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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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이푸 전투는 1818년 4월 5일 칠레 마이푸에서 벌어진 스페인 제국과 칠레-아르헨티나 연합군 간의 전투이다. 호세 데 산마르틴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은 마리아노 오소리오 장군이 지휘하는 스페인군을 격파하고 칠레 독립을 확정지었다. 전투는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 인근에서 벌어졌으며, 연합군은 5,000명의 병력을 투입했고 스페인군은 비슷한 규모의 병력을 동원했다. 전투 결과 스페인군은 1,500명이 사망하고 2,289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연합군은 800명이 사망하고 1,000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칠레에서 스페인의 주요 군사 작전은 종식되었고, 칠레와 아르헨티나 연합군은 남아메리카 태평양 연안의 스페인군 진지를 공격하는 작전을 개시하여 페루의 광대한 지역을 스페인 지배에서 해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전투는 칠레와 아르헨티나에서 기념되고 있으며, 특히 "마이푸의 포옹"으로 알려진 산마르틴과 오히긴스의 포옹이 중요하게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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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푸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 개요 | |
![]() | |
| 전투 이름 | 마이푸 전투 |
| 일부 | 칠레 독립전쟁 |
| 날짜 | 1818년 4월 5일 |
| 장소 | 칠레 산티아고 근처 마이푸 평원 |
| 결과 | 반군의 승리 |
| 교전 세력 | |
| 교전국 1 | 안데스군 칠레군 |
| 교전국 2 | 왕당파 |
| 지휘관 및 지도자 | |
| 교전국 1 지휘관 | 호세 데 산 마르틴 베르나르도 오이긴스 |
| 교전국 2 지휘관 | 마리아노 오소리오 |
| 병력 규모 | |
| 교전국 1 병력 | 5,000명 대포 21문 |
| 교전국 2 병력 | 5,000명 대포 12문 |
| 피해 규모 | |
| 교전국 1 피해 | 1,000명 |
| 교전국 2 피해 | 사망 2,000명 포로 3,000명 |
2. 배경
1817년, 호세 데 산마르틴은 군대를 이끌고 안데스 산맥을 넘어 차카부코 전투에서 스페인군을 물리치고 산티아고를 점령했다.[6] 스페인 총독부는 마리아노 오소리오 장군 지휘하에 산티아고로 스페인 군대를 파병했고, 이 군대는 칸차 라야다 제2전투에서 산마르틴을 패퇴시켰다.[6] 그러나 독립을 향한 열망은 사그라지지 않았고, 이듬해 산마르틴은 전쟁의 결과를 결정지을 최종 공세를 시작했다.[6]
칸차 라야다 전투에서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애국군은 이틀도 채 되지 않아 재편성되어 약 4,000명의 병력을 확보했다.[6] 산마르틴은 부대를 거의 완전히 재건하여, 4월 2일 오차가비아 진영을 떠나 마이포의 아래쪽 언덕으로 이동했다. 애국군은 총 396명의 장교와 약 5,000명의 하급 장교 및 병사들로 구성된 3개의 보병 사단으로 조직되어 있었다.[6]
한편, 왕당군은 애국군을 제압하고 세력을 강화하려는 시도를 계속했고, 칸차 라야다 이후 지속적이고 힘든 추격을 시작했다.[6] 이 추격은 모든 마을과 시골에서 저항에 부딪혔고, 산티아고로 진격하는 것을 지연시켜 애국군에게 재편성 및 오소리오 저지, 수도 진입 방지 계획을 세울 시간을 벌어주었다.[6]
베르나르도 오히긴스는 스페인을 패퇴시키는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몇 가지 중요한 조치를 취했다.[6] 예를 들어, 마누엘 로드리게스가 사람들에게 나눠준 소총과 칼을 수거하고, 안데스 산맥에서 들어오는 보급품을 신속하게 확보했다. 또한 산티아고의 개인과 상인들이 보유한 무기를 획득하거나 압수하여 군대를 재무장하고, 남쪽에서 올라오는 주민들로부터 전투원들을 모아 오차가비아에 훈련소를 설치했다.[6]
오소리오 장군은 3월 말 산 페르난도를 통과한 후, 칸차 라야다에서 애국군을 결정적으로 패퇴시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애국군이 싸워 이길 수 있는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6] 이러한 사실에 직면하여, 산티아고 근처에서 애국군과 왕당군 간의 또 다른 충돌은 불가피해졌다.[6]
2. 1. 전투 준비
1818년 4월 4일 밤, 왕당파 군대는 애국군으로부터 약 7km 떨어진 로 에스페호(Lo Espejo)에 주둔했다. 다음날 새벽, 산 마르틴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남쪽 가장자리의 아랫 언덕을 점령했다.[6]산 마르틴의 군대 배치는 다음과 같았다.
| 부대 | 위치 |
|---|---|
| 라스 에라스 사단 | 우익 |
| 알바라도 사단 | 좌익 |
| 킨타나 사단 | 후방 |
| 그레나디어 | 극우 |
| 독재군의 카사도레스(Cazadores) | 좌익 |
| 포병 | 블랑코 엔칼라다와 보르고뇨 지휘 하에 두 여단으로 나뉘어 양익의 보병으로 보호 |
오소리오는 로 에스페호 북쪽의 삼각형 능선에 자신의 군대를 배치했다.
| 부대 | 위치 |
|---|---|
| 프리모 데 리베라 사단 | 좌익 |
| 프론테라 용기병 연대(Dragones de la Frontera) | 발파라이소로 가는 도로 너머 |
| 모르라 사단 | 삼각형 고원의 서쪽 절반 |
| 오르도녜스 사단 | 우익 |
오전 11시 30분경 안데스군의 포병대가 발포를 시작하고, 이에 스페인군의 포병이 응수하면서 전투가 개시되었다.[6] 초반 30분 정도의 사상자 없는 전초전 후 산 마르틴은 휘하의 라스 에라스와 알바라도(Alvarado)의 보병 부대에 전진 명령을 내렸고, 두 부대는 보복 사격 없이 전진해 갔다.[6] 이윽고 각각 블랑코 엔칼라다(Blanco Encalada)와 보르고뇨(Borgoño)가 맡은 포병대의 양익을 지원하기 위해 라스 에라스와 알바라도는 적 프리모 데 리베라(Primo de Rivera)와 오르도녜스(Ordoñez)의 부대를 공격해 들어갔다. 사피올라(Zapiola)가 이끄는 척탄병대는 스페인 기병대의 공격을 받았다가 간신히 반격을 가하고 적의 기병대를 추격했지만 많은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 잠시 후퇴하여 전열을 재정비한 사피올라는 재차 공격해서 스페인 기병대를 와해시키고 안데스군의 우측면을 안정시켰다. 그러던 와중 안데스군 예비대가 라스 에라스와 알바라도의 전열 뒤편에서 나타나 모를라(Morla)와 오르도녜스 부대와 교전을 시작했다. 직후, 라몬 프레이레(Ramón Freire) 대령이 이끄는 칠레군 카사도레스 대대가 동쪽 측면에서 스페인 기병대를 붕괴시켰다. 이 접전 와중에 칠레군의 대령 산티아고 부에라스(Santiago Bueras)가 사망하였다.
이 전투로 스페인군 약 1,500명이 사망하고 2,289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애국자 측은 800명이 사망하고 1,000명이 부상을 입었다.[2] 이 승리는 칠레에서 스페인의 주요 군사 작전을 종식시키는 큰 결과를 가져왔다. 칠레와 아르헨티나 연합군은 남아메리카 태평양 연안의 스페인군 진지를 공격하는 일련의 작전을 개시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는 페루의 광대한 지역을 스페인 지배에서 해방하는 것으로 절정에 달했다.
마이푸 전투의 승리는 매년 4월 5일 마이푸에서 민군 합동 퍼레이드를 통해 기념된다. 이날은 칠레 육군의 군인의 날이기도 하다. 4월 마지막 일요일에 열리는 역사 재현 행사는 마이푸 전투 승리를 기념하는 한 달간의 전국 축제를 마무리한다.[3]
호세 데 산 마르틴 장군이 이끄는 칠레-아르헨티나 연합군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6]
[1]
웹사이트
Battle of Maipu
http://www.britannic[...]
3. 전황

중앙부에서는 양 군의 보병대가 격돌하고 있었다. 부르고스와 아레키파 대대가 합류하여 강화된 오르도녜스 부대는 안데스군 전열로 돌격을 개시해 안데스군을 조금 밀어냈다. 그러나 산 마르틴은 이 지역에 세 개의 대대(1, 3, 7)를 투입하여 오르도녜스 부대를 공격했고, 부르고스 대대를 분산시키고 아레키파 대대를 궤멸시켰다. 나머지 스페인 병력은 사각 대형을 이루어 버티다가 중앙부 뒤로 후퇴했고, 스페인군의 우익은 로에스페호(Lo Espejo)로 퇴각했다. 이 시점에서 오소리오는 군사의 지휘를 오르도녜스에게 맡기고 전장에서 이탈했다.
프리모 데 리베라 부대 휘하의 6개 중대와 스페인군 잔여 병력은 농장에 집결하여 최후의 저항을 펼쳤고, 이 지역에 무모한 정면 돌격을 시도한 안데스군 코킴보 대대는 큰 타격을 입었다. 이에 산 마르틴은 엔칼라다와 보르고뇨의 포병대에게 스페인군 대포 포격 명령을 내렸다. 오르도녜스의 스페인군은 로에스페호의 집들을 방패 삼아서까지 버텼으나, 결국 안데스군 보병이 쇄도해 들어가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 밖의 지리멸렬해진 스페인군 패잔병들은 베르나르도 오이긴스의 시민군이 생포하였다.
4. 결과
5. 기념
산마르틴과 오이긴스가 전투 후 포옹을 한 것은 아르헨티나와 칠레에서 "마이푸의 포옹"(Abrazo de Maipú)으로 기념된다. 이 포옹을 기념하여 남극 피난처 한 곳의 이름이 붙여졌다.[3]
6. 전투 서열
사단 부대 지휘관 총사령관 호세 데 산 마르틴 라스 에라스 사단 -- 제11보병대대 후안 그레고리오 데 라스 에라스 -- 코킴보 사냥꾼 연대 아이작 톰슨 -- 애국자 보병대대 호세 안토니오 부스타만테 -- 기병 그레나디어 연대, 4개 중대 호세 마티아스 사피올라 야포 8문 알바라도 사단 -- 제2보병대대 호세 베르나르도 카세레스 -- 제8보병대대 엔리케 마르티네스 -- 안데스 사냥꾼 대대 -- 안데스 기병 사냥꾼, 4개 중대 야포 9문 예비 사단 -- 제1보병대대 F. 드 디오스 리베라 -- 제3보병대대 아구스틴 로페스 -- 제7보병대대 페드로 콘데 -- 호위 기병대, 2개 중대 라몬 프레이레 야포 4문 총계 병력 5,000명, 야포 21문
마리아노 오소리오 장군이 이끄는 스페인 왕당파 군대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여단 부대 지휘관 총사령관 마리아노 오소리오 제1여단 -- 콘셉시온 대대 후안 호세 캄피요 -- 인판테 돈 카를로스 대대 베르나르도 데 라 토레 -- 공병대 1중대 -- 란세르 델 레이 기병대, 1중대 호세 로드리게스 -- 아레키파 기병대, 1중대 대포 4문 제2여단 -- 아레키파 대대 호세 라몬 로딜 -- 부르고스 대대 호세 마리아 바에사 -- 칠란 기마보병대 시프리아노 팔마 -- 국경 기마보병대, 2중대 안토니오 모르가도 대포 4문 제3여단 정예 혼성대대 (부르고스, 콘셉시온, 인판테, 아레키파 대대의 그레나디어 및 샤쇠르 중대) 대포 4문 총계 병력 5,000명, 대포 12문
참조
[2]
웹사이트
Crónica de La Batalla de Maipú
https://www.maipuasu[...]
2020-05-12
[3]
웹사이트
El Abrazo de Maipú
https://www.maipuasu[...]
2020-05-12
[4]
서적
Batallas por la Libertad
Aquilar
2006
[5]
서적
Historia de Chile. Tomo IV. Las guerras de Independencia
Santiago
2006
[6]
문서
부대, 대대, 중대 용어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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