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경
1. 개요
이준경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갑자사화로 인해 유배를 겪었으나 중종 반정 이후 복귀하여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기묘사화 당시 사림파를 옹호하다 파직되었고, 을사사화에서는 이언적과 함께 사림을 보호하려 노력했다. 명종 때 영의정에 올라 척신 윤원형을 축출하고 조광조를 신원하는 등 개혁을 추진했으며, 명종 사후 선조를 옹립했다. 붕당 정치를 비판하며 이이와 갈등을 겪었고, 임종 직전 붕당의 폐단을 예견했다. 이이의 비판을 받았으나, 사후 붕당이 심화되자 이이도 그의 예견을 인정했다. 시호는 충정이며, 선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 이름 | 이준경 |
|---|---|
| 원어명 | 李浚慶 |
| 출생일 | 1499년 음력 12월 27일 |
| 출생지 | 조선 경기도 광주군 |
| 사망지 | 조선 경기도 광주군 |
| 사망일 | 1572년 음력 7월 7일 (74세) |
| 국적 | 조선 |
| 별명 | 자(字)는 원길(原吉) 호(號)는 동고(東皐)·남당(南堂)·홍련거사(紅蓮居士)·연방노인(蓮坊老人) 시호는 충정(忠正) |
| 경력 | 문인, 사상가, 정치가, 시인, 서예가 |
| 종교 | 유교(성리학) |
| 배우자 | 정실 김씨 부인 그 외 측실 1명 |
| 자녀 | 2남 |
| 정당 | 훈구파 세력 |
| 직책 | 영의정 |
|---|---|
| 임기 | 1565년 8월 15일 ~ 1571년 5월 1일 |
| 군주 | 조선 선조 이연 |
| 부모 | 이수정(부), 신씨 부인(모) |
|---|---|
| 형제 | 이윤경(형) |
| 친인척 | 이세좌(조부) 이연경(족척) 이중경(족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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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묘왜변 관련자 -
심연원
심연원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영의정까지 올랐고, 을사사화 때 위사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손녀가 명종의 비 인순왕후가 되면서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고 심의겸, 심충겸 형제가 서인의 영수로 활동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
을묘왜변 관련자 -
이광식 (1493년)
조선 시대 무신 이광식은 무과 급제 후 여러 관직을 거치며 변방 방비와 민생 안정에 힘썼고 을묘왜변 당시 왜적 토벌에 공을 세웠으며 사후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
청백리 -
이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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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 -
황희
황희는 고려 말부터 조선 전기까지 활동한 재상으로, 세종 시대에 영의정을 지내며 태평성대를 이끌었으나, 친인척 비리 옹호 논란도 있는 인물이다. -
유교에 관한 -
민영환
민영환은 1861년 서울에서 태어나 문과에 급제하고 요직을 거치며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참석한 개화파 인물로,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여 자결했으며 그의 유서는 독립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
유교에 관한 -
김만중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소설가인 김만중은 명문 양반 가문 출신으로, 암행어사, 공조 판서, 대사헌, 대제학 등 요직을 역임하며 숙종의 궁녀 장씨 총애를 비판하다 유배 생활을 했고, 어머니를 위해 지은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비롯한 저서를 통해 국어 문학 발전에 기여하며 주자학적 세계관과 불교적 사상을 융합한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다.
2. 생애
기묘사화로 죄없이 갇힌 사람들을 석방할 것을 주장하다 김안로에게 미움을 받아 쫓겨났다. 이후 명종의 고명대신으로 명종의 유명을 받들어 하성군(훗날의 선조)을 옹립했다.
영의정 자리에 있으면서도 겸손하고 신중한 자세로 정사에 임하여 명재상으로 칭송받았다. 사림파의 급진적 개혁에는 반대하였고, 신진 사림(훗날의 동인)과 기성 사림(훗날의 서인) 간의 분쟁을 조정하려 했으나, 신진사림에게 정적(政敵)으로 지목되어 이이, 기대승 등에게 공격받았다. 이이와 심하게 갈등하던 중 이이의 인격을 의심하는 발언을 하여 그와 척을 지게 되었다. 죽기 직전 붕당의 폐단이 나라의 혼란을 초래할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다가 이이에게 공격받았으나, 유성룡 등이 변호하여 처벌을 면했다.
이연경과 조광조의 문인이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며, 1591년(선조 24) 광국원종공신 1등에 특별히 추서되었다.
2.1. 생애 초기
할아버지는 이세좌이고, 아버지는 홍문관 수찬 이수정(李守貞)이다. 할아버지 이세좌는 성종 때 승정원좌승지로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리는 명을 받고 금부도사와 함께 사약을 들고 가서 사사되는 것을 목격했는데, 이때 그의 할머니는 집안이 망하게 되었다면서 염려했다고 한다. 1504년 연산군 때 갑자사화로 할아버지 이세좌와 아버지 이수정이 사사되었다. 이준경은 이때 6세였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형 이윤경과 함께 괴산으로 유배되었으나, 1506년 중종 반정으로 풀려나왔다. 외가에서 성장했으며 16세 때부터 이연경과 조광조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이연경과 조광조는 김굉필의 제자로,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 정여창으로 이어지는 사림의 학맥을 계승한다.
2.2. 관료 생활과 기묘사화
1504년 연산군 때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형 이윤경과 함께 괴산으로 유배되었으나, 1506년 중종 반정으로 풀려나왔다. 외가에서 성장했으며 16세 때부터 이연경과 조광조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이연경과 조광조는 김굉필의 제자로,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 정여창으로 이어지는 사림의 학맥을 계승한다.
그 뒤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부수찬이 되었으나, 1519년 기묘사화 때 사림파를 옹호하여 죄없는 사람들을 석방할 것을 주장하다가 김안로에 의해 파직되었다. 이후 향리에 칩거하며 문밖 출입을 끊고 독서와 수양으로 성리학에 정진했다. 그 뒤 김안로가 사사된 후 복직되었다.
2.3. 을사사화와 을묘왜변
홍문관 직제학을 거쳐 당상관으로 승진하여 승정원승지, 형조참판 등을 거쳐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병조판서로 승진하여 되돌아왔고 대사헌, 한성부판윤, 형조판서, 지중추부사, 이조판서, 우찬성, 좌찬성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을사사화 당시 이언적과 함께 신진 사림파와 선비들을 보호하려 애썼으나 실패하였다. 대사헌으로 있던 1550년(명종 5년)에는 정적(政敵)이었던 이기의 탄핵으로 대윤 윤임의 일파로 몰려 충청도 보은에 유배되었다. 1551년 석방되어 지중추부사로 복귀했다.
1553년(명종 8년) 함경도 도순변사로 출정하여 북방여진족의 반란을 진무했다. 1555년 호남에 왜구들이 쳐들어와 해안가의 군현이 함락되자, 전라도 도순찰사가 되어 을묘왜변을 진압하고 왜구를 격퇴시킨 공으로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1555년(명종 10년) 5월 왜적이 해안가로 침략하여 장수를 죽이고 여러 고을이 함락됐다. 이때 좌우방어사를 나눠 보내고 그는 전라도도순찰사로 특별 임명되어 내륙 깊숙이 침입한 왜구 토벌을 지휘하게 했다. 그는 형 전주부윤 이윤경을 순변사로 추천하고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영암성에 파견했다. 왜적을 소탕하고 돌아와 의정부우찬성 겸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때 그는 남치근 등을 발탁, 추천하였다.
2.4. 영의정 재직과 척신 정치 청산
명종의 고명대신으로 그의 유명을 받들어 하성군(훗날의 선조)을 옹립했다.
영의정 자리에 있으면서도 늘 겸손하고 신중한 자세로 정사에 임하여 명재상으로 칭송받았다. 사림파의 급진적 개혁에 반대하였고, 신진 사림(훗날의 동인)과 기성 사림(훗날의 서인)의 분쟁을 조정하다가 신진사림의 정적(政敵)으로 지목되어 이이, 기대승 등의 공격을 받았다. 이이와 심하게 갈등하던 그는 이이의 인격을 의심하는 발언을 하여 그와 척을 지게 된다.
영의정이 되자 이량이 퇴출당하면서 국정을 주도하여, 척신 윤원형을 축출하는 한편 백관을 거느리고 입궐, 윤원형의 죄를 물어 사정을 끊고 정형하도록 청하자 명종이 3일 만에 수락했다. 그러나 명종은 윤원형을 사형시키지는 않고 유배 보내는 선에서 종결지었다. 이어 조광조를 신원, 복권하여 문묘(文廟)에 종사할 것을 청하고, 심통원을 축출하였으며, 궐내 불당을 해체하고 불교 억압 정책과 소격서 혁파를 실시하는 등 성리학적 이념에 기반한 정치가 정착되도록 노력했다.
명종이 자신의 후사를 언급하자 그는 이것은 남의 신하로서 감히 논의할 일이 아니라며 물리쳤다. 영의정 재직 중 명종이 죽자 좌의정 심통원과 함께 왕의 임종을 지키며 고명대신으로 명종의 유지를 받들었는데, 심통원이 다른 뜻을 품고 하성군을 지지하지 않자, 그를 창고에 가둔 뒤 원상으로서 국사(國史)를 총괄했고, 왕의 유명을 받들어 선조를 옹립했다. 한편 선조 즉위 시 그는 새 왕은 명철하기는 하지만 그릇이 큰 인물은 아니다. 예의가 바르기는 해도 절대 겸손한 성품은 아니다 라는 평을 하였고, 이는 그대로 선조와 다른 이들의 귀에도 들어갔다.
2.5. 명종 승하와 선조 즉위
명종이 죽자 이준경은 좌의정 심통원과 함께 왕의 임종을 지키며 고명대신으로서 명종의 유지를 받들었다. 그러나 심통원이 다른 뜻을 품고 하성군(훗날의 선조)을 지지하지 않자, 이준경은 그를 창고에 가둔 뒤 원상으로서 국사(國史)를 총괄했고, 왕의 유명을 받들어 선조를 옹립했다.
선조 즉위 시 이준경은 새 왕은 명철하기는 하지만 그릇이 큰 인물은 아니며, 예의가 바르기는 해도 절대 겸손한 성품은 아니라는 평을 하였는데, 이는 그대로 선조와 다른 이들의 귀에도 들어갔다.
2.6. 이이와의 갈등과 붕당 정치 비판
이이와 심하게 갈등하던 이준경은 이이의 인격을 의심하는 발언을 하여 그와 척을 지게 된다. 이준경은 백인걸을 찾아가 "자네가 추천한 이 아무개라는 인간이 왜 그 모양인가?" 하고 항의했다. 이 발언이 이이의 귀에 들어가면서 이이는 이준경을 상당히 안 좋게 생각했고, 그 역시 이이의 인격을 의심하였다.
이준경은 1572년 병으로 임종하기 직전에 사림들이 당을 나누어서 싸우게 될 것을 예견하였다. 그리고 당쟁의 중심인물로 이이를 지목하였다. 화가 난 이이는 이준경이 자신을 모함하는 것이라며 반박하였다. 이이는 붕당정치를 무조건 비판할 것이 아니며, 사람은 각자 사상이 다를 수 있다고 반박했다. 이이에 의하면 붕당은 국가 정치를 문란하게 하는 무리가 아니라 뜻이 맞는 이들끼리의 모임이라고 보았다. 그는 소인이 무리를 이루듯, 뜻을 같이 하는 군자들끼리 집단을 이루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았다. 또한 상대방 정당이라고 해서 전부 소인배들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이준경이 당쟁을 예견하는 글을 쓰자 이이는 이준경을 향해, 죽음에 이르러 그 말이 사악하다며 강도 높게 비난했다.
그러나 일부 사림 인사들은 율곡 이이의 종조부 이기가 이준경과 원수였던 것과, 율곡 이이의 관료 생활 초반 그의 솔직함을 비판하고 예의 없는 인간으로 몰고 간 것에 대한 한풀이로 해석하였다. 뒤늦게 1575년 을해당론으로 동인, 서인 분당이 확실해지자, 이이는 그의 당론을 인정하고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후에 이이는 자신의 저서 《석담일기》에서 이준경을 가리켜 '임금을 도로서 인도하지 못하고 오직 자기만 잘난 척하면서 사람을 받아들이는 도량이 없었다'는 평을 남겼다.
2.7. 죽음과 평가
김안로의 미움을 받고 쫓겨났다가 명종의 고명대신으로 그의 유명을 받들어 하성군(훗날의 선조)을 옹립했다. 영의정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늘 겸손하고 신중한 자세로 정사에 임하여 명재상으로 칭송받았다.
사림파의 급진적 개혁에 반대하였고, 신진 사림(훗날의 동인)과 기성 사림(훗날의 서인)의 분쟁을 조정하다가 신진사림의 정적(政敵)으로 지목되어 이이, 기대승 등의 공격을 받았다. 이이와 심하게 갈등하던 그는 이이의 인격을 의심하는 발언을 하여 그와 척을 지게 되었다. 1572년(선조 5년) 죽기 직전 붕당의 폐단이 나라의 혼란이 되리라는 유언과 경영에 관하여 4가지 조목으로 된 유소(遺疏)를 올리고 죽었다. 그중 붕당이 형성되는 것을 방지하지 않으면 앞으로 국가가 난국에 빠질 것이라는 내용은 많은 파문을 일으켜 이이, 유성룡 등 신진 사류들은 이를 격렬히 부정하면서 붕당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으나 이 예언은 몇 년 후 동서분당으로 현실화되었다. 그가 선조 즉위 시 했던 발언 역시 문제시되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이이, 유성룡 등의 공격을 받았고 이후에도 계속 이이의 공격을 받았으나, 유성룡 등이 그를 변호하여 처벌을 면했다. 그 뒤 사후 4년만에 붕당이 출현하자 이이도 생각을 바꾸게 된다. 후일 충정(忠正)의 시호가 내려졌다. 1591년(선조 24) 종계변무가 성사되자 광국원종공신 1등에 특별히 추서되었다.
《이준경선생묘》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에 있다. 부인과 함께 장사지낸 합장묘이며, 긴 돌을 이용하여 봉분 아랫부분을 둘렀다. 묘 앞에는 묘비·상석·향로석이 있으며, 상석 앞에는 장명등(長明燈: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있고, 좌우에는 멀리서도 무덤이 있음을 알려주는 망주석·문인석이 1쌍씩 배치되어 있다. 묘비는 근래에 세운 것인데, 원래의 비문은 노수신이 지어 선조 18년(1585)에 세운 것으로 마모가 심해 현재는 수원대학교 박물관으로 옮겨서 보관하고 있다. 1987년 2월 12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96호로 지정되었다.
선조 묘정에 종사되고, 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3. 저서
* 동고유고 (東皐遺稿)
* 조선풍속 (朝鮮風俗)
4. 가족 관계
5. 기타
영의정 재임 시절 아들 이덕열이 홍문관 관리 후보인 홍문록에 올라가자, 이준경은 "내 아들이라서 누구보다 실력이 모자라다는 것을 잘 안다"며 그 이름을 삭제해버린 일화가 있다. 이는 도곡(陶谷) 이의현(李宜顯)의 도곡집 23권과 동고유고 동고선생행장에 수록되었다. 이덕열은 남원(南原)에 살던 그의 사촌형제 이유경(李有慶)의 양자로 보내졌으며, 이덕열의 아들 이사성은 뒷날 허균의 사위가 된다.
이준경은 죽기 직전에 붕당의 출현과 당쟁으로 나라가 망할 것이라 예언하여 화제가 되었다. 임종 전에 당쟁을 예견했다가 이이의 비판을 받았으나, 후일 당쟁 예언이 사실로 나타나자 율곡 이이가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이때 류성룡 등이 이준경을 옹호하였다. 훗날 영남 유림들과 심통원과도 개인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이는 동인과 남인이 그를 추종, 추앙하는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