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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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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파는 1945년 해방 이후 한국교회 재건 과정에서 친일 행적을 참회하지 않는 세력에 반발하여 생겨난 용어이다.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거부 운동을 주도한 한상동, 이기선 목사 등을 중심으로, 배교를 참회하고 신학교육을 통해 교회를 재건하려 했다. 고려신학교 설립과 교단 분열을 겪었으며,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과의 합동과 분리, 신자 간의 불신 법정 고소 문제, 목사 소송 사건 등을 거치며 여러 교단으로 분열되었다. 현재는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대한예수교장로회(계신), 대한예수교장로회(고려개혁), 대한예수교장로회(고려) 등이 고려파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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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파
교단 정보
교단명고려파 (高麗派)
영문 교단명Presbyterian Church in Korea (KoRyuPa)
설립 연도1952년
설립 배경한국신학대학의 자유주의 신학 논쟁
성경무오설 옹호
신사참배 반대
주요 인물박윤선
한상동
주기철
오병세
손양원
신학적 입장개혁주의
칼뱅주의
성경무오설
특징보수적인 신학 강조
신사참배 반대 정신 계승
장로교 고려신학교 고려신학대학원과 관련
분열 역사1976년: 대한예수교장로회(고려)와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으로 분열
2012년: 예장고려와 예장고려개혁으로 분열
현재 교단대한예수교장로회(고려)
대한예수교장로회(고려개혁)
관련 학교고려신학대학원

2. 역사적 배경

고려파라는 명칭은 스스로 붙인 것이 아니라, 1945년 해방 이후 한국 교회가 일제강점기 때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했던 과거를 극복하고 새롭게 거듭나는 과정에서 다른 이들이 붙인 이름이다. 1945년 광복과 함께 감옥에서 나온 한상동, 이기선 목사 등은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한국교회를 바로 세우는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2] 그러나 기존의 친일 행적을 가진 목사와 그들을 따르는 세력들은 과거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뉘우치기보다는, 1943년 스스로 해체했던 총회 조직과 기구를 다시 만드는 데만 열중했다.[2]

이와 달리, 순교를 각오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고려파를 비롯한 재건파, 혁신복구파, 순장파 등은 한국교회가 일제에 굴복했던 잘못을 공개적으로 뉘우치고, 이를 널리 알려 한국교회를 올바르게 다시 세우고자 했다. 이러한 노력의 과정에서 북한 공산당 정권의 방해로 1946년 부산으로 내려온 한상동 목사는 주남선, 박윤선 목사와 함께 1946년 6월부터 진해에서 신학 강좌를 열고 교회를 바로 세우는 운동을 펼쳤다.[2]

이후 고려파는 1959년에 '연동측'(현재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과 분열한 '승동측'(현재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과 신앙 노선이 같아 대등한 조건으로 합치기로 결정하고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을 출범시켰으나, 3년 만에 원래의 고려파로 돌아갔다. 그 이유는 총회가 고려신학교를 폐쇄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2]

1963년 합동 총회는 서로 분리되어 승동측은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으로, 고려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고려'로 돌아갔지만, 1974년 제24회 총회에서 "신자 간의 불신 법정 고소가 가능하다"는 결의로 인해 반(反)고소 고려측 총회(대한예수교장로회(고려))가 생겨났다. 이는 1958년 제7회 총회에서 마산문창교회당 분쟁 사건을 불신 법정에 소송한 것을 취하하지 않자, 이병규 목사를 중심으로 경기노회(대한예수교장로회 계신)가 이탈한 역사적 배경과 원인이 계속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2]

1990년 제21회 고신 서울노회와 고신 제41회, 제42회 총회가 불법으로 이혼한 목사의 소송 사건을 정치성을 앞세워 총회 재판부가 아닌 행정부로 보내 묵살하자, 서울노회 다수의 목사와 교단 내 여러 교회가 이탈하여 고려개혁측(대한예수교장로회(고려개혁)) 총회가 다시 생겨났다.[2]

2013년 12월 고려 총회 소속 고려신학교 교장 석원태 목사에 대한 신상 문제로 인해 다음 해 1월 20일 임시 노회 및 비상 총회를 거쳐 총회장 서상일 목사를 중심으로 서울 남노회, 호남노회, 영남노회, 중부노회로 이루어진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고려)''' 총회가 새롭게 생겨났다. 그 후에는 정통성 계승을 이유로 대한예수교장로회(고려)로 이름을 바꾸었다.[2]

한편 본래의 예장고려측은 2015년 9월 15일 총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과 통합을 결의하였다.[2]

2. 1.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강요와 저항

1930년대부터 일제는 한국 개신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했으며, 이에 대한 찬반 논쟁이 교단 내에서 격렬하게 벌어졌다. 주기철, 한상동 목사 등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킨 이들은 투옥, 순교 등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김길창 등 친일 행적이 있는 일부 목회자들은 신사참배를 옹호하며 일제의 정책에 협력했다.[2]

2. 2. 해방 이후 교회 재건 운동과 갈등

1945년 광복과 함께 한상동, 이기선 목사 등은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한국교회 재건 운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신사참배에 반대하며 순교를 각오했던 목회자들로, 과거 신사참배에 가담했던 친일파 목사와 동조 세력들의 공개적인 회개를 요구했다. 그러나 기존 교단 지도부는 이러한 요구를 외면하고, 1943년 스스로 해체했던 총회 조직 복구에만 집중했다.[2]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재건파, 혁신복구파, 순장파 등은 한국교회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참회하고 바로잡고자 했다. 그러나 북한 공산당 정권의 방해로 1946년 부산으로 내려온 한상동 목사는 주남선, 박윤선 목사와 함께 진해에서 신학 강좌를 열고 교회 재건 운동을 이어갔다.[2]

한편, 일제강점기 채필근평양신학교는 일제 정책에 동조하여 제국주의 전쟁 신학을 퍼뜨리는 친일 신학교였다. 이에 한상동 목사 등은 1938년 폐교된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의 정신을 잇는 바른 신학교육 기관으로 고려신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나 1946년, 친일파 목사인 김길창이 경남노회장으로 선출되면서 고려신학교 학생 추천을 취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김길창과 친일파 세력이 주도하는 경남노회의 불법을 총회에 상소했으나 개선되지 않았고, 결국 경남노회(법통)가 새롭게 결성되었다. 하지만 총회는 이 노회를 불법으로 축출했다.[2]

2년 동안 분열을 막으려 노력했지만 실패하고, 고려파 지지자들은 총회로부터 분리되어 1952년 9월 경남노회를 중심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 고려파를 조직하게 되었다.[2]

2. 3. 고려신학교 설립과 교단 분열

한상동, 주남선, 박윤선 목사 등은 1946년에 신사참배에 반대했던 신념을 이어갈 새로운 신학교인 고려신학교를 설립했다. 고려신학교는 순수한 신앙과 신학을 추구하며 많은 학생들을 배출했지만, 기존 교단과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특히, 경남노회에서의 갈등은 고려파 형성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김길창 등 친일파 목회자들의 행태는 고려파의 분립을 가속화시켰다.[2]

1945년 광복과 함께 출옥한 한상동, 이기선 목사 등은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한국교회 재건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친일파 목사들은 과거 죄상을 참회하기보다는 해체한 총회 조직 복구에만 열을 올렸다. 반면, 고려파 등은 한국교회의 배교와 배도를 공적으로 참회하고 한국교회를 바르게 재건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한상동 목사는 주남선, 박윤선 목사와 함께 1946년 6월부터 진해에서 신학강좌와 교회재건운동을 전개했다.[2]

이러한 상황에서 한상동 목사 등은 1938년에 폐교된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평양신학교)의 전통을 계승할 신학교육 기관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고려신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나 1946년 친일파 목사인 김길창이 경남노회장으로 선출되자, 기존 노회는 고려신학교 학생 추천을 취소하기로 가결했다. 김길창과 친일파 세력이 주도하는 경남노회의 불법을 총회에 상소했으나 개선되지 않자, 경남노회(법통)가 새롭게 결성되었다. 하지만 총회는 새로 구성된 경남노회를 불법적으로 축출했다.[2]

결국 축출된 경남노회는 2년 동안 분열을 피하고자 노력했지만 무산되었고, 고려파 지지자들은 총회로부터 분리당했다. 이에 따라 1952년 9월, 경남노회를 중심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고려)가 조직되었다.[2]

3. 주요 분열과 연합

고려파는 1952년 9월 경남노회를 중심으로 조직되었으나, 이후 여러 차례 분열과 연합을 겪었다.[2] 주요 분열 및 연합 사건은 다음과 같다.

3. 1.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과의 합동과 분리

고려파는 1959년 '승동측'(현재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과 신앙 노선이 일치하여 대등한 조건으로 합동해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을 출범시켰다. 그러나 합동 3년 만인 1963년에 고려파는 원래의 고려파로 환원했다. 그 이유는 총회가 고려신학교를 폐쇄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2]

3. 2. 대한예수교장로회(고려)의 분열 (반고소 고려측)

1974년 대한예수교장로회(고려)는 신자 간의 불신 법정 고소 문제로 다시 분열되었다. "신자간의 불신법정 고소가 가하다"는 총회 결의에 반대한 이들은 대한예수교장로회(고려) (반고소 고려측, 훗날 대한예수교장로회(계신))를 형성했다.[2] 이는 1958년 9월 제7회 총회에서 마산문창교회당 분쟁사건을 불신법정에 송사한 것을 고소 취하하지 않자, 이병규 목사를 중심으로 경기노회 (대한예수교장로회(계신))가 이탈한 역사적 배경과 원인이 상존해 왔기 때문이다.[2]

3. 3. 대한예수교장로회(고려개혁)의 형성

1990년, 이혼한 목사의 소송 사건을 둘러싼 갈등으로 인해 대한예수교장로회(고려개혁)이 형성되었다. 총회 재판부가 아닌 행정부가 이 사건을 묵살하면서 분열이 발생했다.[2]

3. 4. 대한예수교장로회(고려)의 재분열과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과의 통합

2013년, 대한예수교장로회(고려) 소속 고려신학교 교장 석원태 목사의 신상 문제로 인해, 2014년 1월 20일 임시노회 및 비상총회를 거쳐 총회장 서상일 목사를 중심으로 서울 남노회, 호남노회, 영남노회, 중부노회로 이루어진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고려)''' 총회가 새롭게 태동했다.[2] 이후 대한예수교장로회(개혁고려)는 정통성 계승을 이유로 대한예수교장로회(고려)로 환원하였다.[2]

한편, 본래의 대한예수교장로회(고려)는 2015년 9월 15일 총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과 통합을 결의하였다.

4. 현재의 고려파 교단

현재 고려파의 전통을 계승하는 주요 교단은 다음과 같다.

참조

[1] 웹사이트 Adressdatenbank reformierter Kirchen und Einrichtungen http://www.reformier[...] 2021-06-22
[2] 웹인용 제64회 대한예수교장로회(고려) 총회 성료 http://blog.ghpc.or.[...] 2015-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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