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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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루클린은 미국 뉴욕시의 자치구로, 롱아일랜드 서부에 위치하며 1634년 네덜란드인에 의해 최초로 유럽인 정착이 시작되었다. 1646년 지방자치체로 인가받았으며, 1664년 영국에 정복된 후 여러 명칭 변화를 거쳐 브루클린으로 굳어졌다. 미국 독립 전쟁 당시 롱아일랜드 전투가 벌어진 곳이며, 도시화 과정을 거쳐 1898년 뉴욕시에 병합되었다. 현재는 다양한 인종 구성과 습윤 아열대 기후를 보이며, 풍부한 문화 시설과 스포츠 역사를 자랑한다. 대중교통이 발달했으며, 도로와 해상 교통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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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자치구는 1898년 뉴욕 시 통합으로 채택된 행정 구역으로, 맨해튼, 브루클린, 퀸스, 브롱크스, 스태튼아일랜드 5개의 주요 구역으로 구성되며 각 구는 뉴욕주 카운티와 동일 구역을 갖고 제한적 행정 기능을 수행하는 구청장을 둔다. - 뉴욕의 행정구 - 스태튼아일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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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 | |
---|---|
지도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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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다른 이름 | 킹스 군, 뉴욕 |
유형 | 버러 및 군 |
표어 | Eendraght Maeckt Maght (단결은 힘을 만든다) |
이미지 및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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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
주 | 뉴욕 |
군 | 킹스 (동일 영역) |
시 | 뉴욕 |
정치 | |
정부 형태 | 버러 |
자치구장 | 안토니오 레이노소 (민주당) — (브루클린 자치구) |
지방 검사 | 에릭 곤잘레스 (민주당) — (킹스 군) |
설립 | 1634년 |
명칭 유래 | 네덜란드 브뢰컬런 |
면적 | |
총 면적 | 97 sq mi |
육지 면적 | 70.82 sq mi |
수역 면적 | 26 sq mi |
수역 면적 (제곱킬로미터) | 67 km2 |
단위 기본 설정 | 임페리얼 |
최대 고도 | 67m |
최대 고도 (피트) | 220ft |
최대 고도 각주 | 배틀 힐 |
인구 | |
인구 조사 기준 시점 | 2020년 |
총 인구 | 2,736,074 |
인구 밀도 | 38,634 sq mi 당 명 |
주민 | 브루클린 사람 |
경제 | |
GDP (총액) | 미화 1,072억 7,400만 달러 (2022년) |
일반 정보 | |
우편 번호 | 112 |
지역 번호 | 718/347/929, 917 |
미국 하원 의원 선거구 | 7번, 8번, 9번, 10번, 11번 |
웹사이트 | brooklynbp.nyc.gov |
2. 역사
1639년 네덜란드 제작 지도와 1766년 킹스군 지도를 보면, 맨해튼은 개발이 진행되고 농지가 많았던 반면, 킹스군은 해안선이 울퉁불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럽인 정착의 브루클린 역사는 350년 이상 거슬러 올라간다. 17세기에 네덜란드가 이스트 강 기슭의 롱 아일랜드에 "브루클렌"이라는 작은 마을을 세웠고, 19세기에 상당한 규모의 도시로 성장했다. 1898년 맨해튼, 브롱크스, 킹스카운티의 나머지 시골 지역, 퀸즈와 스태튼 아일랜드와 통합되어 현대 뉴욕시를 형성했다.
1840년과 1924년 사이에는 유럽 이민자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인구가 급증하였다. 1950년대에는 미국 남부에서 온 흑인들과 푸에르토리코인들이 연이어 이주해 왔다. 그러나 1950년과 1980년 사이에는 많은 사람들이 도시 외곽으로 빠져나가면서 인구가 약 500,000명으로 감소하였다.
30여 년에 걸친 뉴욕 대도시권의 확장과 함께 킹스 군은 항구 도시로서 눈부시게 발전하여 19세기에는 미국에서 세 번째로 많은 인구를 보유하게 되었다. 시인 에마 라자러스(Emma Lazarus)의 소네트 작품 "The New Colossus" (1883년 발표)에서 브루클린은 맨해튼(뉴욕 군)의 쌍둥이 도시로 묘사되며, 뉴욕 항이 두 도시를 잇는 공중 통로로 표현되어 있다.
이민자 유입과 산업화로 인해 경제 발전 또한 눈에 띄었다. 고와너스(Gowanus) 항구에서 그린포인트(Greenpoint)까지의 해안에는 부두와 공장이 늘어섰고, 고와너스 운하(Gowanus Canal)의 개통과 뉴타운 강(Newtown Creek)이라고 불리는 삼각주를 운하화함으로써 수송 효율도 향상되었다. 철갑선 모니터(Monitor) 등은 고도성장 시대 윌리엄스버그(Williamsburg)의 조선소에서 생산된 가장 유명한 공산품이다. 남북 전쟁 이후에는 노면 전차를 비롯한 사회기반시설 정비도 진행되어 개발은 프로스펙트 공원을 넘어 동쪽으로 군의 중부까지 확대되었다. 인구가 급증함에 따라 상수도 시설 정비가 필요해져 리지우드 저수지(Ridgewood Reservoir)를 설치하였다.
1883년, 브루클린교가 완성되면서 오랫동안 배만이 맨해튼과의 연락 수단이었던 시대는 끝났다. 이 무렵 브루클린 시는 독립적인 발전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뉴욕 카운티, 서부 퀸즈 카운티, 리치먼드 카운티(스태튼 아일랜드), 브롱크스 카운티를 포함하는 5구 체제의 뉴욕 시의 일부가 될 것인가를 놓고 갈등하게 되었다. 앤드루 해즈웰 그린 등의 진보파는 5구 체제 안에 찬성했고, 그들은 반대파인 보수층과 브루클린 이글 신문사 등과 논쟁을 계속했다. 1894년 선거에서 5개 카운티 주민들은 5구 체제 합병안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다수가 되었고, 1898년에 공식적으로 합병되어 현재의 뉴욕 시가 탄생했다.
이 합병으로 브루클린 주민들의 정체성은 상당히 복잡해졌고, 신문 등에서는 종종 "1898년의 큰 실수"라고 불리기도 했다.
시장 | 정당 | 취임 | 퇴임 |
---|---|---|---|
조지 홀 | 민주당/공화당 | 1834년 | 1834년 |
조나단 트로터 | 민주당 | 1835년 | 1836년 |
제레마이어 존슨 | 휘그당 | 1837년 | 1838년 |
실러스 P. 스미스 | 휘그당 | 1839년 | 1841년 |
헨리 C. 머피 | 민주당 | 1842년 | 1842년 |
조셉 스프래그 | 민주당 | 1843년 | 1844년 |
토마스 G. 탈메이지 | 민주당 | 1845년 | 1845년 |
프랜시스 B. 스트라이커 | 휘그당 | 1846년 | 1848년 |
에드워드 코플랜드 | 민주당 | 1849년 | 1849년 |
사뮤엘 스미스 | 민주당 | 1850년 | 1850년 |
콩클린 브러시 | 휘그당 | 1851년 | 1852년 |
에드워드 A. 램버트 | 민주당 | 1853년 | 1854년 |
조지 홀 | 1855년 | 1856년 | |
사뮤엘 S. 파웰 | 민주당 | 1857년 | 1860년 |
마틴 칼브페리쉬 | 민주당 | 1861년 | 1863년 |
알프레드 M. 우드 | 공화당 | 1864년 | 1865년 |
사뮤엘 루스 | 공화당 | 1866년 | 1867년 |
마틴 칼브페리쉬 | 민주당 | 1868년 | 1871년 |
사뮤엘 S. 파웰 | 민주당 | 1872년 | 1873년 |
존 W. 헌터 | 민주당 | 1874년 | 1875년 |
프레데릭 A. 슈뢰더 | 공화당 | 1876년 | 1877년 |
제임스 호웰 | 민주당 | 1878년 | 1881년 |
세스 로우 | 공화당 | 1882년 | 1885년 |
다니엘 D. 휘트니 | 민주당 | 1886년 | 1887년 |
알프레드 C. 샤핀 | 민주당 | 1888년 | 1891년 |
데이비드 A. 부디 | 민주당 | 1892년 | 1893년 |
찰스 A. 쉘렌 | 공화당 | 1894년 | 1895년 |
프레데릭 W. 울스터 | 공화당 | 1896년 | 1898년 |
2. 1. 식민지 시대
유럽인의 브루클린 개척은 17세기부터 시작되어 35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 중 하나이다. 네덜란드인들은 롱아일랜드 서부에 정착한 첫 유럽인들이었다. 당시 이 지역은 커나시 아메리카 원주민 종족이 주로 거주하고 있었다. 첫 네덜란드인 정착은 1634년에 설립된 미드부트 (미드우드)였다. 네덜란드인들은 또한 1630년대에 거와너스, 레드후크, 브루클린 해군 공창과 부시위크를 둘러싸인 대지를 모호크 족에게서 매입하였다. 1646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브뢰컬런(브루클린) 마을에 권한을 부여했고, 이곳은 현재 뉴욕주의 첫 지방자치체가 되었다. 당시 브뢰컬런은 뉴네덜란드의 일부였다.
1664년, 네덜란드인들은 영국의 뉴네덜란드 정복으로 브뢰컬런을 잃었다. 이후 브루클린은 초기 영국령 아메리카의 중부 식민지 중 하나인 뉴욕 주 요크셔 서부 지역의 일부가 되었다.
1683년, 영국인들은 뉴욕 영령 식민지를 12개의 군으로 재편성하고 각 군을 타운으로 세분했다. 이때 브뢰컬런은 브로클랜드, 브로클린, 브루클라인 등으로 이름이 바뀌다가 결국 브루클린으로 확정되었다. 킹스 군은 원래 12개 군 중 하나였고, 브루클린은 킹스 군 내 원래 6개 타운 중 하나였다. 군 이름은 잉글랜드 국왕 찰스 2세를 기리기 위해 지어졌다.
허드슨 강 유역을 따라 확립된 파트룬과 소작농 시스템이 없었던 이 농업 카운티는 노예 비율이 "원래 13개 식민지" 중 북아메리카 대서양 동부 해안의 다른 지역보다 매우 높았다.
2. 2. 미국 독립 전쟁
1776년 8월과 9월에 걸쳐 롱아일랜드 전투(브루클린 전투라고도 함)가 킹스 군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는 미국 독립 선언에 이어진 미국 독립 전쟁에서 첫 주요 전투이자 전체 교전 중에 가장 큰 규모였다. 조지 워싱턴 휘하의 대륙군은 현재의 그린우드 묘지, 프로스펙트 공원, 그랜드 아미 플라자 부근 고지대에서 영국군에게 밀려났다.[32]워싱턴은 현재의 애틀랜틱 애비뉴 서쪽 끝 언덕에서 고와너스 크릭과 올드 스톤 하우스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를 목격하고 "오늘 나는 얼마나 용감한 사람들을 잃을 것인가!"라고 외쳤다고 전해진다.[32]
요새화된 브루클린 하이츠의 미군 진지들은 결국 방어 불가능해졌고, 며칠 후 철수하여 영국군이 뉴욕 항을 장악하게 되었다. 워싱턴의 전투에서의 패배는 그의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켰지만, 모든 군대와 보급품을 단 하룻밤 만에 이스트 강 건너로 전술적 후퇴시킨 것은 현재 역사가들에 의해 그의 가장 훌륭한 승리 중 하나로 여겨진다.[32]
영국군은 전쟁 기간 동안 주변 지역을 장악했고, 뉴욕시는 곧 점령되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북아메리카에서 그들의 군사 및 정치적 작전 기지가 되었다. 애국자 주민들은 대부분 그 지역을 떠났거나 쫓겨났고, 이후 영국군은 대체로 킹스 카운티에 남은 주민들로부터 우세한 로열리스트 지지를 받았지만, 이 지역은 워싱턴 자신이 이끄는 초기의—그리고 대체로 성공적인—애국자 정보망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영국군은 월러바웃 베이의 브루클린 해안가에 포로 수용선 시스템을 설치했다. 미국 애국자 중 더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사망했는데, 이는 미국 독립 전쟁의 모든 전투에서 전투 중 사망한 수를 합친 것보다 많았다. 1783년 파리 조약의 결과 중 하나는 뉴욕시에서 영국군의 철수였으며, 이는 20세기까지 뉴욕 시민들에 의해 기념되었다.
2. 3. 도시화
19세기 초, 뉴욕에서 이스트 강 하안 지역을 따라 도시들이 성장했다. 브루클린 시티와 윌리엄스버그 시티, 두 개의 도시가 킹스 군에 있었다. 1854년, 브루클린은 윌리엄스버그를 합병했다. 1896년에는 브루클린이 킹스 군의 나머지 지역 전부를 합병했다.[30]1878년, 브라이튼 비치 라인과 같은 철도 연결이 증축되면서 브루클린 시티는 뉴로츠 타운(1886년), 플랫부시 타운, 그레브센드 타운, 뉴유트레크트 타운(1894년), 플랫랜즈 타운(1896년)을 10년 만에 병합했다.
2. 4. 뉴욕에 병합
1898년 브루클린 주민들은 맨해튼, 브롱크스, 퀸스와 리치먼드(후에 스태튼아일랜드)에 가입하여 근대 뉴욕을 형성하는 5개 자치구로 통합하는 투표를 하였고, 근소한 다수에 의해 통과되었다. 킹스 군은 뉴욕주의 군 중 하나로 그 지위를 유지하였다.1840년과 1924년 사이에는 유럽 이민자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인구가 급증하였다. 1950년대에는 미국 남부에서 온 흑인들과 푸에르토리코인들이 연이어 이주해 왔다. 그러나 1950년과 1980년 사이에는 많은 사람들이 도시 외곽으로 빠져나가면서 인구가 약 500,000명으로 감소하였다.
30여 년에 걸친 뉴욕 대도시권의 확장과 함께 킹스 군은 항구 도시로서 눈부시게 발전하여 19세기에는 미국에서 세 번째로 많은 인구를 보유하게 되었다. 시인 에마 라자러스(Emma Lazarus)의 소네트 작품 "The New Colossus" (1883년 발표)에서 브루클린은 맨해튼(뉴욕 군)의 쌍둥이 도시로 묘사되며, 뉴욕 항이 두 도시를 잇는 공중 통로로 표현되어 있다.
이민자 유입과 산업화로 인해 경제 발전 또한 눈에 띄었다. 고와너스(Gowanus) 항구에서 그린포인트(Greenpoint)까지의 해안에는 부두와 공장이 늘어섰고, 고와너스 운하(Gowanus Canal)의 개통과 뉴타운 강(Newtown Creek)이라고 불리는 삼각주를 운하화함으로써 수송 효율도 향상되었다. 철갑선 모니터(Monitor) 등은 고도성장 시대 윌리엄스버그(Williamsburg)의 조선소에서 생산된 가장 유명한 공산품이다. 남북 전쟁 이후에는 노면 전차를 비롯한 사회기반시설 정비도 진행되어 개발은 프로스펙트 공원(Prospect Park)을 넘어 동쪽으로 군의 중부까지 확대되었다. 인구가 급증함에 따라 상수도 시설 정비가 필요해져 리지우드 저수지(Ridgewood Reservoir)를 설치하였다.

하지만 킹스 군 변두리에 있는 마을들은 지하철망이 없었기 때문에 맨해튼이나 브루클린 다운타운과 고립된 지역이었고,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조용한 교외 지역으로서의 환경을 유지하고 싶어했다. 1878년 뉴욕시 지하철 BMT 브라이튼선(BMT Brighton Line)(Q 트레인)이 개통됨으로써 해당 지역의 고립 상태는 종식되었다.
스포츠 등 오락 산업도 번성하여 프로 야구팀 브루클린 브리지룸스(Brooklyn Bridge Rooms)는 워싱턴 파크(Washington Park)나 파크 슬로프(Park Slope) 등에서 경기를 치렀다. 이 팀은 20세기 초 브루클린 다저스(Brooklyn Dodgers)로 이름을 바꾸고 에베츠 필드(Ebbets Field)를 홈으로 삼았다. 또한 코니 아일랜드(Coney Island)의 브라이튼 비치(Brighton Beach)를 중심으로 남부 연안 지역에서는 경마장과 유원지가 개업하여 미국 최고의 오락 산업 지역으로서 전성기를 맞았다.
19세기 말은 브루클린의 폭발적인 성장의 마지막 시대였으며, 지하철과 산업화는 최남단(서쪽)의 베이 리지(Bay Ridge)에서 선셋 파크(Sunset Park)까지 확대되었다. 브루클린시는 1886년 뉴로츠(New Lots) 마을, 1894년 플랫부시(Flatbush) 마을, 그레이브센드(Gravesend) 마을, 뉴 유트레히트(New Utrecht) 마을, 1896년 플랫랜즈(Flatlands) 마을을 합병하여 그 면적은 거의 킹스 군 전체에 필적하는 크기가 되었다.



1883년, 브루클린교가 완성되면서 오랫동안 배만이 맨해튼과의 연락 수단이었던 시대는 끝났다. 이 무렵 브루클린 시는 독립적인 발전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뉴욕 카운티, 서부 퀸즈 카운티, 리치먼드 카운티(스태튼 아일랜드), 브롱크스 카운티를 포함하는 5구 체제의 뉴욕 시의 일부가 될 것인가를 놓고 갈등하게 되었다. 앤드류 해즈웰 그린(Andrew Haswell Green) 등의 진보파는 5구 체제 안에 찬성했고, 그들은 반대파인 보수층과 브루클린 이글(Brooklyn Eagle) 신문사 등과 논쟁을 계속했다. 1894년 선거에서 5개 카운티 주민들은 5구 체제 합병안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다수가 되었고, 1898년에 공식적으로 합병되어 현재의 뉴욕 시가 탄생했다.
이 합병으로 브루클린 주민들의 정체성은 상당히 복잡해졌고, 신문 등에서는 종종 "1898년의 큰 실수"라고 불리기도 했다.
시장 | 정당 | 취임 | 퇴임 |
---|---|---|---|
조지 홀 | 민주당/공화당 | 1834년 | |
조나단 트로터 | 민주당 | 1835년 | 1836년 |
제레마이어 존슨 | 휘그당 | 1837년 | 1838년 |
실러스 P. 스미스 | 1839년 | 1841년 | |
헨리 C. 머피 | 민주당 | 1842년 | |
조셉 스프래그 | 1843년 | 1844년 | |
토마스 G. 탈메이지 | 1845년 | ||
프랜시스 B. 스트라이커 | 휘그당 | 1846년 | 1848년 |
에드워드 코플랜드 | 1849년 | ||
사뮤엘 스미스 | 민주당 | 1850년 | |
콩클린 브러시 | 휘그당 | 1851년 | 1852년 |
에드워드 A. 램버트 | 민주당 | 1853년 | 1854년 |
조지 홀 | 1855년 | 1856년 | |
사뮤엘 S. 파웰 | 민주당 | 1857년 | 1860년 |
마틴 칼브페리쉬 | 1861년 | 1863년 | |
알프레드 M. 우드 | 공화당 | 1864년 | 1865년 |
사뮤엘 루스 | 1866년 | 1867년 | |
마틴 칼브페리쉬 | 민주당 | 1868년 | 1871년 |
사뮤엘 S. 파웰 | 1872년 | 1873년 | |
존 W. 헌터 | 1874년 | 1875년 | |
프레데릭 A. 슈뢰더 | 공화당 | 1876년 | 1877년 |
제임스 호웰 | 민주당 | 1878년 | 1881년 |
세스 로우 | 공화당 | 1882년 | 1885년 |
다니엘 D. 휘트니 | 민주당 | 1886년 | 1887년 |
알프레드 C. 샤핀 | 1888년 | 1891년 | |
데이비드 A. 부디 | 1892년 | 1893년 | |
찰스 A. 쉘렌 | 공화당 | 1894년 | 1895년 |
프레데릭 W. 울스터 | 1896년 | 1898년 |
2. 5. 20세기 이후
1883년 브루클린교가 완성되면서 맨해튼과의 교통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이로 인해 브루클린은 뉴욕 카운티, 서부 퀸즈 카운티, 리치먼드 카운티(스태튼 아일랜드), 브롱크스 카운티를 포함하는 5개 구 체제의 뉴욕시의 일부가 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앤드루 해즈웰 그린 등의 진보파는 합병을 지지했고, 보수파와 브루클린 이글 신문사 등은 반대했다. 1894년 선거에서 합병 찬성파가 다수를 차지했고, 1898년 공식적으로 합병되어 현재의 뉴욕시가 탄생했다.[4]이 합병으로 브루클린 주민들의 정체성은 복잡해졌으며, 신문 등에서는 종종 "1898년의 큰 실수"라고 불리기도 했다.[4] 브루클린의 독자성은 현재도 노년층에 의해 계승되며, 브루클린 주민으로서의 자부심을 유지하고 있다.[4]
뉴욕시 탄생 후에도 브루클린 구는 킹스 카운티로서 뉴욕주의 카운티 중 하나로 계속 존재하고 있다.[4]
시장 | 정당 | 취임 | 퇴임 |
---|---|---|---|
조지 홀 | 민주당/공화당 | 1834년 | 1834년 |
조나단 트로터 | 민주당 | 1835년 | 1836년 |
제레마이어 존슨 | 휘그당 | 1837년 | 1838년 |
실러스 P. 스미스 | 휘그당 | 1839년 | 1841년 |
헨리 C. 머피 | 민주당 | 1842년 | 1842년 |
조셉 스프래그 | 민주당 | 1843년 | 1844년 |
토마스 G. 탈메이지 | 민주당 | 1845년 | 1845년 |
프랜시스 B. 스트라이커 | 휘그당 | 1846년 | 1848년 |
에드워드 코플랜드 | 민주당 | 1849년 | 1849년 |
사뮤엘 스미스 | 민주당 | 1850년 | 1850년 |
콩클린 브러시 | 휘그당 | 1851년 | 1852년 |
에드워드 A. 램버트 | 민주당 | 1853년 | 1854년 |
조지 홀 | 1855년 | 1856년 | |
사뮤엘 S. 파웰 | 민주당 | 1857년 | 1860년 |
마틴 칼브페리쉬 | 민주당 | 1861년 | 1863년 |
알프레드 M. 우드 | 공화당 | 1864년 | 1865년 |
사뮤엘 루스 | 공화당 | 1866년 | 1867년 |
마틴 칼브페리쉬 | 민주당 | 1868년 | 1871년 |
사뮤엘 S. 파웰 | 민주당 | 1872년 | 1873년 |
존 W. 헌터 | 민주당 | 1874년 | 1875년 |
프레데릭 A. 슈뢰더 | 공화당 | 1876년 | 1877년 |
제임스 호웰 | 민주당 | 1878년 | 1881년 |
세스 로우 | 공화당 | 1882년 | 1885년 |
다니엘 D. 휘트니 | 민주당 | 1886년 | 1887년 |
알프레드 C. 샤핀 | 민주당 | 1888년 | 1891년 |
데이비드 A. 부디 | 민주당 | 1892년 | 1893년 |
찰스 A. 쉘렌 | 공화당 | 1894년 | 1895년 |
프레데릭 W. 울스터 | 공화당 | 1896년 | 1898년 |
브루클린은 쾨펜의 기후 구분에 따르면 애팔래치아 산맥의 부분적인 보호와 대서양의 온화한 영향으로 습윤 아열대 기후(Cfa)를 경험한다.[47] 연중 강수량이 풍부하며, 연간 약 약 127.00cm에 달한다. 햇빛이 비치는 날은 연간 평균 234일이며, 연간 일조 시간은 2,535시간으로 가능한 일조량의 평균 57%이다.[48] 브루클린은 미국 농무부 식물 내한성 구역 7b에 위치한다.[49]
브루클린은 롱아일랜드의 가장 서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북동쪽으로는 퀸스와 유일하게 육지 경계선을 나눈다. 이 경계선의 가장 서쪽은 이스트 강으로 흘러가는 뉴타운 지류에 의해 정해졌다.
3. 인구
2020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브루클린에는 2,736,074명이 거주하고 있다. 미국 인구조사국은 2010년부터 2019년까지 브루클린 인구가 2.2% 증가하여 2,559,903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브루클린의 추정 인구는 뉴욕시 추정 인구 8,336,817명의 30.7%, 롱아일랜드 인구 7,701,172명의 33.5%, 뉴욕주 인구 19,542,209명의 13.2%를 차지했다.[96] 2020년 뉴욕시 정부는 브루클린 인구를 2,648,403명으로 예상했다.[97] 2019년 인구 조사 추정치에 따르면 가구 수는 958,567가구이며, 가구당 평균 인원은 2.66명이다.[98] 2019년에는 1,065,399개의 주택이 있었고, 중간 총 임대료는 1,426달러였다. 브루클린은 성장세를 보이며 2019년 인구 조사 추정 프로그램에서 건축 허가 9,696건을 얻었다.
2020년 미국 인구조사에 따르면, 브루클린의 인종 및 민족 구성은 비히스패닉 백인 35.4%, 흑인 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26.7%, 미국 원주민 또는 알래스카 원주민 0.9%, 아시아계 미국인 13.6%, 태평양 섬 주민계 미국인 0.1%, 혼혈 미국인 4.1%, 그리고 어떤 인종의 히스패닉 또는 라틴 아메리카인 18.9%로 추산된다.[102]
브루클린은 언어 다양성이 높다. 2010년 기준으로, 5세 이상 브루클린 거주민의 54.1%(1,240,416명)는 가정에서 영어를 제1언어로 사용했고, 17.2%(393,340명)는 스페인어, 6.5%(148,012명)는 중국어, 5.3%(121,607명)는 러시아어, 3.5%(79,469명)는 이디시어, 2.8%(63,019명)는 프랑스어 크레올어, 1.4%(31,004명)는 이탈리아어, 1.2%(27,440명)는 히브리어, 1.0%(23,207명)는 폴란드어, 1.0%(22,763명)는 프랑스어, 1.0%(21,773명)는 아랍어, 0.9%(19,388명)는 인도어, 0.7%(15,936명)는 우르두어를 사용했으며, 아프리카 언어는 5세 이상 인구의 0.5%(12,305명)가 모국어로 사용했다. 총계로 브루클린의 5세 이상 인구 중 45.9%(1,051,456명)가 영어가 아닌 다른 모국어를 사용했다.[105]
4. 기후
브루클린의 기후는 JFK 공항 (1981~2010년 평균,[212] 1948년~현재 극값)과 뉴욕시 브루클린 (아베뉴 V)[54]에서 측정한 자료를 통해 자세히 알 수 있다.월 평균 최고 기온 (°F) 평균 최저 기온 (°F) 강수량 (inch) 적설량 (inch) 1월 39.7 27.5 3.53 6.5 2월 42.4 29.1 2.97 8.5 3월 49.7 35.2 4.37 4.4 4월 60.5 44.8 3.85 0.6 5월 70.5 54.4 4.03 0 6월 79.3 64.0 4.44 0 7월 84.8 70.3 4.85 0 8월 83.3 68.9 3.92 0 9월 76.5 62.4 3.92 0 10월 65.0 51.2 4.02 0 11월 54.3 41.4 3.23 0.2 12월 44.5 33.2 4.00 4.3 연간 62.5 48.5 47.13 24.5
5. 지리
브루클린의 해안은 여러 수역을 향한다. 중부 브루클린은 뉴욕만에, 북부 브루클린의 해안은 이스트 강에 의해 경계를 이룬다. 이 해안 지역은 레드후크 반도와 이리 분지를 포함한다. 거버너스섬에서는 버터밀크 해협이 이 해안 지역을 가른다. 남서쪽은 고와너스 운하로 연결된 고와너스 만이다. 남쪽의 가장 서쪽 구역에서 브루클린은 뉴욕만의 상부와 하부가 만나는 베라자노 내로스 교에 의해 스태튼아일랜드와 분리된다.
브루클린의 남부 해안은 코니아일랜드, 브라이튼비치와 맨해튼비치로 뻗어있는 반도를 포함한다. 남동부 해안은 섬이 점점이 흩어져 있는 자메이카만에 위치한다.
브루클린에서 가장 높은 곳은 프로스펙트 공원과 그린우드 묘지를 둘러싼 지역으로, 해수면 위로 약 60m 솟아있다. 브루클린하이츠로 알려진 다운타운 브루클린에도 고지대가 몇 군데 있다.
브루클린의 면적은 약 251.23km2이며, 이 중 육지 면적은 약 183.89km2(73%), 수면 면적은 약 67.34km2(27%)이다. 육지 면적 기준으로 뉴욕시 자치구 중 두 번째로 넓다. 킹스 카운티는 육지 면적 기준으로는 뉴욕주에서 네 번째로 작고, 전체 면적 기준으로는 세 번째로 작다.[6] 브루클린은 롱 아일랜드의 남서쪽 끝에 위치하며, 자치구의 서쪽 경계는 섬의 서쪽 끝을 이룬다.
브루클린의 해안선은 광대하고 다양하며, 자메이카 베이, 대서양, 네로즈 해협(베라자노-네로즈 다리가 지나감), 상부 뉴욕 만(저지시티 및 베이온을 구분), 이스트 강(브루클린-배터리 터널, 브루클린 브리지, 맨해튼 브리지, 윌리엄스버그 브리지와 여러 뉴욕 지하철 노선이 지나감) 등이 포함된다. 브루클린 동쪽에는 퀸즈 자치구가 있으며, 자메이카 지역에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이 있다. 공항은 브루클린의 이스트 뉴욕 지역 경계에서 약 2마일 떨어져 있다.
5. 1. 이웃들
브루클린은 많은 잘 규정된 이웃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들 중 다수는 1600년대 초 네덜란드 식민지 시절에 설립된 구역의 타운과 마을에서 발전했다.
브루클린 교와 프로스펙트 공원 사이의 북서부 이웃들(보럼힐, 브루클린하이츠, 캐롤가든스, 코블힐, 클린턴힐, 비니거힐, 포트그린, 고와너스, 파크 슬로프, 프로스펙트하이츠, 레드후크 등)은 19세기의 벽돌로 만든 2-3층 짜리 도시 주택과 부유 계급의 주택들에 의해 특성을 나타낸다. 이 이웃들은 광대한 지하철 노선, 문화적 관례, 고급 식당들과 더불어 브루클린에서 가장 고급스럽고 부유한 이웃들 중 일부를 포함한다.
이스트 강을 따라 더 북쪽에는 윌리엄스버그와 그린포인트가 있다. 전통적으로 활기 넘치는 문화적 혼합과 함께, 많은 화가들이 있는 근로자 계급의 공동체였으나, 1990년대 후반부터 이 지역으로 이주해 왔다. 2005년에는 많은 새로운 거주 콘도미니엄들을 위해 브루클린 해안의 광대한 재구분이 완료되었다. 가격이 오르면서 재개발은 "L" 지하철 노선을 따라 해안에서 동쪽으로 옮겨져 부시위크로 들어갔다.
중부와 남부 브루클린은 건축과 문화적으로 구역적인 이웃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들 중 일부는 향상 지향의 이민자들이 로어 이스트 사이드 같은 맨해튼 이웃들에 있는 주택들에서 이주하면서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빠르게 성장했다. 보로파크는 크게 정통파 유대인들이 살고, 베드퍼드스타이베선트는 미국에서 가장 큰 흑인 이웃이며, 벤슨허스트는 역사적으로 이탈리아인들이다. 다이커하이츠는 부유한 이탈리아인 이웃이다. 이스트플랫부시와 포트그린은 중산층 계급의 흑인 전문인들이 많이 사는 곳이다. 브라이튼비치는 많은 러시아인들이 산다. 1990년 이래 브루클린은 융성하는 멕시코와 중국계 공동체들이 사는 선셋파크 같은 이웃들에 새로운 이민에서 증가를 보였다.
브루클린의 지역들은 민족 구성 면에서 역동적이다. 예를 들어, 20세기 초중반 브라운스빌은 대다수가 유대인 주민이었지만, 1970년대 이후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20세기 초 미드우드는 아일랜드계 주민들로 가득했고, 그 후 약 50년 동안 유대인 주민들이 많았으며, 현재는 서서히 파키스탄계 거주 지역이 되고 있다. 브루클린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하는 백인 인구는 1930년 97.2%에서 1990년에는 46.9%로 감소했다.[55]
이 자치구는 미국 내 다른 도시에 살던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이 중 대부분은 시카고, 디트로이트, 샌프란시스코, 워싱턴 D.C., 볼티모어, 필라델피아, 보스턴, 신시내티, 그리고 시애틀 출신이다.[56][57][58][59][60][61][62]
60만 명이 넘는 유대인, 특히 정통파(Orthodox)와 하시딤(Hasidic) 유대인들이 브루클린의 보로 파크(Borough Park), 윌리엄스버그(Williamsburg), 미드우드(Midwood)와 같은 유서 깊은 유대인 거주 지역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곳에는 많은 예시바(yeshiva), 회당(synagogue), 코셔(kosher) 식당뿐 아니라 다양한 유대인 사업체들이 있다.
20만 명이 넘는 중국계 미국인들이 브루클린 남부 지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주로 선셋 파크(Sunset Park), 벤슨허스트(Bensonhurst), 그레이브센드(Gravesend), 홈크레스트(Homecrest)에 집중되어 있다. 브루클린은 뉴욕시에서 가장 많은 차이나타운이 있는 자치구이다.
브루클린의 아프리카계 미국인(African Americans)과 카리브해 사람(Caribbean people) 공동체는 브루클린 대부분 지역에 퍼져 있다. 브루클린의 서인도제도(West Indian) 공동체는 크라운 하이츠, 플랫부시, 이스트 플랫부시, 켄싱턴, 카나시 등 브루클린 중심부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맨해튼의 오랜 거주지(특히 어퍼 웨스트 사이드)를 파괴한 도시 재개발 사업으로 인해 푸에르토리코 이민자들은 선착장과 공장이 있는 선셋 파크, 레드 후크, 고와너스와 같은 해안가 산업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1965년 하트-셀러 법(Hart-Cellar Act)이 라틴 아메리카 다른 지역 출신 이민에 대한 제한을 완화함에 따라 브루클린의 히스패닉 인구는 다양해졌다.
브루클린은 또한 많은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의 거주지이며, 주로 브라이턴 비치와 쉽스헤드 베이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브루클린의 폴란드계 미국인(Polish-Americans)들은 역사적으로 그린포인트(Greenpoint)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곳에는 리틀 폴란드(Little Poland)가 있다.
전후 시대 내내 스태튼 아일랜드와 뉴욕 대도시권의 교외 지역으로 광범위하게 이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은 여전히 벤슨허스트, 다이커 하이츠, 베이 릿지, 배스 비치, 그레이브센드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최근에는 주로 무슬림인 아랍계 이민자들, 특히 이집트인과 레바논인들이 브루클린 남서부, 특히 베이릿지로 이주하였다.
3세대, 4세대, 5세대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은 브루클린 전역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윈저 테라스, 파크 슬로프, 베이 릿지, 마린 파크, 그리고 게릿센 비치 등의 지역에 상당한 규모가 남아 있다.
브라이턴 비치는 성장하는 파키스탄계 미국인 공동체의 중심지이며, 미드우드에는 최근 무함마드 알리 진나 길로 이름이 바뀐 코니 아일랜드 애비뉴를 따라 리틀 파키스탄이 있다.
그 북쪽에 있는 켄싱턴은 뉴욕의 여러 신흥 방글라데시인 거주 지역 중 하나이다.
브루클린의 그리스계 미국인들은 자치구 전역에 거주한다. 베이 리지와 인근 지역에는 그리스 관련 학교, 사업체, 문화 기관들이 눈에 띄게 밀집해 있는 역사적인 집중 지역이 존재한다.
브루클린에는 동성 커플이 많이 살고 있으며 그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뉴욕에서는 2011년 6월 24일 동성 결혼이 합법화되었으며, 30일 후부터 동성 결혼이 허용되었다.[78] 특히 파크 슬로프 지역은 레즈비언들에게 인기 있는 지역으로 자리 잡았으며, 프로스펙트 하이츠에도 LGBT 거주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79]
6. 정부
''(상대적 비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