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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 데 에스파냐 왕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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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 데 에스파냐 왕녀는 1726년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의 딸로 태어났다. 프랑스의 루이 15세의 사촌이자, 루이 15세의 아들 루이 페르디낭의 부인이 되어 마리 테레즈 라파엘로 불렸다. 1745년 루이 페르디낭과 결혼하여 프랑스 왕실의 일원이 되었으나, 1746년 딸 마리 테레즈를 낳은 후 3일 만에 사망했다. 루이 페르디낭은 그녀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여, 훗날 자신의 심장을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의 묘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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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1726년 마드리드의 왕궁에서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와 그의 두 번째 왕비 이사벨 디 파르네시오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펠리페 5세는 프랑스루이 14세의 손자였기에,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와는 사촌 관계였으며, 루이 15세의 아들 도팽 루이 페르디낭과는 종질(오촌 조카) 관계였다.

당시 악화된 스페인과 프랑스 왕실 관계 개선을 위해 정략결혼이 추진되었다. 마리아 테레사는 1745년 2월 23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프랑스의 도팽 루이 페르디낭과 결혼하여 도팽비(Dauphine)가 되었으며, 프랑스에서는 '마리 테레즈 라파엘'로 불렸다.

내성적인 성격이었으나 남편 루이 페르디낭과는 사이가 좋았다. 1746년 7월 19일 딸 마리 테레즈를 낳았으나, 난산으로 인한 산후 합병증으로 사흘 뒤인 7월 22일 사망하였다. 짧은 결혼 생활이었지만 그녀의 죽음은 남편 루이 페르디낭에게 깊은 슬픔을 안겼다. 루이 페르디낭은 이후 작센 공녀 마리아 요제파와 재혼했지만, 평생 첫 아내 마리아 테레사를 잊지 못했고, 훗날 자신이 죽으면 심장을 그녀의 묘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2. 1. 스페인 공주 시절

루이-미셸 반 로가 그린 어린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


1726년 마드리드 왕궁에서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와 그의 두 번째 왕비 이사벨 디 파르네시오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마리아 테레사 안토니아 라파엘라''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출생 신분에 따라 스페인의 공주(infanta de España|인판타 데 에스파냐es)였고 ''전하''라는 경칭을 받았다. 그녀는 보통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로 알려졌지만, 때로는 단순히 마리아 테레사로 불리기도 했다.

아버지 펠리페 5세는 프랑스루이 14세의 손자이자 루이 15세의 숙부였다. 이러한 혈연 관계로 마리아 테레사에게 루이 15세는 사촌오빠였으며, 그의 아들인 도팽 루이 페르디낭은 종질 관계였다.

마리아 테레사가 태어나기 전인 1725년, 스페인과 프랑스 왕실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루이 15세가 마리아 테레사의 언니인 인판타 마리아나 빅토리아와의 약혼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스페인으로 돌려보낸 사건 때문이었다. 이 일로 스페인 왕실은 프랑스에 큰 모욕감을 느꼈다. 루이 15세는 대신 마리 레슈친스카와 결혼하여 도팽 루이를 낳았다.

같은 부르봉 왕가의 혈통을 잇는 두 왕실의 관계 개선을 위해 새로운 정략결혼이 추진되었다. 1739년 8월, 마리아 테레사의 오빠인 인판테 펠리페와 루이 15세의 딸이자 도팽 루이 페르디낭의 누나인 프랑스의 루이즈 엘리자베트 공주의 결혼이 발표되었다. 같은 해, 마리아 테레사와 그녀보다 세 살 어린 도팽 루이 페르디낭과의 결혼 또한 발표되었다. 이 결혼은 두 부르봉 왕가의 관계 회복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그러나 어머니 이사벨 디 파르네시오의 영향으로, 마리아 테레사는 좀 더 성숙한 나이가 될 때까지 프랑스로 가지는 않았다.

2. 2. 프랑스 도팽비 시절

1745년경 다니엘 클라인 2세의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 초상화


마리아 테레사의 아버지 펠리페 5세프랑스루이 14세의 손자이자 루이 15세의 숙부였다. 따라서 마리아 테레사에게 루이 15세는 사촌오빠였고, 그의 아들인 도팽 루이 페르디낭은 종질(오촌 조카) 관계였다. 과거 마리아 테레사의 언니 마리아나 빅토리아가 루이 15세의 왕비 후보였으나 프랑스 측에서 일방적으로 혼담을 파기하고 그녀를 스페인으로 돌려보낸 사건 때문에, 당시 스페인과 프랑스 양국 왕실의 사이는 매우 좋지 않았다. 같은 부르봉 왕가 혈통을 잇는 두 왕가의 관계 개선을 위해 새로운 혼담이 추진되었다. 마리아 테레사의 오빠 펠리페와 루이 페르디낭의 누나 엘리사베타가 먼저 결혼했고, 이어서 마리아 테레사와 그녀보다 세 살 어린 루이 페르디낭의 결혼이 결정되었다.

1744년 12월 18일, 마리아 테레사는 마드리드에서 대리 결혼 방식으로 루이 페르디낭과 결혼식을 올렸고, 1745년 1월 스페인을 떠나 프랑스로 향했다. 1745년 2월 21일 베르사유 궁전에 도착했으며, 이틀 뒤인 2월 23일 로앙 추기경의 집전 하에 공식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프랑스에서는 '마리 테레즈 라파엘'로 불렸으며, 마담 라 도핀(Madame la Dauphine)이라는 칭호를 얻어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 다음으로 프랑스 왕국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여성이 되었다. 그녀는 1712년 사보이의 마리 아델라이드 공녀 사망 이후 프랑스의 첫 번째 도팽비였다.

결혼 다음 날인 2월 24일에는 신혼부부를 위한 성대한 이 나무 연회가 열렸다. 이 연회는 루이 15세의 총애하는 정부(情婦)가 될 퐁파두르 부인이 베르사유에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계기가 되기도 했다. 연회에는 국왕 부부, 마담 앙리에트, 마담 아델라이드, 샤르트르 공작 부인, 콩티의 루이즈 엘리자베스 공주, 모데나 공작 부인 등 여러 왕족이 참석했다.

결혼 생활 초기에는 첫날 밤 합방이 이루어지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고, 이는 젊은 도팽비에게 당혹감을 안겨주며 궁정 내 입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1745년 9월 마침내 부부 관계가 성사되면서 이러한 소문은 가라앉았다. 마리아 테레사는 내성적인 성격 탓에 화려한 궁정 사교계에 잘 어울리지 못하고 유흥에 참여하기보다는 조용히 지내는 것을 선호했지만, 남편 루이 페르디낭과는 매우 깊은 사랑에 빠져 서로에게 헌신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녀는 아름답고 위엄 있으며 교양 있는 인물로 평가받았으나, 붉은 머리 때문에 일부 부정적인 시선을 받기도 했다. 국왕 루이 15세왕비 마리 레슈친스카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국왕의 총애를 받던 퐁파두르 부인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냈다. 마리아 테레사와 루이 페르디낭 부부는 퐁파두르 부인이 왕비에게 향해야 할 관심을 빼앗는다고 여겨 그녀를 매우 싫어했다. 이는 퐁파두르 부인에게 빠져 있던 루이 15세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1746년 7월 19일, 마리아 테레사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딸 마리 테레즈를 낳았다. 그러나 출산 과정이 순탄치 않았고(난산) 탓에 난산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고, 출산 사흘 뒤인 7월 22일 세상을 떠났다. 공교롭게도 그녀의 아버지 펠리페 5세 역시 불과 13일 전인 7월 9일에 사망한 뒤였다. 아내의 죽음은 남편 루이 페르디낭에게 엄청난 충격과 슬픔을 안겨주었다. 루이 15세는 슬픔에 잠긴 아들을 아내의 임종 자리에서 억지로 떼어내야 할 정도였다. 루이 페르디낭은 이후 작센 공녀 마리아 요제파와 재혼했지만, 첫 아내를 잃은 슬픔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마리아 테레사의 딸 마리 테레즈는 '마담 루아얄' 칭호를 받았으나, 안타깝게도 1748년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마리아 테레사는 1746년 8월 6일 파리 근교의 프랑스 왕실 묘지인 생 드니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녀가 사망하자 이복 오빠인 스페인의 페르디난트 6세는 자신의 여동생 스페인의 마리아 안토니아 페르난다를 루이 페르디낭의 다음 아내로 제안했지만, 루이 15세는 이를 거절했다. 훗날 1765년 루이 페르디낭은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심장을 첫 번째 아내 마리아 테레사의 무덤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2. 3. 죽음

1746년 7월 19일,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딸 마리 테레즈를 낳았다. 그러나 출산 과정에서의 난산으로 인해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고, 결국 출산 사흘 뒤인 7월 22일에 산후 합병증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죽음은 남편 도팽 루이 페르디낭에게 크나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루이 15세는 슬픔에 잠긴 아들을 아내의 임종 자리에서 억지로 떼어놓아야 할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가 사망하기 불과 13일 전인 7월 9일에는 그녀의 아버지인 스페인의 펠리페 5세 국왕이 사망하기도 했다.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의 딸은 '마리 테레즈'로 세례를 받았고, 마담 로얄이라는 칭호를 얻었으나, 안타깝게도 1748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는 1746년 8월 6일 파리 외곽의 프랑스 왕실 묘지인 생 드니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녀가 죽자, 그녀의 이복 오빠인 스페인의 페르디난트 6세는 도팽 루이 페르디낭에게 자신의 여동생인 스페인의 마리아 안토니아 페르난다와의 재혼을 제안했으나, 루이 15세는 이를 거절했다.

이듬해, 도팽 루이 페르디낭은 폴란드의 아우구스투스 3세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요제파의 딸인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 공주와 재혼했다. 마리아 요제파와의 사이에서는 훗날 루이 16세가 되는 아들을 포함하여 일곱 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루이 페르디낭은 첫 번째 아내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를 잊지 못했고, 1765년 자신이 사망할 때 자신의 심장을 그녀의 무덤 옆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3. 자녀


  • 마리 테레즈 (1746년 7월 19일 ~ 1748년 4월 27일)[2]

4. 가계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 데 에스파냐 왕녀의 가계'''[1]
세대번호이름비고
부모2펠리페 5세아버지
3엘리자베타 파르네세어머니
조부모4루이, 프랑스의 도팽친할아버지
5마리아 안나 빅토리아친할머니
6오도아르도 파르네세, 파르마 세습 공작외할아버지
7도르테아 소피 폰 데어 팔츠외할머니
증조부모8루이 14세증조부 (친가)
9마리아 테레사증조모 (친가)
10페르디난트 마리아, 바이에른 선제후증조부 (친가)
11앙리에트 아델라이드 드 사부아증조모 (친가)
12라누초 2세 파르네세증조부 (외가)
13이사벨라 데스테증조모 (외가)
14필리프 빌헬름, 팔츠 선제후증조부 (외가)
15엘리자베트 아말리에 폰 헤센다름슈타트증조모 (외가)
고조부모16루이 13세고조부 (친가)
17오스트리아의 안고조모 (친가)
18펠리페 4세고조부 (친가)
19엘리자베트고조모 (친가)
20막시밀리안 1세, 바이에른 선제후고조부 (친가)
21마리아 안나고조모 (친가)
22비토리오 아메데오 1세, 사보이 공작고조부 (친가)
23크리스틴 마리 드 프랑스고조모 (친가)
24오도아르도 파르네세고조부 (외가)
25마르게리타 데 메디치고조모 (외가)
26프란체스코 1세 데스테고조부 (외가)
27마리아 카테리나 파르네세고조모 (외가)
28볼프강 빌헬름, 팔츠 선제후고조부 (외가)
29마달레나고조모 (외가)
30게오르크 2세, 헤센다름슈타트 방백고조부 (외가)
31작센의 조피 엘레오노레고조모 (외가)


참조

[1] 서적 Genealogie ascendante jusqu'au quatrieme degre inclusivement de tous les Rois et Princes de maisons souveraines de l'Europe actuellement vivans https://books.google[...] Frederic Guillaume Birnstiel
[2] 서적 Le fils de Louis XV, Louis, dauphin de France, 1729-1765 E. Plon 1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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