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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언 애스플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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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릴리언 애스플런드는 1906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우스터에서 태어나 2006년 99세의 나이로 사망한 타이타닉 호 생존자이다. 1912년 부모, 형제들과 함께 타이타닉 호에 승선했으나, 침몰 사고로 아버지와 세 형제를 잃었다. 릴리언은 어머니, 남동생과 함께 구조되었으며, 이후 우스터에서 비서직으로 일하며 어머니를 돌봤다. 릴리언은 타이타닉 호에 대한 언론 인터뷰를 거절하며 참사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고, 2002년 위니프레드 퀵의 사망 이후 "사고 현장을 기억하는 마지막 생존자"로 불렸다. 그녀의 사망으로 타이타닉 호 침몰 사고에 대한 생생한 증언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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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언 애스플런드
기본 정보
이름릴리언 거트루드 애스플런드
출생일1906년 10월 21일
출생지매사추세츠주 우스터
사망일2006년 5월 6일
사망지매사추세츠주 슈루즈버리
부모칼 애스플런드
셀마 애스플런드
가족필립 애스플런드
클래런스 애스플런드
칼 애스플런드 (쌍둥이)
펠릭스 애스플런드
알려진 이유RMS 타이타닉의 생존자 중 한 명

2. 어린 시절

1906년 매사추세츠주 우스터에서 스웨덴계 미국인 2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잠시 스웨덴에서 거주하였으며,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1912년 4월, 부모님과 네 명의 형제와 함께 영국 사우샘프턴에서 타이타닉호 3등 선실에 승선했다.

2. 1. 출생과 가족

릴리언 거트루드 애스플런드는 1906년 10월 21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우스터에서 스웨덴 이민자인 칼 오스카르 필로프 애스플런드와 셀마 아우구스타 에밀리아 애스플런드(결혼 전 성: 요한손)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우스터에 정착하기 전에 잠시 미주리주에 살았다. 릴리언에게는 쌍둥이 남동생 칼 에드거, 두 명의 형 필립 오스카(1898년생)와 칼 클래런스(1902년생), 그리고 막내 남동생 펠릭스 헨리(1909년생)가 있었다.

1907년, 릴리언의 아버지는 스웨덴에 있는 자신의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버지 칼이 할아버지의 유언 집행인이었으므로, 가족은 스웨덴으로 돌아가 스몰란드의 알세다 마을 근처에 있는 가족 농장의 재산을 정리하기로 결정했다. 릴리언과 그녀의 부모, 세 형제는 보스턴에서 쿠나드 라인의 ''Ivernia''호를 타고 출항하여 7월 4일에 리버풀에 도착한 후, 예테보리를 거쳐 알세다에 도착했다.[2] 가족은 농장 문제를 해결하고 릴리언의 할머니를 돌보면서 4년 넘게 알세다에 머물렀고, 그 동안 어머니 셀마는 1909년 3월에 막내아들 펠릭스를 낳았다. 스웨덴에서 지낸 후, 가족은 미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릴리언의 어머니는 스웨덴에 더 머물고 싶어했지만, 아버지는 아이들이 미국에서 더 나은 교육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새로운 화이트 스타 라인의 여객선 ''타이타닉'' 호에 가족의 승선을 예약했다.[3]

2. 2. 스웨덴 이주와 귀환

1907년, 릴리언의 가족은 릴리언의 아버지 쪽 할아버지가 스웨덴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버지 칼이 할아버지의 유언 집행인이었기 때문에, 가족은 스웨덴으로 돌아가 스몰란드의 알세다 마을 근처에 있는 가족 농장의 재산을 정리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릴리언과 그녀의 부모, 세 형제는 보스턴에서 쿠나드 라인의 ''Ivernia''호를 타고 출항하여 7월 4일에 리버풀에 도착한 후, 예테보리를 거쳐 알세다에 도착했다.[2] 가족은 농장 문제를 해결하고 릴리언의 할머니를 돌보면서 4년 넘게 알세다에 머물렀고, 그 동안 어머니 셀마는 1909년 3월에 막내아들 펠릭스를 낳았다. 릴리언의 어머니는 스웨덴에 더 머물고 싶어했지만, 릴리언의 아버지는 아이들이 미국에서 더 나은 교육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새로운 화이트 스타 라인의 타이타닉 호에 가족의 승선을 예약했다.[3]

3. 타이타닉 호

스웨덴계 미국인 2세였던 릴리언 애스플런드는 할머니가 있는 스웨덴에서 잠시 지낸 후 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1912년 가족과 함께 영국 사우샘프턴에서 타이타닉 호 3등 선실에 승선했다. 당시 승선한 가족은 아버지 칼, 어머니 셀마, 두 형 필립과 클래런스, 쌍둥이 형 에드거, 남동생 펠릭스까지 총 7명이었다.

그러나 타이타닉 호 침몰 사고로 아버지 칼과 세 형제(필립, 클래런스, 에드거)는 목숨을 잃었다. 릴리언은 어머니 셀마, 남동생 펠릭스와 함께 15번 구명보트에 탑승하여 생존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2002년 위니프레드 퀵이 사망한 후, 릴리언은 타이타닉 호 사고 당시를 기억하는 몇 안 되는 생존자이자, 미국 국적의 마지막 생존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3. 1. 승선

스웨덴계 미국인 2세였던 릴리언은 1906년 매사추세츠주 우스터에서 태어났다. 잠시 할머니가 있는 스웨덴에서 지낸 후, 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1912년 4월 10일 영국 사우스햄튼에서 부모님(칼, 셀마), 두 형(필립, 클래런스), 쌍둥이 형 에드거, 남동생 펠릭스와 함께 총 7명이 타이타닉 호 3등 선실에 승선했다. 당시 다섯 살이었던 릴리언은 배가 "매우 컸고, 페인트칠을 막 끝낸 상태였다. 나는 갓 칠한 페인트 냄새를 싫어했던 기억이 난다."라고 회상했다.[3]

3. 2. 침몰

1912년 4월 14일 밤 11시 40분, 타이타닉 호가 빙산과 충돌했을 때, 릴리언의 아버지 칼 애스플런드는 릴리언과 남동생 펠릭스를 1등석 산책로 창가에서 구명 보트 10호에 태웠다.[4][5] 어머니 셀마는 남편과 함께 남으려 했으나,[3] 결국 아이들과 함께 보트에 태워졌다.[5] 릴리언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어머니는 남편[아버지]과 함께 배와 함께 가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이들이 혼자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자리에 앉으셨다. 펠릭스를 무릎에 앉히고, 저를 무릎 사이에 앉히셨다. 어머니는 그렇게 하면 제가 조금 더 따뜻할 거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3] 보트가 거의 다 차서 다른 아이들이 탈 자리가 없었기에, 칼 애스플런드는 아내에게 "먼저 가세요, 우리가 다른 보트 중 하나에 타도록 하겠소."라고 말했다.[6] 릴리언은 아버지와 형제들이 난간에 서 있는 모습,[7] 아버지가 다른 구명 보트를 찾기 위해 형제들을 데리고 떠나는 모습을 본 기억에 오랫동안 시달렸다.[5] 그녀는 배가 침몰하는 모습이 "거대한 건물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묘사했다.[3]

이 사고로 릴리언의 아버지 칼과 세 형제 필립, 클래런스, 칼 에드가는 모두 목숨을 잃었다. 릴리언과 어머니, 남동생 펠릭스는 침몰 다음 날인 4월 15일 오전 4시 직후 현장에 도착한 카르파티아 호에 의해 구조되었다. 릴리언과 남동생은 마대 자루에 담겨 배 갑판으로 옮겨졌다. 릴리언은 ''카르파티아 호''에서의 경험을 이렇게 기억했다.

> 한 여자가 내 옷을 다 벗겼다. 구명 보트에서 내 옷이 매우 더러워지고 젖었다. 어머니는 나를 찾으려고 애쓰셨다. 어머니는 '내 딸이 있어요!'라고 말씀하셨다. 결국 어머니는 나를 찾으셨다. 그리고 마침내 내 옷이 말랐고, 나는 다시 옷을 입었다. 그들은 우리, 아이들을 아픈 사람들을 데려가는 곳으로 데려갔다. 음, 아픈 사람, 하지만 조금 더 관심이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카르파티아 호''의 사람들은 우리에게 매우 잘 대해주었다."[3]

''카르파티아 호''는 4월 18일 뉴욕 시에 도착했고, 릴리언의 어머니는 릴리언과 남동생을 데리고 우스터로 돌아갔다.

사고 직후의 혼란 속에서 우스터 지역 신문은 처음에 애스플런드 부부와 클래런스, 릴리언, 펠릭스가 구조되었다고 잘못 보도하기도 했다.[8][9] 하지만 최종적으로 아버지 칼과 형 클래런스는 생존자 명단에 없음이 확인되었다.[10] 아버지 칼의 시신은 나중에 케이블 부설선 CS ''매케이-베넷''에 의해 수습되었는데,[12] 그의 시계는 배가 완전히 침몰하기 1분 전인 오전 2시 19분에 멈춰 있었다.[11] 칼 애스플런드의 시신은 우스터의 모든 신앙 묘지에 안장되었다. 가족의 저축과 소지품이 이 재난으로 인해 손실되었기 때문에 우스터 시에서 기금 모금 행사와 자선 행사를 개최하여 2,000달러를 모금했다.[12]

3. 3. 구조

릴리언과 어머니 셀마 애스플런드, 남동생 펠릭스는 타이타닉 호 침몰 사고 현장에 1912년 4월 15일 오전 4시 직후 도착한 ''카르파티아 호''에 의해 구조되었다.[3][12] 릴리언과 남동생은 구조 과정에서 마대 자루에 담겨 배 갑판으로 끌어 올려졌다.[3] 릴리언은 ''카르파티아 호''에서의 경험을 회상하며, 구명보트에서 더러워지고 젖은 옷을 벗고 다른 옷으로 갈아입었던 기억과, 어머니가 자신을 찾아다녔던 일, 그리고 ''카르파티아 호'' 승무원들이 아이들을 잘 보살펴 주었던 것을 이야기했다.

> 한 여자가 내 옷을 다 벗겼다. 구명 보트에서 내 옷이 매우 더러워지고 젖었다. 어머니는 나를 찾으려고 애쓰셨다. 어머니는 '내 딸이 있어요!'라고 말씀하셨다. 결국 어머니는 나를 찾으셨다. 그리고 마침내 내 옷이 말랐고, 나는 다시 옷을 입었다. 그들은 우리, 아이들을 아픈 사람들을 데려가는 곳으로 데려갔다. 음, 아픈 사람, 하지만 조금 더 관심이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카르파티아 호''의 사람들은 우리에게 매우 잘 대해주었다."[3]

''카르파티아 호''는 생존자들을 태우고 4월 18일 뉴욕 시에 도착했다. 릴리언의 어머니는 릴리언과 남동생을 데리고 곧바로 매사추세츠주 우스터로 돌아갔다.[12]

사고 직후의 혼란 속에서, 우스터 지역 신문은 처음에 애스플런드 부부와 아들 클래런스가 릴리언, 펠릭스와 함께 구조되었다고 잘못 보도하기도 했다.[8][9] 그러나 나중에 릴리언의 아버지 칼과 세 오빠 필립, 클래런스, 칼 에드가는 생존자 명단에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어 사망한 것으로 최종적으로 밝혀졌다.[10] 아버지 칼 애스플런드의 시신은 이후 케이블 부설선 CS ''매케이-베넷'' 호에 의해 수습되었다.[12] 그의 시신에서 발견된 회중시계는 타이타닉 호가 완전히 침몰하기 1분 전인 오전 2시 19분에 멈춰 있었다.[11] 칼 애스플런드는 우스터의 모든 신앙 묘지(All Faiths Cemetery)에 안장되었다.[12] 애스플런드 가족은 사고로 모든 저축과 소지품을 잃었지만, 우스터 시에서 열린 기금 모금 행사와 자선 활동을 통해 약 2000USD의 지원금을 받았다.[12]

3. 4. 사고 이후

릴리언의 아버지 칼과 세 형제 필립, 클래런스, 칼 에드가는 모두 침몰 사고로 사망했다. 릴리언과 어머니, 남동생 펠릭스는 오전 4시 직후 현장에 도착한 카르파티아 호에 의해 구조되었다. 릴리언과 남동생은 마대 자루에 담겨 배 갑판으로 끌어 올려졌다. 릴리언은 ''카르파티아 호''에서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한 여자가 내 옷을 다 벗겼다. 구명 보트에서 내 옷이 매우 더러워지고 젖었다. 어머니는 나를 찾으려고 애쓰셨다. 어머니는 '내 딸이 있어요!'라고 말씀하셨다. 결국 어머니는 나를 찾으셨다. 그리고 마침내 내 옷이 말랐고, 나는 다시 옷을 입었다. 그들은 우리, 아이들을 아픈 사람들을 데려가는 곳으로 데려갔다. 음, 아픈 사람, 하지만 조금 더 관심이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카르파티아 호''의 사람들은 우리에게 매우 잘 대해주었다."[3]


''카르파티아 호''는 4월 18일 뉴욕 시에 도착했다. 릴리언의 어머니는 릴리언과 남동생을 그 직후에 매사추세츠주 우스터로 데려갔다.

참사 후 혼란 속에서 우스터 지역 신문은 애스플런드 부부가 클래런스, 릴리언, 펠릭스와 함께 구조되었고, 필립과 칼은 익사했다고 잘못 보도하기도 했다.[8] 나중 보도에서는 애스플런드 부인과 "두 아이"가 지역 병원으로 옮겨졌다고 전했으며,[9] 최종적으로 릴리언의 아버지와 형 클래런스가 생존자 명단에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10] 아버지 칼 애스플런드의 시신은 CS ''매케이-베넷'' 호에 의해 수습되었다.[12] 그의 시신에서 발견된 시계는 배가 완전히 침몰하기 1분 전인 오전 2시 19분에 멈춰 있었다.[11] 그는 이후 우스터의 모든 신앙 묘지(All Faiths Cemetery)에 안장되었다. 사고로 가족의 저축과 소지품 대부분을 잃었기 때문에, 우스터 시에서는 기금 모금 행사와 자선 활동을 통해 2000USD를 모아 가족을 도왔다.[12]

사고 이후 릴리언은 미국에서 보험 회사 사무원으로 일했지만, 어머니 셀마를 간호하기 위해 조기 퇴직했다. 어머니 셀마는 1964년 4월 15일 90세로, 남동생 펠릭스는 1983년 3월 15일 73세로 사망했다. 릴리언은 2002년 위니프레드 퀵이 사망한 후 "미국인 마지막 생존자", "사고 현장을 기억하는 마지막 생존자"로 알려졌으나, 본인은 평생 공적인 자리에 나서거나 사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렸다. 그녀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으며, 2006년 9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릴리언은 우스터의 묘지에 먼저 세상을 떠난 아버지(사고 후 시신 수습), 어머니, 남동생과 함께 묻혔다.

4. 이후 생애

릴리언의 어머니 셀마는 남편과 세 아들을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에서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 참사에 대해 누구와도 이야기하기를 거부했다. 릴리언 역시 어머니의 생각에 동의하여 평생 동안 사고에 대해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의 변호사에 따르면, 돈을 제시하며 인터뷰를 요청하는 제안에도 릴리언은 "왜 내가 ''타이타닉''에서 돈을 받으려 하겠어요? 내가 무엇을 잃었는지 보세요. 아버지와 세 형제들을."이라고 말하며 거절했다고 한다.[6]

릴리언은 매사추세츠주 우스터 지역에서 보험 회사 사무원으로 일했으며,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일찍 은퇴했다.[13] 어머니 셀마는 1964년 4월 15일, 타이타닉호 침몰 52주년이 되는 날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12] 릴리언과 함께 살았던 남동생 펠릭스는 결혼하지 않았으며, 1983년 3월 15일 폐렴으로 73세에 사망했다.[12]

릴리언은 평생 독신으로 지냈으며, 공적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거나 사고 경험을 이야기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2002년 위니프레드 퀵이 사망한 후, 릴리언은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의 "미국인 마지막 생존자"이자 "사고 현장을 기억하는 마지막 생존자"로 알려졌다. 그녀는 2006년 99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우스터의 묘지에 아버지(사고 후 시신이 수습됨)를 포함한 가족들과 함께 묻혔다.

5. 사망

릴리언은 2006년 5월 6일, 99세의 나이로 매사추세츠주 슈루즈베리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녀는 아버지, 어머니, 오빠와 함께 우스터의 올드 스웨덴 묘지에 묻혔다. 그녀의 사망으로 바바라 웨스트와 밀비나 딘만이 ''타이타닉'' 생존자 중 마지막 두 명이 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당시 1세 미만이었기에 침몰 사고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었다.

릴리언은 2002년 위니프레드 반 톤가루(Jane Quick)가 사망한 후 "사고 현장을 기억하는 마지막 생존자"로 불렸으며,[7] 그녀의 죽음과 함께 RMS ''타이타닉''에 대한 생생한 증언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릴리언은 동생 펠릭스와 함께 평생 독신으로 지냈으며, 공적인 자리에 나오거나 사고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릴리언의 사망 후, 그녀가 오랫동안 소유했던 증기선 티켓은 2009년 경매에 부쳐졌다.[1] 이는 배가 침몰하기 직전인 2시 19분에 멈춘 그녀 아버지의 회중시계와 같이, 사후에 안전 금고에서 발견된 재난 관련 문서 및 물품 중 일부였다.[7]

6. 유산

릴리언 애스플런드는 2006년 5월 6일, 99세의 나이로 매사추세츠주 슈루즈베리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녀는 아버지, 어머니, 오빠와 함께 우스터의 올드 스웨덴 묘지에 묻혔다.

그녀의 사망으로 타이타닉 생존자는 바바라 웨스트와 밀비나 딘 두 명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사고 당시 1세 미만이었기 때문에 침몰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따라서 릴리언은 타이타닉 참사를 직접 목격하고 기억하는 마지막 생존자였으며, 그녀의 죽음과 함께 타이타닉호에 대한 생생한 증언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릴리언은 평생 타이타닉 사고에 대해 공적인 자리에서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간직했던 유품들은 사후에 발견되어 타이타닉 역사의 일부로 남았다. 오랫동안 소유했던 타이타닉 증기선 티켓과 2시 19분에 멈춘 아버지의 회중시계 등은 그녀가 사망한 후 안전 금고에서 발견되었으며, 2009년 경매에 부쳐졌다.[1][7] 비록 침묵 속에 살았지만, 그녀의 존재와 기억은 타이타닉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참조

[1] 뉴스 Titanic ticket belonging to last U.S. survivor auctioned http://www.nydailyne[...] Daily News (New York) 2008-04-19
[2] 문서 Microfilm images from archives of UK-bound passenger lists, accessed through Ancestry.com
[3] 뉴스 The Last Witness https://www.washingt[...] 2010-05-07
[4] 웹사이트 Lillian Gertrud Asplund : Titanic Survivor https://www.encyclop[...] 2021-11-18
[5] 서적 Swedish American Genealogist: "Swedes on the Titanic: Some Glimpses" https://digitalcommo[...]
[6] 웹사이트 Survivor held memory of Titanic in her heart https://www.telegram[...] 2021-06-10
[7] 뉴스 Titanic survivor's secrets revealed https://www.telegrap[...] 2018-10-06
[8] 웹사이트 Two of the Asplund Children are Lost http://www.encyclope[...] 2007-04-14
[9] 웹사이트 Mrs Asplund and children safe in hospital at N.Y. http://www.encyclope[...] 2007-04-14
[10] 웹사이트 Four of the Asplunds are Titanic Victims http://www.encyclope[...] 2007-04-14
[11] 뉴스 The Titanic: A Survivor's Keepsakes https://www.wsj.com/[...] 2021-08-20
[12] 뉴스 Lillian Asplund, 99; Last U.S. Survivor of Titanic's Sinking https://www.latimes.[...] 2018-10-06
[13] 뉴스 Lillian Gertrud Asplund, 99, Who Survived the Titanic's Sinking, Is Dead https://www.nytimes.[...] 2018-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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