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전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곡전재는 1929년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한옥으로,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위치한다. 7천석 대지주였던 박승림이 풍수지리설에 따라 금환락지에 해당하는 터를 찾아 건립했으며, 이후 이교신에게 소유권이 이전된 후 그의 호를 따 곡전재로 불리게 되었다. 현재는 5대째 후손들이 거주하며, 1998년 일부 복원되어 5채 51간 규모를 갖추고 있다. 2005년 구례군 향토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한옥 펜션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구례군의 향토문화유산 - 용호정
용호정은 일제강점기 유림 인사들이 항일 의지를 다지고 독립 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1917년 건립한 정자로, 민족의식 고취와 항일 운동의 거점 역할을 수행하며 민주주의와 민족정신의 상징으로 평가받는다. - 구례군의 향토문화유산 - 지리산 남악제
지리산 남악제는 신라 시대부터 이어져 온 전통 제례 행사로, 국가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며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고, 광복 이후 부활하여 현재는 지역 문화 행사로 자리 잡았다. - 구례군의 건축물 - 구례공영버스터미널
구례공영버스터미널은 전라남도 구례군에 위치하며 서울, 광주, 부산 등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고속버스 및 시외버스 노선과 구례군 내 농어촌버스를 이용할 수 있는 버스 터미널이다. - 구례군의 건축물 - 방호정
방호정은 전라남도 구례군과 경상북도 청송군에 있는 정자 건축물로, 구례군의 방호정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전통 정자이며 청송군의 방호정은 독특한 퇴적암 지층 위에 세워져 지질학적 경관을 자랑한다. - 1929년 완공된 건축물 - 총리대신 관저
총리대신 관저는 일본 내각총리대신의 공식 관저로, 1929년에 완공된 구 관저와 2002년에 건설된 현재 관저가 있으며, 주요 회의 및 외국 수뇌 회담 장소로 사용되고, 지하에는 위기관리센터가 운영된다. - 1929년 완공된 건축물 - 성 비투스 대성당
체코 프라하에 위치한 성 비투스 대성당은 930년 바츨라프 1세가 세운 로마네스크 양식의 원형 성당에서 시작하여 1344년 카를 4세 때 고딕 양식으로 재건축되어 약 600년 만에 완공되었으며, 성 바츨라프 예배당, 보헤미아 왕관 보석 등의 건축물과 예술품을 소장하고 중앙 유럽 후기 고딕 건축 양식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 곡전재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 곡전재 정보 | |
![]() | |
| 명칭 | 곡전재 |
| 위치 |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476-3 |
| 유형 | 향토문화유산 |
| 지정 번호 | 9 |
| 지정일 | 2005년 5월 18일 |
2. 건립 배경
곡전재는 7천 석 대지주였던 박승림이 풍수지리설에 따라 명당을 찾아 지은 집이다. 박승림은 1910년 무렵부터 지관들과 함께 집터를 물색하였고, 10년 만에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의 금환락지(金環洛地)에 해당하는 터를 발견하여 이교신과 함께 1929년 집을 지었다.[3]
2. 1. 부지 선정
박승림은 오늘날 승주군에 속하는 옛 순천군 황전면 대치리에 살던 7천 석 대지주였다. 처음에는 구례읍 봉북리로 이사하였으나 풍수지리설을 쫓아 백방으로 명당을 물색하다가 지금의 터에 집을 짓기로 하였다.[2] 박승림은 집터를 정하기 위해 많은 지관(地官, 풍수지리설을 쫓아 명당을 찾는 사람)을 풀어 1910년 무렵부터 땅을 알아보았는데 지금의 집터를 정하는 데 10년을 보냈다고 한다.[3]집터는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정하였고, 풍수지리설의 금환락지(金環洛地 - 선녀가 금반지를 떨어뜨린 자리)에 해당한다고 보아 집터 자체를 반지 모양으로 둥글게 조성하였다.[4] 오미리가 금환락지에 해당한다는 이야기는 인근의 운조루를 비롯한 오미리 마을 옛집에 두루 전하는 이야기이다.[2] 풍수에서 금환락지란 생산이 풍부한 땅을 의미한다.[5]
2. 2. 금환락지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집터를 정하였고, 풍수지리설에서 금환락지(金環洛地, 선녀가 금반지를 떨어뜨린 자리)에 해당한다고 보아 집터 자체를 반지 모양으로 둥글게 조성하였다.[4] 오미리가 금환락지에 해당한다는 이야기는 인근의 운조루를 비롯한 오미리 마을 옛집에 두루 전하는 이야기이다.[2] 풍수에서 금환락지란 생산이 풍부한 땅을 의미한다.[5]3. 건축 양식 및 구조
원래 지어진 집은 모두 여섯 채 53간 규모였으나, 1998년에 일부 복원하여 현재는 5채 51간 규모이다.[3]
3. 1. 전통 한옥 양식
이 건물은 1929년 박승림이 건립하였으며, 1940년에 이교신(호는 곡전)이 인수하여 현재까지 그 후손들이 살고 있다. 조선 후기 한국 전통 목조 건축 양식의 주택으로서 부연을 단 고주집, 문살의 외미리 형식, 기둥, 서까래 등이 매우 크고 지붕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당시 영호남 지역에서 발견되는 부농의 민가 형식 주택으로 문간채, 사랑채, 안채가 모두 일(一)자형으로 배치되었으며, 2.5m 이상의 호박돌 담장을 설치하여 집터의 환경에 금환(金環) 개념을 도입한 점 등이 독창적이다.[1]3. 2. 내부 구조
이 건물은 1929년 박승림이 건립하였으며, 1940년에 이교신(호-곡전) 씨가 인수하여 현재까지 그 후손들이 거처하고 있다. 조선 후기 한국 전통 목조 건축 양식의 주택으로서 부연을 단 고주집, 문살의 외미리 형식, 기둥, 석가래 등이 매우 크고 지붕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당시 영, 호남지역에서 발견되는 부농의 민가 형식 주택으로 문간채, 사랑채, 안채가 모두 ―자형으로 배치되었으며 2.5m 이상의 호박돌 담장을 설치하여 집터의 환경을 금환(金環)의 개념을 도입한 점 등이 독창적이다.[1]담장을 높이 올려 안을 전혀 들여다볼 수 없다. 내부는 문간채와 행랑채, 안채를 기본으로 하여 지어 남부 지방의 부유한 민가의 트인 ㅁ자 구조를 잘 보여준다.[6]
집이 지어진 시기는 1929년으로 일제강점기에 해당하지만, 건물은 조선 후기의 전통적인 한옥 구조를 따라 지었다. 집 안 동편으로 밖에서 물을 끌어들여 동행랑채 옆에 연못을 마련하였고, 마루방을 만들어 여름철을 보낼 수 있게 하였다.[7] 연못의 물은 집을 감아 돌아 대문 옆 정원을 거쳐 빠져나간다.
3. 3. 조경
담장을 높이 올려 안을 전혀 들여다볼 수 없다. 내부는 문간채와 행랑채, 안채를 기본으로 하여 지어져 남부 지방의 부유한 민가의 트인 ㅁ자 구조를 잘 보여준다.[6]일제강점기인 1929년에 지어졌지만, 건물은 조선 후기의 전통적인 한옥 구조를 따라 지었다. 집 안 동편으로 밖에서 물을 끌어들여 동행랑채 옆에 연못을 마련하였고, 마루방을 만들어 여름철을 보낼 수 있게 하였다.[7] 연못의 물은 집을 감아 돌아 대문 옆 정원을 거쳐 빠져나간다.
4. 역사
1929년 박승림이 집을 지을 당시 서울에 사업체를 차리고 살았기 때문에 이교신에게 집 관리를 맡겼다. 1940년 박승림이 서울에서 사망하자 유족인 며느리가 이교신에게 집을 매각하였다. 이후 이교신의 호인 곡전(穀田)을 따 집 이름이 곡전재가 되었고, 5대째 후손들이 살고 있다.[5] 2003년 학술 조사를 거쳐 2005년 구례군 향토문화재로 지정되었다.[5]
이후 이교신의 후손 이병주는 2006년 한옥 고택 보존과 문화재 관람객의 편익을 위해 팬션 사업을 시작하였고[3], 2010년 한옥 팬션업으로 인허가를 받아 관람로와 손님방을 꾸며 영업 중이다.[8]
4. 1. 박승림과 이교신
박승림은 오늘날 승주군에 속하는 옛 순천군 황전면 대치리에 살던 7천 석 대지주였다. 처음에는 구례읍 봉북리로 이사하였으나 풍수지리설을 쫓아 명당을 물색하다가 지금의 터에 집을 짓기로 하였다.[2] 박승림은 집터를 정하기 위해 많은 지관(地官, 풍수지리설을 쫓아 명당을 찾는 사람)을 풀어 1910년 무렵부터 땅을 알아보았는데 지금의 집터를 정하는 데 10년을 보냈다고 한다. 이때 함께 땅을 알아보러 다닌 사람이 이교신으로 1929년 박승림과 함께 집을 지었다.[3]1929년 집을 지은 박승림은 서울에 사업체를 차리고 살았고, 집 관리는 이교신에게 맡겼다. 1940년 박승림이 서울에서 사망한 뒤 유족인 며느리가 집을 이교신에게 매각하였다. 이후 이교신의 호인 곡전(穀田)을 따 집 이름이 곡전재가 되었고 지금까지 5대째 후손들이 살고 있다.[5]
4. 2. 곡전재의 현재
1940년 박승림이 서울에서 사망한 뒤 유족인 며느리가 이교신에게 집을 매각하였다. 이후 이교신의 호인 곡전(穀田)을 따 집의 이름이 곡전재가 되었고, 지금까지 5대째 후손들이 살고 있다.[5] 2003년 학술 조사가 진행되었으며 2005년 구례군 향토문화재로 지정되었다.[5]이교신의 후손인 이병주는 2006년 한옥 고택을 보존하고 문화재 관람객의 편익을 위해 팬션 사업을 시작하였다.[3] 2010년 한옥 팬션업으로 인허가되어 관람로와 손님방을 꾸며 영업 중이다.[8] 손님방은 전통 한옥 생활 방식의 바닥 방과 침대를 마련한 방이 있다.[9]
5. 활용 및 방문
1940년 박승림이 서울에서 사망한 뒤 유족인 며느리가 이교신에게 집을 매각하였다. 이후 이교신의 호인 곡전(穀田)을 따 집의 이름이 곡전재가 되었고 지금까지 5대째 후손들이 살고 있다.[5]
이교신의 후손인 이병주는 2006년 한옥 고택의 보존과 문화재 관람객의 편익을 위한 팬션 사업을 시작하였고,[3] 2010년 한옥 팬션업으로 인허가되어 관람로와 손님방을 꾸미고 영업 중이다.[8] 전통 한옥 생활 방식의 바닥 방과 침대를 마련한 방이 있다.[9]
참조
[1]
웹사이트
곡전재
https://www.gurye.go[...]
[2]
웹사이트
구만평의 동네들
http://unjoru.com/bb[...]
[3]
뉴스
특집 한옥여행 - 전남 구례 곡전재 하늘이 내린 명당 금환락지에서 하룻밤
http://www.ktsketch.[...]
여행스케치
2008-06-13
[4]
웨이백
전곡재
https://www.culturec[...]
2021-08-06
[5]
뉴스
전남 구례지방의 유명 고택, 곡전재
http://www.seniormae[...]
시니어매일
2021-03-15
[6]
웹사이트
금환락지 곡전재, 조선후기 부농의 민가
http://www.newsfreez[...]
[7]
웹사이트
곡전재
http://www.koreatrip[...]
[8]
웹사이트
곡전재
https://udb.kr/local[...]
[9]
웹사이트
곡전재
https://korean.visit[...]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