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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 페스팅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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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온 페스팅거는 1919년 뉴욕에서 태어나 1989년에 사망한 미국의 사회 심리학자이다. 뉴욕 시립 대학교 시티 칼리지를 졸업하고 아이오와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쿠르트 레빈의 영향을 받았으며, 아이오와 대학교, 로체스터 대학교,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미네소타 대학교, 미시간 대학교, 스탠퍼드 대학교, 뉴스쿨 대학교 등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주요 이론으로는 근접 효과, 비형식적 사회적 커뮤니케이션, 사회 비교 이론, 인지 부조화 이론 등이 있으며, 저서 '예언이 실패했을 때'를 통해 신념 지속성에 대한 연구를 제시했다. 페스팅거는 사회 심리학의 실험적 연구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인지 부조화 이론은 사회 심리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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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 페스팅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레온 페스팅거
레온 페스팅거
분야심리학
인물 정보
출생1919년 5월 8일
출생지미국 뉴욕주 뉴욕 시
사망1989년 2월 11일
사망지미국 뉴욕주 뉴욕 시
국적미국
학력
학사뉴욕 시립 대학교
석사, 박사아이오와 대학교
박사 지도 교수쿠르트 레빈
학위 논문 제목의사 결정 이론의 실험적 검증
학위 논문 URL의사 결정 이론의 실험적 검증
박사 학위 년도1942년
경력
주요 근무 기관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미시간 대학교
미네소타 대학교
스탠퍼드 대학교
뉴스쿨
주요 제자버트럼 레이븐
스탠리 샤흐터
주요 업적
주요 업적인지 부조화 이론
노력 정당화
사회 비교 이론

2. 생애

레온 페스팅거는 1919년 러시아계 유대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뉴욕에서 성장했다. 1939년 뉴욕 시립 대학교 시티 칼리지를 졸업하고, 1942년 아이오와 대학교에서 쿠르트 레빈의 지도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레빈은 "사회 심리학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로 저명한 학자였으며, 페스팅거는 그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페스팅거는 아이오와 대학교, 로체스터 대학교,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미네소타 대학교, 미시간 대학교, 스탠퍼드 대학교 등 여러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1968년 뉴욕에 있는 뉴스쿨 대학교로 옮겨 1989년 사망할 때까지 연구를 계속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레온 페스팅거는 1919년 5월 8일 뉴욕 브루클린에서 러시아계 유대인 이민자인 알렉스 페스팅거와 사라 솔로몬 페스팅거 사이에서 태어났다.[9] 그의 아버지는 자수 제조업자였으며, "러시아를 급진주의자이자 무신론자로 떠났으며 평생 동안 이 견해를 충실히 지켰다."[9] 페스팅거는 보이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뉴욕 시립 대학교에서 심리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10]

이후 아이오와 대학교에서 쿠르트 레빈에게서 공부했으며, 1940년에 석사 학위를, 1942년에 아동 행동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11] 페스팅거는 아이오와에 도착했을 때 사회심리학에 관심이 없었고, 사회심리학 전공 과정을 철저히 이수하지 않았다.[12] 대신 그는 레빈의 긴장 시스템에 대한 초기 연구에 관심이 있었다.[12] 그러나 페스팅거는 통계학 연구, 의사 결정의 양적 모델 개발, 심지어 쥐에 대한 실험실 연구를 출판하는 등 자신의 원래 관심사를 계속 추구했다.[14][15][16][17]

졸업 후 페스팅거는 1941년부터 1943년까지 아이오와에서 연구원으로 일했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로체스터 대학교에서 항공기 조종사 선발 및 훈련 위원회의 통계학자로 일했다.[20] 1943년, 페스팅거는 피아니스트인 메리 올리버 발루와 결혼하여 캐서린, 리처드, 커트 세 자녀를 두었다.[20][21] 페스팅거와 발루는 나중에 이혼했고, 1968년 페스팅거는 뉴욕 대학교 사회 복지학과 교수인 트루디 브래들리와 재혼했다.[22][23]

2. 2. 경력

페스팅거는 1941년부터 1943년까지 아이오와 대학교에서 연구원으로 일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로체스터 대학교에서 항공기 조종사 선발 및 훈련 위원회의 통계학자로 근무했다.[24] 1945년에는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에 조교수로 합류하여 쿠르트 레빈이 새로 설립한 집단 역학 연구 센터에 들어갔다. 페스팅거는 MIT에서 "일단 사회 심리학자가 되었고, 그 분야의 모든 어려움, 모호함, 그리고 도전과 함께 몰입했다."라고 회고했다.[24] 또한 MIT에서 집단 내 사회적 의사소통과 압력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는데, 이는 그의 연구의 전환점이 되었다.[24] 페스팅거는 "MIT에서의 몇 년은 우리 모두에게 획기적이고 중요한 무언가의 새로운 시작으로 보였다."라고 말했다.[25] 당시 페스팅거의 제자이자 연구 조교였던 스탠리 섀터는 "이 시기에 페스팅거와 함께 일할 수 있었던 것이 행운이었고, 나는 그것을 내 과학적 삶의 가장 중요한 시기 중 하나로 생각한다."라고 언급했다.[26]

1947년 레빈이 사망한 후, 페스팅거는 1948년 연구 센터와 함께 미시간 대학교로 옮겼다.[31] 이후 1951년 미네소타 대학교로,[31] 1955년에는 스탠퍼드 대학교로 옮겨 사회 비교 이론과 인지 부조화 이론을 발표하며 사회 심리학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31][32] 1959년에는 미국 심리학회로부터 뛰어난 과학적 공헌상을 받았으며,[34] ''포춘'' 잡지에 의해 미국에서 가장 유망한 과학자 10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35]

1964년, 페스팅거는 "나 자신이 침체되어 있고, 생산성을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출처로부터 지적 자극을 주입받아야 한다는 확신이 당시 나에게 커지고 있었다."라는 이유로 사회 심리학 분야를 떠나 시각 시스템 연구에 집중했다.[36] 1968년에는 고향인 뉴욕시로 돌아와 뉴스쿨(당시에는 사회 연구를 위한 뉴스쿨로 알려짐)에서 지각 연구를 계속했다.[37] 1979년, 그는 "점점 더 좁은 기술적 문제에 매달리는 것에 불만족"을 이유로 연구실을 닫았다.[37]

2. 3. 말년

1983년 자신의 연구실을 폐쇄한 지 4년 후, 페스팅거는 자신과 심리학 분야가 이룬 것에 대해 실망감을 표현했다.[38] 이후 페스팅거는 선사 시대 고고학 데이터를 탐구하기 시작하여 스티븐 제이 굴드를 만나 아이디어를 논의하고, 원시적인 도구 제작을 직접 조사하기 위해 고고학 유적지를 방문했다.[39] 그의 노력은 결국 인간이 어떻게 진화하여 복잡한 사회를 발전시켰는지를 고찰한 저서, 『인간 유산』으로 이어졌다.[40] 심리학 분야에 대한 환멸과 전면적인 포기의 결과처럼 보이지만, 페스팅거는 이 연구를 심리학의 근본적인 관심사로의 복귀로 여겼다. 그는 새로운 연구 관심사의 목표를 "우리가 인간이라고 부르는 이 종의 본질, 특성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 서로 다른 데이터 영역에서 무엇을 추론할 수 있는지 보는 것"[41]이라고 설명했으며, 동료 심리학자들이 그의 새로운 연구 관심사가 심리학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묻는 것에 당황스러움을 느꼈다.[42]

페스팅거의 다음이자 마지막 사업은 어떤 아이디어가 문화에 의해 수용되거나 거부되는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었고, 그는 새로운 기술이 서양에서는 빠르게 채택되었지만 비잔틴 제국에서는 그렇지 않은 이유를 조사하면 이 문제를 밝힐 수 있다고 판단했다.[43] 그러나 페스팅거는 이 자료를 출판하기 전에 암 진단을 받았다. 그는 치료를 받지 않기로 결정하고 1989년 2월 11일에 사망했다.[44]

3. 주요 이론

레온 페스팅거는 사회심리학에서 이론이나 방법의 모호함을 허용하는 편이 발견적 가치가 높다고 주장했다.[46]

3. 1. 근접 효과 (Proximity Effect)

스탠리 샤흐터, 커트 벡과 함께 페스팅거는 MIT의 기숙사에 거주하는 대학생들 사이에서 친구 선택을 조사했다. 연구팀은 친구 관계 형성이 일반적인 통념처럼 비슷한 취향이나 신념뿐만 아니라, 학생들이 거주하는 물리적 근접성인 근접성에 의해 예측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즉, 사람들은 단순히 이웃과 친구가 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또한 기능적 거리 역시 사회적 관계를 예측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2층짜리 아파트 건물에서 계단 옆 아래층에 사는 사람들은 같은 아래층에 사는 다른 사람들보다 위층 거주자들과 기능적으로 더 가깝다. 계단 근처 아래층 거주자들은 같은 아래층의 이웃들보다 위층에 사는 사람들과 친구가 될 가능성이 더 높았다. 페스팅거와 그의 연구 협력자들은 이러한 발견이 우정은 종종 수동적인 접촉(예: 학생 주거 공동체 내에서 집으로 오고 가는 중에 발생하는 짧은 만남)을 기반으로 발전하며, 그러한 수동적 접촉은 사람들 간의 더 가까운 물리적 및 기능적 거리를 고려할 때 발생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증거라고 보았다.[46]

3. 2. 비형식적 사회적 커뮤니케이션 (Informal Social Communication)

페스팅거는 1950년 논문에서 의사 소통의 주요 동기 중 하나가 집단 내 통일성 유지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태도와 의견의 타당성을 확인하기 위해 사회적 현실에 의존한다고 보았다. 즉, 집단 구성원 간 의견 불일치가 있을 때 의사 소통 압력이 발생하며, 이는 누가, 누구에게, 어떻게 소통하는지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사회 비교 이론(1954년)은 이러한 생각을 능력 영역까지 확장한 것이다. 페스팅거는 인간이 자신의 의견과 능력을 정확히 평가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이를 위해 타인과 자신을 비교한다고 가정했다. 특히, 자신과 너무 다른 사람과의 비교는 어렵기 때문에, 유사한 사람들을 찾아 비교하려 한다. 예를 들어, 체스 초보자는 체스 고수가 아닌 비슷한 실력의 초보자와 자신을 비교할 것이다.[48]

사람들은 의견 불일치를 줄이기 위해 타인을 변화시키거나 자신의 태도를 바꾸는 행동을 한다. 능력의 경우에도, 더 나아지려는 '상향적 동기' 때문에 불일치를 줄이려 노력한다. 페스팅거는 이러한 사회적 영향 과정과 경쟁적 행동이 모두 "자기 평가 욕구"와 "타인과의 비교를 통한 평가 필요성"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49]

또한, 페스팅거는 사회 비교 이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으로, 사람들이 자신과 비슷한 의견과 능력을 가진 집단으로 모이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사회가 유사한 집단들로 분화되는 결과를 낳는다고 주장했다.

1954년 논문에서 페스팅거는 다음과 같은 주요 가설을 제시했다.

번호내용
1인간은 자신의 의견과 능력을 평가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2객관적인 방법이 없을 때, 사람들은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의견과 능력을 평가한다.
3자신과 타인의 의견/능력 차이가 클수록, 특정인과의 비교 경향은 감소한다.
4능력의 경우, 의견과는 달리 일방적인 상향적 동기가 존재한다.
5능력을 바꾸기 어렵게 하는 비사회적 제약이 존재하지만, 의견에는 거의 없다.
6타인과의 비교 중단은, 그 비교가 불쾌한 결과를 암시할 때 적대감/비하를 동반한다.
7특정 집단의 중요성이 커질수록, 그 집단 내 의견/능력 균일성을 향한 압력이 증가한다.
8의견/능력이 매우 다른 사람은, 그 차이와 관련된 속성에서 자신과 다르다고 인식되면, 비교 범위를 좁히려는 경향이 강해진다.
9집단 내 의견/능력 범위가 있을 때, 균일성을 향한 압력은 집단 평균에 가까운 사람과 먼 사람에게 다르게 나타난다. 평균에 가까운 사람은 타인을 바꾸려는 경향이 강하고, 비교 범위를 좁히려는 경향은 약하며, 자신의 입장을 바꾸려는 경향은 훨씬 약하다.[50]


3. 3. 사회 비교 이론 (Social Comparison Theory)

레온 페스팅거의 사회 비교 이론(1954)은 자신의 의견과 능력을 평가하기 위해 사회적 현실에 의존하는 경향을 설명한다. 페스팅거는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과 능력을 정확하게 평가하려는 타고난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이를 위해 다른 사람과 비교한다고 가정했다. 특히, 자신과 너무 다른 사람과의 비교는 어렵기 때문에, 자신과 유사한 의견 및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 비교하려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태도 불일치를 줄이기 위해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거나 자신의 태도를 바꾸는 행동을 한다. 능력의 경우에도 불일치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며, 특히 능력을 향상시키려는 상향적 동기가 작용한다. 페스팅거는 이러한 사회적 영향 과정과 경쟁적 행동이 모두 자기 평가 욕구와 타인과의 비교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심리적 과정이라고 보았다. 또한, 사회 비교 이론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고 능력 수준이 비슷한 집단으로 이동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사회가 유사한 집단으로 분화되는 결과를 낳는다고 주장했다.

1954년 논문에서 페스팅거는 다음과 같은 주요 가설을 제시했다.

번호가설 내용
1인간은 자신의 의견과 능력을 평가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2객관적인 수단이 없을 때, 사람들은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의견과 능력을 평가한다.
3자신과 타인의 의견이나 능력 차이가 클수록, 특정인과의 비교 경향은 감소한다.
4능력의 경우, 의견과 달리 일방적인 상향적 동기가 존재한다.
5능력 변화를 어렵게 만드는 비사회적 제약이 존재하지만, 의견에는 이러한 제약이 거의 없다.
6타인과의 비교 중단은 적대감이나 비하를 동반하며, 이는 지속적인 비교가 불쾌한 결과를 암시할 때 나타난다.
7특정 집단의 중요성이 커질수록, 해당 집단 내 의견 및 능력 균일성을 향한 압력이 증가한다.
8자신의 의견이나 능력과 매우 다른 사람은 비교 가능성 범위를 좁히려는 경향이 강해진다.
9집단 내 의견이나 능력 범위가 있을 때, 균일성을 향한 압력은 집단 최빈값에 가까운 사람과 먼 사람에게 다르게 나타난다. 최빈값에 가까운 사람은 타인을 변화시키려는 경향이 강하고, 비교 범위를 좁히려는 경향은 약하며, 자신의 입장을 바꾸려는 경향은 약하다.


3. 4. 인지 부조화 이론 (Cognitive Dissonance Theory)

페스팅어의 1957년 저서는 인지 부조화 이론에 따라 영향력과 사회적 의사소통에 관한 기존의 연구 문헌을 통합했다.[56] 이 이론은 1934년 인도에서 발생한 심각한 지진 직후의 소문에 대한 연구에서 동기를 얻었다. 지진의 충격을 느꼈지만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더 심각한 재앙이 닥칠 것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사람들이 "두려움을 유발하는" 소문을 믿는 것은 직관에 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페스팅어는 이러한 소문이 실제로 "두려움을 정당화하는" 것이라고 추론했다.[57] 소문은 지진의 영향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느낄 이유를 제시함으로써 사람들의 두려움과 일관성 없는 감정을 줄이는 역할을 했다.

페스팅어는 인지 부조화의 기본 가설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 부조화 [또는 불일치]의 존재는 심리적으로 불편하기 때문에, 사람은 부조화를 줄이고 조화 [또는 일관성]를 달성하려고 노력하게 될 것이다.

:2. 부조화가 존재할 때, 사람은 그것을 줄이려는 시도 외에도, 부조화를 증가시킬 가능성이 있는 상황과 정보를 적극적으로 피할 것이다.[58]

부조화 감소는 인지를 바꾸거나,[59] 새로운 정보나 의견을 선택적으로 습득함으로써 달성할 수 있다. 담배가 건강에 해롭다는 것을 알고 있는 흡연자의 예를 들어, 흡연자는 금연을 선택하거나, 흡연의 영향에 대한 생각을 바꾸거나(예: 흡연은 다른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건강에 해롭지 않다), 흡연의 긍정적인 효과를 지적하는 지식을 습득함으로써 부조화를 줄일 수 있다(예: 흡연은 체중 증가를 방지한다).[60]

페스팅어와 제임스 M. 칼스미스는 1959년에 고전적인 인지 부조화 실험을 발표했다.[61] 실험에서, 피험자들은 한 시간 동안 지루하고 단조로운 작업을 수행하도록 요청받았다. 실험 참여가 종료되었다고 믿게 된 일부 피험자들은 실제로는 공모자인 다음 참가자에게 작업이 매우 즐거웠다고 말해달라는 부탁을 실험자에게 했다. 이 부탁을 수행한 피험자들에게는 부조화가 생겼는데, 그 작업이 사실 지루했기 때문이다. 돈을 받은 피험자의 절반은 그 부탁에 대해 1USD를 받았고, 나머지 절반은 20USD를 받았다. 페스팅어와 칼스미스가 예측한 대로, 1USD를 받은 사람들은 20USD를 받은 사람들보다 그 작업이 더 즐거웠다고 보고했다. 1USD를 받은 사람들은 작업에 대한 의견을 바꿔 그 작업이 즐거웠다고 보고하는 행동과 일치하게 함으로써 부조화를 줄여야 했다. 20USD를 받은 피험자들은 더 적은 부조화를 경험했는데, 이는 큰 금액의 지불이 그들의 행동과 일치성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작업을 덜 즐거웠다고 평가했으며, 그들의 평가는 부조화를 일으키는 부탁을 수행하도록 요청받지 않은 사람들의 평가와 유사했다.

3. 5. 예언이 실패했을 때 (When Prophecy Fails)

페스팅어와 그의 협력자들인 헨리 리켄과 스탠리 샤흐터는 1956년 저서 ''예언이 실패했을 때''에서 신념이 부정되었을 때 오히려 그러한 신념에 대한 확신이 강해지는 조건들을 연구했다.[51][52] 이 연구팀은 '클래리온'이라는 다른 행성의 외계 존재들인 "수호자들"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도로시 마틴(책에서는 마리안 키치라는 가명으로 등장)이라는 주부가 이끄는 작은 종말론적 컬트를 연구했다.[51][52] 메시지에서는 1954년 12월 21일에 대홍수가 일어나 세상이 파괴될 것이라고 했다.

세 명의 심리학자와 여러 조력자들이 이 컬트 집단에 합류하여 예언된 종말 전후 수개월 동안 이 집단을 직접 관찰했다. 많은 구성원들이 종말을 준비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소지품을 처분했다. 그러나 종말의 날이 왔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마틴은 세상이 구원받은 것은 집단 구성원들이 퍼뜨린 "선과 빛의 힘"[53]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구성원들은 부인된 신념을 버리는 대신, 그 신념을 더욱 굳게 지켰으며 열정적으로 포교하기 시작했다.

페스팅어와 그의 공저자들은 다음과 같은 조건에서 신념이 부정된 후에도 신념에 대한 확신이 강해진다고 결론지었다.

:1. 신념은 깊은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신봉자의 행동이나 행위에 관련되어 있어야 한다.

:2. 신념은 실행하기 어렵다고 주장할 수 있는 행동을 낳았어야 한다.

:3. 신념은 명확하게 부정될 수 있도록 충분히 구체적이고 실제 세계와 관련되어 있어야 한다.

:4. 부정적인 증거는 신봉자에 의해 인식되어야 한다.

:5. 신봉자는 다른 신봉자들로부터 사회적 지원을 받아야 한다.[54]

페스팅어는 또한 부인 이후 컬트 구성원들의 확신과 포교가 증가하는 현상이 인지 부조화의 구체적인 사례라고 설명했다.[55]

''예언이 실패했을 때''에 보고된 관찰은 신념 지속성에 대한 최초의 실험적 증거였다.

4. 유산 및 영향

사회 비교 이론과 인지 부조화는 다른 심리학자들에 의해 "사회 심리학에서 가장 유익한 두 가지 이론"으로 묘사되었다.[62] 인지 부조화는 "사회 심리학의 가장 주목할 만한 업적,"[63] "오늘날까지 사회 심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발전,"[64] "이론이 없었다면 사회 심리학은 오늘날의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다양한 설명이 있다.[65] 인지 부조화는 이론적 정교화 및 개발에 초점을 맞춘 연구[66]에서 의사 결정, 아동의 사회화, 색상 선호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걸쳐 수십 년간의 관련 연구를 낳았다.[67]

또한 페스팅거는 "실험을 지식 탐구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강력한 과학적 도구로 전환"한 사람으로서 사회 심리학에서 실험실 실험의 부상을 이끈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68] 『미국 심리학자(American Psychologist)』에 실린 부고 기사에서는 페스팅거가 없었다면 "실험 심리학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언급했다.[69] 그러나 페스팅거는 과도한 경험적 정밀성에 대한 요구에 대해 경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론적 개념이 아직 완전히 개발되지 않은 경우, 그러한 요구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면서 "연구는 더 큰 문제보다는 이전 연구의 사소한 불명확성에 점점 더 집중할 수 있으며, 사람들은 분야가 진행 중인 연구에 의해 정의되기 때문에 기본적인 문제들을 간과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70] 그는 또한 실험실 실험이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다"면서 "실험실 실험과 실제 상황 연구 사이에 적극적인 상호 관계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71]

페스팅거는 이론적 엄밀함과 사회 심리학에 대한 실험적 접근 방식으로 칭찬을 받지만, "미국에서 기초 사회 심리학과 응용 사회 심리학 사이의 소원함"에 기여한 것으로 여겨진다.[72] 그는 "냉철하고 이론 지향적이며 순수 실험 과학자의 상징"이 되었으며, 페스팅거와 자주 충돌했던 레빈의 집단 역학 연구 센터의 동료 교수인 론 리피트는 "모호하고 선한 일을 하는 응용 사회 심리학 실무자의 상징"이 되었다.[73]

페스팅거 연구의 가장 큰 영향 중 하나는 '뛰어난 과학적 기여상'에서 인용된 것처럼 "사회를 사고하는 유기체의 지속적인 행동으로 묘사하여 그의 세계에 질서를 가져오고 감정과 습관의 맹목적인 충동이 아닌 사회적 행동을 묘사한다"는 것이다.[74] 당시까지 심리학을 지배했던 행동주의는 인간을 자극-반응 강화 과정을 통해 조건화된 습관의 존재로 특징지었다. 행동주의자들은 인지적 또는 감정적 과정을 언급하지 않고 관찰 가능한 것, 즉 행동과 외부적 보상에만 집중했다.[75] 인지 부조화와 같은 이론은 행동주의적 용어로 설명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행동주의에 따르면 호감은 단순히 보상의 기능이므로 더 큰 보상이 더 큰 호감을 생성했을 것이다. 페스팅거와 칼스미스의 실험은 더 낮은 보상으로 더 큰 호감을 분명히 보여주었으며, 이는 인지적 과정의 인정을 필요로 하는 결과였다.[76] 페스팅거의 이론과 그가 생성한 연구를 통해 "강화 이론이 사회 심리학에 가졌던 독점적인 영향력은 효과적으로 영구적으로 깨졌다."[77]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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