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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투리아스 공 카를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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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스투리아스 공 카를로스는 펠리페 2세와 포르투갈의 마리아 마누엘라의 아들로, 23세에 사망했다. 그는 어머니가 일찍 사망하여 어머니의 보살핌 없이 자랐으며, 언어 발달이 늦고 신체적, 정신적인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1568년 아버지 펠리페 2세에 의해 감금되었고, 갇힌 채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그의 삶은 실러의 희곡과 베르디의 오페라 등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으며, 반(反)스페인 선전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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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투리아스 공 카를로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알론소 산체스 코엘로의 초상화, 1564년
알론소 산체스 코엘로의 초상화, 1564년
칭호아스투리아스 공
출생일1545년 7월 8일
출생지스페인바야돌리드
사망일1568년 7월 24일
사망지스페인마드리드
매장지엘 에스코리알
가문합스부르크 가문
아버지펠리페 2세
어머니마리아 마누엘라 데 포르투갈

2. 생애

젊은 돈 카를로스 데 아우스트리아


펠리페 2세포르투갈의 마리아 마누엘라의 아들로 태어난 카를로스는 23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르지 못한 채 죽었다. 어머니 마리아 마누엘라는 카를로스가 태어난 지 나흘 만에 사망했기 때문에 그는 어머니 없이 자랐다. 카를로스는 말을 늦게 배웠고 성인이 되어서도 말을 더듬었다. 알론소 산체스 코엘로가 그린 카를로스의 초상화를 보면, 그는 다리 길이의 불균형과 척추 전만증을 가지고 태어나 어깨와 자세가 비대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2] 그의 신체적 기형과 행동 문제는 합스부르크 가문과 아비스 가문의 근친 교배의 결과로 여겨진다.[3]

카를로스는 어릴 때부터 폭력적인 행동을 보였고, 하인과 동물들에게 자주 공격성을 드러냈다. 베네치아 대사 지롤라모 소란조는 카를로스가 "추하고 혐오스럽다"고 생각했다.[9] 또 다른 베네치아인 파올로 티에폴로는 "그[카를로스 왕자]는 공부도, 운동도 하고 싶어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고 싶어했다"고 썼다.[10]

1564년 카를로스는 국가 자문회의의 일원이 되어 국정에 관여하기 시작했지만, 같은 해에 펠리페 2세는 알바 공작에게 아들이 "판단력뿐 아니라 이해력, 인격에 있어서도 정상 수준에 비해 떨어져 있다"라고 말했다.

펠리페 2세는 평생 네 번 결혼했는데, 세 번째 부인인 프랑스 공주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는 본래 카를로스와 혼담이 오갔던 상대였다. 카를로스는 동갑내기 의붓어머니에게 호감을 가졌고 펠리페 2세는 아들을 의심하기 시작했으나, 둘 사이에 부정한 관계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오스트리아의 아나의 아버지 막시밀리안 2세가 결혼 협상을 재촉하자 펠리페 2세는 아들의 성장이 또래에 비해 늦다는 것을 이유로 결혼을 몇 번이나 늦추었다. 결국 안나는 펠리페 2세의 네 번째 부인이 되었다.

펠리페 2세와 카를로스의 사이는 점점 나빠졌고, 카를로스는 아버지에게 위해를 입을까 두려워 방문을 안에서 잠글 수 있는 자물쇠를 만들게 했다. 또 베개 밑에 칼과 소총 등 무기를 숨겨놓기도 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그는 스페인을 탈출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아들이 외국으로 도망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된 펠리페 2세는 1568년 1월 18일 카를로스의 무기를 빼앗고 그의 방 창문에 못질을 해서 감금시켰다. 펠리페 2세는 왕위 계승자를 구금한 이유에 대해 왕자의 천성적인 결함과 자질 때문이라고 발표했고, 교황에게도 왕자의 생각에 결함이 많고 자질이 모자라 구금했다고 편지를 보냈다. 카를로스는 자신의 방에 감금당한 채 의문의 죽음을 맞았고, 몇 달 후 엘리자베트 또한 죽었다.

돈 카를로스 데 아우스트리아와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의 이야기는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스》 및 실러의 희곡 《돈 카를로스》 등의 모티브가 되었다.

2. 1. 출생과 유년기

스페인 펠리페 2세와 포르투갈의 마리아 마누엘라 공주의 아들로 1545년 7월 8일 바야돌리드에서 태어났다.[1] 카를로스의 아버지 펠리페 2세와 어머니 마리아 마누엘라는 사촌간 결혼으로 태어났다. 카를로스의 어머니는 아들을 낳은 후 출혈로 인해 출산 4일 만에 사망했다.[1]

카를로스는 어머니 없이 자랐으며, 다리 길이의 불균형과 척추 전만증을 가지고 태어나 어깨와 자세가 비대칭이었다.[2] 그의 신체적 기형과 행동 문제는 합스부르크 가문과 아비스 가문의 근친 교배의 결과로 여겨진다.[3] 카를로스는 일반적인 8명이 아닌 4명의 증조부모만을 가지고 있었으며,[5] 그의 부모는 25%의 동일한 혈연 관계 계수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그들이 이복 형제나 자매와 같은 관계였음을 의미한다. 그는 또한 최대 16명이 아닌 6명의 고조부모만을 가지고 있었다.[5]

어머니가 사망한 후, 카를로스는 1548년과 1552년에 각각 결혼할 때까지 아버지의 고모인 마리아와 후아나의 손에서 자랐다. 펠리페 2세는 오랫동안 해외에 있었고, 후아나가 떠난 후 카를로스는 뚜렷한 애정 결핍을 겪었다.[6] 궁정 신하 가미즈에 따르면, 카를로스는 버릇없고 짜증을 잘 냈다.

카를로스는 어릴 때부터 폭력적인 행동을 보였고, 하인과 동물들에게 자주 공격성을 드러냈다. 그는 한때 마음에 안 든다고 구두 제조공에게 신발을 먹이려 했다고 한다. 베네치아 대사 지롤라모 소란조는 카를로스가 "추하고 혐오스럽다"고 생각했다.[9] 또 다른 베네치아인 파올로 티에폴로는 "그[카를로스 왕자]는 공부도, 운동도 하고 싶어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고 싶어했다"고 썼다.[10]

1556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는 퇴위하고 스페인 남부의 유스테 수도원으로 은퇴했으며, 그의 제국의 스페인 영토를 카를로스의 아버지 펠리페에게 넘겨주었다. 유스테로 가는 길에 황제는 바야돌리드에 들러 손자를 만났다. 카를로스는 무모하고 버릇없는 사람으로 여겨져 좋지 않은 인상을 남겼다.

1559년, 카를로스는 프랑스 국왕 앙리 2세의 장녀인 발루아의 엘리자베스와 약혼했다.[12] 그러나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의 화해를 서두르기 위해 엘리자베스는 대신 펠리페와 결혼했다.[13] 그 후 왕세자를 위한 세 명의 다른 신부가 제안되었다: 스코틀랜드의 메리;[14] 발루아의 마르가리타, 프랑스 앙리 2세의 막내 딸;[15]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안나. 1564년에 카를로스가 안나와 결혼하기로 합의했지만,[16] 결혼은 펠리페에 의해 계속 연기되었다. 안나는 나중에 펠리페의 네 번째 아내가 되었다.[17]

1560년부터 카를로스는 재발성 열병을 앓았는데, 이는 말라리아로 인한 것으로 의심되었다.[18] 건강을 위해 궁정 의사들은 왕세자를 알칼라 데 에나레스로 옮길 것을 권했다. 1561년 펠리페는 카를로스가 삼촌인 오스트리아의 후안, 사촌인 파르마 공 알렉산데르 파르네세와 함께 알칼라 데 에나레스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도록 조치했다.[19]

2. 2. 교육과 초기 정치 참여

펠리페 2세포르투갈의 마리아 마누엘라의 아들 카를로스는 어머니 없이 자랐으며, 말을 늦게 배웠고 성인이 되어서도 말을 더듬었다.[6] 카를로스는 정서적으로 결핍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 펠리페 2세는 오랫동안 해외에 있었고, 후아나가 떠난 후 카를로스는 애정 결핍을 겪었다. 궁정 신하 가미즈에 따르면, 카를로스는 버릇없고 짜증을 잘 냈다.[7]

카를로스는 어릴 때부터 폭력적인 행동을 보였고, 하인과 동물들에게 공격성을 드러냈다. 그는 마음에 안 든다고 구두 제조공에게 신발을 먹이려 했다고 한다. 그의 행동은 궁정에서 악명을 얻었고, 외국 대사들의 주목을 받았다.[8] 베네치아 대사 지롤라모 소란조는 카를로스가 "추하고 혐오스럽다"고 생각했다.[9] 또 다른 베네치아인 파올로 티에폴로는 "그[카를로스 왕자]는 공부도, 운동도 하고 싶어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고 싶어했다"고 썼다.[10]

1564년, 카를로스는 국가 자문회의의 일원이 되어 국정에 관여하기 시작했지만, 같은 해 펠리페 2세는 알바 공작에게 아들이 "판단력뿐 아니라 이해력, 인격에 있어서도 정상 수준에 비해 떨어져 있다"라고 말했다.

1560년부터 카를로스는 말라리아로 의심되는 재발성 열병을 앓았다.[18] 건강을 위해 궁정 의사들은 왕세자를 알칼라 데 에나레스로 옮길 것을 권했다. 1561년, 펠리페는 카를로스가 삼촌 오스트리아의 후안, 사촌 파르마 공 알렉산데르 파르네세와 함께 알칼라 데 에나레스 대학교에서 교육받도록 조치했다.[19]

15세의 카를로스는 1560년 카스티야 왕위 계승자로 인정받았으며,[20] 3년 후 아라곤 왕국 왕위 계승자로도 인정받았다. 그는 세바스티앙 국왕의 부계 사촌으로서 포르투갈 왕위 계승자였다.[21] 그는 국무회의(외교 문제 담당)에 종종 참석했고, 저지대 국가를 통치하던 고모 파르마의 마르가리타와 서신을 주고받았다.

1562년 4월, 카를로스는 알칼라 대학교에서 계단에서 떨어져 심각한 머리 부상을 입었다.[22] 처음에는 위협적이지 않았지만, 10일 이내에 망상과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펠리페는 다양한 치료법을 찾고, 의사와 상담했으며, 디에고 데 알칼라의 유물을 왕자 침대 옆에 놓았다.[18] 5월 말, 카를로스 상태는 호전되었다. 펠리페는 프란체스코회 시체의 기적적인 힘을 믿었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의 두개골 천공술 또는 무어인 의사의 연고 사용으로 회복된 것으로 본다.[23] 회복 후, 카를로스는 더욱 난폭해졌고, 기질은 불안정해졌으며 행동은 예측 불가능해졌다.

2. 3. 신체적, 정신적 문제와 1562년의 사고

펠리페 2세 국왕과 포르투갈의 마리아 마누엘라 왕비의 아들로 태어난 카를로스는 어릴 때부터 폭력적인 행동을 보였고, 하인과 동물들에게 자주 공격성을 드러냈다.[8] 베네치아 대사 지롤라모 소란조는 카를로스가 "추하고 혐오스럽다"고 생각했으며,[9] 또 다른 베네치아인 파올로 티에폴로는 "그[카를로스 왕자]는 공부도, 운동도 하고 싶어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고 싶어했다"고 기록했다.[10]

1560년부터 카를로스는 재발성 열병을 앓았는데, 이는 말라리아로 인한 것으로 의심되었다.[18] 1561년 펠리페는 카를로스가 오스트리아의 후안, 파르마 공 알렉산데르 파르네세와 함께 알칼라 데 에나레스 대학교에서 교육을 받도록 조치했다.[19]

요리스 반 데르 스트라텐이 그린 돈 카를로스 초상화


1562년 4월, 알칼라 대학교에 있던 카를로스는 계단에서 떨어져 심각한 머리 부상을 입었다.[22] 처음에는 위협적이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지만, 그의 상태는 빠르게 악화되었고, 10일 이내에 그는 망상과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아들의 생명을 두려워한 필리페는 다양한 치료법을 찾고, 수많은 의사와 상담했으며, 왕자의 침대 옆에 디에고 데 알칼라의 유물을 놓는 데 의지했다.[18] 5월 말에 이르러 카를로스의 상태는 호전되기 시작했다. 필리페는 프란체스코회 시체의 기적적인 힘을 믿었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왕자의 회복을 해부학자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가 시행한 두개골 천공술 또는 무어인 의사의 연고 사용으로 돌린다.[23] 회복 후 카를로스는 더욱 난폭해지고, 그의 기질은 더욱 불안정해졌으며 행동은 예측 불가능해졌다. 그가 지적 장애가 있었는지, 아니면 1562년의 뇌 손상으로 지적 능력이 손상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11]

2. 4. 결혼 협상과 좌절

펠리페 2세포르투갈의 마리아 마누엘라의 아들로 태어난 카를로스는 23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르지 못한 채 죽었다. 카를로스는 어릴 때부터 폭력적인 행동을 보였고, 하인과 동물들에게 자주 공격성을 드러냈다.[8] 베네치아 대사 지롤라모 소란조는 카를로스가 "추하고 혐오스럽다"고 생각했다.[9] 또 다른 베네치아인 파올로 티에폴로는 "그[카를로스 왕자]는 공부도, 운동도 하고 싶어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고 싶어했다"고 썼다.[10]

1559년, 카를로스는 프랑스 국왕 앙리 2세의 장녀인 발루아의 엘리자베스와 약혼했다.[12] 그러나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의 화해를 서두르기 위해 엘리자베스는 대신 펠리페 2세와 결혼했다.[13] 그 후 카를로스의 신부 후보로 메리 스튜어트,[14] 프랑스 앙리 2세의 막내 딸 발루아의 마르가리타,[15]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와 펠리페 2세의 누이 마리아의 딸인 오스트리아의 안나가 제안되었다.[16] 1564년에 카를로스와 안나의 결혼이 합의되었지만, 펠리페 2세에 의해 계속 연기되어 카를로스는 매우 좌절했다. 안나는 나중에 펠리페 2세의 네 번째 아내가 되었다.[17]

카를로스는 아버지에게 위해를 입을까 두려워 방문을 안에서 잠글 수 있는 자물쇠를 만들게 했다. 또 베개 밑에 칼과 소총 등 무기를 숨겨놓기도 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그는 스페인을 탈출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아들이 외국으로 도망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된 펠리페 2세는 1568년 1월 18일 카를로스의 무기를 빼앗고 그의 방 창문에 못질을 해서 감금시켰다.

2. 5. 펠리페 2세와의 갈등과 감금

펠리페 2세포르투갈의 마리아 마누엘라의 아들로 태어난 카를로스는 어머니 없이 자랐으며, 말을 더듬는 등 성장 과정에 어려움을 겪었다. 아버지 펠리페 2세는 아들을 의심하여 여러 차례 혼담을 미루었고, 카를로스는 국가 자문회의에 참여했지만 "판단력뿐 아니라 이해력, 인격에 있어서도 정상 수준에 비해 떨어져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24]

펠리페 2세와 카를로스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카를로스는 아버지에게 위해를 입을까 두려워 방문을 잠그고 무기를 숨기기도 했다. 그는 스페인을 탈출하려는 계획까지 세웠으나, 1568년 1월 18일 펠리페 2세는 카를로스를 감금하고 왕위 계승자를 구금한 이유에 대해 왕자의 천성적인 결함과 자질 때문이라고 발표했다.[29][30] 카를로스는 감금된 채 의문의 죽음을 맞았고, 몇 달 후 의붓어머니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도 사망했다. 이들의 이야기는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스》와 실러의 희곡 《돈 카를로스》의 모티브가 되었다.

카를로스는 에그몽 백작 라모랄과 몽모렌시의 플로리스 등 저지대 국가에서 필리페 2세에 대항하는 반란 지도자들과 접촉했다는 주장이 있지만,[25]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이 주장을 일축했다.[26] 1567년, 카를로스는 정서적 불안정을 보였고, 아버지에게 권한을 부여받지 못하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27] 펠리페 2세는 카를로스를 국무회의 의장으로 임명했지만, 카를로스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28]

1559년, 펠리페 2세는 카를로스에게 저지대 국가 통치를 약속했지만, 아들이 권력을 맡기에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알바 공작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에게 총독 자리를 주었다.[25] 분노한 카를로스는 공작을 공격하려 했지만 제지당했다.[30] 1567년 가을, 카를로스는 오스트리아의 후안에게 이탈리아로 데려가 달라고 요청하여 네덜란드로 도망치려 했으나, 펠리페 2세는 이를 거부했다.[31] 거절당한 후 카를로스는 후안을 쏘려고 시도했고, 이후 외부와의 접촉 없이 방에 갇혔다. 1568년 1월, 펠리페 2세는 카를로스를 체포하고 그의 서류와 무기를 압수했다.[32] 카를로스는 자살을 위협했고, 1568년 7월 24일, 굶주림으로 추정되는 원인으로 사망했다.

펠리페 2세는 카를로스의 투옥을 정당화하려 했지만, 투명성 부족으로 인해 여러 추측을 불러일으켰다.[33] 그의 죽음은 스페인 흑색 선전의 핵심 요소로 사용되었고, 80년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34] 침묵하는 빌렘은 펠리페 2세가 카를로스를 독살했다고 주장했지만, 대부분의 증거는 자연사를 가리킨다.[35]

2. 6. 죽음

1568년 1월 18일, 아버지 펠리페 2세는 아들 카를로스가 외국으로 도망치려 한다는 것을 알고 그의 무기를 빼앗고 방 창문에 못질을 하여 감금했다.[31] 펠리페 2세는 왕위 계승자를 구금한 이유에 대해 왕자의 천성적인 결함과 자질 때문이라고 발표했고, 교황에게도 왕자의 생각에 결함이 많고 자질이 모자라 구금했다고 편지를 보냈다. 카를로스는 자신의 방에 감금당한 채 의문의 죽음을 맞았고,[34] 그로부터 몇 달 되지 않아 의붓어머니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 또한 죽었다.

펠리페 2세는 카를로스 공의 실제 위법 행위나 정신 상태를 밝히지 않고 투옥을 정당화하려 했으며,[31] 이러한 투명성 부족은 펠리페 2세의 적들이 광범위한 추측을 하게 만들었다.[32] 특히 카를로스 공이 개신교 신자라는 이유로 투옥되었다는 소문이 프랑스와 플랑드르에서 퍼졌으나, 대부분의 증거는 카를로스 공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음을 시사한다. 7월까지 카를로스 공은 단식 투쟁으로 "끔찍할 정도로 야윈" 상태가 되었다.[33] 1568년 7월 24일, 카를로스 공은 자신의 방에서 사망했는데, 아마도 굶주림의 결과였을 것이다.

그의 죽음은 네덜란드에서 스페인 흑색 선전의 핵심 요소 중 하나로 사용되었으며, 이는 국왕에 대한 반란을 정당화하는 데 필요했고, 그 결과 80년 전쟁이 일어났다. 이후 침묵하는 빌렘은 1581년 선전물인 ''변명''에서 펠리페 2세의 명령에 따라 카를로스가 독살되었다고 주장했다.[34] 독살설은 20세기까지 네덜란드에서 제작된 선전물에 근거하여 중부 및 북부 유럽 역사가들이 주장해 왔으며, 대부분의 스페인 및 이탈리아 역사가들은 증거와 문서가 자연사로 인한 사망을 가리킨다고 계속 주장했다.[35][18]

3. 사후의 평가와 유산

펠리페 2세는 카를로스 공의 위법 행위나 정신 상태를 밝히지 않고 투옥을 정당화하려 했으나, 이는 펠리페 2세의 적들에게 광범위한 추측을 불러일으켰다.[31][32] 카를로스 공이 개신교 신자라는 이유로 투옥되었다는 소문이 프랑스와 플랑드르에서 퍼졌지만, 대부분의 증거는 그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음을 보여준다.[32] 1568년 7월 24일, 카를로스 공은 굶주림으로 인해 자신의 방에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네덜란드에서 스페인 흑색 선전의 핵심 요소로 사용되어 국왕에 대한 반란을 정당화하고 80년 전쟁을 일으켰다. 침묵하는 빌렘은 1581년 ''변명''에서 펠리페 2세가 카를로스 공을 독살했다고 주장했다.[34] 독살설은 20세기까지 네덜란드 선전물에 기반하여 중부 및 북부 유럽 역사가들이 주장했지만, 스페인 및 이탈리아 역사가들은 자연사를 주장한다.[35][18]

아스투리아스 공작의 문장 (1560–1568).


펠리페 2세의 아들 감금 및 살해설은 영국에서 반(反)스페인 흑색선전[34][18]을 구축하는 데, 네덜란드, 독일, 중부 유럽에서는 이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36][37] 이는 프리드리히 실러의 1787년 비극 ''돈 카를로스, 스페인 공자''의 토대가 되었다.

실러는 프랑스 사제 세자르 비샤르 드 생-레알의 1672년 소설을 바탕으로 작품을 썼는데, 이는 영국 작가 토마스 오트웨이의 희곡 ''돈 카를로스, 스페인 공자''의 출처이기도 하다. 두 작품 모두 카를로스를 고귀하고 용감한 로맨틱 기사로 묘사한다. 그는 펠리페 2세의 아내 엘리자베스의 연인으로, 잔혹하고 독재적인 펠리페 2세와 스페인 궁정 세력에 맞서 자유와 사랑을 위해 싸우다 배신당한다.[38]

실러의 희곡은 주세페 베르디의 ''돈 카를로스''(1867)를 포함한 여러 오페라로 각색되었다. 베르디의 오페라는 오페라 레퍼토리의 주류이며 자주 공연되어 현대 관객에게 가장 익숙한 이야기 버전이다. 여기서 카를로스는 궁정 음모의 희생자로 동정적으로 묘사되며, 정신 불안정이나 폭력성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페드로 칼데론 데 라 바르카의 스페인 희곡 ''라 비다 에스 수에뇨''(''인생은 꿈'') (1635) 또한 아들을 감금한 왕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이 희곡은 돈 카를로스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신플라톤주의적 종교 성찰과 플라톤의 동굴에서 영감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39]

80년 전쟁 중 네덜란드로 도주하려다 체포, 감금되어 23세에 옥사했다는 점, 프랑스 앙리 2세의 딸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와 약혼했으나 펠리페 2세가 엘리자베트를 세 번째 왕비로 맞이했다는 점, 카를로스의 죽음 몇 달 후 엘리자베트가 사망했다는 점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실러의 희곡 『돈 카를로스』와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에서 엘리자베트에 대한 비련이라는 허구가 만들어져 비극적인 인물로 알려졌다.

4. 대중문화

펠리페 2세포르투갈의 마리아 마누엘라의 아들인 돈 카를로스 데 아우스트리아와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의 이야기는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스》 및 실러의 희곡 《돈 카를로스》 등의 모티브가 되었다.[34][18]

필리페 2세가 자신의 아들을 감금하고 살해했다는 생각은 영국에서 반(反)스페인 흑색선전을 구축하는 데 영향을 주었고, 네덜란드, 독일, 중부 유럽에서 이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36][37] 이러한 선전은 프리드리히 실러의 1787년 비극 ''돈 카를로스, 스페인 공자''의 토대가 되었다.

실러는 프랑스 사제 세자르 비샤르 드 생-레알이 1672년에 쓴 소설을 토대로 이 작품을 만들었는데, 이 소설은 영국 작가 토마스 오트웨이의 희곡 ''돈 카를로스, 스페인 공자''의 출처이기도 하다. 민족주의와 낭만적인 사랑을 결합한 두 작품 모두에서 카를로스는 고귀하고 용감한 기사의 이상을 구현한다. 그는 필리페 2세의 아내인 젊은 발루아의 엘리자베스의 연인으로 묘사되며, 잔혹하고 독재적이며 무자비한 필리페 2세와 그의 스페인 궁정 세력에 맞서 자유와 사랑을 위해 싸운다.

실러의 희곡은 여러 편의 오페라로 각색되었는데, 특히 주세페 베르디의 ''돈 카를로스''(1867)가 가장 유명하다. 베르디의 오페라는 오페라 레퍼토리의 주류를 이루며 현대 관객에게 가장 익숙한 이야기 버전이다. 여기서 카를로스는 궁정 음모의 희생자로 묘사되며, 그의 정신 불안정이나 폭력적인 성향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80년 전쟁 중 네덜란드로 도주하는 등의 내용은 역사적으로 실증되지 않았지만, 실러의 희곡 『돈 카를로스』와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에서 엘리자베트에 대한 비련이라는 허구가 만들어져 비극적인 인물로 알려졌다.


  • 돈 카를로스 - 실러의 희곡
  • 돈 카를로 - 베르디 작곡의 오페라.
  • 돈 카를로스 - 뮤지컬, 다카라즈카 가극단 유키구미 공연 (2012년 3월 상연). 주연: 오토즈키 케이, 마이하네 미미.


아들을 감금한 왕의 이야기는 스페인 극작가 페드로 칼데론 데 라 바르카의 희곡 ''라 비다 에스 수에뇨''(''인생은 꿈'') (1635)의 기초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희곡은 돈 카를로스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다른 전제에서 시작하며, 신플라톤주의 맥락에서 종교적 성찰과 플라톤의 동굴의 조합에서 영감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39]

카를로스는 CW의 드라마 ''레인''에서 캐나다 배우 마크 가님이 연기했다.[40] 그는 채찍질을 즐기고 관련 결혼을 통해 스코틀랜드를 지배하는 데 관심을 보이는 성적 일탈자로 묘사되었다.

카를로스는 1962년 TV 시리즈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 에피소드 "스페인 방문"에서 14세의 가학적인 인물로 묘사되었다.

존 폭스는 ''순교자 열전''(1570년 2판)에서 아스투리아스 공 카를로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5. 가계도

1. 아스투리아스 공 카를로스
2.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
3. 포르투갈의 마리아 마누엘
4.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
5. 포르투갈의 이사벨라
6. 포르투갈 국왕 주앙 3세
7. 오스트리아의 카테리나
8. 카스티야 국왕 펠리페 1세
9. 카스티야 여왕 후아나 1세
10.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1세
11. 아라곤의 마리아
12.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1세 (= 10)
13. 아라곤의 마리아 (= 11)
14. 카스티야 국왕 펠리페 1세 (= 8)
15. 카스티야 여왕 후아나 1세 (= 9)



Carlos' ancestry shown without duplicates
카를로스의 중복되지 않은 조상 계보


카를로스는 일반적인 경우보다 적은 수의 조상을 가졌다. 그는 증조부모가 8명이 아닌 4명, 고조부모가 16명이 아닌 6명이었다.[5] 그의 외할머니와 친할아버지는 남매였고, 외할아버지와 친할머니 또한 남매였으며, 두 증조할머니는 자매였다.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4] 간행물 On the expected relationship between inbreeding, fitness, and extinction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서적
[10] 서적
[11] 서적 Lectura y bibliofilia en el príncipe don Carlos (1545–1568), o la alucinada búsqueda de la 'sabiduría' Instituto de Historia del Libro y de la Lectura
[12] 서적
[13] 서적
[14] 서적
[15] 서적
[16] 서적
[17] 서적
[18] 간행물 Brief account on the head injury of a noble youngster in the sixteenth century (Prince Don Carlos, heir to Philip II of Spain, 1545–1568) 2015-07-01
[19] 서적
[20] 서적
[21] 서적
[22] 서적
[23] 서적
[24] 서적
[25] 기타
[26] 서적
[27] 서적
[28] 서적
[29] 서적
[30] 서적
[31] 서적
[32] 서적
[33] 서적
[34] 서적
[35] 서적 Felipe II y su tiempo Espasa Calpe, Madrid
[36] 간행물 "La Leyenda Negra: Estudios Sobre Sus Orígines" Göteborgs Universitets Årsskrift 1960
[37] 서적 The Black Legend: Anti-Spanish Attitudes in the Old World and the New 1971
[38] 웹사이트 Don Carlos 2010-11-05
[39] 간행물 "Inventario de representaciones de La vida es sueño" 2012
[40] 웹사이트 'Reign' Season 3, Midseason Finale Spoilers: Mary Uncovers Dark Secret About Prince Don Carlos http://www.latinpost[...] 2016-01-09
[41] 서적 Foxe's Book of Martyrs https://www.guten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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