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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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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상본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다. 아명은 구월등, 호는 남송이며, 1915년 평강군에서 잠시 독립 운동 관련 잠입하던 시절 손시헌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경상북도 영일에서 태어나 3.1 운동에 참여했으며, 일제에 항거하는 내용의 문서를 작성하여 투옥되었다. 1920년 출소 후 농사에 전념하다가 한국독립당 대표전임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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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구상본
한자 표기具尙本
출생일1898년 10월 21일
사망일1963년 11월 5일
출생지대한제국 경상북도 영일군 흥해면 남송동리 71번지
사망지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 감포
직업독립운동가
거주지대한민국 경상북도 포항
종교유교(성리학)
본관미확인
학력경상북도 대구 계성고등보통학교
정치 활동
정당무소속
경력한국독립당 대표전임위원

2. 별칭

아명(兒名)은 '''구월등'''(具月登)이고, 호(號)는 남송(南松)이며, 1915년 강원도 평강 지방에서 잠시 독립운동 관련 잠입하던 시절에 '''손시헌'''(孫始軒)이라는 가명을 잠시 사용하였다.

3. 생애

구상본은 경상북도 영일군 흥해면 남송동리(현 포항시) 71번지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경주 감포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냈고 포항에서 성장하였다. 1919년 3월 초, 경주시 감포에서 대한 독립 만세 운동에 참가했다.

이후 일제의 식민 통치에 분노하여 일본 대왕에게 조선 독립의 필요성과 일제의 죄를 지적하는 문서를 작성, 포항 우편함에 넣었다가 체포되어, 1919년 12월 2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불경죄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1920년에 만기 출감하였다.

3. 1. 초기 생애와 성장

경상북도 영일군 흥해면 남송동리 71번지(慶尙北道 迎日郡 興海面 南松洞里 71番地)에서 부농(富農) 집안의 자제로 출생하였다. 경주 감포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으며 포항에서 성장하였다. 1919년 10월 21일 당시에는 경상북도 영일군(迎日郡) 흥해면(興海面) 남송동리(南松洞里)에 주로 거주하였다.

3. 2. 3.1 운동 참여와 투옥

그는 1919년 3월 초순 경상북도 경주시 감포에서 대한 독립 만세 운동에 참가하였으며, 그 후 경상북도 영일군 흥해면 남송동리로 거주지를 옮겼다. 1919년 10월 21일, 일제의 식민 지배에 통분하여 '조선은 흥하고 일본은 망할 것이므로, 대왕은 현명한 사람으로 하여금 조선의 왕을 세워 후환이 없도록 하지 않으면 대왕의 생명이 온전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내용의 문서를 작성했다. 봉투 앞면에는 '구상본', 뒷면에는 '대정씨전(大正氏殿)'이라 쓰고 10월 22일 경상북도 영일군 포항 우편함에 투입하였다.

1919년 10월 27일, '일본 대왕의 죄'라는 제목으로 문서를 작성하였다. 내용은 '첫째, 주인 있는 나라(조선)를 강제로 빼앗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죄, 둘째, 임금을 죽이고 충성스러운 무리를 죽여 욕심을 채운 죄, 셋째, 군자와 소인을 뒤바꾸어 나라를 다스리게 한 죄'를 들어 일본을 비판했다. 이 문서는 봉투 앞면에 '일본 군주 황궁 대정전(日本 君主 皇宮 大正殿)', 뒷면에 '구상본'이라 적어 10월 29일 영일군 포항 우편함에 투입했다가 10월 30일 일경에 체포되었다.

1919년 12월 2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불경죄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1920년에 만기 출감하였다.

4.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고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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