다나카 토라조, 아라이 타다오, 요시무라 간이치로, 사이토 하지메
유술시노하라 야스노신, 야나기다 산지로, 마츠바라 타다시
문학이토 카시타로, 시바 료사쿠, 오가타 슌타로, 케나이 아리노스케, 타케다 간류사이
포술키요하라 키요시, 아베 쥬로
마술야스토미 사이스케
창술타니 산주로


5. 신센구미를 소재로 한 작품

2004년 NHK 대하드라마 <신센구미!>가 방영되었고, 인기 그룹 SMAP의 멤버 카토리 싱고곤도 이사미 역을 맡았다.[13] 소라치 히데아키 작가의 만화 은혼에는 신센구미를 패러디한 진선조(眞選組)가 등장하며, 실존 인물들의 이름을 조금씩 변형한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예: 신센구미의 곤도 이사미 → 진선조의 콘도 이사오)

오토메 게임 박앵귀는 신센구미 관련 인물들과 역사적 사실에 가상의 인물과 판타지 요소를 가미한 게임으로, 신센구미의 중요 간부들을 공략할 수 있다. 2008년 9월 출시된 원작 게임 《박앵귀 ~신센구미기담~》에 이어 2012년 7월에 방영한, 세리자와 카모 암살사건을 다룬 애니메이션 《박앵귀 여명록》까지 꾸준한 인기로 시리즈가 연이어 출시되고 있다.[17]

쿠로노 나나에 작가의 만화 신찬조이문 피스메이커와 피스메이커 쿠로가네에서는 실존 인물로 신센구미의 최연소 대원이었던 이치무라 테츠노스케를 등장시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와타나베 타에코 작가의 순정만화 바람의 빛에서는 상상의 인물 세이자부로가 남장을 하고 신센구미에 입대하여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풀어나간다. 한국에서는 2021년 11월까지 45권으로 완결되었다.

드라마 CD 신센구미 물망초에서는 사이토 하지메, 오키타 소지, 곤도 이사미, 도도 헤이스케, 히지카타 도시조, 야마자키 스스무, 나가쿠라 신파치, 하라다 사노스케, 이토 가시타로, 야마나미 게이스케 등 10명의 이야기(여성향)를 다루고 있다.

6. 연표


  • 분큐 3년(1863년)
  • * 2월 8일 로시구미(浪士組)가 에도에서 출발.
  • * 2월 23일 교토에 도착.
  • * 3월 12일 아이즈 번 소속 미부로시구미(壬生浪士組) 결성.
  • * 3월 25일 도노우치 요시오(殿内義雄) 피살.
  • * 6월 3일 오사카 스모(大坂相撲) 리키시(力士)와 난투.
  • * 8월 13일 오사카야 방화 사건(大和屋焼き討ち事件) 발생.
  • * 8월 18일 8월 18일의 정변. 고쇼(대궐) 경비 출동.
  • * 9월 13일 다나카 이오리(田中伊織) 암살.
  • * 9월 18일 세리자와 카모, 히라야마 고로(平山五郎) 숙청, 히라마 쥬스케(平間重助) 탈주(이설 있음).
  • * 9월 25일 '''신선조'''로 개칭.
  • * 9월 26일 미쿠라 이세타케(御倉伊勢武), 아라키다 사마노스케(荒木田左馬之助), 구스노키 고쥬로(楠小十郎)가 조슈 번 간자(間者)로 숙청.
  • * 10월 이와키쇼야 사건(岩城升屋事件). 오사카 포목상 이와키쇼야(岩城升屋)에 쳐들어간 불령 로시 격퇴.
  • * 12월 27일 노구치 겐지(野口健司) 할복.
  • 겐지 원년(1864년)
  • * 5월 20일 오사카 니시마치부교쇼(大坂西町奉行所) 요리키(与力) 우치야마 히코지로(内山彦次郎) 피살.
  • * 6월 5일 '''이케다야 사건'''. 오쿠자와 에이스케(奥沢栄助) 전사, 안도 하야타로(安藤早太郎), 닛타 가쿠자에몬(新田革左衛門) 등 부상 후 사망.
  • * 6월 10일 '''아케보노 정 사건(明保野亭事件)'''. 이케다야 사건 잔당 포박.
  • * 7월 19일 '''금문의 변'''. 조슈 번사 진압 출동.
  • * 8월 곤도 이사미에 유감 품은 나가쿠라 신파치, 사이토 하지메, 하라다 사노스케, 시마다 카이(島田魁), 오세키 세이이치로(尾関政一郎), 가즈라야마 다케하치로(葛山武八郎)가 마쓰다이라 가타모리에게 비행 5개조 제출.
  • * 10월 27일 이토 가시타로 등 신선조 입대.
  • 겐지 2년(1865년)
  • * 1월 8일 '''젠자이야 사건(ぜんざい屋事件)'''. 도사 근왕당(土佐勤王党) 잔당 오사카 성 탈취 계획 저지.
  • * 2월 23일 야마나미 게이스케(山南敬助) 할복.
  • * 3월 10일 니시혼간지(西本願寺)로 둔소 이전.
  • 게이오(慶応) 원년(1865년)
  • * 9월 1일 마쓰바라 쥬지(松原忠司) 사망.
  • 게이오 2년(1866년)
  • * 2월 15일 가와이 기사부로(河合耆三郎) 할복.
  • * 4월 1일 다니 산주로(谷三十郎) 사망.
  • * 9월 12일 '''산조 세이사쓰 사건(三条制札事件)'''. 산조 대교(三条大橋) 사이사쓰(制札) 뽑은 도사 번 번사 포박.
  • 게이오 3년(1867년)
  • * 3월 20일 이토 가시타로, 도도 헤이스케, 사이토 하지메 등 13인 '''고료에지(御陵衛士)''' 결성, 신선조 이탈(사이토는 간자로 잠입, 훗날 복귀).
  • * 6월 10일 신선조, 막신(幕臣) 등용.
  • * 6월 15일 후도도 촌(不動堂村)으로 둔소 이전.[61]
  • * 6월 22일 다케다 간류사이(武田観柳斎) 피살.
  • * 11월 18일 '''아부라노코지 사건(油小路事件)'''. 고료에지와 항쟁. 이토 가시타로, 도도 헤이스케, 모나이 아리노스케(毛内有之助), 핫토리 다케오(服部武雄) 등 피살(도도 생존설 있음).
  • * 12월 7일 '''덴만야 사건(天満屋事件)'''. 해원대(海援隊) ・ 육원대(陸援隊) 대원 전투. 미야카와 신키치(宮川信吉), 후나쓰 부타로(舟津釜太郎) 전사, 우메도 가쓰노신(梅戸勝之進) 중상.
  • * 12월 18일 곤도 이사미, 고료에지 잔당에 저격, 중상.
  • 게이오 4년(1868년)
  • * 1월 3일 '''도바 후시미 전투'''. 신선조 대원 1명 전사.
  • * 1월 5일 '''요도 센요마쓰 전투(淀千両松の戦い)'''. 이노우에 겐자부로(井上源三郎) 등 7명 전사.
  • * 1월 6일 '''하시모토 전투(橋本の戦い)'''. 신선조 대원 4명 전사.
  • * 1월 10일 군함 후지산마루(富士山丸), 순토마루(順動丸)로 에도 이동 중 야마자키 스스무(山崎丞) 사망(이설 있음).
  • * 3월 6일 '''고슈 가쓰누마 전투(甲州勝沼の戦い)'''. 신선조 대원 2명 전사.
  • * 3월 12일 나가쿠라 신파치, 하라다 사노스케 등 '''정병대(靖兵隊)''' 결성, 신선조 이탈.
  • * 3월 13일 고효에 닛타(五兵衛新田, 도쿄도 아다치구 아야세綾瀬4초메) 긴코케(金子家) 중심 둔영(4월 1일까지).
  • * 4월 2일 가즈사(下総) 나가레야마(流山)에 진 치다.
  • * 4월 3일 곤도 이사미, 신정부군 포위, 투항.
  • * 4월 12일 히지카타 도시조, 옛 막부 육군 가담.
  • * 4월 19일 '''우쓰노미야 성 전투(宇都宮城の戦い)'''
  • * 4월 25일 곤도 이사미, 이타바시 처형장(板橋刑場) 처형.
  • * 윤4월 25일 '''시라카와구치 전투(白河口の戦い)'''.
  • * 5월 17일 하라다 사노스케 사망(이설 있음).
  • * 5월 30일 오키타 소지, 폐결핵으로 에도에서 사망.
  • * 8월 21일 '''보나리토게 전투(母成峠の戦い)'''.
  • * 8월 24일 야마구치 지로(山口二郎), 이케다 시치사부로(池田七三郎) 등 13인 아이즈 잔류.
  • 메이지(明治) 원년(1868년)
  • * 10월 26일 옛 막부군, 하코다테(箱館) 고료가쿠(五稜郭) 입성.
  • 1869년(메이지 2년)
  • * 4월 13일 '''제1차 후타마타구치 전투(二股口の戦い)'''.
  • * 4월 24일 '''제2차 후타마타구치 전투'''
  • * 5월 5일 이치무라 데쓰노스케(市村鉄之助) 하코다테 탈출.
  • * 5월 11일 잇본키 관문(一本木関門, 하코다테 시 와카마쓰 정) 부근 히지카타 도시조 전사.
  • * 5월 14일 소마 도노모(相馬主計) 신선조 국장(局長) 취임, 벤텐다이바(弁天台場) 신선조 항복.
  • * 5월 18일 옛 막부군 항복, '''보신 전쟁(戊辰戦争)''' 종결.
  • 1915년(다이쇼 4년)
  • * 1월 5일 나가쿠라 신파치, 홋카이도 오타루에서 사망.
  • 1938년(쇼와 13년)
  • * 1월 16일 마지막 생존자 이케다 시치사부로(池田七三郎) 병사. 신선조 대원 모두 사망.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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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Kindle A Guide on Shinsengumi: the background and management amazon.com 2021
[3] 서적 Anti-foreignism and Western learning in early-modern Japan: the new theses of 1825 Harvard University Press 1986
[4] 서적 Shinsengumi: Saigo no Bushi no Jitsuzō Shin Jinbutsu Oraisha 2004
[5] 서적 The Samurai swordsman – master of war https://books.google[...] Tuttle Publishing 2013
[6] 문서 A Guide on Shinsengumi: the background and management 2021
[7] 문서 A Guide on Shinsengumi: the background and management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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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웹사이트 NHK大河「新選組!」脚本務めた三谷幸喜氏「新選組のイメージ変えた」永倉新八の子孫から感謝 https://www.nikkansp[...] 日刊スポーツ 2022-12-11
[29] 서적 歴史のなかの新選組 岩波書店
[30] 서적 大和屋焼き打ち事件の真実
[31] 논문 新選組研究への評論と大和屋焼き討ち事件
[32] 문서 당시는 야노미 사다미츠와 아스카이 마사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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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서적 新選組 ―「最後の武士」の実像― 中公新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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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웹인용 新選組「洛中最後の拠点」諸説論争に決着か 西本願寺古文書に「西九条村」の記述 https://www.kyoto-np[...] 京都新聞 2020-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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