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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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문
김도산(金陶山, 1891년~1921년 7월 26일)은 일제 강점기 시대의 연극인이자 영화인입니다. 본명은 김진학(金鎭學)이며, 아명(兒名)은 김영근(金英根)으로 서울 출신입니다.
주요 활동:
- 연극: 상동학교(尙洞學校)를 졸업하고 신극 운동을 하던 이인직에게 연극을 배운 뒤 이인직의 사설극장인 원각사에서 활동했습니다. 1911년에는 임성구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신파 극단인 혁신단을 창립하였고, 「불효천벌」, 「육혈포강도」등의 작품을 공연했습니다. 1918년에는 대구 지역 최초의 극단으로 인정받는 신극좌를 창립하여 대구와 서울을 순회하며 활동했습니다.
- 영화: 1919년 한국 최초의 영화로 여겨지는 연쇄극 《의리적 구토(義理的仇討)》의 극본 및 연출을 맡았습니다. 이 영화는 1919년 10월 27일 서울 단성사에서 상영되었으며, 이 날은 현재 '영화의 날'로 기념되고 있습니다. 《의리적 구토》는 연극과 영상을 결합한 '연쇄극' 형태로, 완전한 영화는 아니지만 한국 영화사의 중요한 시작점으로 평가받습니다. 1918년 일본의 연쇄활동사진인 '선장의 처'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촬영과 편집은 일본 기술자들이 담당했습니다.
- 기타: 1914년에는 김소량 등과 협력하여 창극배우들과 신파배우들을 규합한 신파극단 개량단을 만들었습니다.
사망:김도산은 1921년 7월 26일에 31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참고:
- 《의리적 구토》에서 '구토'는 '원수 갚음'을 뜻하는 일본어 단어 '아다우치'(仇討ち)의 한자 표기를 한국 한자음으로 읽은 것입니다.
- 2019년은 한국 영화 100주년으로 기념되었습니다.
김도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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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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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본명 | 김인한 (金仁翰) |
호 | 도산(陶山) |
출생 | 1861년 10월 14일 |
사망 | 1940년 1월 1일 |
직업 | 조선의 관료, 일제강점기의 기업인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정부인(貞夫人) 안동 김씨 |
자녀 | 김정수(金正洙) 김영수(金永洙) 김광수(金光洙) 김준수(金俊洙) 김봉수(金鳳洙) 김순애(金順愛) |
경력 | |
대한제국 | 탁지부 재무감독 사헌부 감찰 장례원 판임주사 중추원 찬의 |
일제강점기 |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동민회 회장 국민협회 발기인 |
기타 | |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 |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 |
참고 자료 | |
엔싸이버 백과사전 | 김도산 |
한국 최초 | 김은신의 '이것이 한국 최초' (삼문, 1995) 301~30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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