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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용구는 1868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나 동학에 입교하여 최시형의 제자가 되었으며, 동학 농민 운동 당시 항일 의병으로 활동하다 투옥되었다. 이후 일본으로 망명하여 진보회를 조직하고 일진회와 합류하여 친일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시천교를 창설하고 일진회 총위원장 및 회장을 역임하며 한일 합방을 주도했다. 1912년 사망했으며, 사후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서보장을 받았다. 친일 행적으로 인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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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이용구
원어명李容九
한자李容九
로마자 표기I Yong-gu
대유(大有, Daeyu)
해산(海山, Haesan)
본관벽진
출생1868년 2월 14일
출생지조선 경상도 상주
사망1912년 5월 22일
사망지일본 제국 효고현 무코 군 스마 정
거주지조선 충청도 청주
직업 및 경력
경력일진회 회장 겸 대표최고위원
기타 정보
관련 문서
관련 링크동학농민혁명 종합지식정보 시스템
사진
이 용구 초상

2. 생애

1868년 경상북도 상주군 진두리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청주충주 등지로 이주하며 생활했다.[3] 23세가 되던 해 동학에 입교하여 2대 교주 최시형의 가르침을 받았고, 손병희와 함께 뛰어난 제자로 인정받았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는 항일 의병장으로 활동하며 일본군과 싸우기도 했으나,[3] 운동 실패 후 투옥되었다가 사면되었다.

1901년 3월, 대한제국 정부의 동학 탄압을 피해 손병희, 손병흠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3] 이후 러일 전쟁(1904-1905) 발발을 계기로 그의 정치적 입장은 급격히 변하여 친일 노선으로 돌아섰다. 1904년 9월, 손병희의 지시로 귀국하여 포교 활동을 하던 중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였고,[4] 같은 해 송병준의 권유로 친일단체 일진회와 통합하여 회장이 되었다. 일진회 회장으로서 그는 러일 전쟁 당시 일본군에게 적극 협력하였다.

1905년 손병희가 동학의 전통을 이어 반일 성향의 천도교를 창설하자, 이용구는 이에 반발하여 1906년 독자적으로 친일 성향의 시천교(侍天教)를 창설하고 교주가 되었다.[6] 이는 스승 최시형과 동지 손병희와의 완전한 결별을 의미했으며, 그의 친일 행보를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해 통감부가 설치되자, 그는 흑룡회의 우치다 료헤이 등 일본 우익 인사들과 연계하여[3] 노골적인 친일 활동을 전개했다. 일진회 회장으로서 아시아주의와 대동합방론을 내세우며 한일 합방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1906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공식적인 합방을 주장했다. 그는 고종 황제, 총리대신 이완용, 소네 아라스케 통감 등에게 여러 차례 합방 건의서를 제출하며 합방을 추진했다.

1909년 11월 4일, 이토 히로부미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하자 서대문 밖 독립관에서 일진회 회원들을 동원해 대규모 추도회를 열었다.[5] 같은 해 12월에는 일진회 회원 연명으로 순종 황제, 테라우치 마사타케 통감, 이완용 총리에게 '한일합방건의서'(韓日合邦を要求する声明書|한일합방요구성명서일본어)를 제출하여,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한국을 위해 희생했으므로 한국은 일본과 대등하게 합방하여 '일등 국민'의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이는 국가 주권을 포기하고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주장이었다. 합방 추진 과정에서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에게 활동 자금 지원을 요청했으나, 약속과 달리 미미한 금액만 지급받는 등[3] 일본 측에 철저히 이용당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910년 8월 22일 한일 병합이 이루어진 후, 일진회는 9월 25일 해산되었다. 이용구가 주장했던 '대등 합방'은 실현되지 않았고, 일방적인 병합과 일진회 해산에 많은 회원들이 실망과 분노를 느꼈으며, 이들 중 일부는 이후 3.1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용구는 1911년 과로로 쓰러져 입원했고, 이듬해인 1912년 5월 22일 일본 효고현 스마정에서 사망했다. 죽기 직전 문병 온 우치다 료헤이에게 "우리는 참 바보짓을 했어요. 혹시 처음부터 속았던 것은 아닐까요?"라며 뒤늦은 후회를 토로했다고 전해진다.[3] 사후 일본 정부는 그의 친일 공로를 인정하여 훈1등 瑞宝章|서보장일본어을 추서했다.[6]

2. 1. 초기 생애와 동학 입문

1868년 경상북도 상주군 진두리에서 태어났다. 양반 고위 계급 출신의 문벌 가문 출신이다.[3] 19세에 청주로, 20세에 충주군 황산리로 이주하였다.[3] 23세 때 동학에 입교하여, 2대 교주 최시형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손병희와 함께 그의 뛰어난 제자(高弟)가 되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 당시에는 이를 지휘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광무 2년(1898년)에는 동학 활동으로 체포되었으나, 투옥 중 묵비를 지키다가 석방되었다.

2. 2. 항일 의병 활동과 투옥

23세 때 동학에 입교하여 2대 교주 최시형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손병희와 함께 그의 뛰어난 제자가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갑오농민전쟁)이 발발하자, 항일 의병장으로 활동하며 일본군과 싸웠다.[3] 이는 당시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던 민족 운동의 중요한 일부로 평가된다. 동학농민운동 이후 교주 등이 체포되어 처형될 무렵, 이용구도 함께 투옥되었으나 곧 사면되어 풀려났다.[3]

2. 3. 일본 망명과 친일 전향

1901년 3월 손병희, 손병흠 등과 함께 대한제국 정부의 동학 탄압을 피해 일본으로 망명하였다.[3] 이는 1894년 동학 농민 혁명 당시 항일 의병장으로 활동했던[3] 그의 이전 행보와는 대조적인 결정이었다.

일본 망명 생활과 러일 전쟁(1904-1905) 발발을 거치면서 그의 입장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조선 내부의 거듭된 개혁 실패와 양반 계층의 착취 구조를 보며, 조선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근대화와 개혁 달성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인식 하에 일본과의 협력을 통해 조선의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는 친일 노선으로 점차 선회하였다.

1904년 9월, 러일 전쟁손병희의 명을 받고 귀국하여 포교 활동을 하던 이용구는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고 이를 이끌었다.[4] 같은 해 송병준의 권유로 진보회는 일진회와 통합하였고, 이용구는 일진회 회장이 되어 러일 전쟁 기간 동안 일본군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등 본격적인 친일 활동에 나섰다.

1905년 손병희동학의 전통을 계승하여 반일적 성향의 천도교를 창시하자, 이용구는 이에 반발하여 1906년 천도교를 탈퇴하고 독자적으로 친일 성향의 시천교(侍天教)를 창설하여 교주가 되었다.[6] 이는 스승 최시형의 가르침과 동지 손병희와의 완전한 결별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의 친일 노선을 명확히 드러낸 사건이었다.

일진회 회장으로서 이용구는 아시아주의(亞洲主義)와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을 내세우며 아시아 민족의 단결을 통한 서구 제국주의 대항을 주장했다. 그는 러시아 제국의 남하를 저지하고 조선의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 일본과의 군사 동맹 및 정치적 통합, 즉 '한일합방(韓日合邦)'이 필수적이라고 역설하며, 1906년 이를 최초로 주장했다. 같은 해 통감부 설치 이후에는 흑룡회의 우치다 료헤이 등 일본 내 극우 인사들과 연계하여[3] 고종, 총리대신 이완용, 소네 아라스케 통감 등에게 한일합방 건의서를 제출하는 등[6] 합방 운동을 노골적으로 추진하였다.

1909년 11월 이토 히로부미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하자, 이용구는 서대문 밖 독립관에서 일진회 회원들을 동원하여 추도회를 열었다.[5] 같은 해 12월, 그는 일진회 회원 연명으로 '한일합방요구상주문'(韓日合邦を要求する声明書일본어)을 순종, 테라우치 마사타케 통감, 이완용 총리에게 제출했다. 이 성명서에서 그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조선을 위해 희생했으며, 을사늑약이나 헤이그 특사 사건 등은 조선이 자초한 일이라고 강변했다. 나아가 조선인이 일본인과 동등한 '일등 국민' 대우를 받는 대등 합방을 통해 국가와 사회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2. 4. 일진회와 시천교 활동

1901년 3월 손병희, 손병흠과 함께 대한제국동학 탄압을 피해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손병희의 지시를 받고 귀국하여 포교 활동에 종사하던 중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1904년 9월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여 이끌었다.[4] 같은 해 송병준의 권유를 받아들여 진보회를 일진회와 통합하고 회장이 되었다.

러일 전쟁 당시 일본군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1905년 손병희가 동학의 전통을 이어 반일 성향의 천도교를 창설하자, 이용구는 이에 맞서 친일 성향의 시천교1906년에 창설하고 교주가 되어 손병희와 결별하였다.[3] (일부 기록에는 1905년 창설로 나타나기도 한다.)

일진회 총위원장과 회장을 역임하며 본격적인 친일 활동을 전개했다.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되자 흑룡회 간부 우치다 료헤이와의 관계를 통해 친일 활동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는 아시아주의와 대동합방론을 내세우며, 아시아 민족이 단결하여 서구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야 하고, 이를 위해 일본대한제국이 군사 동맹을 맺고 나아가 합방하는 것이 러시아 제국에 대항하고 한국의 부국강병을 이루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1906년 처음으로 한일합방을 공식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용구는 양반에 의한 하층 계급 착취 문제를 조선 내부의 힘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일본과의 합방을 통해 이를 개혁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생각은 1909년 12월, 일진회 명의로 황제 순종, 소네 아라스케 통감,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제출한 '''한일합방건의서'''에 잘 나타난다. 이 건의서에서 그는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막대한 희생을 치르며 한국을 러시아의 위협에서 구하고 독립을 지켜주었으나, 한국은 이를 감사히 여기지 않고 외교권을 빼앗기고 보호 조약(을사늑약)을 자초했다. 헤이그 밀사 사건 등도 우리가 자초한 일이니, 앞으로 닥칠 위험을 막고 일본인과 같은 대우를 받으며 발전하기 위해 대한제국일본 제국이 하나의 정치 기관을 설립하여 대등하게 합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사실상 대한제국의 주권 포기와 일본 제국으로의 편입을 요구했다.[3]

1909년 11월 4일,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한 이토 히로부미의 장례식 날에는 서대문 밖 독립관에서 일진회 회원들을 동원하여 대규모 추도회를 열었다.[5]독립협회 회원이자 당시 일진회 총무였던 한석진이 조문을 낭독했다. 같은 해 12월, 한일합방 청원을 추진하며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에게 필요한 자금 300만 지원을 요청하자, 가쓰라는 3천만 엔이라도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실제 일진회에 지급된 돈은 15만에 불과했다.[3]

1910년 8월 22일 한일 병합이 이루어진 후, 일진회는 9월 25일 해산되었다. 이용구가 주장했던 대등한 합방이 아닌 일방적인 병합으로 귀결되자, 일진회 회원들 사이에서는 실망과 분노가 퍼졌으며, 이후 3·1 운동에 참여한 이들도 많았다.

이용구는 1911년 과로로 한성병원에 입원했으며, 1912년 5월 22일 일본 효고현 武庫郡|무코군일본어 須磨町|스마정일본어에서 요양 중 사망했다. 죽기 직전 문병 온 우치다 료헤이에게 "우리는 참 바보짓을 했어요. 혹시 처음부터 속았던 것은 아닐까요?"라며 후회하는 듯한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3] 사후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瑞宝章|서보장일본어을 추서받았다.[6]

2. 5. 한일 합방 주도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 이용구는 흑룡회의 우치다 료헤이 등 일본 측 인사들과 연계하여 본격적인 친일 활동을 재개하였다. 그는 1905년 손병희천도교를 창설하며 반일 노선을 명확히 하자, 이에 맞서 친일 성향의 시천교를 독자적으로 창설하고 교주가 되었다. 일진회 회장으로서 1906년부터는 공개적으로 한일 합방을 주장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한국인으로서는 공식적으로 제기된 최초의 합방 주장이었다.

이용구는 국민들에게 합방의 필요성을 선전하는 동시에, 고종 황제, 총리대신 이완용, 소네 아라스케 통감 등 최고위층에게 지속해서 한일 합방 건의서를 제출하며 합방을 관철하려 시도했다.[4] 그의 친일 행보는 1909년 11월 4일, 이토 히로부미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한 후 치러진 장례식 날에 더욱 노골화되었다. 그는 서대문 밖 독립관에서 일진회 회원들을 동원하여 대규모 추도회를 열었으며,[5] 이 자리에서 일진회 총무이자 기관지 국민신문 사장이었던 한석진이 조문을 낭독하며 이토를 애도했다.

같은 해 12월, 이용구는 일진회 회원들과 연명으로 '한일합방성명서'(韓日合邦을 要求하는 聲明書)를 작성하여 순종 황제, 소네 아라스케 통감, 이완용 총리에게 제출했다. 이 성명서에서 그는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막대한 희생을 치르며 한국을 독립시켜 주었으며 러시아 제국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해 주었다. 그러나 한국은 이에 감사하기는커녕 여러 나라에 의존하다 외교권을 빼앗기고 보호 조약(을사늑약) 체결과 헤이그 밀사 사건 파견 등 스스로 화를 자초했다. 앞으로 닥칠 위험 역시 우리가 자초한 것이므로, 일본과 대등하게 합방하여 대일본제국의 일등 국민으로서 대우를 받고 정부와 사회를 발전시키자"고 주장하며,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이 하나의 정치 기관을 설립하는 대등 합방을 요구했다. 이는 국권 상실의 책임을 한국 스스로에게 전가하고 일본의 침략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궤변이었다.

합방 청원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용구는 일본 수상 가쓰라 다로에게 활동 자금으로 300만 지원을 요청했다. 가쓰라는 3000만이라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실제 일진회에 지급된 금액은 15만에 불과했다.[3] 이는 일본 측이 일진회를 이용 가치가 떨어지면 언제든 폐기할 수 있는 정치적 도구로 간주했음을 시사한다.

이용구가 이처럼 적극적으로 합방을 추진한 배경에는, 조선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인 양반 계층의 하층민 착취와 학대를 조선인 스스로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으며, 오직 일본과의 합방을 통해서만 개혁이 가능하다고 착각했던 인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민족의 자주성을 포기하고 외세에 의존하려 한 매우 위험한 발상이었다.

결국 그의 '대등 합방'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910년 8월 22일 한일 병합이 강행되었다. 병합 직후 일진회는 일본 측으로부터 해산 권고를 받았고, 9월 25일 해체되었다. 대등 합방을 기대했던 많은 회원들은 일방적인 병합과 일진회 해산에 큰 실망과 분노를 느꼈고, 이들 중 일부는 훗날 3.1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용구 자신도 죽기 직전인 1912년 5월, 병문안을 온 우치다 료헤이에게 "우리는 참 바보짓을 했어요. 혹시 처음부터 속았던 것은 아닐까요?"라며 뒤늦은 후회를 토로한 것으로 전해진다.[3]

사후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서보장(瑞寶章)을 수여받았다.[6] 이는 그의 친일 행각에 대한 일제의 보상이었다.

2. 6. 사망

1911년 과로로 쓰러져 한성의 병원에 입원했다. 이듬해인 1912년 5월 22일, 요양을 위해 머물던 일본 효고현 스마정에서 사망했다.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비탄에 잠겨 분사(憤死)했다는 기록이 있다.

죽음을 앞두고 병문안을 온 흑룡회의 우치다 료헤이에게 "우리는 참 바보짓을 했어요. 혹시 처음부터 속았던 것은 아닐까요?"라고 말하며 자신의 일진회 활동과 친일 행적에 대한 후회를 내비쳤다고 전해진다.[3] 입원 중 다른 일본인 친구에게도 비슷한 후회를 토로했다고 한다.

사후 일본 정부는 그의 한일 병합 공로를 인정하여 훈1등 서보장(瑞寶章)을 수여했다.[6]

3. 사후 평가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또한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도 이름이 오르는 등, 대한민국 정부와 사회로부터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공식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3. 1. 친일반민족행위자 지정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다. 또한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이 명단들에는 그의 장남 이석규도 함께 포함되어 있어, 부자가 모두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3. 2. 역사적 논란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포함되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평가받는다. 그의 장남 이석규 역시 명단에 함께 올랐다.

양반 가문 출신으로 젊은 시절 최시형동학에 가입하여 1894년 갑오농민전쟁 당시 일본군에 맞서 싸우기도 했다. 1898년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 1901년 손병희와 함께 일본을 방문하였고, 러일전쟁을 계기로 친일 노선으로 돌아섰다.

1904년 송병준과 함께 친일 단체인 일진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 아시아주의와 '대동합방론'을 내세우며 아시아 민족의 단결로 서구 제국주의 침략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일본과의 군사 동맹이 러시아 제국에 대항하고 대한제국부국강병을 이루는 길이라고 주장했으며, 1906년에는 처음으로 한일 합방을 주장했다. 같은 해, 그의 친일 행보에 반대한 손병희와 결별하고 천도교를 나와 시천교를 창립하여 교주가 되었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사망하자, 이용구는 일진회 회원들과 연명으로 대한제국 황제 순종, 테라우치 마사타케 한국 통감, 총리 이완용에게 '한일합방건의서'(韓日合邦を要求する声明書|한니치가포켄기쇼일본어)를 제출하여 합방을 촉구했다. 이용구는 양반 지배층의 착취와 학정을 조선인 스스로 극복하기 어렵다고 보고, 일본과의 합방을 통해 이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제출한 '한일합방건의서'는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희생을 치르며 한국을 독립시켜 주었다는 논리를 펴면서, 을사늑약이나 헤이그 밀사 사건 등 국권 침탈 과정이 모두 한국이 자초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대한제국일본 제국 정부가 하나의 정치 기관을 세워 일본한국이 대등하게 합방하고, 조선인도 일본인과 같은 대우를 받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이는 당시 친일 세력의 논리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1910년 8월 22일 한일 병합은 이용구가 주장한 '대등 합방'이 아닌 일방적인 병합으로 이루어졌고, 대한제국 황족은 왕공족으로서 일본 황족에 준하는, 일부 유력자는 조선귀족으로서 일본 화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 데 그쳤다. 이용구는 병합 직후인 9월 25일 일진회를 해산했다. 일본 측이 대등 합방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해 일진회 회원들 사이에서는 실망과 분노가 퍼졌고, 이후 3.1운동에 참여한 이들도 많았다. 이용구 자신도 1911년 과로로 입원한 뒤, 이듬해인 1912년 5월 22일 일본 스마(須磨)에서 사망했는데, 입원 중 일본인 친구에게 일진회 활동을 후회한다는 심경을 토로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과정은 흑룡회의 『한일합방비사』(韓日合邦秘史|간니치가포히시일본어)나 우치다 요헤이(内田良平|우치다 료헤이일본어)의 『한일합방』 등에 기록되어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동학농민혁명 종합지식정보 시스템 http://www.e-donghak[...] 2022-08-24
[2] 웹인용 시천교종역사 http://www.e-donghak[...] 2021-06-17
[3] 서적 실록 친일파 돌베개 1991-02-01
[4] 서적 친일파99인 돌베게 1993
[5] 서적 실록 친일파 돌베개 1991-02-01
[6] 서적 친일정치 100년사 동풍 1995-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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