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사카 데 라 팔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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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사카 데 라 팔마 전투는 1846년 5월 9일, 미국-멕시코 전쟁 중 벌어진 전투로, 팔로 알토 전투에서 패배한 멕시코군이 재정비하여 미국군과 격돌한 사건이다. 멕시코군은 초반 저항했으나, 미군의 포병 운용과 기병대 격퇴에 실패하며 결국 패퇴했고, 많은 물자를 버리고 도주했다. 이 전투의 승리는 텍사스 영토로의 멕시코군 공세를 종식시키고, 미국 군부와 대중에게 큰 명성을 얻게 했다. 또한, 멕시코군의 전략 재검토를 이끌었으며, 미국은 멕시코군의 개인 지도를 획득하여 다음 작전을 계획하는 데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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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6년 미국-멕시코 전쟁 직전, 멕시코군이 리오그란데강 북쪽의 텍사스 요새를 포위하며 포격으로 요새 지휘관이 전사했으나, 미군의 승리로 멕시코군의 진격이 막히면서 텍사스 요새 포위전은 멕시코군의 승리로 끝났고 텍사스 독립 전쟁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 1846년 전투 - 팔로 알토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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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6년 5월 8일 텍사스 팔로 알토에서 재커리 테일러 장군이 이끄는 미군이 마리아노 아리스타 장군이 이끄는 멕시코군과 싸워 "비행 포병" 전술로 승리한 전투로, 현재 팔로알토 전투 국립 역사공원으로 관리되고 있다.
레사카 데 라 팔마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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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전투명 | 레사카 데 라 팔마 전투 |
관련 전쟁 | 미묵 전쟁 |
![]() | |
날짜 | 1846년 5월 9일 |
장소 | 텍사스주 브라운즈빌 근처 |
결과 | 미국군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미국 |
교전국 2 | 멕시코 |
지휘관 1 | 재커리 테일러 |
지휘관 2 | 마리아노 아리스타 |
병력 규모 | |
미국 | 1,700명 |
멕시코 | 4,000명 |
사상자 규모 | |
미국 | 전사 33명, 부상 89명 |
멕시코 | 전사 154명, 부상 205명, 실종 156명 |
추가 정보 | |
멕시코군 후퇴 | 리오그란데 강 남쪽으로 멕시코군 후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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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5월 8일, 팔로 알토 전투에서 결판이 나지 않자, 아리스타 장군은 레사카 데 라 팔마로 철수를 선택하여 테일러 장군의 다음 움직임을 주시하며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5월 9일 아침, 테일러 장군의 1,700명에 이르는 부대가 아리스타 장군이 이끄는 4,000명의 멕시코군과 교전을 벌였다.
테일러는 오후 3시경 그 지역에 도착하여 윌리엄 W. 매칼(William W. Mackall) 대위의 척후병과 랜돌프 리들리(Randolph Ridgely) 대위의 포병대를 도로를 따라 배치하고, 제4 및 제5 보병을 왼쪽에, 나머지 제4 및 제3 보병을 오른쪽에 배치하도록 명령했다.[8]
2. 1. 멕시코군의 방어 전략
5월 8일, 팔로 알토 전투에서 결판이 나지 않자, 아리스타 장군은 레사카 데 라 팔마로 철수를 선택하여 테일러 장군의 다음 움직임을 주시하며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다.[8]아리스타는 포트 텍사스 공성전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오전 10시경 리오그란데에서 약 4.83km 떨어진 곳에 깊이 약 3.66m, 폭 약 60.96m의 레사카를 따라 부대를 배치했다.[8] 테일러의 포병 효과를 무력화하기 위해 보병 대부분을 양쪽에 울창한 숲이 우거진 계곡에 배치했다. 구체적인 배치 현황은 다음과 같다.[8]
위치 | 부대 |
---|---|
도로 동쪽 | 제6 및 제10 보병, 공병, 제2 경보병, 제1 보병 |
도로 서쪽 | 제2 보병, 탐피코 대대, 제4 보병 |
후방 측면 | 프레시디알레스(Presidiales), 경기병, 제7 및 제8 연대, 남쪽 제방의 2개 포병대 |
멕시코군은 강력하게 저항했고, 기병 부대가 멕시코군 전선 측면을 공격하여 후퇴시키면서 미군은 패배 직전까지 몰렸다. 미군은 두 차례의 반격을 저지했고, 멕시코군은 여러 대포와 마리아노 아리스타 장군의 책상, 은식기 세트, 멕시코에서 칭송받던 탐피코 대대의 군기, 그리고 여러 물품들을 남겨둔 채 초원으로 달아났다.[2]
그러나 멕시코군 장교들의 정치적 내분과 복잡한 지형으로 인한 보급의 어려움 때문에, 레사카 데 라 팔마에서 미합중국군과 격돌한다는 아리스타 장군의 신중한 계획은 빛을 보지 못했다.
3. 전투
3. 1. 멕시코군의 혼란과 패퇴
멕시코군은 강력하게 저항했고, 기병 부대가 멕시코군 전선 측면을 공격하여 후퇴시키면서 미군은 패배 직전까지 몰렸다. 미군은 두 차례의 반격을 저지했고, 멕시코군은 여러 대포와 마리아노 아리스타 장군의 책상, 은식기 세트, 멕시코에서 칭송받던 탐피코 대대의 군기, 그리고 여러 물품들을 남겨둔 채 초원으로 달아났다.[2]
오후 3시경, 미군은 멕시코군의 방어선과 마주치기 시작했다. 매캘(Mackall) 대위가 이끄는 선발 정찰병들은 오전과 이른 오후 내내 아리스타 장군의 군대를 추격했고, 레사카 데 라 팔마 주변의 덤불에 도착했을 때 집중적인 소총과 포격을 받았다.[2] 매캘 대위는 멕시코군의 위치를 더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더 진격하려 했으나, 재커리 테일러 장군의 본대 화력이 부족하여 후퇴하여 증원을 기다려야 했다.
오후 4시가 되자 테일러 장군은 매캘 대위와 합류하여 아리스타 장군의 위치를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배치했다. 먼저, 멕시코군 정찰병들을 제압하기 위해 움직였다. 리들리(Ridgely)의 포병대의 지원을 받은 두 개의 보병 연대가 아리스타 장군의 정찰병들을 공격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며 멕시코군 주력 방어선으로 밀어붙였다.[2]
빽빽한 관목과 맹렬한 멕시코군 포격으로 인해 전투는 혼란스럽고 조직적이지 못했지만, 리들리는 멕시코군 기병대의 돌격을 격퇴했다.[8] 연대들이 무성한 덤불 속으로 진입하면서 부대의 결속력이 깨졌고, 점점 더 작은 부대들이 서로 분리되었다. 많은 부대들은 하급 장교들이 이끌었는데, 장교들이 병사들과 떨어졌기 때문이다.[2]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멕시코군 방어군에게도 마찬가지였는데, 관목이 통신선과 시야를 방해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전투는 동시에 발생했지만, 각 부대가 전투 전체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에 독립적으로 진행되었다.[2] 이러한 부대의 통합력 상실은 멕시코군이 일반적으로 누렸을 방어적 및 수적 우위를 사실상 무효화했다.
관목으로 인한 시야 저하로 인해 리들리의 포병대는 측면 공격에 대한 지원을 거의 제공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아리스타 장군의 포병을 무력화하는 데 집중했고, 그 결과 포격전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2] 테일러 장군은 멕시코군 포병을 제압하기 위해 찰스 A. 메이(Charles A. May) 대위의 드라군 중대의 돌격을 명령했다. 그러나 메이의 돌격은 멕시코군 포병대를 훨씬 지나쳤고, 로물로 디아스 데 라 베가(Romulo Diaz de la Vega) 장군을 포로로 잡았지만, 포를 장악하지는 못했다.[8] 그 후 테일러 장군은 벨크냅(William G. Belknap)의 제5, 제8 보병 연대에게 포를 확보하도록 명령했고, 그들은 명령을 수행했다.[8] 그러자 도로 동쪽에 있던 멕시코군은 방어 위치에서 후퇴했다.[8]
이때까지 아리스타 장군은 전장에 나서지 않고 자신의 텐트에서 행정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2] 미군의 공격 소식을 들었지만, 늦은 시간대였고 자신의 위치가 우세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소한 공격이라고 여겼다. 방어선이 심각하게 무너지기 시작했을 때에야 아리스타 장군은 전투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후퇴하는 보병들을 재집결시키는 데 실패한 후, 아리스타 장군은 직접 기병 돌격을 이끌어 레사카 남쪽 강둑에서 미군의 전진을 막으려 했다.[2] 처음에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험준한 지형으로 인해 돌격은 테일러 장군의 군대에 큰 피해를 주기 전에 와해되었다.
도로 서쪽에서는 부캐넌(Robert C. Buchanan) 대위와 제4보병 연대 병사들이 멕시코군 좌익으로 향하는 길을 발견하여 그곳에 있는 포병대를 점령하고 유지할 수 있었다. 그들은 페드로 데 암푸디아(Pedro de Ampudia) 장군의 반격을 막아냈고, 멕시코군 전체가 혼란에 빠져 리오그란데 강을 건너 도망쳤으며, 많은 멕시코 병사들이 그 과정에서 익사했다.[8]
4. 여파
테일러는 아리스타와 포로 교환을 하였다.[8] 5월 18일, 테일러는 리오그란데 강을 건넜고, 아리스타의 군대는 몬테레이로 후퇴하면서 누에보레온주 리나레스에서 포와 병자, 부상자를 버렸다.[8]
테일러는 아리스타 장군과 포로 교환을 하기 전에 버려진 멕시코 부상자들을 인도적으로 대우하여 미국 부상자들과 같은 치료를 제공했다. 그는 부상자들을 돌본 후 전투 중 사망한 미군과 멕시코군 병사들의 장례식을 치렀다.[9] 아리스타 장군 또한 포로로 잡힌 미군 병사들을 잘 돌보았는데, 특히 갈등 초기 습격을 당한 세스 손튼 대위의 기병 순찰대 병사들을 잘 대우한 것으로 알려졌다.[3]
레스카 데 라 팔마 전투터는 현재 텍사스주 브라운스빌 시내에 있지만 팔로 알토 전투 국립역사공원의 일부이다. 이 전투는 나중에 레스카 전투가 벌어진 조지아주 레사카의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4. 1. 전술적 의의
레사카 데 라 팔마 전투의 승리는 미군과 대중에게 큰 명성을 안겨주었다. 테일러 장군 부대 병사들의 개인 문서를 보면 멕시코군 격퇴에 대한 엄청난 기쁨과 흥분을 엿볼 수 있으며, 이는 이미 높았던 사기를 더욱 진작시켰다.[3] 미국 대중에게 이 승리는 전쟁 소식을 알린 첫 번째 뉴스 중 하나였다. 멕시코의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는 레사카 데 라 팔마 전투가 벌어진 5월 9일까지 제임스 K. 폴크 대통령에게 워싱턴 D.C.에 전달되지 않았다.[4] 이러한 지연으로 인해 대다수의 미국 시민들은 전쟁 발발과 레스카 데 라 팔마 전투의 승리 소식을 동시에 접하게 되었다.[4] 멕시코군에 대한 테일러 장군의 압도적인 성공은 미국의 전쟁 인식에 영향을 미쳤고, 의회의 새로운 연대 창설 요구(승리 소식 이전에 비준됨)는 수천 명의 열렬한 자원봉사자들로 인해 빠르게 초과 충원되었다.[4]이 전투는 텍사스 영토로 진격하는 멕시코군의 공세를 꺾고 테일러 장군에게 멕시코 침공의 기회를 열어주었다. 전략적으로 이 전투는 미국이 전쟁 내내 큰 효과를 거두었던 전술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레스카 데 라 팔마 전투는 미국 포병의 멕시코군에 대한 위력과 멕시코 지휘관들이 그러한 이점을 무력화하려고 했던 방법을 부각시켰다.[5] 리들리의 포병이 사용한 다양한 종류의 포탄 조합은 매우 강력했으며, 특히 기병 돌격에 맞설 때 멕시코 포병보다 훨씬 더 빠르게 다양한 전장 상황에 대응할 수 있게 해주었다.[5]
멕시코군은 많은 포를 남겼고, 멕시코의 자랑스러운 탐피코 대대의 군기를 비롯한 다른 물품들도 남겼는데, 여기에는 아리스타의 책상과 은식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가장 중요한 발견물 중 하나는 아리스타 장군의 동부 내륙 지방에 대한 개인 지도였는데, 이 지도는 타마울리파스주, 누에보레온주, 코아우일라주의 주변 지역에 대한 상세하고 최신의 정보를 제공했다.[6] 이 포괄적인 지도는 1830년대 초에 만들어져 10년 이상 된 테일러 장군의 지도보다 훨씬 더 신뢰할 수 있었다.[6] 이 지도의 확보는 테일러에게 다음 작전 단계를 계획하는 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했는데, 특히 전투가 리오그란데 강의 반대편으로 이동하여 미국의 정보가 덜 신뢰할 수 있게 된 상황에서 더욱 그러했다. 노획된 멕시코 포병 중에는 8파운드짜리 청동포 2문, 6파운드짜리 청동포 2문, 4파운드짜리 청동포 4문이 있었다.[7]
레스카 데 라 팔마에서 아리스타 장군의 군대가 궤멸된 것은 팔로 알토 전투 이전에 테일러가 포인트 이사벨로 이동한 후 주둔군이 남겨져 있던 멕시코의 포트 텍사스 포위전을 해소시켜 주었다.[3] 팔로 알토에서 불과 약 12.87km, 레스카 데 라 팔마에서 약 6.44km 떨어진 이 주둔지는 전투 소리와 거리가 가까웠고 전투의 소음은 포위된 병사들의 사기를 크게 높였다.[3] 멕시코군의 전열이 무너지자 포트 텍사스의 포대는 궤멸에 기여하여 테일러의 선봉 부대와 합류하여 아리스타의 군대를 리오그란데 강 너머로 몰아냈다.[3]
4. 2. 멕시코의 전략 재검토
간발의 차이로 승리가 패배로 바뀌면서, 멕시코는 북부군 사령관을 해임하고 멕시코의 전략을 완전히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멕시코 육군의 기술과 역량이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멕시코 정부의 비리와 내분으로 인해 많은 전투에서 일관성 있는 전략을 수립할 수 없었다.[3]4. 3. 전후 처리
레사카 데 라 팔마 전투의 승리는 미국 군부와 대중 사이에서 빠르게 큰 명성을 얻었다. 테일러 장군의 군대에 배속된 병사들의 개인 문서는 멕시코군의 궤멸에 대한 엄청난 기쁨과 흥분을 보여주며 이미 자신감에 차 있던 사기를 더욱 높였다.[3] 미국 대중에게 이 승리는 전쟁 소식을 접한 최초의 뉴스 중 하나였다. 멕시코의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는 5월 9일, 레스카 데 라 팔마 전투가 벌어진 날까지 제임스 K. 폴크 대통령에게 워싱턴 D.C.에 도달하지 못했다.[4] 이러한 지연으로 인해 대다수의 미국 시민들은 적대 행위의 발발과 레스카 데 라 팔마 전투의 승리 소식을 동시에 접하게 되었다.[4] 테일러 장군의 멕시코군에 대한 압도적인 성공은 미국의 전쟁 인식에 영향을 미쳤고, 의회의 새로운 연대 창설 요구(승리 소식 이전에 비준됨)는 수천 명의 열렬한 자원봉사자들로 인해 빠르게 초과 충원되었다.[4]레스카 데 라 팔마 전투는 텍사스 영토로의 멕시코군의 공세를 꺾고 테일러 장군에게 멕시코 침공의 기회를 열어주었다. 전략적으로 이 전투는 미국이 전쟁 내내 큰 효과를 거두었던 전술, 특히 미국 포병의 멕시코군에 대한 위력을 확립했고 멕시코 지휘관들이 그러한 이점을 무력화하려고 했던 방법을 부각시켰다.[5] 리들리의 포병이 사용한 다양한 종류의 포탄의 조합 또한 매우 강력한 것으로 판명되었고, 특히 기병 돌격에 맞설 때 멕시코 포병보다 훨씬 더 빠르게 다양한 전장 상황에 대응할 수 있게 해주었다.[5]
멕시코군은 많은 포를 남겼고, 아리스타의 책상과 은식기를 포함하여 멕시코의 칭송받는 탐피코 대대의 군기 등 다른 짐들도 남겼다. 가장 중요한 발견물 중 하나는 타마울리파스주, 누에보레온주, 코아우일라주 주변 지역에 대한 상세하고 최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아리스타 장군의 동부 내륙 지방에 대한 개인 지도였다.[6] 이 포괄적인 지도는 1830년대 초에 만들어져 10년 이상 된 테일러 장군의 지도보다 훨씬 더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다.[6] 이 지도의 확보는 테일러에게 다음 작전 단계를 계획하는 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했는데, 특히 전투가 리오그란데 강의 반대편으로 이동하여 미국의 정보가 덜 신뢰할 수 있게 된 상황에서 더욱 그러했다. 노획된 멕시코 포병 중에는 8파운드짜리 청동포 2문, 6파운드짜리 청동포 2문, 4파운드짜리 청동포 4문이 있었다.[7]
레스카 데 라 팔마에서 아리스타 장군의 군대가 궤멸된 것은 팔로 알토 전투 이전에 테일러가 포인트 이사벨로 이동한 후 주둔군이 남겨져 있던 멕시코의 포트 텍사스 포위전을 해소시켜 주었다.[3] 팔로 알토에서 8마일, 레스카 데 라 팔마에서 4마일 떨어진 이 주둔지는 전투 소리와 거리가 가까웠고 전투의 소음은 포위된 병사들의 사기를 크게 높였다.[3] 멕시코군의 전열이 무너지자 포트 텍사스의 포대는 궤멸에 기여하여 테일러의 선봉 부대와 합류하여 아리스타의 군대를 리오그란데 강 너머로 몰아냈다.[3]
테일러는 다음 행동을 고려하면서 그의 군대를 포트 텍사스 야영지에 주둔시켰지만, 아리스타와 포로 교환을 하였다. 테일러는 5월 18일 리오그란데 강을 건넜고, 아리스타의 군대는 몬테레이로 후퇴하는 동안 누에보레온주 리나레스에서 포와 병자, 부상자를 버렸다.[8]
테일러는 아리스타 장군과 포로 교환을 받아들이기 전에 버려진 멕시코 부상자들을 인도적으로 대우하여 미국 부상자들에게 제공되는 것과 같은 치료를 제공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부상자들을 돌본 후 전투 중 사망한 미군과 멕시코군 병사들의 장례식을 치렀다.[9] 아리스타 장군은 특히 갈등 초기 습격을 당한 세스 손튼 대위의 기병 순찰대 병사들과 관련하여 포로로 잡힌 미군 병사들을 잘 돌본 것으로도 인정받았다.[3]
레스카 데 라 팔마 전투터는 현재 텍사스주 브라운스빌 시내에 있지만 팔로 알토 전투 국립역사공원의 일부이다. 레스카 데 라 팔마 전투는 나중에 레스카 전투가 벌어진 곳이 된 지역 사회인 조지아주 레사카의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Battle of Resaca de la Palma
http://www.mymexican[...]
[2]
논문
The Mexican Army At Palo Alto and Resaca De La Palma: A Levels of War Analysis
https://apps.dtic.mi[...]
U.S. Army Command and General Staff College
[3]
학술지
Monterrey is ours!: the Mexican war letters of Lieutenant Dana, 1845-1847
http://dx.doi.org/10[...]
1990-11-01
[4]
학술지
America's Golden Midcentury
http://dx.doi.org/10[...]
1996
[5]
학술지
No Finer Army: The Regular Army in the Mexican War, 1846-1848
2011
[6]
학술지
General Taylor's "Astonishing" Map of Northeastern Mexico
https://www.jstor.or[...]
1997
[7]
서적
Annual Reports of the War Department, Volume 1
https://books.google[...]
United States War Dept
1894
[8]
서적
The Mexican War, 1846-1848
Macmillan
1974
[9]
서적
The life of Major General Zachary Taylor
https://archive.org/[...]
Aubura, J. C. kDerby & co.
1847
[10]
서적
The Mexican War, 1846-1848
Macmillan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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