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하시 사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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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카하시 사다코는 일본의 초능력자로, 염사 능력으로 알려져 있다. 어린 시절부터 과묵하고 예민한 성격이었으며, 남편 다카하시 큐지와 정신 수양을 통해 영적 능력을 얻었다고 여겨졌다. 심리학자 후쿠라이 도모키치와 함께 투시 및 염사 실험을 진행했으나, 실험 결과에 대한 진위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후쿠라이의 연구는 학계에서 비판을 받아 고립되었고, 사다코는 남편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심령 치료를 행했지만, 1933년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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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 사다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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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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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명 | 다카하시 사다코 |
후리가나 | たかはし さだこ |
출생일 | 1886년 |
출생지 | 일본, 오카야마현, 와케군, 와케정 |
사망일 | 불명 |
거주지 | 일본, 도쿄부, 도요타마군, 센다가야정 |
종교 | 일련종 |
배우자 | 다카하시 미야지 |
업적 | |
주요 업적 | 후쿠라이 도모키치의 초능력 실험 피험자 |
2. 생애
다카하시 사다코는 오카야마현 와케군 와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조용하고 사색적인 성격이었으며, 어려운 사람을 돕는 따뜻한 마음씨를 지녔다.[1][2] 감수성이 풍부하여 기분에 따라 신체적 변화를 겪기도 했으며, 아버지의 영향으로 니치렌종을 믿었다.[3][4]
남편 다카하시 큐지는 독자적으로 정신 수양법을 연구했고, 사다코도 이를 따라 하며 정신 통일 방법을 익혔다. 큐지는 사다코에게 영적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1910년 11월 12일, 큐지는 위자 보드를 통해 사다코가 미후네 치즈코처럼 천리안을 가졌다고 판단하여 투시 실험을 제안했다.[1]
심리학자 후쿠라이 도모키치는 우자와 소메이의 소개로 사다코를 알게 되어, 1913년부터 투시 및 염사 실험을 함께 진행했다. 사다코는 실험 중 다른 인격이 깃든 듯한 언행을 보였고, 후쿠라이는 이를 "영격"이라고 불렀다.[1][2]
후쿠라이는 실험을 통해 사다코의 능력을 확신했지만, "미신을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고 학계에서 고립되었다. 야마카와 겐지로 등에게 재실험을 요청했으나 실패했고, 미야니는 학자들의 협력을 거부했다.[1][2] 후쿠라이가 휴직되자, 사다코는 자신들의 실험이 그에게 해를 끼쳤다고 생각해 1915년 남편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3]
오카야마에서 심령 치료를 하며 지지를 받았다고 전해지지만,[4] 1933년 이후의 행적과 사망 연도는 불분명하다.
2. 1. 초기 생애
다카하시 사다코는 오카야마현 와케군 와케정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과묵하고 조용한 성격으로, 혼자 생각에 잠기는 것을 좋아했다.[1] 다른 사람에게는 무뚝뚝해 보였지만, 어려운 사람을 보면 돕지 않고는 못 배기는 깊은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다.[2] 감수성이 풍부하여 기분에 따라 토혈, 발열, 경련 등 신체적인 변화를 겪기도 했다.[3] 아버지의 영향으로 니치렌종에 깊이 귀의하였다.[4]2. 2. 남편 다카하시 큐지와의 실험
사다코의 남편 다카하시 큐지는 초심리학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독자적으로 정신 수양을 위한 호흡법을 연구했고, 사다코도 그를 따라 이를 실천하는 동안 정신 통일 방법을 배웠다. 큐지는 이를 통해 사다코에게 영적 능력이 있다고 느꼈다고 한다.1910년 11월 12일, 나가오 이쿠코의 첫 염사 실험이 행해졌고, 공교롭게도 같은 날 큐지는 사다코의 능력을 알아차렸다. 당시 부부는 도쿄부 도요타마군 센다가야정 (현 도쿄도 시부야구 센다가야)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후쿠라이의 저서 『투시와 염사』에 따르면, 같은 날 사다코는 큐지에게 자신이 든 쇠젓가락이 혼자서 화로 위를 움직여 '清'자를 적었다고 말했다. 큐지가 위자 보드를 시도한 결과, "사다코는 기요하라 치즈코(미후네 치즈코를 지칭, 기요하라는 치즈코의 의붓오빠의 성)처럼 천리 앞을 내다본다"라고 나왔다. 이로 인해 큐지는 사다코에게 투시 실험을 제안했다.[1] 같은 달부터, 글자를 쓴 종이나 물건을 상자에 넣어 투시하는 방법으로 20회 이상 실험이 이루어졌으며, 이 경위는 후쿠라이의 『투시와 염사』에 정리되어 있다. 사다코는 모든 투시에 성공했다고 한다.[2]
2. 3. 후쿠라이 도모키치와의 실험
심리학자 후쿠라이 도모키치는 우자와 소메이의 소개로 다카하시 사다코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13년부터 사다코와 함께 투시 및 염사 실험을 진행했다. 사다코는 실험 중 정신을 통일하면 다른 인격이 깃든 듯한 언행을 보였으며, 후쿠라이는 이를 "영격"이라고 불렀다.[1][2]1913년 3월 2일, 다카하시 집 근처 의사의 집에서 쿠보 요시히데, 고토 마키타 등이 입회한 가운데 첫 번째 실험이 진행되었다. 후쿠라이가 숨겨둔 사진 건판에 염사를 시도했지만, 사다코는 건판의 개수에 대해 다른 말을 했고, 결과적으로 후쿠라이가 준비한 건판이 아닌 다른 건판에 감광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후쿠라이는 이를 사다코의 능력이 다른 곳으로 향한 것으로 해석했지만, 학술적 가치는 없다고 판단하여 첫 번째 실험은 실패로 간주되었다.[3][4]
1913년 4월 27일, 후쿠라이의 자택에서 두 번째 실험이 진행되었다. 후쿠라이는 새 건판 3장을 준비하고 봉인한 후, 사다코에게 "묘법" 두 글자를 염사하도록 했다. 실험 결과, 3장의 건판 중 1장에 "묘법" 두 글자가 감광된 것이 확인되었다.
1913년 5월 10일, 세 번째 실험에서는 사다코가 이틀 전 최면 상태에서 예고한 대로 "천" 자와 자신의 손가락 3개를 염사하는 데 성공했다고 주장되었다. 이외에도 "금" 자, 둥근 모양, 산호초, 작은 둥근 점 등이 건판에 감광되었는데, 사다코는 이에 대해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후쿠라이는 이를 사다코의 잠재 관념이 나타난 것으로 해석했다.
후쿠라이는 이러한 실험 결과를 통해 사다코의 투시 및 염사 능력을 사실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2. 4. 실험 중단과 말년
후쿠라이 도모키치의 실험 결과는 "미신을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았고, 후쿠라이는 학계에서 고립되었다. 야마카와 겐지로 등에게 재실험을 요청했으나, 참여하는 사람이 없어 실패하였다.[1][2]미야니는 야마카와의 불성실한 대응에 분개하여, 더 이상의 학자 협력을 거부하였다. 후쿠라이가 휴직 명령을 받자, 사다코는 자신들의 실험이 후쿠라이에게 해를 끼쳤다고 생각하여, 1915년 남편과 함께 도쿄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다.[3]
오카야마에서 사다코는 심령 치료를 행하며 주변의 지지를 받았다고 전해지지만,[4] 1933년 이후의 행적과 사망 연도는 불분명하다.
3. 진위 논란
미야니와 함께 진행한 실험은 다수의 성공을 거둔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1] 이는 부부만 진행한 실험이므로 객관성은 거의 없다.[1] 근처에 사는 "어떤 의사"가 입회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이 인물 또한 자세한 정보가 불분명하다.[1]
후쿠라이 도모키치의 실험은 제3자가 입회하여 평가할 만하다.[1] 나가오 이쿠코의 염사 실험에서 야마카와 겐지로가 건판에 외부 방사선을 쬐어 감광시켰다고 의심했지만,[2] 다카하시 사다코의 실험에서는 3장 겹쳐진 건판의 중앙에만 염사시키는 등, 외부 자극에 의한 트릭으로는 불가능한 점이 평가되었다.[3]
그러나 사전에 건판을 다른 장소에 두지 않아 건판 바꿔치기 트릭이 가능했기에, 대부분의 염사는 트릭이라는 비판도 있다.[3]
모든 실험 일정과 제목은 사다코가 결정했다.[4] 겉으로는 사다코의 "영격"이라는 다른 인격이 결정했다고 여겨지지만, 객관적으로는 사다코 자신이 결정한 것과 다름없으며,[4] 이로 인해 사전에 트릭을 준비할 수 있었다.[1] 제1회 실험 실패 시에도 사다코가 일시 지정을 했지만, 후쿠라이 등 실험 참가자들은 3시간 이상 늦게 도착했다. 후쿠라이는 이를 "갑작스러운 사태로 사다코의 정신이 흐트러져 실패했다"고 해석했지만, 반대로 사다코 측의 뜻대로 되지 않아 트릭을 사용할 수 없었다는 가능성도 있다.[4]
참조
[1]
서적
[2]
서적
なぜ宇宙人は地球に来ない? 笑う超常現象入門
PHP研究所
[3]
서적
[4]
웹인용
怖かった「山村貞子」展
http://jp.rbth.com/a[...]
ロシア新聞
2014-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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