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이크-노리스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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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드레이크-노리스 원정은 1589년 잉글랜드가 스페인의 해상력 약화를 틈타 펠리페 2세에게 평화 협상을 강요하고 포르투갈 제국에 타격을 주기 위해 기획한 원정이다. 주요 목표는 스페인 함대 파괴, 리스본 반란, 아조레스 제도 기지 건설, 스페인 보물 함대 나포 등이었으나, 자원 부족, 정치적 상황, 전략적 오류, 포르투갈 민중의 비협조 등으로 인해 실패했다. 이 원정으로 잉글랜드는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을 입었으며, 스페인 해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는 데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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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이크-노리스 원정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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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분쟁 | 드레이크-노리스 원정 |
전쟁의 부분 | 잉글랜드-스페인 전쟁 (1585년~1604년) 80년 전쟁 |
![]() | |
날짜 | 1589년 4월 ~ 7월 |
장소 | 이베리아반도 리스본 라코루냐 |
결과 | 에스파냐의 결정적 승리 |
영향 | 에스파냐 합스부르크 왕조가 포르투갈 왕위 유지, 포르투갈의 리스본 대양함대와 같은 해양력을 유지함으로써 제국의 지위 유지, 포르투갈 분리독립 실패. 에스파냐 함대가 전쟁 수행능력을 유지함.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잉글랜드 왕국 네덜란드 공화국 포르투갈 왕국 |
교전국 2 | 이베리아 연합 |
지휘관 및 지도자 | |
교전국 1 지휘관 | 로버트 데버루 프랜시스 드레이크 존 노레이스 에드워드 노레이스 안토니우 1세 |
교전국 2 지휘관 | 라코루냐 방면: [[파일:Flag of Cross of Burgundy.svg|테두리|22px]] 케랄보 후작 [[파일:Flag of Cross of Burgundy.svg|테두리|22px]] 알바로 트론코소 [[파일:Flag of Cross of Burgundy.svg|테두리|22px]] 마리아 피타 리스본 방면: [[파일:Flag of Cross of Burgundy.svg|테두리|22px]] 푸엔테스 백작 [[파일:Flag of Cross of Burgundy.svg|테두리|22px]] 산타가데아 백작 [[파일:Flag of Cross of Burgundy.svg|테두리|22px]] 알론소 데 바잔 [[파일:Flag Portugal (1578).svg|테두리|22px]] 브라간사 공작 |
병력 규모 | |
교전국 1 병력 | 갤리온 6척 무장상선 60척 네덜란드 평저선 60척 피네스 20척 병력 23,375명 |
교전국 2 병력 | 갤리온 4척 무장상선 (개수 불명) 병력 15,000명 |
사상자 및 피해 | |
교전국 1 피해 | 11,000–15,000명 사망 40척 침몰 또는 나포 |
교전국 2 피해 | 900여명 사상 |
영어 위키 정보 | |
분쟁 명칭 (영어) | English Armada |
전쟁의 부분 (영어) | Anglo–Spanish War (1585–1604) |
날짜 | April – July 1589 |
장소 | A Coruña – Lisbon, Iberian Coast (modern Spain (Galicia), and Portugal) Bay of Biscay |
결과 | Spanish victory |
교전국 1 | England Dutch Republic Portuguese loyal to the Prior of Crato |
교전국 2 | Iberian Union Spain Portugal |
지휘관 1 | Elizabeth I Robert Devereux Francis Drake John Norris Prior of Crato |
지휘관 2 | Philip II/I Coruña: Marques de Cerralbo Lisbon: |
병력 1 | 180+ ships 27,667 men |
병력 2 | Four galleons Unknown armed merchant vessels 15,000 men |
사상자 1 | 11,000–18,000 killed, drowned or died of disease 40 ships captured, sunk or scuttled |
사상자 2 | 900 dead or wounded 3 galleons destroyed 13 merchant ships |
2. 배경
스페인 무적함대가 패배하고 스페인으로 돌아간 후,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는 펠리페 2세에게 평화 협상을 강요하려 했다. 그녀의 고문들은 더 야심 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윌리엄 세실, 1대 버클리 남작은 이 원정의 세 가지 주요 목표를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첫째, 북부 스페인 항구에서 수리 중인 손상된 스페인 대서양 함대를 파괴하는 것, 둘째, 리스본에 상륙하여 펠리페 2세(포르투갈의 펠리페 1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것, 셋째, 서쪽으로 계속 진출하여 아조레스 제도에 영구 기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2] 추가 목표는 아메리카에서 카디스로 돌아오는 스페인 보물 함대를 나포하는 것이었지만, 이는 아조레스 작전의 성공에 크게 달려 있었다.[4]
군사 원정의 전략적 목표는 브라질과 동인도를 포함하는 포르투갈 제국 전역에 걸쳐 부과된 무역 금지를 깨는 것이었고, 인도와 중국에도 무역 기지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자원이 없었기 때문에 드레이크와 노리스는 원정을 약 80000GBP의 자본으로 합자 회사로 운영했는데, 그 중 4분의 1은 여왕이, 8분의 1은 네덜란드가, 나머지는 여러 귀족, 상인, 길드가 충당했다.[2] 재무관은 제임스 헤일스 경이었는데, 그는 귀환 도중에 사망했다. 물류 및 악천후에 대한 우려로 함대의 출항이 지연되었고, 항구에서 대기하는 동안 혼란이 커졌다. 네덜란드는 약속한 군함을 공급하지 못했고, 식량의 3분의 1이 이미 소비되었으며, 자원병의 수가 계획된 병력 규모를 10,000명에서 20,000명 이상으로 늘렸다.[2] 전년도 스페인 무적함대 원정과 달리 잉글랜드 함대에는 공성포와 기병대도 부족하여 의도한 목표가 위태로워졌다.
2. 1. 잉글랜드-스페인 관계
스페인 무적함대가 스페인으로 돌아간 후,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스페인의 일시적인 해상 약세를 이용하고 펠리페 2세에게 평화 협상을 강요하려 했다. 잉글랜드는 포르투갈 제국에 부과된 무역 금지를 깨고, 인도와 중국에도 무역 기지를 세우고자 했다. 엘리자베스는 포르투갈 왕실과의 동맹을 통해 유럽에서 스페인 합스부르크가의 권력을 억제하고 이 지역으로 가는 무역로를 확보하고자 했다.[2]아비스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 상속자인 크라투의 안토니오는 아조레스 제도에서 효과적인 망명 정부를 수립하는 데 실패했고, 잉글랜드의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카리스마가 부족했고, 사생아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그의 주장은 약화되었으며, 코르테스의 포르투갈 귀족들에게 왕위에 대한 비교적 강력한 주장을 가진 브라간사 여공작 카타리나를 상대해야 했다.
복잡한 정치 외에도, 잉글랜드 함대는 스페인 침략 시도를 막은 후 완전히 지치고 무력화되었고 엘리자베스의 금고는 비어 있었다.[4]
2. 2. 포르투갈 왕위 계승 위기
1580년 포르투갈 왕위 계승 위기로 인해 포르투갈의 왕위는 공석이 되었다. 아비스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크라투의 안토니오는 왕위를 주장했지만, 사생아라는 출신과 브라간사 여공작 카타리나라는 강력한 경쟁자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펠리페 2세가 1581년 토마르의 코르테스에서 포르투갈 귀족과 성직자들에게 왕으로 인정받으면서 포르투갈은 스페인에 합병되었다.돔 안토니오는 아조레스 제도에서 망명 정부를 수립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잉글랜드에 지원을 요청했다.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는 포르투갈 왕실과의 동맹을 통해 스페인의 세력을 견제하고 무역로를 확보하고자 했다.
3. 원정 준비
엘리자베스 1세는 스페인에 평화 협상을 강요하기 위해 스페인 무적함대 격퇴 직후 잉글랜드 무적함대 원정을 계획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1세의 고문들은 더 큰 야망을 품고,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주요 목표를 설정했다.[2]
# 북부 스페인 항구에서 수리 중인 스페인 함대 격파.
# 리스본 상륙 및 펠리페 2세에 대한 반란 선동.
# 아조레스 제도에 영구 기지 건설.
아메리카에서 카디스로 돌아오는 스페인 보물 함대 나포는 부차적인 목표였다.[4]
군사 원정의 전략적 목표는 브라질과 동인도를 포함하는 포르투갈 제국 전역에 부과된 무역 금지를 깨는 것이었고, 인도와 중국에도 무역 기지가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포르투갈 왕실과의 동맹을 통해 유럽에서 스페인 합스부르크가의 세력을 억제하고 이 지역으로 가는 무역로를 확보하고자 했다.[2]
그러나 펠리페 2세는 이미 1581년 포르투갈 왕위 쟁탈전에서 승리하여 포르투갈 귀족과 성직자들에게 왕으로 인정받은 상황이었다. 아비스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인 크라투의 안토니오는 잉글랜드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그의 출신 배경과 브라간사 여공작 카타리나라는 강력한 경쟁자로 인해 상황이 복잡했다.
복잡한 정치 상황 외에도, 잉글랜드 함대는 스페인의 침략을 막아낸 직후라 자원과 병력이 부족했고, 엘리자베스 1세의 재정도 바닥난 상태였다.[2] 또한, 1587년 카디스 습격의 성공에 고무된 지나치게 낙관적인 계획은 원정의 발목을 잡았다. 여왕의 명령에 따라 스페인 북부 해안의 항구(아 코루냐, 산 세바스티안, 산탄데르)에 정박해 있는 스페인 함대를 파괴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자금 부족으로 인해 드레이크와 노리스에게 원정 자금을 합자 회사 형태로 운영하도록 했다. 약 80000GBP의 자본금 중 4분의 1은 여왕, 8분의 1은 네덜란드가 부담하고, 나머지는 귀족, 상인, 길드가 충당했다.[2] 그러나 네덜란드는 약속한 군함을 제공하지 않았고, 식량 부족과 자원병 급증으로 혼란이 가중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잉글랜드 함대는 공성포와 기병대도 부족하여 목표 달성에 어려움을 겪었다.
3. 1. 함대 구성
1589년 4월 8일(구력) 목록에 따르면, 총 180척의 왕실 갤리온, 영국 무장 상선, 네덜란드 플라이보트, 풀리그 핀네스 및 기타 선박이 참여했다.[1] 이들은 다음과 같이 분류되었다.종류 | 수 |
---|---|
병력 및 선원 | 115 |
짐 | 33 |
말 | 10 |
식량 | 10 |
탄약 | 2 |
지원 | 3 |
개척자 | 7 |
4월 9일(구력) 목록에는 드레이크 경이 지휘하는 5개 전대로 나뉘어 84척의 선박이 나열되어 있다. 각 전대 지휘관과 주력함은 다음과 같다.
- 드레이크 경: ''리벤지''
- 존 노리스 경: ''논페릴''
- 에드워드 노리스: ''포사이트''
- 토마스 페너: ''드레드노트''
- 로저 윌리엄스: ''스위프트슈어''
각 전대는 "약 15척의 플라이보트"를 보유하여 총 160척이 된다.[2] 그러나 1589년 9월 5일(구력) 지급 목록에는 4월 9일 목록에 없는 13척의 선박이 추가되어 있다.[3] 이 선박들은 플라이보트가 아니었으므로, 4월 9일 목록의 160척에 추가해야 한다. 원정이 대부분 상업적이었고, 함대가 4월 28일에 출항할 때까지 막바지 추가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정확한 총 선박 수는 알 수 없지만, 최소 173척은 문서로 확인할 수 있다. 1591년 2월 15일(구력) 버글리에게 보낸 통지에서는 선박 수가 "180척 및 기타 선박"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4] "200척 가까이"에 달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5]

4월 8일(구력) 목록에는 원정에 참여한 병력 수에 대해 두 가지 다른 수치가 기록되어 있다. 첫 번째는 23,375명으로, 대부분의 역사학자와 작가가 사용해 왔지만, 문서 끝 부분에는 총 병력 수가 27,667명으로 증가했다.[1] 드레이크와 노리스의 서명, 그리고 재무경 버글리의 확인 아래 27,667명이 정확한 수치라는 추신이 있다.[1]
로버트 데버루 2세 에식스 백작은 여왕의 명시적인 명령에 반하여 함대에 합류했다. 그는 ''스위프트슈어''에 숨었고, 여왕의 궁정 신하인 프랜시스 놀리스가 그를 찾기 위해 플리머스에 왔을 때 드레이크, 노리스, 윌리엄스는 백작을 배신하지 않았다. ''스위프트슈어''는 놀리스의 선언을 듣자마자 즉시 출항했다.[6] 놀리스가 추격을 위해 핀네스를 타고 출항할 때쯤에는, 강한 바람이 ''스위프트슈어''를 팔머스로 몰아넣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 위치를 알 수 없었다. 잉글랜드 함대는 ''스위프트슈어'' 없이 출항했고, 이틀 후에 출항한 ''스위프트슈어''는 나머지 함대와 합류하기 위해 포르투갈 해안으로 향했다.[7]
3. 2. 전략 및 목표
스페인 무적함대 격퇴 이후,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는 스페인의 약점을 틈타 펠리페 2세에게 평화 협상을 강요하고자 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1세의 고문들은 더 큰 야망을 품고 있었다. 윌리엄 세실, 1대 버클리 남작은 이 원정의 세 가지 주요 목표를 다음과 같이 설정했다.[2]# 북부 스페인 항구에서 수리 중인 스페인 함대 격파.
# 리스본 상륙 및 펠리페 2세(포르투갈의 펠리페 1세)에 대한 반란 선동.
# 아조레스 제도에 영구 기지 건설.
아메리카에서 카디스로 돌아오는 스페인 보물 함대 나포는 부차적인 목표였으며, 아조레스 제도 작전 성공 여부에 따라 실행 여부가 결정될 예정이었다.[4]
군사 원정의 전략적 목표는 브라질과 동인도를 포함하는 포르투갈 제국 전역에 부과된 무역 금지를 깨는 것이었고, 인도와 중국에도 무역 기지가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포르투갈 왕실과의 동맹을 통해 유럽에서 스페인 합스부르크가의 세력을 억제하고 이 지역으로 가는 무역로를 확보하고자 했다.[2]
그러나 펠리페 2세는 이미 1581년 포르투갈 왕위 쟁탈전에서 승리하여 포르투갈 귀족과 성직자들에게 왕으로 인정받은 상황이었다. 아비스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인 크라투의 안토니오는 잉글랜드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그의 출신 배경과 브라간사 여공작 카타리나라는 강력한 경쟁자로 인해 상황이 복잡했다.
복잡한 정치 상황 외에도, 잉글랜드 함대는 스페인의 침략을 막아낸 직후라 자원과 병력이 부족했고, 엘리자베스 1세의 재정도 바닥난 상태였다.[2] 또한, 1587년 카디스 습격의 성공에 고무된 지나치게 낙관적인 계획은 원정의 발목을 잡았다. 여왕의 명령에 따라 스페인 북부 해안의 항구(아 코루냐, 산 세바스티안, 산탄데르)에 정박해 있는 스페인 함대를 파괴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자금 부족으로 인해 드레이크와 노리스에게 원정 자금을 합자 회사 형태로 운영하도록 했다. 약 8만 파운드의 자본금 중 4분의 1은 여왕, 8분의 1은 네덜란드가 부담하고, 나머지는 귀족, 상인, 길드가 충당했다.[2] 그러나 네덜란드는 약속한 군함을 제공하지 않았고, 식량 부족과 자원병 급증으로 혼란이 가중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잉글랜드 함대는 공성포와 기병대도 부족하여 목표 달성에 어려움을 겪었다.


1589년 5월 26일, 드레이크는 페니시에 도착했다. 영국군은 32척의 바지선을 콘솔라상 해변의 가장 위험한 지점으로 보냈는데, 그곳은 바위가 많은 해안선과 깊은 물이 있었다. 14척의 바지선이 침몰하고 다른 바지선들은 암초에 부딪혔고, 80명이 익사했지만 영국군은 첫 번째 소규모 전투가 벌어진 교두보를 확보했다. 영국군은 페니시 요새 수비대의 사령관인 아라우주 대위에게 항복 조건을 제시했고, 그는 자신은 섭정 도밍스 안토니우에게만 항복할 것이라고 답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2]
스페인군은 포르투갈 동맹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다. 포르투갈인들은 크라투 수도원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 그는 포르투갈 왕관 보석을 낭비했을 뿐만 아니라, 나라에서 도망칠 때 가져갔으며, 엘리자베스에게 포르투갈 제국의 복종과 영구적인 금전적 지불을 약속했다. 거대한 침략군과 함께 섭정의 귀환이 가져온 인상은 상반되었다. 포르투갈인들은 도밍스 안토니우가 약속한 것처럼 반란을 일으키고 합류하지 않았지만, 스페인 저항에 참여하려는 열의도 없었다.[2]
4. 원정 과정
존 노리스는 6척의 배와 500명의 병력을 페니셰에 배치한 후, 5월 28일 리스본으로 향했다. 식량 공급에 문제가 있었지만, 안토니우는 현지인들이 군대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영국군은 주민들을 화나게 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페니셰를 벗어나자마자 약탈이 만연했다. 노리스는 범죄자들과 장교들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다.[7] 토레스 베드라스에 접근하자, 스페인군은 엔샤라 도스 카발레이로스로 물러났다.[7]
5월 29일, 안토니우는 토레스 베드라스에 개선했지만, 영국 지휘관들은 포르투갈 귀족들이 없다는 것을 알아챘다. 영국군은 식량 공급에 대해 압박했고, 현지인들이 소지품을 가지고 떠나면서 식량 확보는 더욱 어려워졌다. 한편, 리스본에서는 영국군이 도시를 점령할 것을 예상하여 많은 사람들이 도망쳤고, 도시 방어는 스페인군에게 맡겨졌다.[8][9]
5월 30일, 드레이크는 카스카이스 항구에 도착하여 시타델과 상 줄리앙 요새 사이에 함대를 정박시켰다. 한편, 육로로 이동한 영국군은 로어스에 도착했지만, 스페인군의 지속적인 공격과 식량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10]
5월 31일, 스페인군은 영국군 진영을 기습 공격했다. 영국군은 스페인군의 전투 요청에 응하지 않았고, 스페인군은 6월 1일 새벽, 그리스도의 성체 축일에 다시 한번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이 공격에서 스페인군 지휘관 후안 데 토레스가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11]
6월 1일, 잉글랜드군은 알바라데에 도착했다. 다음날, 상 조르제 성에 설치된 컬버린 포가 잉글랜드군을 향해 발사되어 피해를 입혔다.[12] 잉글랜드군은 엄폐물을 찾아 이동했고, 스페인군은 즉석 방벽을 만들었다.
리스본으로 은밀히 진입하려는 잉글랜드군의 계획은 번번이 실패했다. 성 삼위일체 수도원을 통한 진입 시도는 수도원장이 스페인군에게 정보를 제공하여 무산되었고,[13] 리스본 성문 중 하나를 담당하는 포르투갈 귀족의 배신을 이용하려는 계획도 실패했다.
4. 1. 코루냐 전투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이 이끄는 잉글랜드 함대는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 격퇴 이후, 생존한 스페인 함선을 파괴하기 위해 산탄데르로 향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드레이크는 불리한 바람과 비스케이 만에서의 위험을 이유로 산탄데르 대신 갈리시아의 코루냐를 공격했다.[4] 이 결정은 작전 기지 구축이나 전리품 약탈을 목표로 한 것으로 추정되며, 원정의 첫 번째 주요 실수였다.
코루냐는 당시 방어가 약했다. 코루냐의 방어 병력은 테르시오 부대와 민병대, 이달고를 포함하여 약 1,200명 정도였고, 13세기에 지어진 중세 도시 성벽이 있었다.

1589년 5월 4일, 잉글랜드군은 코루냐 만에 상륙하여 하부 도시를 점령하고 약탈했다. 항구에 있던 우르카 등 함선들은 파괴되었고, 스페인군은 "산 후안"에 불을 질렀다.[4] 이후 2주 동안 잉글랜드군은 상부 도시를 포위 공격했지만, 마리아 피타와 이네스 데 벤을 포함한 스페인 군과 민병대, 도시 여성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큰 피해를 입고 물러섰다.
스페인군은 엘 부르고 다리를 통해 증원군을 파견하려 했으나 존과 에드워드 노레이스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에 의해 저지당했다.[3]
결국 잉글랜드군은 스페인 구원군 소식과 계속된 불리한 바람, 그리고 병사들의 사기 저하로 인해 포위를 풀고 퇴각했다. 이 과정에서 4명의 대장, 3척의 대형 배,[4] 그리고 1,500명 이상의 병력을 잃었다.[5]
4. 2. 포르투갈 상륙 및 리스본 공격
5월 26일, 잉글랜드 함대는 페니셰 만에 정박하여 상륙 작전을 개시했다. 엘리자베스 1세의 계획은 포르투갈에서 펠리페 2세에 대항하는 봉기를 일으키는 것이었으나, 잉글랜드가 지지하는 왕위 요구자 안토니우는 충분한 지지를 얻지 못했다.[12]드레이크와 존 노리스는 페니셰에 상륙한 후, 육로로 70km 남쪽에 있는 리스본을 공격하고, 드레이크는 해상에서 공격하는 계획을 세웠다. 노리스는 500명의 병력을 페니셰에 남겨두고[5], 5월 28일 리스본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현지 주민들의 호응은 기대와 달리 미온적이었고, 식량 부족 문제까지 겹쳤다. 노리스는 약탈을 엄금했지만, 페니셰를 벗어나자마자 잉글랜드군의 약탈이 만연하여 처벌을 해야 했다.[7]
5월 29일, 토레스 베드라스에 도착한 잉글랜드군은 포르투갈 귀족들이 나타나지 않은 것에 당황했다. 안토니우는 포르투갈 귀족들이 자신을 지지할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현실은 달랐다.[8] 잉글랜드군은 식량 부족에 시달렸고, 리스본에서는 잉글랜드군의 공격에 대비해 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가지고 도시를 떠났다.[9]
5월 30일, 드레이크는 카스카이스 항구에 도착하여 시타델과 상 줄리앙 요새 사이에 함대를 정박시켰다. 한편, 육로로 이동한 노리스의 군대는 로어스에 도착했지만, 스페인군의 지속적인 공격과 식량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10]
5월 31일, 스페인군은 잉글랜드군의 진영을 기습 공격하여 2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잉글랜드군은 스페인군의 전투 요청에 응하지 않았고, 스페인군은 6월 1일 새벽, 그리스도의 성체 축일에 다시 한번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이 공격에서 스페인군 지휘관 후안 데 토레스가 팔에 부상을 입고 3주 후에 사망했다.[11]
6월 1일, 잉글랜드군은 알바라데에 도착했다. 다음날, 상 조르제 성에 설치된 컬버린 포가 잉글랜드군을 향해 발사되어 피해를 입혔다.[12] 잉글랜드군은 엄폐물을 찾아 이동했고, 스페인군은 즉석 방벽을 만들었다.
리스본으로 은밀히 진입하려는 잉글랜드군의 계획은 번번이 실패했다. 성 삼위일체 수도원을 통한 진입 시도는 수도원장이 스페인군에게 정보를 제공하여 무산되었고,[13] 리스본 성문 중 하나를 담당하는 포르투갈 귀족의 배신을 이용하려는 계획도 실패했다.
6월 3일, 스페인군은 잉글랜드군에 대한 전면 공격을 시작했다. 잉글랜드군은 리스본에서 카스카이스까지 퇴각하면서 약 500명의 사망자를 냈다.[14]
6월 6일, 푸엔테스 백작은 카스카이스로 진군하여 잉글랜드군에게 최대한 많은 피해를 입히려 했다. 그러나 6월 7일, 잉글랜드군 참호에 도착했을 때 드레이크 함대의 포격으로 인해 직접 공격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15]
6월 8일, 에식스 백작은 스페인군에게 공개적인 전투를 제안했지만, 스페인군은 응답하지 않았다.[16]
6월 9일, 스페인군은 잉글랜드군에게 빵을 공급하던 방앗간을 파괴했다.[17] 6월 11일, 카스카이스 성 사령관은 항복했다.[18]
시간이 지날수록 이베리아 군대는 강해졌고, 잉글랜드군은 약해졌다. 6월 13일, 성 안토니오 축일에 잉글랜드군의 육해군 합동 공격이 예상되었으나, 마르틴 파디야가 이끄는 15척의 갤리선이 도착하여 해상 포위가 완료되면서 잉글랜드군은 그날 밤 승선을 완료했다.[19]
6월 18일, 드레이크는 함대와 나포한 상선들을 이끌고 출항했다. 6월 20일, 이베리아 함대와의 해상 교전에서 잉글랜드 선박 9~11척과 소형 선박 2척이 손실되었다.[20]
6월 22일, 드레이크는 페니셰에 남겨둔 주둔군을 회수하려 했으나, 요새의 포격으로 인해 실패했다.[21]
4. 3. 비고 공격
드레이크는 5일 동안 항해하여 6월 29일 아침 비고에 도착했다. 밤이 되자 133척의 배가 비고, 부자스, 테이스 앞바다에 닻을 내렸고, 20척의 배가 시에스 제도 주변을 경계했다.[25]6월 30일 새벽, 영국군은 세 곳에서 해안에 상륙했고, 마을이 비어 있자 코루냐와 리스본에서의 패배에 분노하여 비고에 대한 파괴를 시작했다. 파괴는 함포 사격, 성상 파괴, 방화로 이어졌고, 마을의 나머지 부분을 불태웠다. 영국군은 식량과 전리품을 찾아 흩어졌고, 그날 몇 차례의 소규모 전투가 벌어져 수백 명이 죽었지만, 물통을 다시 채우는 것이 주 목적이었다.[26]
7월 1일, 돈 루이스 사르미엔토가 이끄는 스페인 군대가 나타나 영국군을 기습하여 수백 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다. 드레이크는 부하들에게 재승선을 명령하고 포로를 돌려준다는 조건으로 떠나겠다고 제안했다. 스페인 지휘관은 포로들을 교수형에 처했고, 드레이크에게 더 많은 영국군을 보내면 모두 교수형에 처하겠다고 위협했다.
다음 날, 드레이크는 대부분의 함대를 이끌고 강 어귀를 떠났고, 노리스는 30척의 배와 함께 남았다. 드레이크의 배 2척이 나포되었고, 한 척은 좌초, 2척은 캉가스 근처 바위에 부딪혀 부서졌다. 7월 3일, 드레이크는 피니스테레로 가는 길에 바람과 싸웠고, 노리스는 좌초된 배에서 포병을 제거하고 불을 질렀다. 노리스는 7월 4일에 시에스를 떠났다.
5. 원정 실패 원인
영국-스페인 전쟁 중에 수행된 드레이크-노리스 원정의 실패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노리스가 이끄는 육군은 페니체(Peniche)에 병력을 배치한 후 리스본으로 진군했지만, 보급 문제에 직면했다. 도밍구스 안토니우는 현지인들이 군대에 필요한 물자를 제공할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영국군은 주민들을 약탈했고, 이로 인해 노리스는 범죄자들과 장교들을 처형해야 했다.[7] 토레스 베드라스(Torres Vedras)에 도착했을 때, 영국군은 포르투갈 귀족들이 봉기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는 포르투갈 민중 봉기에 대한 희망이 사라졌음을 의미한다.[8]
영국군은 식량 부족에 시달렸고, 리스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도시를 떠나면서 방어가 스페인군에게 맡겨졌다.[7] 드레이크는 카스카이스 항구에 도착하여 함대를 정박시키고 주변 해역을 수색했지만,[7] 육군은 스페인군의 지속적인 공격과 보급 차단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스페인군은 영국군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약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전략을 택했다.[9][10]
리스본의 상 조르제 성에서는 영국군 진영을 향해 새로운 대형 컬버린 포를 발사하여 영국군에게 피해를 입혔다.[11] 영국군은 도시로 진입하기 위해 여러 계획을 세웠지만, 모두 실패했다. 가톨릭 수사들은 영국군의 가톨릭 신자 처우에 대한 정보를 스페인군에게 전달했고, 리스본 성문 중 하나를 담당하는 포르투갈 귀족의 배신 계획도 실패했다. 도밍구스 안토니우가 리스본 성벽에 도착하면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계획도 실현되지 않았다.[7]
영국 함대는 귀환길에도 큰 피해를 입었다. ''드레드노트'' 호는 선원 대부분이 사망하거나 병든 채로 플리머스에 돌아왔고,[7] ''뤼베크의 그리핀'' 호도 비슷한 상황이었다.[7] 드레이크의 기함 ''리벤지'' 호는 폭풍 피해로 침몰 직전에 플리머스에 도착했다.[7]
6. 결과 및 영향
드레이크-노리스 원정은 군사적, 재정적으로 모두 실패했다. 원정대는 스페인 함대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 못했고, 많은 인명과 물자 손실을 입었다. 잉글랜드는 많은 수의 함선, 병력, 자원을 잃었지만, 스페인에 심각한 피해를 주지는 못했다.[12] 재정적으로도 실패하여, 150문의 대포와 약 30000GBP 상당의 약탈품만 회수하는 데 그쳤다.[12]
원정 실패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질병이었다. 귀환하는 선박에서 질병이 빠르게 퍼져 잉글랜드 항구 마을 주민들에게까지 피해를 입혔다. 플리머스에서는 처음 몇 주 동안 400명의 지역 주민이 사망했다.[28]
원정대의 정확한 사상자 수는 파악하기 어렵다. 기록에 따르면 3,722명이 귀환하여 급여를 요구했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인원이 사망, 탈영, 또는 행방불명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양한 자료에서 사망자 수를 11,000명에서 18,000명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다.[33] 잃어버린 선박의 수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우나, 대략 40척의 영국 함선이 코루냐, 리스본, 그리고 퇴각 중에 침몰, 자침, 나포되거나 행방불명된 것으로 추정된다.[24]
원정 실패 이후, 펠리페 2세는 스페인 해군을 재건하여 브르타뉴에 작전 기지를 설립했다.[37] 스페인은 이후에도 잉글랜드를 상대로 여러 차례 함대를 파견하는 등, 수십 년 동안 유럽의 주요 강대국으로 남았다.[37]
잉글랜드에서는 원정 실패의 책임을 물어 드레이크와 존 노리스가 공개적으로 비난받지는 않았지만, 이후 한동안 지휘권을 받지 못했다.[29] 원정의 실패는 잉글랜드 재정에 큰 타격을 주었고, 그 중요성은 축소되어 왔다.[30]
포르투갈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페니셰의 친구"라는 표현이 생겨났는데, 이는 겉으로는 친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사람을 의미한다.[39]
7. 역사적 평가
데이비드 키스는 영국 역사학에서 잉글랜드 무적함대의 실패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1911년 ''브리태니커 백과''(11판)에서는 "1589년 드레이크와 노리스가 포르투갈에 대한 시도는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고 간략하게 언급한다.[38] 포르투갈에서는 일부 잉글랜드 군인들의 약탈과 잉글랜드 파견 군대의 무능함 때문에, 친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사람을 의미하는 "페니셰의 친구"라는 말이 생겨났다.[39]
7. 1. 잉글랜드 역사에서의 무적함대
데이비드 키스는 영국 역사학에서 잉글랜드 함대의 실패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ABC의 Gran Bretaña olvida su gran desastre naval mientras recupera restos de la Armada Invencible|영국은 무적 함대의 잔해를 회수하면서 자국의 거대한 해상 재앙을 잊는다es 기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영국 함대는 스페인 함대보다 더 컸고, 여러 면에서 훨씬 더 큰 재앙이었다. 하지만 이 사실은 완전히 간과되고 있다. 영국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 수업에서는 한 번도 언급되지 않으며, 대부분의 영국 역사 교사들은 그것에 대해 들어본 적조차 없다."[38]1911년 ''브리태니커 백과''(11판)에서도 "1589년 드레이크와 노리스 하에 포르투갈에 대한 시도는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고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38]
포르투갈에서는 일부 잉글랜드 군인들이 저지른 약탈과 잉글랜드 파견 군대의 무능함 때문에, 친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사람을 의미하는 "페니셰의 친구"라는 말이 생겨났다.[39] "Amigo de Peniche"는 밀가루, 달걀, 설탕, 아몬드로 만든 지역 페이스트리의 한 종류이기도 하다.[40]
7. 2. 스페인 및 포르투갈 역사에서의 무적함대
데이비드 키스에 따르면, 영국 함대의 실패는 영국 역사학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38] Gran Bretaña olvida su gran desastre naval mientras recupera restos de la Armada Invencible|영국은 무적 함대의 잔해를 회수하면서 자국의 거대한 해상 재앙을 잊는다es라는 기사에서 언급된 것처럼, 영국 함대는 스페인 함대보다 규모가 더 컸고 여러 면에서 훨씬 더 큰 재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은 완전히 간과되고 있다. 영국의 학교 역사 수업에서는 한 번도 언급되지 않으며, 대부분의 영국 역사 교사들은 들어본 적조차 없다.[38]1911년 ''브리태니커 백과'' 11판에서도 "1589년 드레이크와 노리스가 포르투갈에 대한 시도는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고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38]
포르투갈에서는 일부 영국 군인들의 약탈과 잉글랜드 파견 군대의 무능함으로 인해, 친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사람을 의미하는 "페니셰의 친구"라는 말이 생겨났다.[39] "Amigo de Peniche"는 밀가루, 달걀, 설탕, 아몬드로 만든 지역 페이스트리의 한 종류이기도 하다.[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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