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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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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공우는 전한 시대의 관료로, 경서에 밝고 청렴결백하여 명성을 얻었다. 양주 자사를 거쳐 하남 현령을 지냈으며, 원제 즉위 후 간대부로 임명되어 흉년 대책으로 황제의 사치를 줄이고 토지를 백성에게 분배할 것을 건의하여 광록대부가 되었다. 이후 장신소부를 거쳐 어사대부에 임명되었고, 구전 징수 연령 변경, 조세 및 봉록의 현물 지급, 이궁의 축소 등을 건의했다.

2. 생애

공우는 같은 군 사람인 왕길과 벗하였으며, 세상 사람들은 왕길이 지위를 얻으면 공우도 벼슬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공우는 경서에 밝고 청렴결백하여 명성을 떨쳤고, 징소[1]되어 박사(博士)에 임명되었다. 이후 양주자사로 관직을 옮겼으나, 병으로 사임하였다. 다시 현량(賢良)으로 천거되어 하남(河南令)이 되었으나, 한 해 남짓 지나고 직무상 문제로 태수부(太守府)의 문책을 받아 관을 벗고 사죄하였다. 공우는 한 번 관을 벗은 이상 다시 쓸 수는 없다며 그 길로 관직을 버렸다.

2. 1. 관직 생활과 간언

원제 즉위 후 공우는 간대부(諫大夫)로 징소[1]되어 정무 자문을 맡았다. 때마침 흉년이 들자, 공우는 황제의 의식주 경비와 궁녀 수를 줄이고, 수렵용 토지를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줄 것을 진언하였다. 원제는 이를 받아들여 말에게 먹일 곡식을 줄이고 자신의 사유지 일부를 가난한 백성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오락을 줄이고 공우를 광록대부에 임명하였다.

공우는 여든이 넘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원제는 이를 반려하고 장신소부에 임명하였다.

초원 5년(기원전 44년), 진만년의 뒤를 이어 어사대부가 되었다.

공우는 어사대부 시절에도 수십 회에 걸쳐 진언하였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구전(口錢)[2] 징수 연령을 7세로 미룬다.
  • 조세 징수 및 봉록·하사품을 돈 대신 비단이나 곡식으로 한다.
  • 이궁(離宮)과 장락궁의 위병 및 노비 수를 줄인다.
  • 황제 측근의 물건 판매를 금지한다.


원제는 대신들에게 검토하게 하여, 구전 징수 연령 변경 등을 시행하였다. 또한 공우는 군국(郡國)의 종묘(宗廟) 폐지 등 종묘 제도에 관하여 상주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 2. 사망과 후대

공우는 그 해에 죽었고, 원제는 백만 전을 하사하였다.[1] 아들은 낭(郞)으로 임용되고, 동군도위(東郡都尉)를 지냈다.[2]

3. 출전


  • 반고의 《한서》 권19하 백관공경표 下·권72 왕공양공포전을 출전으로 한다.

참조

[1] 문서 중앙 정부에서 특채로 임용하는 것
[2] 문서 자식이 세 살이 되면 걷던 인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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