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리드 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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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드리드 왕궁은 9세기에 건설된 성곽을 기원으로 하며, 이후 여러 차례 증축과 개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1734년 화재로 소실된 구 성곽 자리에 펠리페 5세의 명으로 새로운 궁전이 건설되었으며, 1764년 카를로스 3세가 처음으로 거주했다. 왕궁 내부에는 왕립 무기고, 왕립 약국, 도서관 등이 있으며, 19세기 이후에도 여러 차례 개조되었다. 왕궁 주변에는 아르메리아 광장, 오리엔테 광장, 캄포 델 모로 정원, 사바티니 정원 등이 조성되어 있다. 현재 스페인 왕실은 공식 행사 시 이 왕궁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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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드 왕궁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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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마드리드 왕궁 |
로마자 표기 | Palacio Real de Madrid |
위치 | 마드리드 |
국가 | 스페인 |
건축 양식 | 바로크 건축 고전주의 |
건축가 | 필리포 유바라 (외 다수) |
의뢰인 | 펠리페 5세 |
착공일 | 1735년 4월 7일 |
바닥 면적 | 135,000 m² |
문화재 지정 | 스페인 비이동 문화재 기념물 |
문화재 지정일 | 1931년 |
문화재 지정 번호 | RI-51-0001061 |
설명 | 스페인 왕가의 공식 거주지 |
상세 정보 | |
공식 웹사이트 | 마드리드 왕궁 |
2. 역사
마드리드 왕궁의 역사는 9세기 무함마드 1세가 마드리드 지방에 마이리트라 불리는 성벽을 건설하면서 시작되었다. 1036년 경에는 무어인이 건설한 톨레도 왕국의 소유였다가, 마드리드가 카스티야 왕국에 넘어가면서 카스티야 군주의 소유가 되었다. 1329년 카스티야의 알폰소 11세는 최초로 스페인 국회를 마드리드 왕궁에 소집하였고, 펠리페 2세는 1561년에 그의 궁정을 마드리드 왕궁으로 옮겼다.
16세기에 지어진 구 성곽(Antiguo Alcázares)은 1734년 12월 24일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 화재는 프랑스 화가 장 랑(Jean Ranc)의 방에서 시작되었는데, 미사 알림 종소리와 화재 경고 종소리가 혼동되어 화재 대응이 지연되었고, 약탈을 우려하여 건물의 문을 닫아 구조 작업에 어려움이 있었다. 벨라스케스의 "무어인들의 추방"과 같이 많은 예술 작품이 유실되었으나, 라스 메니나스와 같은 다른 작품들은 창문 밖으로 던져 구조되었다. 다행히도 화재 직전 국왕이 소장품의 상당 부분을 부엔 레티로 궁전으로 옮기도록 명령했기 때문에 많은 작품들이 구조되었다. 이 화재는 나흘 동안 지속되었고 옛 알카사르를 완전히 파괴했으며, 남아있던 벽은 1738년에 철거되었다.
펠리페 5세는 같은 장소에 새로운 왕궁 건설을 명하였고, 1738년 부터 1755년 까지 건축이 진행되었다. 필리포 유바라와 조반니 바티스타 산체티에 의해 베르니니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벤투라 로드리게스, 프란체스코 사바티니 등이 협력했다. 1764년 카를로스 3세가 새 궁전에 처음으로 거주하게 되었다.[1]
19세기에 페르디난드 7세는 궁전을 현대 프랑스식으로 바꾸는 개조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손자인 알폰소 12세는 궁전을 빅토리아 시대 스타일로 바꾸었다. 20세기에는 스페인 내전 중 입은 피해를 복구하기 위한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다.[6]
현재 왕궁은 국사 행사가 아닌 경우 일반인에게 공개된다.
2. 1. 기원: 이슬람 요새와 중세 시대
9세기 무함마드 1세가 마드리드 지방에 마이리트라 불리는 성벽을 건설했는데, 이것이 마드리드 왕궁의 기원이다. 1036년 경에는 무어인이 건설한 톨레도 왕국의 소유가 되었다가, 마드리드가 카스티야 왕국에 넘어가면서 카스티야 군주의 소유가 되었으나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1329년 카스티야의 알폰소 11세는 최초로 스페인 국회를 마드리드 왕궁에 소집하였고, 이후 펠리페 2세는 그의 궁정을 마드리드 왕궁으로 옮겼다.16세기에 지어진 구 성곽(Antiguo Alcázares)은 1734년 12월 24일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에 펠리페 5세는 새로운 궁전 건설을 명하였고, 15년 이상 건축이 진행된 후 1764년 카를로스 3세가 새 궁전에 처음으로 거주하게 되었다.
현재 왕궁이 있는 자리는 원래 10세기부터 마이릿(Mayrit 또는 마주리트)이라 불리던 요새가 있던 곳이다. 마이릿은 무함마드 1세 통치하에 국경 방어를 위해 건설되었고, 후우마이야 왕조 붕괴 후에는 타이파의 톨레도 왕국에 계승되었다. 1085년, 마드리드가 카스티야 왕 알폰소 6세에 의해 함락되자 대저택은 카스티야 왕이 사용하게 되었다. 1329년, 카스티야 왕 알폰소 11세는 처음으로 마드리드에 코르테스(신분제 의회)를 소집했다. 펠리페 2세는 1561년에 궁정을 마드리드로 옮겼다.[1]
옛 알카사르(Antiguo Alcázar)는 이곳에 16세기에 지어졌다. 알카사르는 1734년 12월 24일에 전소되었지만, 펠리페 5세는 같은 장소에 새로운 왕궁 건설을 명령했다. 건설은 1738년부터 1755년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필리포 유바라와 조반니 바티스타 산체티에 의해 베르니니 양식으로 지어졌다. 벤투라 로드리게스, 프란체스코 사바티니 등이 협력했다. 1764년에 새로운 왕궁을 차지한 사람은 카를로스 3세였다.[1]
2. 2. 카스티야 왕국과 합스부르크 왕가 시대
궁전의 역사는 9세기, 당시 마이리트라고 불리던 이 지방이 무함마드 1세의 성벽의 일환으로 지어졌던 성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036년경 무어인이 건설한 톨레도 왕국의 소유였다가, 마드리드가 카스티야의 손으로 넘어가자 카스티야 군주는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1329년 카스티야의 알폰소 11세는 최초로 스페인 국회를 마드리드 왕궁에 소집하였다. 이후 펠리페 2세는 1561년에 그의 궁정을 마드리드 왕궁으로 옮겼다.
10세기부터 현재 왕궁이 있는 자리에는 마이릿(Mayrit 또는 마주리트)이라 불리는 요새가 있었다. 마이릿은 후우마이야 왕조 아미르 무함마드 1세 통치하에 국경 방어를 위해 건설되었고, 후우마이야 왕조 붕괴 후에는 타이파의 톨레도 왕국에 계승되었다. 1085년, 마드리드가 카스티야 왕 알폰소 6세에 의해 함락되자 대저택은 카스티야 왕이 사용하게 되었다.
중세 시대의 성을 묘사한 유일한 그림은 얀 코르넬리스 베르메이옌이 1534년에 그린 그림이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는 건축가 알론소 데 코바루비아스와 루이스 데 베가와 함께 1537년에 성을 확장하고 개조했다. 펠리페 2세는 1561년에 마드리드를 수도로 삼고 새로운 증축 공사를 계속했다. 펠리페 3세와 펠리페 4세는 1610년에서 1636년 사이에 긴 남쪽 외벽을 추가했다.
구 성곽(Antiguo Alcázares)은 16세기에 지어졌지만 1734년 12월 24일 불타버렸다. 부르봉 왕가의 펠리페 5세는 1700년에 왕실 아파트를 개조했다. 합스부르크 왕가 시대의 알카사르는 새로운 왕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베르사유 궁전에 비해 소박했으며, 그는 주로 테오도로 아르데만스와 르네 카를리에가 설계한 일련의 재설계를 시작했고, 주요 방들은 마리아 루이사 사보이아 여왕과 우르시니 공주에 의해 프랑스 궁전 스타일로 재장식되었다. 펠리페 5세는 불타버린 같은 장소에 새로운 왕궁 건설을 명령했다. 건설은 1738년부터 1755년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필리포 유바라와 조반니 바티스타 산체티에 의해 베르니니 양식으로 지어졌다. 벤투라 로드리게스, 프란체스코 사바티니, 수시멘토가 협력했다. 1764년에 새로운 왕궁을 차지한 사람은 카를로스 3세였다.
벨라스케스를 비롯해 티에폴로, 고야 등의 최고 화가들이 궁전의 보수 작업에 착수 하였다. 스페인 왕가가 수집해온 역사적인 작품들이 궁전에 전시되어 있다. 13세기 이전의 무기를 비롯하여 포르셀린, 가구 등도 소장품에 속한다.
2. 3. 부르봉 왕가와 새로운 왕궁 건설
1329년 카스티야의 알폰소 11세는 최초로 스페인 국회를 마드리드 왕궁에 소집하였다. 이후 펠리페 2세는 그의 궁정을 마드리드 왕궁으로 옮겼다.16세기에 구 성곽(Antiguo Alcázares)이 지어졌지만 1734년 12월 24일 불타버렸다.

1734년 크리스마스 이브, 프랑스 화가 장 랑(Jean Ranc)의 방에서 시작된 화재로 알카사르가 파괴되었다. 미사 알림 종소리와 화재 경고 종소리가 혼동되어 화재 대응이 지연되었고, 약탈을 우려하여 건물의 문이 닫힌 채로 남아 있어 구조 작업에 어려움이 있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무어인들의 추방"과 같이 많은 예술 작품이 유실되었으나, 라스 메니나스(Las Meninas)와 같은 다른 작품들은 창문 밖으로 던져 구조되었다. 다행히도 화재 직전 국왕이 소장품의 상당 부분을 부엔 레티로 궁전(Buen Retiro Palace)으로 옮기도록 명령했기 때문에 많은 작품들이 구조되었다. 이 화재는 나흘 동안 지속되었고 옛 알카사르를 완전히 파괴했으며, 남아있던 벽은 1738년에 마침내 철거되었다.

펠리페 5세는 새로운 궁전을 다시 짓도록 명하였다. 건축에만 15년 이상이 소요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764년 카를로스 3세가 최초로 새 궁전에 머물렀다. 이탈리아 건축가 필리포 유바라(Filippo Juvarra)는 새로운 궁전 건설을 감독했으며, 잔로렌초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의 루브르 궁전(Palais du Louvre) 설계에서 영감을 받은 호화로운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처음에 유바라는 다른 장소에 궁전을 짓고자 했으나, 이 아이디어는 폐기되었다. 그의 제자인 지암바티스타 사케티(Giambattista Sacchetti)[7]가 스승의 작업을 계속하기 위해 선정되었다. 사케티는 건물을 큰 정사각형 안뜰을 포함하도록 설계하고 돌출된 날개를 만들어 시야 문제를 해결했다.
1760년, 스페인의 샤를 3세(Charles III of Spain)는 신고전주의 건축가 프란체스코 사바티니(Francesco Sabatini)에게 건물 확장을 의뢰했다. 샤를 3세는 1764년에 처음으로 궁전에 거주하였다.
2. 4. 19세기 이후의 변화와 현재
19세기에 발랑세이 성(Château de Valençay)에 오랫동안 투옥되었던 페르디난드 7세는 궁전의 가장 철저한 개조 공사를 시작했다. 이 재설계의 목표는 구식 이탈리아식 건물을 현대 프랑스식 궁전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손자인 알폰소 12세는 궁전을 빅토리아 시대 스타일의 저택으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알폰소의 계획은 건축가 호세 세군도 데 레마가 설계했으며, 여러 방을 개조하고 대리석 바닥을 파르케로 교체하고 시대적 가구를 추가하는 것이었다.[6]20세기에 스페인 내전 중 입은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복원 작업이 필요했다. 장식과 장식 틀을 수리하거나 재설치하고 손상된 벽을 원본을 충실하게 재현한 것으로 교체했다.[6]
궁전은 현재 국사 행사가 아닌 경우 일반인에게 공개되지만, 규모가 매우 크기 때문에 관람객 경로에는 항상 일부 방만 포함되며, 경로는 몇 달마다 변경된다. 입장료가 부과되지만, 때때로 무료인 경우도 있다.
3. 내부
마드리드 왕궁 내부는 디에고 벨라스케스,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안톤 라파엘 멩스 등 유명 화가들의 작품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13세기 이후의 무기류를 소장한 왕립 무기고, 세계에서 유일하게 완벽한 스트라디바리우스 현악 4중주, 태피스트리, 도자기, 가구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왕실 소장품들이 보관되어 있다.[15] 2004년 5월 22일에는 펠리페 6세와 레티시아 왕비의 결혼 피로연이 궁전 중앙 정원에서 열렸다.
3. 1. 1층
1760년 사바티니가 설치한 위치의 반대편으로 옮기고자 했던 카를로스 4세의 요청에 따라 1789년 사바티니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산 아구스틴 대리석 한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계단 중간에는 펠리페 데 카스트로(Felipe de Castro)가 제작한 사자상 하나와 로베르 미셸(Robert Michel)이 제작한 사자상 하나가 자리 잡고 있다. 천장의 프레스코화는 코라도 지아킨토(Corrado Giaquinto)의 작품으로, '스페인이 보호하는 종교'를 묘사하고 있다.[15] 1층에는 로마 토가를 입은 카를로스 3세의 조각상이, 2층에는 카를로스 4세를 묘사한 유사한 조각상이 있다. 네 귀퉁이의 네 개의 카르투슈는 물, 땅, 공기, 불의 네 가지 원소를 묘사하고 있다.
왕립 도서관은 마리아 크리스티나(Maria Christina) 섭정 시대에 아래층으로 옮겨졌다. 책장은 샤를 3세(Charles III), 이사벨 2세, 알폰소 12세 시대의 것이다.
소장품의 하이라이트로는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의 시간의 책, 알폰소 11세 시대의 사본, 마리아 데 몰리나(María de Molina) 여왕의 성서, 그리고 파리넬리가 페르난도 6세에게 헌정한 ''Fiestas reales''가 있다. 또한 도서관에 보관된 지도도 중요한데, 이 지도들은 스페인 제국 시대 왕국의 영토 범위를 분석한 것이다. 왕실 소장품 중 최고의 메달도 일부 전시되어 있다.
책 표지는 시대에 따른 제본 스타일의 진화를 보여준다. 소장품에는 금색에 철제 레이스가 장식된 로코코(Rococo) 양식, 다색의 신고전주의(Neoclassical) 양식, 고딕(Gothic)과 스페인 르네상스(Spanish Renaissance) 모티프가 있는 낭만주의(Romantic) 양식 등이 포함된다.
왕궁 기록 보관소에는 1823년부터 1833년까지의 암울한 10년(Disastrous decade)부터 1931년 스페인 제2공화국 선포까지 약 2만 점의 문서가 보관되어 있다. 또한 왕실 예배당의 음악가들의 악보, 여러 왕들의 특권, 산 로렌소 데 엘 에스코리알(San Lorenzo de El Escorial) 왕립 수도원의 창립 문서, 펠리페 2세의 유언장, 부르봉 왕가(House of Bourbon) 대부분의 왕들의 서신 등도 보관하고 있다.
필립 2세 재위 시절, 왕립 약국은 왕실의 부속 기관이 되어 의약품 공급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이 역할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소장품에는 라 그랑하 데 산 일데폰소(La Granja de San Ildefonso)에서 제작된 19세기 항아리와 18세기 탈라베라 데 라 레이나 도자기(Talavera de la Reina pottery)가 포함되어 있다.
비엔나의 황실 무기고와 함께 세계 최고의 무기고 중 하나로 여겨지며, 13세기 초의 유물까지 포함하고 있다. 왕과 정예 병사들이 사용했던 무기와 갑옷 컬렉션이다.[15] J.S. 드 레마와 E. 레풀레스가 설계한 건물은 1897년에 개관했다.
이 컬렉션은 밀라노와 아우크스부르크의 최고 무기 제작자들이 카를 5세와 필리페 2세를 위해 제작한 토너먼트용 장비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 중에는 뮐베르크 전투에서 카를 5세 황제가 사용했던 풀 플레이트 아머(전신 갑옷)와 무기가 있는데, 이는 티치아노가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유명한 기마 초상화에서 묘사한 것이다. 불행히도, 이 컬렉션의 일부는 반도 전쟁과 스페인 내전 동안 유실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무기고는 프란체스코와 필리포 네그롤리(가장 유명한 무기 제작자 조합 디자이너 중 한 명)의 방패와 버르고넷을 포함하여 유럽과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예술 작품을 보유하고 있다.
3. 2. 2층
할버드병 방 또는 경비실은 사바티니가 설계했으며, 티에폴로의 프레스코화인 ''비너스와 불카누스''가 있다. 루카 조르다노의 두 점의 그림은 솔로몬의 삶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1]기둥의 홀은 지아킨토의 천장 프레스코화를 가지고 있으며, 왕을 아폴론으로 묘사한 ''모든 자연의 힘이 깨어나 기뻐하는 태양''이라는 풍유화이다. 1878년 제작된 ''분노를 정복하는 카를로스 5세''의 청동상은 페르디낭 바르베디엔의 작품이다. 청동 샹들리에는 1846년 파리에서 만들어졌고, 이사벨 2세가 무도회를 위해 설치했다.[2]
왕좌의 방은 1772년 카를로스 3세 때 만들어졌으며, 티에폴로의 천장 프레스코화인 ''스페인 군주제의 신격화''가 특징이다. 청동 조각에는 네 명의 추기경 미덕, 일곱 행성 중 네 개, 사티로스, 게르마니쿠스, 그리고 쌍왕좌를 옆에서 받치고 있는 네 마리의 메디치 사자가 있다.[3]
카를로스 3세의 전실(Saleta)에는 A.R. 멩스가 그린 1774년 천장 프레스코화 ''트라야누스의 신격화''가 있다. 카를로스 3세의 전실(대화의 방)에는 안톤 라파엘 멩스의 천장 프레스코화인 ''헤라클레스의 신격화''도 있다. 이 방에는 고야가 그린 왕실 가족 초상화 네 점이 있다.[4]
카를로스 3세 시대에 왕비의 침실이었던 세 개의 방은 1879년 알폰소 12세에 의해 연회장으로 개조되었고 1885년에 완공되었다. 그러나 세 개의 천장 프레스코화는 남아 있는데, 안톤 라파엘 멩스의 「태양의 전차(Dawn in Her Chariot)」,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벨라스케스의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가톨릭 군주들에게 바치다(Christopher Columbus Offering the New World to the Catholic Monarchs)」, 그리고 프란시스코 바예우 이 수비아스의 「보아브딜(Boabdil)이 그라나다의 열쇠를 가톨릭 군주들에게 넘겨주다(Boabdil Giving the Keys to Granada to the Catholic Monarchs)」가 그것이다.[5]
이 방들은 과거 킨촌 백작 루이스 잉판테가 유배되기 전에 사용했던 곳이다. 스트라디바리우스 방에는 현재 스트라디바리 제작의 비올라 두 대, 첼로 두 대, 바이올린 두 대가 소장되어 있다. 안토니오 곤잘레스 베라스케스가 그린 천장 프레스코화는 "온화함과 네 가지 주요 덕목"을 묘사하고 있다.[6]
루이스 잉판테의 방이자 악기실인 이곳에는 프란시스코 바예우가 그린 천장 프레스코화가 있는데, "인간의 덕목과 능력을 주재하는 섭리"를 묘사하고 있다.[7]
1748년 사케티와 벤투라 로드리게스가 설계한 이 예배당에는 히아킨토의 천장 프레스코화가 있는데, 그중에는 「성삼위일체」, 「종교의 비유」, 「영광과 성모 마리아를 관례하는 성삼위일체」가 포함되어 있다. 제대 위에는 라몬 바예우의 「성 미카엘」이 있다. 성물함 제단에는 에르콜레 페라타의 1659년 은색 부조 「로마 성문에서 아틸라를 막는 교황 레오 1세(Pope Leo I)」가 있다.[8]
알폰소 13세의 어머니인 마리아 크리스티나 오스트리아 대공비의 침전이었던 이 방에는 샤를 3세의 왕좌, 홀, 왕관이 보관되어 있다. 벽에는 야코포 아미고니의 "사계"의 태피스트리가 장식되어 있다. 또한 주목할 만한 것은 퇴위 연설과 펠리페 6세의 즉위 연설이다.[9]
4. 외부
왕궁의 주 정면은 아르메리아 광장(Plaza de la Armeria)을 향하고 있으며, 2층 높이의 소박한 돌 기단 위에 이오니아식 기둥과 토스카나식 기둥이 3개 층의 주요 창문을 둘러싸고 있다. 맨 위층은 옥상 띠석 뒤에 숨겨져 있으며, 과거 성인과 왕들의 조각상으로 장식되었으나 샤를 3세 시대에 고전적인 외관을 위해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1973년 정면 복원 시 사베티니의 도리아식 기둥 발코니와 사케티의 조각상 일부가 복원되었다. 여기에는 아즈텍 통치자 몬테수마 2세와 잉카 황제 아타왈파의 조각상이 포함된다. 로마 황제 호노리우스, 테오도시우스 1세, 아르카디우스, 트라야누스의 조각상은 왕자의 안뜰에 배치되었다. 사베티니의 시계 측면에는 펠리페 5세, 페르디난드 6세, 바르바라 데 브라간사, 사보이아의 마리아 루이사의 조각상과 "황도를 따라 떠오르는 태양"이 번갈아 배치되어 있다. 시계 위에는 천사들이 받치고 있는 왕실 문장이 있고, 그 위에는 1637년과 1761년에 제작된 종이 있다.
궁전 서쪽에는 캄포 델 모로 정원(Campo del Moro)이 있다. 이 정원은 1109년 무어인 지도자 알리 벤 유수프가 마드리드를 탈환하려 했던 이야기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 동쪽에는 오리엔테 광장(Plaza de Oriente)과 레알 극장(Teatro Real)이, 남쪽에는 알마스 광장(Plaza de Armas)과 알무데나 대성당이, 북쪽에는 사바티니 정원(Jardines de Sabatini)이 있다.
2004년 5월 22일, 펠리페 6세와 레티시아 왕비의 결혼 피로연이 궁전 중앙 정원에서 열렸다.
4. 1. 아르메리아 광장 (Plaza de la Armería)
현재의 아르메리아 광장은 1892년 엔리케 마리아 레풀레스(Enrique María Repullés) 건축가의 설계로 조성되었다. 광장의 역사는 1553년 필리프 2세가 왕실 마굿간 건물을 지으라고 명령했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8]알무데나 대성당은 광장을 사이에 두고 왕궁과 마주하고 있다. 대성당 외관은 주변과 조화를 이루도록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내부는 신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다. 알폰소 12세는 그의 아내 메르세데스 데 오를레앙의 유해를 안치하기 위해 건립 자금을 지원했다.[8] 교회 건축은 1878년에 시작되어 1992년에 완공되었다.
1879년 오리엔테 광장을 설계한 나르시소 파스쿠알 콜로메르가 광장 배치를 설계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현재 아르메리아 광장이 있는 자리는 수십 년 동안 무기 전 광장(anteplaza de armas)으로 사용되었다. 사체티(Sachetti)는 마나사레스 강의 처마를 완성하기 위해 대성당을 건설하려 했고, 사바티니(Sabatini)는 이 건물을 왕궁과 합쳐 하나의 블록을 형성하는 것을 제안했지만, 두 계획 모두 샤를 3세에 의해 무시되었다.
안헬 페르난데스 데 로스 리오스는 1868년 오리엔테 광장 주변 전체에 넓은 나무 지역을 조성하여 왕궁의 전망을 개선하자고 제안했다. 10년 후 세군도 데 레마(Segundo de Lema)는 페르난데스의 원래 디자인에 계단을 추가했고, 이는 프란시스코 데 쿠바스(Francisco de Cubas)가 알무데나 교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아이디어로 이어졌다.
아르메리아 광장은 궁전의 남쪽에 있는 넓은 광장으로, 궁전의 좁은 날개로 둘러싸여 있으며, 알무데나 대성당과 마주하고 있다.
4. 2. 오리엔테 광장 (Plaza de Oriente)
오리엔테 광장은 마드리드 왕궁 동쪽 정면과 레알 극장을 연결하는 직사각형 공원이다. 광장의 동쪽은 곡선을 이루며 인접 건물의 여러 카페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 광장은 사케티의 왕궁 설계에 포함되었지만, 조제프 보나파르트 국왕이 교회, 수도원, 왕립 도서관 등 약 60개의 중세 건축물을 철거하라는 명령을 내린 1808년에야 건설이 시작되었다. 조제프가 폐위되기 전에 공사가 완료되지 못했고, 이사벨 2세 여왕이 1844년에 건축가 나르시소 파스쿠알 콜로메르에게 최종 설계를 맡기면서 완공되었다.[9][10]
산책로는 광장을 중앙 정원, 카보 노발 정원, 레판토 정원의 세 구역으로 나눈다. 중앙 정원은 펠리페 4세 국왕의 중앙 기념비를 중심으로 바로크 양식 정원 모델을 따라 격자 모양으로 조성되어 있다. 일곱 개의 화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화단은 회양목 울타리로 경계 지어져 있고 작은 사이프러스, 주목, 마그놀리아와 한해살이 꽃들이 심어져 있다. 중앙 정원의 북쪽과 남쪽 경계는 일반적으로 "고트 왕들"로 알려진 일련의 동상들로 표시되는데, 이는 서고트 왕국의 통치자 5명과 레콩키스타 시대 초기 기독교 왕국의 통치자 15명을 나타내는 조각상들이다. 석회암으로 조각되었으며, 스페인 국왕 전체를 기리는 연작의 일부이다. 이들은 왕궁 장식을 위해 제작되었으며 1750년에서 1753년 사이에 만들어졌다. 기술자들은 이 동상들이 왕궁 난간에는 너무 무겁다고 판단하여 지상에 설치했는데, 세밀함이 부족한 점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나머지 동상들은 사바티니 정원에 있다.[11][12]
이사벨 2세는 피에트로 타카의 기마상인 펠리페 4세의 동상이 왕자의 문(Prince's Gate)과 마주 보도록 광장을 조성했다.
4. 3. 캄포 델 모로 정원 (Campo del Moro Gardens)
이 정원은 1109년 마드리드 재정복을 시도하던 무슬림 지도자 알리 벤 유수프(Ali ben Yusuf)가 군대와 함께 이곳에 진을 쳤다는 이야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지어졌다. 펠리페 4세 국왕 재위 시절에 분수를 만들고 다양한 종류의 식물을 심는 등 이 지역에 대한 최초의 개선이 이루어졌지만, 전반적인 모습은 대부분 방치되었다. 왕궁 건설 중에 그란하 데 산 일데폰소 왕궁(Royal Palace of La Granja de San Ildefonso)의 정원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조경 프로젝트가 진행되었지만, 자금 부족으로 이사벨 2세 재위 때까지 개선이 더디게 진행되었다. 당시 유행에 따라 공원은 낭만주의 양식으로 조성되었다.아랑후에스의 작은 섬 정원에 있던 트리톤 분수와 보아디야 델 몬테에 있는 인판테 돈 루이스 궁전(Palace of Infante don Luis)의 조개 분수는 나르시소 파스쿠알 콜로메르(Narciso Pascual Colomer)의 계획에 따라 이사벨 2세에 의해 직각으로 이어지는 길의 중앙에 배치되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 여왕(Maria Christina of Austria)의 섭정 시대에 공원은 라몬 올리바의 낭만주의 양식 계획에 따라 개조되었다. 트리톤 분수와 궁전 사이에는 호세프 보나파르트(Joseph Bonaparte) 치세에 후안 데 비야누에바(Juan de Villanueva)가 건설한 대형 동굴 또는 그로토(동백나무 하우스)가 있다. 사케티의 1757-1758년 소형 동굴 또는 그로토(감자 방)는 사열장 앞에 있다.
4. 4. 사바티니 정원 (Sabatini Gardens)

사바티니 정원(Sabatini Gardens)은 마드리드 왕궁 북쪽에 있으며, 바일렌 거리(calle de Bailén)와 산 비센테 언덕(cuesta de San Vicente)까지 이어진다. 대칭적인 프랑스식 디자인을 따르는 이 정원은 공화정부 시대인 1933년에 공사가 시작되었다.[13] 사라고사 출신 건축가 페르난도 가르시아 메르카달(Fernando García Mercadal)이 설계했지만, 이전에 이 부지에 있던 왕실 마구간을 설계한 프란체스코 사바티니(Francesco Sabatini)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정원에는 네 개의 분수와 원래 왕궁을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스페인 국왕들의 조각상으로 둘러싸인 큰 직사각형 연못이 있고, 길 사이사이에는 여러 개의 분수가 기하학적으로 배치되어 있다.[13]
공화정부는 왕실의 통제에서 벗어나 이 지역을 국민에게 돌려주기 위해 정원을 조성했으며, 일반인은 1978년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이 개방할 때까지 출입할 수 없었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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