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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티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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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라티움 문화는 이탈리아 중부 라티움 지역에서 기원전 1000년경부터 기원전 580년경까지 존재했던 청동기 시대 후기 및 철기 시대의 문화를 지칭한다. 이 문화는 도자기를 기반으로 한 시기 구분을 가지며, ±25년의 오차를 허용한다. 라티움 문화는 원-빌라노반 문화, 빌라노반 문화, 에트루리아의 오리엔탈화 시기와 연관되며, 사회 변화, 특히 장례 의식과 계층화된 사회 구조의 발전을 보여준다. 주요 유적지는 로마 지역, 알반 언덕 등에 분포하며, 묘지에서 발견된 장례 의식과 부장품을 통해 이 문화를 연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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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티움 문화
개요
라티움 문화의 항아리
라티움 문화의 항아리
지역이탈리아 중부: 라티움
시대철기 시대 초기
연대기원전 900년경 – 기원전 700년경
이전 문화원시 빌라노바 문화, 항아리 묘지 문화, 아펜니노 문화
이후로마 왕국

2. 주기화

구라티움 문화의 주기화는 도자기를 기반으로 하며, ±25년의 오차를 허용한다.[10][12][13][14][15]

2. 1. 시기별 구분

도자기를 기반으로 한 구라티움 문화(라티움 문화)의 표준 시기 구분은 거의 변동 없이 표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25년의 오차는 허용된다.[10][12][13][14][15]

시기기원전 연대국면
라티움 I1000-900도시 이전 단계 (청동기 시대 후기)
라티움 IIA900-830도시 이전 단계 (철기 시대 초기)
라티움 IIB830-770원시 도시 단계 (철기 시대 초기)
라티움 III770-730원시 도시 단계 (기하학 양식)
라티움 IVA730-630원시 도시 단계 (동방화 시기)
라티움 IVB630-580고대 도시 단계 (동방화 시기)



최근의 연륜 연대 측정법을 기반으로 한 연구는 일부 시기 구분을 수정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 보존된 목재는 전통적인 연대기가 유럽의 다른 지역과 약 50년 정도 차이가 날 수 있음을 나타내는데, 이는 목재의 연대가 도자기의 연대와 일치하지 않아 다소 어려움을 야기한다.

라티움 문화의 첫 번째 시기는 이탈리아 반도의 대부분의 고고학 유적에서 원-빌라노반 문화의 유물과 일치한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시기는 에트루리아의 빌라노반 문화와 일치한다. 이들은 단순하고 장식이 없는 도자기와 화장을 주요 장례 의식으로 특징짓는다. 네 번째 단계는 에트루리아의 오리엔탈화 경향과 일치하며, 세 번째 단계는 이 두 단계 사이의 전환점을 나타낸다. 라티움 III기부터 외국 문화의 영향이 도자기 생산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라티움 IV기에 토착화된다. 물질 문화의 이러한 변화의 대부분은 에트루리아 유적의 동시대 변화와 일치하지만, 라티움은 북쪽 지역에 존재했던 풍부한 광맥을 가지고 있지 않아 일반적으로 더 가난한 지역이었다.

시기기원전 연대 (코넬)기원전 연대 (로마스)[8]단계
라티움 I1000-9001085–1020도시 이전 시대 (후기 청동기 시대)
라티움 IIA900-8301020–950도시 이전 시대 (초기 철기 시대)
라티움 IIB830-770950–880원-도시 시대 (초기 철기 시대)
라티움 III770-730880–750원-도시 시대 (초기 철기 시대)
라티움 IVA730-630원-도시 시대 (초기 및 중기 오리엔탈화 시대)
라티움 IVB630-580고대 도시 시대 (후기 오리엔탈화 시대)



초기 라티움 시대는 인구가 수백 명 미만이었을 소규모 마을이 특징이다. 주택은 지름이 약 6.10m를 넘지 않는 타원형 흙벽돌 오두막에 짚 지붕을 덮은 형태가 흔했다. 이 시대의 도자기는 코일 기법을 사용하여 가정 수준에서 생산되었으며, 물레는 기원전 8세기에 도입되었다. 가마가 없었기 때문에 이 시대의 부드러운 점토는 노천에서 가열되었고, 검고 그을린 외관을 보였다. 금속 가공 외에는 특별한 기술이 존재하지 않았다.

라티움 I–II 시대부터 매장이 화장을 점차 대체하여 주요 장례 의식이 되었다. 로마 포럼과 알바노 언덕에서 발견된 오두막 모양의 재 항아리는 내세의 주거지를 나타낸다. 가비이 인근 오스테리아 델'오사(Osteria dell'Osa)에서 발굴된 600개의 무덤에서 장례 관행에 대한 많은 증거가 나타난다. 부장품은 성별과 나이에 따라 지위가 결정되는 단순하고 빈곤한 사회를 보여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발전했지만 비교적 낮은 수준의 부의 불평등을 나타냈다. 화장은 연료 소비가 많아 17~45세 사이의 성인 남성에게 주로 사용되었다. 남성 무덤에는 무기가, 여성 무덤에는 물레가 포함되어 성별에 따른 노동 분업을 반영한다. 개인 장식품은 여성과 함께 묻힐 가능성이 더 높았다.

라티움 III 시대의 부장품은 일관성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축소된 형태의 무기는 청동으로 만들어진 실제 크기의 무기로 더 자주 대체되었다. 호박 보석과 에트루리아 및 그리스에서 수입된 도자기가 무덤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금속 공학의 확장은 청동 호드(hoard)로도 나타난다. 도자기 물레의 도입은 코일 방식의 용기를 대체한다. 인구도 분산되기 시작하여 더 많은 토지가 농업에 투입되고 잉여 생산량이 증가하여 지역 엘리트의 생활 방식을 뒷받침했다.

오스티엔시스 가도에서 약 16.09km 남쪽에 위치한 카스텔 디 데치마의 무덤은 라티알 IV기에 속하며, 부장품이 훨씬 더 많이 흩어져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7세기에 속하는 부유한 무덤에는 호박과 유리 구슬, 금과 은색 피불라, 장식용 은선으로 장식된 화려한 의상을 입은 여성들이 있었다. 여성들은 포도주를 섞는 그릇과 함께 매장되어 라티움 상류층 여성들이 사교 모임에 참여했음을 시사한다. 이 유적에서 가장 부유한 남성 무덤에는 검, 창, 흉갑, 방패 3개, 소형 전차가 들어 있었다.

1855년과 1876년에 발견된 바르베리니 무덤과 베르나르디니 무덤에는 근동에서 영감을 받은 예술 작품과 함께 많은 수의 금 및 은 물건이 들어 있었다. 일부 물건은 이집트 또는 페니키아에서 수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은 그릇 중 하나에는 페니키아 비문이 새겨져 있으며, 이집트 파라오가 전투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과거에는 라티움의 이러한 무덤이 에트루리아의 지배를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탈리아 전역에서 추가적인 증거가 발견되면서 이러한 종류의 군주 무덤이 반도에서 흔히 발견되었으며, 반도의 문화 전반에 걸쳐 오리엔탈화 시대를 반영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한다.

기원전 650년경부터 오두막은 석재 기초 위에 타일 지붕을 얹은 조적조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부장품 또한 이탈리아 전역에서 사라지기 시작했으며, 이는 오리엔탈화 시대가 종말을 고했음을 반영한다. 라비니움의 미네르바 신전과 사트리쿰의 마테르 마투타 신전을 포함한 기념비적인 신전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그리스의 영향 아래 도시 국가의 건설, 금속 가공 및 도자기 개발, 인구 증가, 농업 생산량 증가와 함께 나타났다. 이 무렵, 지역 엘리트들은 정치적, 종교적 권위를 중심으로 사회적 지위를 공고히 했다. 그러나 라티움은 주요 광물 매장량이 부족하여 북쪽의 에트루리아보다 여전히 더 가난했는데, 이는 범 지중해 무역 네트워크에 에트루리아인보다 덜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했다.

3. 사회 변화

구라티움 문화는 초기에는 소규모 마을 중심의 단순한 사회였으나, 점차 계층화되고 도시 국가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인다.

초기 라티움 사회(라티움 I-II)는 인구 수백 명 미만의 작은 마을들로 구성되었으며, 주거 형태는 흙벽돌 오두막에 짚 지붕을 얹은 형태였다. 코일 기법으로 만든 도자기가 사용되었고, 금속 가공 외에는 특별한 기술이 없었다.[1] 장례는 매장이 주를 이루었으며, 로마 포럼과 알바노 언덕에서 발견된 오두막 모양의 재 항아리는 내세의 주거지를 나타낸다.[1] 가비이 인근 오스테리아 델'오사(Osteria dell'Osa)에서 발굴된 600개의 무덤은 성별과 나이에 따라 지위가 결정되는 단순하고 빈곤한 사회상을 보여준다. 남성 무덤에는 무기가, 여성 무덤에는 물레가 포함되어 성별에 따른 노동 분업을 반영했다.[1]

라티움 III-IV기에 접어들면서 사회 계층화가 나타났다. 카스텔 디 데치마 무덤에서는 부장품의 분포가 다양해졌으며, 부유한 무덤에서는 호박, 유리 구슬, 금, 은 등의 장식품이 발견되었다.[1] 라티움 상류층 여성들은 포도주를 섞는 그릇과 함께 매장되어 심포지엄과 사교 모임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2] 바르베리니 무덤과 베르나르디니 무덤에서는 근동의 영향을 받은 예술 작품과 금, 은 물건들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오리엔탈화 시대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3]

기원전 650년경부터 도시 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하면서(라티움 IVB), 오두막은 석재 기초 위에 타일 지붕을 얹은 조적조로 대체되었다. 라비니움의 미네르바 신전과 사트리쿰의 마테르 마투타 신전과 같은 기념비적인 신전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그리스의 영향, 금속 가공 및 도자기 개발, 인구 증가, 농업 생산량 증가와 함께 나타났다. 지역 엘리트들은 정치적, 종교적 권위를 중심으로 사회적 지위를 공고히 했다.[3] 그러나 라티움은 광물 매장량이 부족하여 에트루리아보다 가난했고, 지중해 무역 네트워크에도 덜 연결되어 있었다.[3]

3. 1. 초기 사회 (라티움 I-II)

초기 라티움 시대는 인구가 수백 명 미만이었을 소규모 마을로 특징지어진다. 주택 유적에서는 벽돌 구조 기술이 부족했음이 드러난다. 대신 지름이 약 6.10m를 넘지 않는 타원형 흙벽돌 오두막에 짚 지붕을 덮은 형태가 일반적이었다. 이 시대의 도자기는 코일 기법을 사용하여 가정에서 생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물레는 기원전 8세기에 이르러서야 도입되었다. 가마가 없어 부드러운 점토를 노천에서 가열했기 때문에 검고 그을린 외관을 보였다. 금속 가공 외에는 특별한 기술이 없었다.[1]

라티움 I–II 시대에는 매장이 화장을 대체하는 주요 장례 의식이 되었다. 부장품도 사용되었다. 고고학자들은 로마 포럼과 알바노 언덕에서 내세의 주거지를 나타내는 오두막 모양의 재 항아리를 발견했다. 오스테리아 델'오사(Osteria dell'Osa)의 가비이 인근에서 발굴된 600개의 무덤은 장례 관행에 대한 풍부한 증거를 제공한다.[1] 이 무덤들에서 발견된 부장품은 성별과 나이에 따라 지위가 결정되는 단순하고 빈곤한 사회상을 보여준다. 부장품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발전했지만, 특정 시점까지는 비교적 균일하여 낮은 수준의 부의 불평등을 나타냈다. 화장은 연료 소비가 많아 사망 당시 17~45세 사이의 성인 남성에게 거의 독점적으로 사용되었다.[1] 남성 무덤에는 실제 크기 또는 축소된 형태의 무기가, 여성 무덤에는 물레가 포함되어 성별에 따른 노동 분업을 반영했다. 개인 장식품은 여성과 함께 묻힐 가능성이 더 높았다.[1]

3. 2. 사회 계층화 (라티움 III-IV)

오스티엔시스 가도에서 약 16.09km 남쪽에 있는 카스텔 디 데치마 무덤은 라티알 IV기에 속하며, 부장품이 훨씬 더 많이 흩어져 있다. 대부분 매장은 부장품이 전혀 없는 단순한 형태였지만, 7세기에 속하는 부유한 무덤에는 호박, 유리 구슬, 금, 은색 피불라, 장식용 은선으로 장식된 화려한 의상을 입은 여성들이 있었다.[1] 라티움 상류층 여성들은 포도주를 섞는 그릇과 함께 매장되었는데, 이는 이들이 심포지엄과 사교 모임에 주최자로서 참여했음을 시사한다. 이 유적에서 가장 부유한 남성 무덤에는 검, 창, 흉갑, 방패 3개, 소형 전차가 들어 있었다.[2]

1855년과 1876년에 각각 발견된 바르베리니 무덤과 베르나르디니 무덤 같은 복잡한 무덤에는 근동에서 영감을 받은 내부 예술 작품과 함께 많은 수의 금, 은 물건이 있었다. 일부 물건은 이집트 또는 페니키아에서 수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은으로 된 그릇 중 하나에는 페니키아 비문이 새겨져 있고, 이집트 파라오가 전투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2] 과거에는 라티움의 이러한 무덤이 에트루리아의 지배를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탈리아 전역에서 추가적인 증거가 발견되면서, 이러한 종류의 군주 무덤이 반도에서 흔히 발견되었으며 반도 문화 전반에 걸쳐 오리엔탈화 시대를 반영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한다.[3]

3. 3. 도시 국가 형성 (라티움 IVB)

오스티엔시스 가도에서 약 16.09km 남쪽에 있는 카스텔 디 데치마의 무덤은 라티알 IV기에 속하며, 부장품이 훨씬 더 많이 흩어져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매장은 부장품이 전혀 없는 단순한 형태였지만, 7세기에 속하는 부유한 무덤에는 호박, 유리 구슬, 금과 은색 피불라, 장식용 은선으로 장식된 화려한 의상을 입은 여성들이 있었다.[1] 이 여성들은 포도주를 섞는 그릇과 함께 매장되었는데, 이는 라티움의 상류층 여성들이 심포지엄과 사교 모임에 주최자로서 참여했음을 시사한다. 같은 유적에서 가장 부유한 남성 무덤에는 검, 창, 흉갑, 방패 3개, 소형 전차가 들어 있었다.[1]

1855년과 1876년에 각각 발견된 바르베리니 무덤과 베르나르디니 무덤처럼 복잡한 무덤에는 근동에서 영감을 받은 내부 예술 작품과 함께 많은 수의 금, 은 물건이 들어 있었다. 일부 물건은 이집트 또는 페니키아에서 수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은으로 된 그릇 중 하나에는 페니키아 비문이 새겨져 있으며, 이집트 파라오가 전투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1] 과거에는 라티움의 이러한 무덤이 에트루리아의 지배를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탈리아 전역에서 추가적인 증거가 발견되면서 이러한 종류의 군주 무덤이 반도에서 흔히 발견되었으며, 반도의 문화 전반에 걸쳐 오리엔탈화 시대를 반영했을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한다.[2]

기원전 650년경부터 오두막은 석재 기초 위에 타일 지붕을 얹은 조적조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부장품 또한 이탈리아 전역에서 사라지기 시작했으며, 이는 기원전 580년경부터 오리엔탈화 시대가 종말을 고했음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라비니움의 미네르바 신전과 사트리쿰의 마테르 마투타 신전을 포함한 기념비적인 신전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그리스의 영향 아래 도시 국가 건설, 금속 가공 및 도자기 개발, 인구 증가, 농업 생산량 증가와 함께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지역 엘리트들은 정치적, 종교적 권위를 중심으로 사회적 지위를 공고히 했다. 그러나 라티움은 주요 광물 매장량이 부족하여 북쪽의 에트루리아보다 여전히 더 가난했는데, 이는 범 지중해 무역 네트워크에 에트루리아인보다 덜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했다.[3]

4. 유적지

구라티움 1기[16]는 로마 지역, 알반 언덕, 몬티 델라 톨파를 중심으로 분포했다. 문명의 증거는 주로 묘지(네크로폴리스)에서 발견되는 장례 풍습을 통해 알 수 있다.[17] 당시에는 화장이 주된 장례 의례였다.

4. 1. 주요 유적

구라티움 문화는 오두막 모양의 매장 항아리로 식별된다. 원시 빌라노바 문화의 항아리는 평평하고 원뿔형이며 깊은 갱도에 묻혔다. 오두막 항아리는 뾰족한 지붕이 있는 오두막의 원형 또는 사각형 모델이다. 내부는 측면에 있는 문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매장과 함께 화장도 행해졌다. 스타일이 독특하다. 오두막 항아리는 사람이 살았던 오두막의 축소판이었지만, 이 기간 동안 사원 및 기타 공공건물에 석재 사용도 개발했다.[9][10]

라티움의 아펜니네 문화는 침입하는 인구 이동의 증거 없이 구라티움 문화로 원활하게 전환되었다. 인구는 일반적으로 순전히 경제적 이점이 있는 장소를 버리고 나중에 도시가 된 방어 가능한 장소를 선택했다. '도시 이전'이라는 용어가 이 시대에 사용된다. 보다 방어 가능한 장소로의 인구 이동은 약탈의 증가를 나타낼 수 있다.[11]

구라티움 1기[16]는 로마 지역, 알반 언덕과 몬티 델라 톨파에 집중되어 있다. 문명의 증거는 주로 묘지(네크로폴리스)에서 얻은 장례이다. 화장이 주된 의례였다.[17] 화장 매장은 고인의 유골이 담긴 오두막을 돌륨(큰 항아리)에 넣고 음식을 제공하는 데 사용되는 다른 그릇으로 구성된다. 도자기는 장식되지 않았다. 오두막 대신에 원뿔 모양의 지붕이 있는 꽃병이나 모조 투구가 때때로 사용되었다. 돌로 만든 포초(구멍)에 돌륨을 넣어 지상에서 기념했다.

무덤 부장품의 경우 방추체는 여성체를 식별하고, 소형 갑옷과 무기로 남성체로 식별한다. 손을 뻗은 조각상이 있을 수 있다.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논문 Aspetti culturali della Roma primitiva: il periodo orientalizzante recente
[7] 서적 Preistoria e protostoria di Roma e del Lazio Roma
[8] 서적
[9] 서적
[10] 서적
[11] 서적
[12] 서적
[13] 서적
[14] 논문 Aspetti culturali della Roma primitiva: il periodo orientalizzante recente
[15] 서적 Preistoria e protostoria di Roma e del Lazio Roma
[16] 서적
[17]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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