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이 다다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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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리이 다다요시는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긴 인물이다. 15세기 말에 태어나 1572년에 사망했으며, 미카와 국의 마쓰다이라 기요야스를 섬기며 오카자키 성 관리에 기여했다. 오케하자마 전투 이후에는 이에야스를 보좌하고, 조정에도 충성심을 인정받았다. 어려운 시기에도 재산을 축적하여 이에야스를 도왔으며, 그의 충성심은 미카와 무사들의 귀감이 되었다. 장남은 전사하고 차남은 출가하여 삼남인 도리이 모토타다가 가독을 상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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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이 다다요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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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씨명 | 도리이 씨 |
사망 | 겐키 3년 음력 3월 25일(1572년 5월 7일) |
묘소 | 후타이인(아이치현니시오시) |
관직 | |
관위 | 이가노카미 |
가족 | |
아버지 | 도리이 다다아키(鳥居忠明) |
자녀 | |
아들 | 다다무네 혼오 이하쿠 모토타다 다다히로 |
딸 | 미야케 마사사다 실 마쓰다이라 시게카쓰 실 |
처 | 혼다 시게쓰구 정실 |
섬긴 가문 | |
주군 | 마쓰다이라 기요야스 히로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
2. 생애
도리이 다다아키의 아들로 태어났다.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 수 없으나, 사망 당시 80여 세였다는 기록에 따라 분메이에서 메이오 연간(15세기 말)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미카와 국의 센고쿠 다이묘인 마쓰다이라 기요야스를 섬기기 시작했으며, 기요야스가 오카자키성으로 진출할 때 등용된 '오카자키 후다이(岡崎譜代)' 가신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1] 기요야스 사후 마쓰다이라 종가가 약화되고 주군 마쓰다이라 히로타다마저 사망하자, 어린 후계자 다케치요(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씨의 인질로 슨푸에 보내지고 오카자키 성은 이마가와 가문의 관리하에 놓였다.
이 어려운 시기 동안 다다요시는 아베 사다요시 등과 함께 오카자키의 실무를 담당하며, 곤궁한 상황 속에서도 훗날 이에야스가 돌아올 날을 대비하여 검약하고 재물을 모으는 등 충정을 다했다. 에이로쿠 3년(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에서는 이에야스를 따라 참전했으며, 전투 후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사망하자 오카자키 성으로 돌아온 이에야스를 그동안 모아둔 재물로 맞이하여 감동시켰다고 전해진다. 이후 고령을 이유로 오카자키 성의 유수(留守)를 맡아 성을 지켰다. 그의 충성심은 조정에도 알려졌다고 한다.[1]
겐키 3년(1572년)에 사망하였다. 장남 다다무네(忠宗)는 일찍 전사하고 차남 혼오 이하쿠는 출가하였기에, 삼남 모토타다가 가독을 이었다.
2. 1. 마쓰다이라 가문 섬김
미카와 국의 센고쿠 다이묘인 마쓰다이라 기요야스를 섬겼다. 다다요시 이전의 당주가 마쓰다이라 가문을 섬겼는지는 확인되지 않아, 마쓰다이라 기요야스가 오카자키성으로 진출한 것을 계기로 섬기게 된 '오카자키 후다이(岡崎譜代)'라 불리는 가신 그룹의 일원으로 추정된다.[1]마쓰다이라 종가는 기요야스 사후, 분가인 사쿠라이 마쓰다이라가의 당주 마쓰다이라 노부사다에게 대항하기 어려울 정도로 세력이 약해져, 스루가 국의 명문가 이마가와 씨의 보호 아래 명맥을 유지했다. 덴분 18년(1549년), 기요야스의 아들이자 주군인 마쓰다이라 히로타다가 사망하자, 그의 어린 아들 다케치요(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요시모토에게 보내져 슨푸에서 인질 생활을 하게 되었고, 오카자키성은 이마가와 가문의 관리하에 놓였다.
이 시기 오카자키의 통치는 이마가와 가문에서 파견된 성대(城代)보다는 다다요시와 아베 사다요시 등 마쓰다이라 가신들의 실무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수확물의 대부분은 이마가와 가문에게 바쳐야 했기에, 마쓰다이라 가신들은 일상생활조차 어려울 정도로 곤궁했다. 그럼에도 다다요시는 얼마 안 되는 수입을 쪼개어, 훗날 이에야스가 오카자키로 돌아올 날을 대비해 검약하며 재물을 모으는 데 힘썼다고 알려져 있다. 아베 사다요시가 사망한 후, 다다요시를 중심으로 마쓰다이라 가신단은 더욱 굳게 결속했다. 가난 속에서도 전투가 벌어지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이러한 충성심은 후세에 '미카와 무사'라는 명성을 얻게 한 바탕이 되었다. 당시 그들의 강인한 자세와 의식은 이에야스를 생각하는 다다요시에 의해 심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에이로쿠 3년(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에서는 이에야스를 따라 참전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전사한 후, 다이주지(오카자키시)를 거쳐 오카자키성에 입성한 젊은 주군 이에야스에게 다다요시는 그동안 모아둔 재산을 보여주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만큼 모아두었습니다"라고 보고했고, 이에야스는 크게 감사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다다요시는 고령을 이유로 오카자키성의 유수(留守, 성주 부재 시 성 관리 책임자)를 맡아 성을 지켰다.
다다요시의 충성심은 조정에도 알려져 있었다. 에이로쿠 11년(1569년) 11월, 고나라 천황의 13주기를 맞아 이에야스가 조정에 헌금을 하자, 고요제이 천황이 이를 가상히 여겼다. 이때 야마시나 도키쓰구가 이 사실을 특별히 도리이 이가노카미(鳥居伊賀守) 입도(入道, 출가한 사람)인 다다요시에게 서신으로 알렸다는 기록이 『언계경기』에 남아있다.[1]
겐키 3년(1572년)에 사망했다. 장남 다다무네(忠宗)는 덴분 16년(1547년) 와타리(渡) 전투에서 이미 전사했고, 차남 혼오 이하쿠는 출가했으므로, 삼남 도리이 모토타다가 가독을 이었다. 묘소는 차남 혼오 이하쿠가 주지를 지낸 아이치현 니시오시의 후타이인(不退院)에 있다.
2. 2. 오카자키 성 관리
덴분 18년 (1549년), 주군 히로타다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이자 새로운 주군인 다케치요(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마가와 씨의 인질로 슨푸에 보내졌다. 이로 인해 오카자키성은 이마가와 씨의 관리하에 놓이게 되었다.이 시기 오카자키의 실질적인 관리는 이마가와 씨가 파견한 성대(城代)보다는 다다요시와 아베 사다요시 등 마쓰다이라 가신들의 손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성에서 나는 수확 등 대부분의 부는 이마가와 씨에게 돌아갔기 때문에, 마쓰다이라 가신들은 매우 곤궁한 생활을 해야 했다. 다다요시는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언젠가 이에야스가 돌아올 날을 대비하여 검소하게 생활하며 재산을 모으는 데 힘썼다. 아베 사다요시가 사망한 후에는 다다요시를 중심으로 마쓰다이라 가신단의 결속이 더욱 강해졌다.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전투가 벌어지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이러한 충성심은 후대에 '미카와 무사'라는 명성을 얻게 한 바탕이 되었다. 당시 가신들의 이러한 자세와 의식은 이에야스를 생각하는 다다요시에 의해 형성된 것이었다.
에이로쿠 3년 (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전사하자, 다다요시는 이에야스를 따라 다이주지(오카자키시)를 거쳐 오카자키 성으로 돌아왔다. 이때 그는 젊은 주군 이에야스에게 그동안 모아둔 재산을 보여주며 "어려운 중에도 이만큼의 재산을 모았습니다"라고 보고했고, 이에야스는 크게 감격하며 감사했다고 전해진다. 그 후 다다요시는 고령을 이유로 오카자키 성의 유수(留守, 성을 지키는 역할)를 맡았다. 그의 충성심은 조정에도 알려져, 에이로쿠 11년 (1569년) 11월 고나라 천황의 13주기를 맞아 이에야스가 조정에 헌금을 했을 때, 고요제이 천황이 이에야스에게 상을 내리면서 야마시나 도키쓰구가 이 사실을 특별히 다다요시(도리이 이가 입도)에게 서신으로 알렸다는 기록이 『겐쓰기쿄키』에 남아 있다[1]。
2. 3. 오케하자마 전투 이후
에이로쿠 3년 (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에서는 이에야스를 따라 종군하였다.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전사한 후, 다이주지(오카자키시)를 거쳐 오카자키성에 들어간 젊은 주군 이에야스에게 그동안 축적해 온 재산을 보여주며 "어려운 중에도 이만큼의 축적을 이루었다"고 보고하였고, 이에 이에야스는 크게 감동하며 감사했다고 전해진다.이후 다다요시는 고령을 이유로 오카자키성의 유수(留守, 성주 부재 시 성을 지키는 역할)를 맡아 후방을 지원했다. 그의 충성심은 조정에도 알려질 정도였다. 에이로쿠 11년 (1569년) 11월, 고나라 천황의 13주기를 맞아 이에야스가 조정에 헌금을 하자 고요제이 천황이 이에 대한 상을 내렸는데, 이 사실을 야마시나 도키쓰구가 특별히 도리이 이가 입도(충길)에게 서신으로 알렸다는 기록이 『겐쓰기쿄키』에 남아 있다.[1]
겐키 3년 (1572년)에 사망하였다. 장남 충종(忠宗)은 덴분 16년 (1547년) 와타리 전투에서 이미 전사하였고, 차남 혼오 이하쿠는 출가하였기 때문에, 삼남인 모토타다가 가독을 상속받았다.
묘소는 차남 혼오 이하쿠가 주지로 있었던 후타이인(아이치현 니시오시)에 있다.
2. 4. 사망
겐키 3년(1572년)에 사망하였다. 장남 충종(忠宗)은 덴분 16년(1547년) 와타리 전투에서 이미 전사하였고, 차남 혼오 이하쿠(本翁意伯)는 출가하였기 때문에, 삼남인 도리이 모토타다가 가독을 상속받았다.묘소는 차남 혼오 이하쿠가 주지로 있던 후타이인(不退院) (아이치현 니시오시)에 있다.
3. 인물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한 충신으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어려운 시기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재산을 모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다다요시가 '와타리'(渡り)라 불리는, 여러 지역을 돌며 물건을 사고파는 상공업자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고문서인 『에이로쿠 잇키 유래(永禄一揆由来)』에는 "분수를 아는 매수인"으로, 『산슈 잇코슈 란키(三州一向宗乱記)』에는 "농업과 상업에 종사하며 부유했던 자"로 기록되어 있어, 토리이 가문이 상당한 경제력을 지녔음을 짐작할 수 있다.
토리이 가문의 근거지였던 미카와 국 헤키카이 군은 야하기 강의 수운 덕분에 수륙 교통의 중심지로 번성했던 곳이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배나 말을 이용한 상업 활동으로 큰 부를 쌓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4. 배우
참조
[1]
논문
徳川家康の甲斐郡内領支配と鳥居元忠
[1]
서적
戦国・織豊期大名徳川氏の領国支配
岩田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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