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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바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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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케바시 사건은 1878년 일본에서 발생한 군사 반란 사건으로, 서남 전쟁 이후 재정 삭감과 은상에 대한 불만, 징병제에 대한 불만 등이 배경이 되었다. 근위 포병 대대를 중심으로 한 반란군은 대대장과 주번 사관을 살해하고 총격전을 벌였으나, 진압군의 반격과 투항으로 2시간 반 만에 진압되었다. 이 사건은 군 내부 개혁과 헌병 창설, 황거 경비 조직 설치의 계기가 되었으며, 언론 보도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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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바시 사건 - [전쟁]에 관한 문서
사건 개요
명칭다케바시 사건
종류반란
목표메이지 천황에게 직접 호소
발생 장소일본, 도쿄도, 지요다구, 황거
결과진압
기간1878년 8월 23일 ~ 24일
이미지
사건의 발단이 된 근위 포병 대대의 장교들. 왼쪽부터 6번째 우쓰노미야 소좌, 3번째 후카자와 대위
사건의 발단이 된 근위 포병 대대의 장교들. 왼쪽부터 6번째 우쓰노미야 소좌, 3번째 후카자와 대위
관련 인물 및 단체
지도자오카모토 류노스케
관련 단체해당사항 없음
관련 사건서남 전쟁
참가 규모
참가자259명
피해 규모
사망자진압군 측 2명, 반란군 측 6명
체포자394명
교전 세력
반란군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
마쓰오 미요타로(松尾三代太郎)
나가시마 다케시로(長島竹四郎)
고지마 만스케(小島万助)
미즈에 우노스케(水江卯之助)
우치야마 사다고(内山定吾)
야나다 마사나오(梁田正名)
히라야마 이바라(平山伊腹)
진압군니시 간지로(西寛二郎)
구로카와 쓰(黒川通軌)
야마카와 히로시(山川浩)
고쿠시 요리마사(国司順正)
오시마 히사나오(大島久直)
경찰 844명
병사 988명

2. 배경

다케바시 사건은 당시 일본 수도였던 도쿄에서 발생했다. 이 사건은 과도한 노동에 대한 낮은 임금과 젊은 남성들의 일본 제국 육군 강제 징집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다. 국가의 군사력 현대화를 위한 정부 노력의 일환이었던 징집은 인구 일부 계층으로부터 저항에 직면했다. 8월 23일, 다케바시 가쓰미라는 전직 사무라이가 이끄는 불만을 품은 일단의 사람들이 도쿄의 다케바시 다리 근처에 모여 인근에 위치한 징병사무소의 운영을 방해하려 했다.

2. 1. 사회경제적 불만

다케바시 사건은 당시 일본 수도였던 도쿄에서 발생했다. 이 사건은 과도한 노동에 대한 낮은 임금과 젊은 남성들의 일본 제국 육군 강제 징집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다. 국가의 군사력 현대화를 위한 정부 노력의 일환이었던 징집은 인구 일부 계층으로부터 저항에 직면했다.[2][3]

사건의 동기는 서남 전쟁에서의 재정 삭감, 행상에 대한 불만이었다. 오쿠마 저택이 공격 목표가 된 것은 그가 행상 삭감을 꾀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병역 제도에 따른 장병제 시대 병졸에 대한 퇴직금 폐지, 가독 상속자의 징병 면제 등도 불만으로 꼽혔다.[2][3]

7월 상순, 평소 사관에 비해 병졸의 은상이 극히 적은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근위 포병 대대 제2소대의 어졸인 나가시마 다케시로는, 같은 어졸인 고지마 만스케와 증급을 강요하려 했다. 이후 그들은 8월 상순, 근위 보병 제2연대 제2대대 제2중대 병졸인 미소에 우노스케와 접촉하여[4], 근위 포병 대대 제1소대 어졸인 다카하시 고사부로, 오가와 야조, 도쿄 진대 예비 포병 제1대대의 병졸 등과도 접촉했다.

반란의 기운은 같은 예비 포병 제1대대 부속인 우치야마 사다고 소위, 하부관 야나다 마사나오 조장, 제1중대 히라야마 이바나 화공 하장(1등 군조 상당관) 등 장교, 하사관도 끌어들여 결의 계획이 세워졌다. 근위 진대에서는 장교나 하사관에 대한 불신감 때문에 병졸만으로 결의하려 했지만, 도쿄 진대 예비 포대에서는 "요즘 병졸은 뭔가 장교를 경멸하는 경향이 있다, 시비를 분별하지 못하고 백성 봉기와 같은 일을 일으키는 것은 부당하다"라는 히라야마 화공 하장의 우치야마 소위에 대한 제안에 따라 전대가 결의할 예정이 되었고[5], 대대장인 오카모토 류노스케 소령도 결의에는 절대 반대라는 입장은 아니었다.[6] 이 외에도, 근위 공병 중대의 제2소대에도 접촉이 이루어졌지만, 그들은 호응하지 못했다.

깃발을 사용하여 신호를 보내거나, "용흥", "용야" 등의 암호, "용"→"용기"[7], "우일"→"기일" 등의 암호를 만드는 등 계획적이었다.

내무성의 판임관 십등속 니시무라 오리베는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 저녁, 간다바시의 공중 변소에서 3명의 근위병이 변소 밖에서 반란 계획을 모의하고 있는 것을 알고, 내무성으로 돌아와 대서기관다케이 모리마사에게 급한 상황을 알렸다. 이 통보로 봉기 계획은 사전에 새어 나갔지만, 저지할 수는 없었다.[8]

2. 2. 징병제와 군 내부 갈등

서남 전쟁에서의 재정 삭감, 행상에 대한 불만이 사건의 동기였다. 오쿠마 저택이 공격 목표가 된 것은 그가 행상 삭감을 꾀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병역 제도에 따른 장병제 시대의 병졸에 대한 퇴직금 폐지, 가독 상속자의 징병 면제 등도 불만으로 꼽혔다.[2][3]

7월 상순, 평소 사관에 비해 병졸의 은상이 매우 적은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근위 포병 대대 제2소대의 어졸인 나가시마 다케시로는, 같은 어졸인 고지마 만스케와 증급을 강요하려 했다. 8월 상순에는 근위 보병 제2연대 제2대대 제2중대 병졸인 미소에 우노스케와 접촉했고[4], 근위 포병 대대 제1소대 어졸인 다카하시 고사부로, 오가와 야조, 도쿄 진대 예비 포병 제1대대의 병졸 등과도 접촉했다. 반란의 기운은 같은 예비 포병 제1대대 부속인 우치야마 사다고 소위, 하부관 야나다 마사나오 조장, 제1중대 히라야마 이바나 화공 하장(1등 군조 상당관) 등 장교 하사관도 끌어들여 결의 계획이 세워졌다.

근위 진대에서는 장교나 하사관에 대한 불신감 때문에 병졸만으로 결의하려 했지만, 도쿄 진대 예비 포대에서는 "요즘 병졸은 뭔가 장교를 경멸하는 경향이 있다, 시비를 분별하지 못하고 백성 봉기와 같은 일을 일으키는 것은 부당하다"는 히라야마 화공 하장의 우치야마 소위에 대한 제안에 따라 전대가 결의할 예정이 되었고[5], 대대장인 오카모토 류노스케 소령도 결의에는 절대 반대라는 입장은 아니었다.[6] 이 외에도 근위 공병 중대의 제2소대에도 접촉이 이루어졌지만, 그들은 호응하지 못했다.

깃발을 사용하여 신호를 보내거나, "용흥", "용야" 등의 암호, "용"→"용기"[7], "우일"→"기일" 등의 암호를 만드는 등 계획적이었다.

내무성의 판임관 십등속 니시무라 오리베는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 저녁, 간다바시의 공중 변소에서 3명의 근위병이 변소 밖에서 반란 계획을 모의하고 있는 것을 알고, 내무성으로 돌아와 대서기관다케이 모리마사에게 급한 상황을 알렸다. 이 통보로 봉기 계획은 사전에 새어 나갔지만, 저지할 수는 없었다.[8]

2. 3. 사전 모의와 정보 유출

서남 전쟁에서의 재정 삭감, 행상에 대한 불만이 동기였다. 오쿠마 저택이 공격 목표가 된 것은 그가 행상 삭감을 꾀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병역 제도에 따른 장병제 시대의 병졸에 대한 퇴직금 폐지, 가독 상속자의 징병 면제 등도 불만으로 꼽혔다.[2][3]

7월 상순, 평소 사관에 비해 병졸의 은상이 극히 적은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근위 포병 대대 제2소대의 어졸 나가시마 다케시로는, 같은 어졸인 고지마 만스케와 증급을 강요하려 했다. 8월 상순, 이들은 근위 보병 제2연대 제2대대 제2중대 병졸인 미소에 우노스케와 접촉하고[4], 근위 포병 대대 제1소대 어졸인 다카하시 고사부로, 오가와 야조, 도쿄 진대 예비 포병 제1대대의 병졸 등과도 접촉했다. 반란의 기운은 같은 예비 포병 제1대대 부속인 우치야마 사다고 소위, 하부관 야나다 마사나오 조장, 제1중대 히라야마 이바나 화공 하장(1등 군조 상당관) 등 장교 하사관도 끌어들여, 결기의 계획이 세워졌다.

근위 진대에서는 장교나 하사관에 대한 불신감 때문에 병졸만으로 결기하려 했지만, 도쿄 진대 예비 포대에서는 "요즘 병졸은 뭔가 장교를 경멸하는 경향이 있다, 시비를 분별하지 못하고 백성 봉기와 같은 일을 일으키는 것은 부당하다"는 히라야마 화공 하장의 우치야마 소위에 대한 제안에 따라 전대가 결기할 예정이 되었고[5], 대대장인 오카모토 류노스케 소령도 결기에는 절대 반대라는 입장은 아니었다.[6] 이 외에도, 근위 공병 중대의 제2소대에도 접촉이 이루어졌지만, 그들은 호응하지 못했다.

깃발을 사용하여 신호를 보내거나, "용흥", "용야" 등의 암호, "용"→"용기"[7], "우일"→"기일" 등의 암호를 만드는 등 계획적이었다.

내무성의 판임관 십등속 니시무라 오리베는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 저녁, 간다바시의 공중 변소에서 3명의 근위병이 변소 밖에서 반란 계획을 모의하고 있는 것을 알고, 내무성으로 돌아와 대서기관 다케이 모리마사에게 급한 상황을 알렸다. 이 통보로 봉기 계획은 사전에 새어 나갔지만, 저지할 수는 없었다.[8]

3. 사건 경과

근위 포병대 반란군은 소총탄을 대폭 소모한 후, 오후 12시에 천황이 있는 아카사카 가이 황거로 향했다. 이들은 참의를 포로로 잡으려 했다. 도중에 20여 명은 근위국의 주번 사관의 설득에 응해 투항하여 영사로 돌아갔다. 남은 94명은 가이 황거에 도착하여 근위국 당직 사관 이소바야시 신조 중위에게 유도되어 정문에서 "탄원의 취지 있음"이라고 외쳤다.[6]

같은 날 오전 8시, 육군 재판소에서 체포자 심문이 시작되었다. 재판장은 구로카와 도키였고, 야마카와 히로시 중좌, 후세야 준 및 사카모토 쥰키 소좌, 구니시 스미마사 중좌, 니시 칸지로 소좌, 가마오카 노부쓰나 소좌, 오시마 히사나오 소좌 등이 평사와 참좌를 맡았다.[9] 10월 15일 판결이 내려져, 미소에 등 55명은 총살형(그중 2명은 이듬해 4월 10일 처형)을, 내야마 사다고 소위 등 118명은 준유죄(내야마는 나중에 대사), 징역형 15명, 태형 및 금고형 1명, 금고형 4명이 처해졌다. 츠다 신이치로 대위, 마쓰오 미요타로 기병 대위 등은 관직 박탈로 제대, 가이 무네요시 대위는 강등, 가와카미 치카에 중위, 이케다 쓰나히라 소위, 마쓰무라 쓰네히사 대위 등은 정직 처분을 받았다.[11] 사건에 직접 참가하지 않은 병사, 민간인 1명을 포함하여 전체 394명이 처벌받았다.

3. 1. 봉기 발발과 초기 진압

메이지 정부는 국가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다케바시 사건에 즉각적으로 대응했다. 일본 제국 육군과 경찰이 시위대를 진압하고 상황을 통제하기 위해 파견되었다.[6] 정부군과 시위대의 대립은 폭력 사태로 이어져 여러 시위대가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고, 다케바시 역시 충돌 과정에서 사망했다. 정부의 신속한 대응으로 반란은 몇 시간 만에 진압되었다.

오후 11시, 근위 포병 대대 다케바시 부대를 중심으로 한 반란병 259명이 봉기했다. 이들은 산포 2문을 끌고 소란을 듣고 달려온 대대장 우쓰노미야 시게토시 소좌와 주번 사관 후카자와 미키치 대위를 살해했다.[6]

도쿄 진대 예비 포병대는 오카모토 소좌가 내야마 소위의 제안을 거부하고 관망하는 자세로 전환하여 오후 10시 아스카야마 공원으로 행군을 시작했다. 폭동 발생 후에도 참가를 권유하는 부하들을 억누르고 아스카야마에서 숙박했다.[6]

반란군은 근위 보병 제1, 제2 연대와 총격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대장경 오쿠마 시게노부 공저에 총격을 가하고, 영내 마구간과 주변 주택에 방화했다. 한 시간에 걸친 전투에서 진압군 측은 사카모토 효 소위 등 2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당했다. 반란군 측도 6명이 사망하고 70명 이상이 체포되었다.[6]

소총탄을 소모한 반란군은 오후 12시에 천황이 있는 아카사카 가이 황거로 향했다. 도중에 20여 명이 투항했고, 남은 94명은 가이 황거에 도착하여 근위국 당직 사관 이소바야시 신조 중위에게 유도되어 정문에 도착, "탄원의 취지 있음"을 외쳤다.[6]

니시 칸지로 소좌가 이끄는 근위 보병대가 이들을 저지하고 무기를 넘기라고 외치자, 반란군 대표는 칼을 휘두르는 척했지만, 근위 보병 중대가 총을 겨누고 있는 것을 보고 사기를 잃고 칼을 내밀었다. 리더격인 오쿠보 타다하치가 자결하자, 나머지 전원은 오전 1시 30분에 무장 해제하고 투항했다. 봉기한 지 2시간 반 만의 일이었다.[6]

도쿄 진대 예비 포병대의 내야마 소위는 부하 몇 명과 아카바네 화약고로 탄약을 가지러 갔지만, 이미 폭동은 진압된 후였다.[6]

3. 2. 충돌과 피해

정부군과 시위대의 대립은 폭력 사태로 번졌다. 여러 시위대가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었으며, 다케바시 역시 충돌 과정에서 사망했다. 정부의 신속한 대응으로 반란은 몇 시간 안에 진압되었다.[6]

오후 11시, 하시니즈메에 있던 근위포병대대 다케바시 부대를 중심으로 한 반란병 259명이 산포 2문을 끌고 봉기하여, 소란을 듣고 달려온 대대장 우쓰노미야 시게토시 소좌, 이어서 주번사관 후카자와 미키치 대위를 살해했다.

포병대 정문을 나서자 이미 근위 보병 제1, 제2 연대가 출동해 있었고, 이들과 총격전이 벌어졌다. 전투에 휩쓸려 반란군은 대장경 오쿠마 시게노부 공저에 총격을 가하고, 영내의 마구간과 주변 주택 수채에 방화했다. 이 한 시간에 걸친 전투에서 진압군 측에서는 사카모토 효 소위 등 2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했다. 반대로 반란군 측도 6명이 사망하고 70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이 전투에서 소총탄을 대폭 소모해 버린 반란군은 오후 12시, 천황이 있는 아카사카 가이 황거로 향했다. 도중에 20여 명이 말로 달려온 근위국의 주번 사관의 설득에 응해 투항하여 영사로 돌아갔다. 남은 94명은 아카사카 이궁에 도착하자, 소란을 만류하려 한 근위국 당직 사관 이소바야시 신조 중위에게 유도되어 정문에 도착하여 "탄원의 취지 있음"이라고 외쳤다.

정문을 경비하고 있는 니시 칸지로 소좌가 이끄는 근위 보병대가 일행을 저지하고 무기를 넘기라고 외치자, 반란 측 대표로 나선 병사는 순간 칼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였지만, 사관의 배후에 근위 보병 한 개 중대가 총을 겨누고 있는 것을 보고 사기를 상실하고 칼을 내밀었다. 이어서 절망한 리더 격인 병사 오쿠보 타다하치가 총구를 배에 대고 자결했다. 이를 신호로 나머지 전원은 오전 1시 30분에 무장 해제하고 투항했다. 봉기한 지 불과 2시간 반 후의 일이었다.[6]

같은 날 오전 8시, 육군 재판소에서 체포자에 대한 심문이 시작되었다. 10월 15일에 판결이 내려졌는데, 소란에 가담한 자 중 미소에 등 55명은 같은 날 총살형(그중 2명은 이듬해 4월 10일 처형)되었고, 내야마 사다고 소위 등 118명이 준유죄(내야마는 나중에 대사), 징역형 15명, 태형 및 금고형 1명, 금고형 4명이 처해졌다. 사건에 직접 참가하지 않은 병사, 민간인 1명을 포함하여 전체적으로 처벌을 받은 것은 394명이었다.[9][11]

3. 3. 아카사카 임시 황거로의 이동과 투항

오후 11시, 하시니즈메에 있던 근위포병대대 다케바시 부대를 중심으로 한 반란병 259명이 산포 2문을 끌고 봉기하여 대대장 우쓰노미야 시게토시 소좌와 주번사관 후카자와 미키치 대위를 살해했다.[6]

반란군은 소총탄을 대폭 소모한 후, 오후 12시에 천황이 있는 아카사카 임시 황거로 향해 모여있는 참의를 포로로 잡으려 했다. 도중에 20여 명은 근위국 주번 사관의 설득에 투항하여 영사로 돌아갔다. 남은 94명은 아카사카 이궁에 도착하여 정문에서 "탄원의 취지 있음"이라고 외쳤다.

정문을 경비하던 니시 칸지로 소좌가 이끄는 근위 보병대가 이들을 저지하고 무기를 넘기라고 외쳤다. 반란군 대표는 칼을 휘두르는 척했지만, 근위 보병 중대가 총을 겨누고 있는 것을 보고 사기를 잃고 칼을 내밀었다. 리더 격인 오쿠보 타다하치가 자결하자, 나머지 전원은 오전 1시 30분에 무장 해제하고 투항했다. 봉기한 지 불과 2시간 반 만의 일이었다.

3. 4. 도쿄 진대 예비 포병대의 움직임

오후 10시, 아스카야마로 행군을 시작한 도쿄 진대 예비 포병대는 오카모토 소좌가 내야마 소위의 제안을 거부하고 관망하는 자세로 전환했다. 폭동 발생 후에도 참가 권유를 억누르고 아스카야마에서 숙박했다.[6]

내야마 소위는 부하 몇 명을 데리고 아카바네 화약고로 탄약을 가지러 갔지만, 이미 폭동은 진압된 후였다.[6]

4. 재판과 처벌

1878년 8월 23일, 사건 당일 오전 8시에 육군 재판소에서 체포자들에 대한 심문이 시작되었다. 재판장은 구로카와 도키였고, 야마카와 히로시 중좌, 권평사 후세야 준 및 사카모토 쥰키 소좌, 참좌 구니시 스미마사 중좌, 니시 칸지로 소좌, 가마오카 노부쓰나 소좌, 오시마 히사나오 소좌가 재판을 맡았다.[9] 10월 15일 판결이 내려졌는데, 소란에 가담한 자 중 미소에 등 55명은 같은 날 총살형을 당했다. (그중 2명은 이듬해 4월 10일 처형) 내야마 사다고 소위 등 118명은 준유죄(내야마는 나중에 대사), 징역형 15명, 태형 및 금고형 1명, 금고형 4명이 처해졌다.[11]

사관 중에서는 오카모토 소좌 외에 근위 포병 대대 제2 소대장[10] 츠다 신이치로 대위, 마쓰오 미요타로 기병 대위 등이 관직 박탈로 제대했고, 가이 무네요시 대위는 강등, 가와카미 치카에 중위, 이케다 쓰나히라 소위, 마쓰무라 쓰네히사 대위 등은 정직 처분을 받았다. 사건에 직접 참가하지 않은 병사, 민간인 1명을 포함하여 전체적으로 처벌을 받은 것은 394명이었다.[11]

5. 영향

이 사건은 일본군의 사상 통일을 꾀하는 군인칙유 발안과 군 내부 질서 유지를 위한 헌병 창설의 계기가 되었다. 또한 황거 경비 조직으로 문부(후의 황궁경찰)를 설치하는 계기가 되었다.[1]

5. 1. 군 내부 개혁의 계기

이 사건은 일본군의 사상 통일을 꾀하는 군인칙유 발안과 군 내부 질서 유지를 위한 헌병 창설의 계기가 되었다. 또한 근위병 외에 황거 경비 조직으로 문부(후의 황궁경찰)를 설치하는 계기가 되었다.[1] 사건 내용은 1878년 각 신문에 시계열을 포함하여 상세하게 보도되었고, 신문사에서는 호외까지 발간할 정도였다.[1] 육군성도 다케바시 사건에 대한 발표를 하고 각 부현에 통달했으며, 이를 신문에서도 보도했다.[1] 최근에는 이 사건의 배경에 자유 민권 사상의 영향이 있었다고도 평가받고 있다.[1]

5. 2. 언론 보도와 자유 민권 사상의 영향

이 사건은 일본군의 사상 통일을 꾀하는 군인칙유 발안과 군 내부 질서 유지를 위한 헌병 창설의 계기가 되었다. 또한 근위병 외의 황거 경비 조직으로 문부(후의 황궁경찰)를 설치하는 계기가 되었다. 1878년 각 신문은 이 사건의 내용을 시계열을 포함하여 상세히 보도했고, 신문사들은 호외까지 발행했다.[1] 육군성도 다케바시 사건에 대한 발표를 각 부현에 통달했으며, 이는 신문에도 보도되었다.[1] 최근에는 이 사건의 배경에 자유 민권 사상의 영향이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1]

참조

[1] 서적 Japan's Imperial Army: Its Rise and Fall 1853-1945 University of Kansas Press 2020-03-26
[2] 간행물 竹橋事件百周年記念出版編集委員会
[3] 간행물 竹橋事件百周年記念出版編集委員会
[4] 간행물 竹橋事件百周年記念出版編集委員会
[5] 간행물 竹橋事件百周年記念出版編集委員会
[6] 간행물 竹橋事件百周年記念出版編集委員会
[7] 간행물 竹橋事件百周年記念出版編集委員会
[8] 서적 岩倉具視書翰 大木喬任宛 明治11年8月23日『大木喬任関係文書』 국립국회도서관 1878-08-23
[9] 간행물 竹橋事件百周年記念出版編集委員会
[10] 간행물 竹橋事件百周年記念出版編集委員会
[11] 간행물 竹橋事件百周年記念出版編集委員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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