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탄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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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척탄병은 화약 무기를 사용하는 병사를 지칭하는 용어로, 8세기 동로마 제국에서 액체 화약인 '그리스 불'을 사용한 것이 시초이다. 이후 중국에서 흑색 화약으로 만든 척탄이 사용되었고, 13세기에는 일본에 '진천뢰'라는 척탄이 등장했다. 17세기 유럽에서는 수류탄 투척병을 척탄병으로 불렀으며, 체격이 좋고 훈련된 엘리트 병사로 간주되었다. 19세기 이후 척탄병은 수류탄 외에도 다양한 무기를 사용하며 정예 부대의 명칭으로 사용되었고, 현대에는 수류탄이나 유탄 발사기를 사용하는 보병을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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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탄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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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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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류 | 보병 |
역할 | 특수 작전, 돌격 |
존속 시기 | 17세기 - 20세기 초 |
상세 정보 | |
어원 | 수류탄을 던지는 병사 |
선발 기준 | 체격, 용맹성 |
장비 | 수류탄, 소총, 총검 |
특징 | 높은 사기, 정예 병력 |
전술 | 돌격의 선봉, 주요 거점 공격 |
현대적 의미 | 명예로운 칭호, 의장대 |
역사 | |
기원 | 17세기 프랑스 |
초기 역할 | 공성전 시 수류탄 투척 |
발전 | 각국 군대의 정예 부대로 발전 |
쇠퇴 | 20세기 초, 수류탄의 발전과 함께 사라짐 |
현대적 계승 | 일부 국가에서 명칭 유지, 특수 부대로 존속 |
2. 역사
17세기 중반 유럽에서 처음 등장한 척탄병은 당시 조잡하고 무거웠던 원시적인 수류탄을 멀리 던지는 임무를 맡았다. 이 때문에 주로 체격이 좋고 용감한 병사들이 선발되었으며, 이들은 정예 부대로 인정받아 여러 특권과 함께 일반 병사와 구별되는 복장을 착용했다.
시간이 흐르고 군사 기술이 발전하면서 초기 형태의 수류탄은 점차 실전에서 사용 빈도가 줄어들었다. 하지만 '척탄병'이라는 명칭은 사라지지 않고, 국가 원수를 호위하는 근위대나 전황을 결정짓는 정예 부대를 상징하는 이름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은 일부 정예 부대에 명예 칭호로서 척탄병이라는 이름을 부여했으며, 전쟁 말기에는 사기 진작 차원에서 일반 부대명에 척탄병 칭호를 붙이기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참호전이 주요 전투 양상이 되면서, 근대적인 수류탄의 필요성이 다시 대두되었다. 특히 독일 제국군이 참호 돌파를 위해 편성한 돌격대는 기관단총과 함께 수류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근접 전투에서 높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전술은 다른 국가의 군대에도 영향을 미쳐 현대 보병 전술의 발전에 기여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자동 소총의 보급과 유탄 발사기의 발명으로 대부분의 보병이 직접 수류탄이나 유탄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과거와 같이 수류탄 투척만을 전담하는 병과는 사실상 사라졌지만, '척탄병'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여러 국가에서 정예 부대나 특정 보병 병과를 나타내는 명예로운 칭호로 남아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2. 1. 척탄병의 등장 (17세기 ~ 18세기)
17세기 중반 유럽에서 사용된 수류탄은 성능이 조잡하고 폭발력이 약했으며 크기도 커서, 이를 멀리 던질 수 있는 체격 좋은 병사들이 척탄병으로 선발되었다. 이들은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는 대가로 여러 특권을 누렸으며, 일반 병사들과는 다른 독특한 복장을 착용하여 구별되었다. 수류탄을 사용하는 병사 개념은 명나라 군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유럽에서는 근세 오스트리아와 스페인 군대에서 처음 기록이 나타난다. 이후 프랑스 왕립군, 네덜란드 연합군, 영국군 등 여러 유럽 국가에서 17세기 후반에 걸쳐 정식으로 척탄병 부대를 편성하기 시작했다.[2][3][4] 1678년 6월 29일, 영국의 일기 작가 존 이블린은 런던 근처 호운슬로 야영지에서 훈련 중인 척탄병들을 보고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이제 수류탄을 능숙하게 던지는 새로운 종류의 병사, 즉 척탄병이 투입되었다. 그들은 모두 주머니에 가득 찬 수류탄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예니체리와 같은 뾰족한 왕관을 가진 모피 모자를 쓰고 있어서 매우 사나워 보였고, 일부는 뒤에 긴 후드를 달고 있었는데, 마치 광대처럼 보였다. 그들의 옷도 마찬가지로 얼룩덜룩했는데, 노란색과 빨간색이었다.[5]

17세기 후반, 보병의 넓은 챙 모자는 척탄병에게 불편하다는 이유로 일부 군대에서 폐지되고 챙이 없는 모자(cap)로 대체되었다. 이는 척탄병이 수류탄을 던질 때 머스킷총을 등에 메기 쉽게 하고[7], 수류탄을 머리 위로 던지는 동작을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해석이 있다.[8] 덴마크 육군 박물관의 프레벤 카닉은 수류탄은 아래로 던졌으며, 챙 없는 모자가 필요했던 주된 이유는 머스킷총을 메는 슬링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9] 1690년대 프랑스 보병의 척탄병은 플린트락 총 슬링, 곡선형 사브르, 수류탄 주머니, 도끼 등 특별한 장비를 지급받아 일반 머스킷병과 구별되었다.[10] 1700년경 영국 및 다른 군대의 척탄병들은 수 놓은 천으로 연대 문장을 장식한 주교관 모양의 모자를 착용하기 시작했으며, 플린트락 머스킷과 함께 수류탄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솜심지를 보관하는 놋쇠 '성냥갑'을 어깨띠에 달았다. 이 성냥갑은 이후 척탄병 제복의 상징적인 요소로 남게 되었다.
18세기에 들어 보병 전술과 화승총 기술이 발전하면서 수류탄의 전술적 가치는 점차 감소했다. 그러나 최전선에서 적진을 돌파할 정예 돌격 부대의 필요성은 여전했고, 기존의 척탄병 중대가 이 역할을 맡게 되었다. 척탄병은 본래 평균 이상의 신체 조건이 중요시되었으며, 18세기에도 키와 힘은 선발의 중요한 기준이었다. 영국 보병 연대에서는 각 연대의 10개 중대 중 하나인 척탄병 중대에 결원이 생기면 주로 경험 많은 베테랑 병사들을 임명하는 것을 선호했다. 키 기준은 신병을 대량으로 분류해야 할 때 주로 적용되었다.[11] 1745년 컬로덴 전투 전 컴벌랜드 공작은 척탄병 중대가 "각 연대의 최우수 인원으로 보충되어 항상 그렇게 유지되도록" 명령하기도 했다.[12] 반면, 18세기 프랑스 척탄병 중대는 여전히 키를 주요 선발 기준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이나, 혁명 전쟁 발발 이후 대규모 동원이 이루어지면서 개별 장교의 판단에 따라 선발이 이루어지기도 했다.[13] 척탄병 중대로의 이동은 일반적으로 지위 향상과 급여 인상을 동반했다.[14]

척탄병은 외형적인 위용과 명성 덕분에 각 군대에서 자랑스러운 존재로 여겨졌다. 예를 들어 19세기 초 스페인 군의 척탄병 중대는 일상적인 순찰 임무에서는 면제되었지만, 지휘관과 고위 장교의 거처 경비를 맡는 명예로운 임무를 수행했다. 연대가 정렬할 때 척탄병 중대는 항상 가장 오른쪽, 즉 명예로운 위치에 섰다. 영국군의 근위 연대 군기 게양식에서는 참여 연대에 관계없이 "영국 척탄병(The British Grenadiers)" 행진곡이 연주되는데, 이는 과거 모든 연대의 오른쪽에 척탄병 중대가 위치했던 전통에서 유래한다.

척탄병을 다른 보병과 구별하는 가장 큰 특징은 머리 장식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미터 모자와 베어스킨이었다. 이 두 형태의 모자는 17세기 후반, 척탄병이 수류탄을 던질 때 넓은 챙 모자가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등장했다.[15] 초기에는 털로 장식된 천 모자가 사용되었으나[16], 점차 미터 모자나 베어스킨으로 대체되었다. 18세기 중반 영국, 스페인, 프랑스 척탄병들은 왕관 모양의 색깔 있는 천과 때로는 장식용 앞판이 달린 높은 털 장식 모자를 착용하여 사열대와 전장에서 위용을 과시했다.[17]
미터 모자는 주로 영국, 러시아, 프로이센 및 대부분의 독일 국가에서 사용되었고[18],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등 남유럽 국가들은 길고 화려한 천 '가방'이 달린 높은 털 모자(베어스킨의 초기 형태)를 선호했다.[18] 미터 모자는 점차 베어스킨으로 대체되었지만, 1914년까지 프로이센의 제1 보병 근위대와 제1 (황제 알렉산더) 근위 척탄병[19], 러시아의 파블로프스키 근위대에서는 계속 사용되었다.[20] 영국은 1768년에 베어스킨을 채택했다.[21] 털 모자의 모양과 외관은 시대와 국가에 따라 다양했는데, 프랑스는 비교적 작은 베어스킨을,[22][23] 스페인은 길게 늘어지는 가방이 달린 높은 모자를 선호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폼폼, 끈, 배지, 앞판, 깃털 등 장식이 추가되어 더욱 화려해졌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는 샤코가 등장하면서 미터 모자와 베어스킨의 사용이 줄어들었지만, 프랑스 대(Grande Armée)의 척탄병 연대[24]와 황실 근위 연대[25], 오스트리아 군대 등에서는 여전히 사용되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프로이센 군대에는 거인들을 모아 편성한 "장갑 척탄병"(Panzergrenadier) 부대가 존재했는데, 이는 당시에는 드물게 갑옷(Panzer)을 착용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초기 척탄은 흑색 화약을 사용한 구형 폭탄으로, 도화선에 불을 붙여 던져야 하는 위험한 임무였고 살상 효과도 제한적이었다. 또한 사선 보병 전술이 발달하면서 적진에 접근하기 전에 사살될 위험이 커져 척탄의 사용은 점차 줄어들었다. 하지만 용감하고 체격이 뛰어난 병사들로 구성된 척탄병 중대는 보병 연대의 정예 부대로서 중요한 국면에 투입되었으며, 여러 연대의 척탄병 중대를 모아 임시 척탄병 대대를 편성하여 운용하기도 했다.[55][56] 척탄병 중대는 19세기 중반까지 보병 연대에 존재했으나[57], 점차 실질적인 역할보다는 명예 칭호로서의 의미가 강해졌다.
2. 1. 1. 초기 수류탄


수류탄과 같은 투척 폭탄의 개념은 고대부터 존재했다. 8세기 동로마 제국에서는 그리스 불이라는 액체 소이제를 채운 도기 형태의 척탄을 사용한 기록이 있다. 그리스 불은 지중해 패권을 둘러싼 이슬람 세력과의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제조법이 군사 기밀로 유지되다 제국의 멸망과 함께 소실되어 정확한 실체는 불분명하다.[50]
흑색 화약이 발명된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화약을 채운 척탄이나 원시적인 형태의 화기가 사용되었다. 10세기 둔황의 불화에는 화창과 함께 척탄으로 보이는 무기를 든 모습이 묘사되어 있어, 당시 화약 무기가 상당히 보급되었음을 보여준다. 명나라 군대는 만리장성에 주둔하며 뇌폭탄이라 불리는 수류탄을 사용하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13세기 여몽 연합군의 일본 침략 당시 원나라 군대가 "진천뢰"라는 이름의 철제 또는 도제 폭탄을 사용한 것이 기록상 최초이다. 이는 폭발 시 파편으로 살상력을 높인 무기로, 이후 일본에서도 호로쿠타마라는 이름으로 유사한 형태의 척탄이 센고쿠 시대와 에도 시대까지 사용되었다.
유럽 군대에서 수류탄을 사용하는 병사에 대한 기록은 근세 오스트리아와 스페인 군대에서 처음 나타난다. 수류탄 투척 개념은 17세기 중반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프랑스 왕립군은 루이 14세 치세인 1667년 장 마르티네의 제안으로 ''Régiment du Roi'' 연대에 처음 척탄병 부대를 창설했으며, 1670년에는 27개 보병 연대에 수류탄 투척을 전문으로 하는 정예 부대를 두도록 허가했다.[2]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네덜란드 연합군은 1672년에 척탄병을 도입했고, 1678년에는 각 부대에서 6명의 병사가 네덜란드 화기 명장 요한 판 하렌이 개발한 수류탄 투척 훈련을 받았다.[3] 영국군은 1677년 5월 근위 연대 병사들에게 척탄병 훈련을 명령했고, 1678년 4월에는 상위 8개 보병 연대에 척탄병 중대를 추가했다.[4] 같은 해 6월 29일, 일기 작가 존 이블린은 런던 근처 호운슬로의 야영지에서 훈련 중인 척탄병들을 보고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이제 수류탄을 능숙하게 던지는 새로운 종류의 병사, 즉 척탄병이 투입되었다. 그들은 모두 주머니에 가득 찬 수류탄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예니체리와 같은 뾰족한 왕관을 가진 모피 모자를 쓰고 있어서 매우 사나워 보였고, 일부는 뒤에 긴 후드를 달고 있었는데, 마치 광대처럼 보였다. 그들의 옷도 마찬가지로 얼룩덜룩했는데, 노란색과 빨간색이었다.[5]
초기 수류탄은 주로 화약으로 채워진 작은 철구나 도기 형태였으며, 크기는 대략 테니스 공과 비슷했다. 척탄병은 이 무거운 물체를 아군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적진에 효과적으로 던질 수 있을 만큼 키가 크고 힘이 세야 했다. 또한 전투 최전선에서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적이 다시 던질 시간을 주지 않도록 정확한 순간에 투척할 수 있는 숙련된 기술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신체적, 기술적 요구 조건 때문에 척탄병은 당시 보병 부대 내에서 엘리트 전투원으로 여겨졌다.
2. 2. 근대 척탄병 (19세기 ~ 20세기 초)
18세기에 수류탄의 직접적인 사용은 줄어들었지만[11], 용감하고 체격이 뛰어난 병사들을 모은 척탄병 부대는 여전히 보병 연대의 정예 돌격 부대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55][56] 이들은 전술상 중요한 국면에 투입되었으며, 여러 연대의 척탄병 중대를 모아 별도의 척탄병 대대를 편성하여 운용하기도 했다.[30][55][56] 척탄병은 외형이나 명성 덕분에 각국 군대에서 자랑스러운 존재로 여겨졌고, 종종 특별한 임무나 의장 역할을 맡았다. 예를 들어 스페인 군에서는 일상적인 순찰 임무에서 면제되는 대신 지휘관 숙소 경비를 담당했으며, 연대 정렬 시 항상 우측에 위치했다. 영국군에서는 근위 연대 군기 게양식에서 "영국 척탄병(The British Grenadiers)" 행진곡이 연주되는데, 이는 척탄병 중대가 전통적으로 대열의 오른쪽에 섰기 때문이다.19세기 중반까지 영국, 미국, 오스트리아 등 여러 국가의 보병 연대는 일반적으로 8개의 일반 중대와 2개의 측면 중대(척탄병 중대, 경보병 중대)로 구성되었다.[28] 미국에서는 1792년 의회법에 따라 모든 보병 대대에 척탄병, 소총병, 또는 경보병 중대 중 하나가 포함되어야 했다.[29] 오스트리아 육군의 경우, 각 정규 보병 연대에 2개 중대로 구성된 척탄병 사단이 포함되었으며, 이들은 종종 모 연대에서 분리되어 특정 작전을 위한 복합 척탄병 대대로 편성되었다.[31] 반면 러시아 제국군은 18세기부터 별도의 척탄병 연대를 운용하는 등 독자적인 발전 경로를 걸었으며, 이러한 정책은 1917년 러시아 혁명까지 이어졌다.[32] 1827년부터 1917년까지는 명예로운 베테랑으로 구성된 의장 중대인 궁전 척탄병이 겨울 궁전 경비를 담당하기도 했다.[33]
그러나 19세기 중반, 훈련과 전술이 표준화되면서 연대 내에서 특별히 척탄병 중대를 둘 필요성이 점차 사라졌다. 이에 따라 영국군, 프랑스군, 오스트리아 육군은 1850년대와 1860년대 사이에 척탄병 중대를 단계적으로 폐지했다.[57] 이후 '척탄병'이라는 명칭은 점차 실제 역할보다는 부대의 역사와 명예를 나타내는 칭호로 변모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군사 기술은 급격하게 발전했다. 피크르산이나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고성능 폭약이 개발되고, 이를 이용한 유탄이 포에서 발사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기관총과 철조망이 실용화되면서, 야전 참호의 방어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이는 보어 전쟁과 러일 전쟁을 거쳐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지면서, 양측이 견고한 참호선을 구축하고 대치하는 참호전 시대를 열었다.
이러한 참호전 환경에서 적 참호를 공격하거나 파괴하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 필요해졌고, 고성능 폭약을 사용한 새로운 형태의 척탄, 즉 현대적인 수류탄이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특히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밀스 수류탄과 같이 안전하고 사용하기 편리한 지연 신관 방식의 수류탄이 개발되어 널리 보급되었다. 이로써 약 2세기 동안 주춤했던 척탄 투척은 다시 보병의 중요한 전투 수단으로 부활하게 되었다.
비록 실제 수류탄 투척 임무를 전담하는 병과는 사라졌지만, '척탄병'이라는 이름은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독일 국방군처럼 정예 부대에 부여되는 명예 칭호로 사용되거나, 사기 진작을 위해 부대명에 붙여지는 형태로 그 명맥을 유지하기도 했다.
2. 3. 척탄병의 부활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총포 기술의 발달로 요새의 가치가 하락했으나, 피크르산과 같은 고성능 폭약을 사용한 유탄과 기관총, 철조망의 등장은 참호의 방어력을 크게 높였다. 이로 인해 보어 전쟁, 러일 전쟁을 거쳐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참호전이 주요 양상이 되었다. 한편, 19세기 말 발명된 다이너마이트는 기존 흑색 화약보다 훨씬 강력한 위력을 지녀 참호 공격이나 파괴에 사용되기 시작했다.[40]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수류탄 역시 중요한 보병 무기로 다시 부상했다. 특히 지연 신관을 사용한 수류탄은 사용 편의성이 높아, 약 2세기의 공백기를 거쳐 병사들의 주요 전투 수단으로 부활하게 되었다.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 제국군은 참호 돌파를 위해 침투 전술을 사용하는 돌격대(Stoßtrupp)를 조직했다. 이들은 참호선의 약점을 공격하여 돌파하고 후방의 지휘 체계를 무너뜨리는 것을 목표로 했다. 적진 깊숙이 침투하여 독립적으로 작전을 수행해야 했기에 높은 위험 부담을 안고 있었으며, 현대 특수 부대의 성격과 유사했다. 초기에는 기관단총 MP18을 주로 사용했으나, 곧 수류탄의 효과가 입증되어 주요 무장으로 추가되었다. 특히 "감자 으깨기"라는 별명의 ''Stielhandgranate''는 효과적인 무기였다.[40] 이처럼 돌격대는 수류탄의 타격력과 기관단총의 제압력을 결합하여 현대적인 척탄병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독일의 패전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침투 전술과 편제는 각국 군대에 영향을 미쳐 현대 보병 전술의 기초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독일은 국방군과 무장친위대를 확장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돌격대의 개념을 부활시켜 전격전의 핵심 병력으로 활용했다. 이들은 MP38 기관단총과 M24 수류탄으로 무장하고 전쟁 초반 독일의 승리에 기여했으나, 바르바로사 작전 실패 등으로 많은 병력을 잃었다.
1943년 3월, 악화된 전황 속에서 사기 진작을 위해 프로이센의 전통에 따라 보병 부대에 '척탄병'(''Grenadier'')이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특히 기계화 보병은 '''기갑척탄병'''(''Panzergrenadier'')으로 불리며, 이 명칭은 돌격 부대로서 척탄병의 전통적인 역할을 반영한 것이었다.[58] 오늘날 연방군(연방군(Bundeswehr))에서도 기갑척탄병은 기계화 보병을 의미한다.
1944년 가을, 연합군의 공세로 병력 손실이 커지자 독일은 노병이나 징병 부적격자 등으로 구성된 급조 부대인 '''국민척탄병'''(''Volksgrenadier'')을 창설했다. 이들은 판처파우스트 휴대용 대전차 성형작약탄 발사기와 MP43 (후의 StG44) 돌격소총으로 무장했다. 이는 휴대용 대전차 로켓과 돌격소총 조합의 선구적인 사례였으며, 명칭뿐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대전차 전투를 수행하는 척탄병의 부활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미 전세가 기울어 이들의 저항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다른 국가에서도 척탄병과 관련된 변화가 있었다. 영국에서는 전문 수류탄 부대를 척탄병으로 부르자는 제안이 있었으나, 근위 척탄병 연대가 명칭에 대한 독점권을 주장하여 대신 "폭격수"(Bomber)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미국 육군에서는 공수 부대 창설 초기 항공대가 이들을 "공중 척탄병"(Air Grenadiers)으로 부르려 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41]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군 분대에는 M79 유탄 발사기와 M1911 권총으로 무장한 척탄병이 포함되는 경우가 많았다. M79는 수류탄 최대 투척 거리와 박격포 최소 사거리 사이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설계되었다. 이후 M16 소총에 부착하는 XM148 유탄 발사기가 개발되었으나 문제점이 많아[43] M203 유탄 발사기로 대체되었다. M203은 현재 M320 유탄 발사기 모듈로 대체되고 있지만 여전히 널리 사용되고 있다.
소련에서는 1941년 10월, 총기 부족으로 인해 제4군 내에 특별 "척탄병 여단"을 편성하기도 했다. 이 부대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척탄병 연대 복무 경험이 있는 G.T. 티모페예프 소장이 지휘했다.[42]
현대에 '척탄병' 명칭을 사용하는 부대는 과거의 정예 전통을 계승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강하며, 실제 역할은 일반 보병과 크게 다르지 않다. 수류탄, RPG, 유탄 발사기 등이 보병의 표준 장비가 되면서, 현대 보병 대부분은 소총수 역할과 함께 유탄 발사기를 운용하는 척탄병의 역할을 겸하게 되었다.
3. 각국의 척탄병
17세기 중반 유럽에서 등장한 초기 척탄병은 당시 조잡하고 위력이 부족했던 수류탄을 멀리 던질 수 있는 체격 좋은 병사들로 선발되었다. 이들은 특별한 복장을 착용하고 여러 특권을 누렸다.
이후 수류탄과 보병 화기의 발달로 전통적인 의미의 척탄병은 점차 사라졌지만, '척탄병'이라는 명칭은 여러 국가에서 정예 부대의 명예 칭호로 유지되거나 채택되었다. 예를 들어, 폴란드군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제1 척탄병 사단을 운용했다.
현대 군대에서도 '척탄병'이라는 명칭은 다양한 형태로 사용되고 있다. 특정 부대의 명예 칭호로 쓰이거나(영국 육군의 근위척탄병 연대 등), 특정 병과(독일 연방군의 장갑척탄병)나 계급(노르웨이 군대)을 지칭하는 경우도 있다. 벨기에, 스위스, 러시아 공수군, 인도, 아르헨티나, 멕시코 등 여러 나라에서 척탄병의 명칭이나 전통이 계승되고 있다. 수류탄 자체가 보편적인 보병 장비가 되면서, 현대의 많은 보병들은 실질적으로 과거 척탄병의 역할 일부를 수행한다고 볼 수도 있다.
각국의 구체적인 척탄병 역사, 편제, 역할 등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해당 국가별 하위 섹션에서 다룬다.
3. 1. 독일
프로이센을 비롯한 독일 지역에서도 척탄병은 중요한 군사 조직이었다. 초기 척탄병은 수류탄 투척을 위해 체격이 좋은 병사들로 선발되었으며, 점차 정예 보병 부대를 상징하는 명칭으로 자리 잡았다.프로이센에서는 특히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창설한 포츠담 척탄병 연대가 유명했으며, 이는 큰 키의 병사들로 구성된 상징적인 부대였다. 프리드리히 대왕 시대에도 척탄병은 프로이센 군대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특유의 주교관 모양 모자를 착용하여 다른 보병들과 구별되었다. 17세기 말 프로이센의 전신인 브란덴부르크 시절부터 척탄병 부대가 존재했으며, 뤼베크와 같은 독일의 자유 도시에서도 독자적인 척탄병 부대를 운용했다.
20세기에 들어 수류탄과 보병 화기가 발전하면서 전통적인 의미의 척탄병은 사라졌지만, 독일 국방군은 정예 부대에 대한 명예 칭호로서 '척탄병'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는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일반 보병 부대에까지 '척탄병' 칭호를 부여하기도 했는데, 이는 전쟁 막바지의 어려운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현대의 독일 연방군에서는 '척탄병'이라는 용어가 다른 의미로 쓰인다. 독일 연방군 경비대대(Wachbataillon)의 육군 부대(Heeresteil)에서는 '척탄병'(Grenadier)이 가장 낮은 계급(OR-1)을 의미한다.[44] 또한, 독일 육군의 기계화 보병 부대인 '기갑척탄병 부대'(Panzergrenadiertruppe)에서는 '기갑척탄병'(Panzergrenadier)이 가장 낮은 계급(OR-1)을 가리킨다. 이들은 보병전투차와 함께 작전하는 현대적인 기계화 보병을 뜻하며, 과거의 척탄병과는 역할과 성격이 다르다.
3. 2. 프랑스
프랑스군은 1870년 이후 공식적으로 척탄병 부대를 편성하지 않았지만, 수류탄 모양의 배지는 프랑스 외인부대, 프랑스 국가 헌병대, 그리고 1940년까지 군사 조직이었던 프랑스 관세청 등에서 여전히 부대의 특징적인 표지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과거 척탄병이 정예 부대였던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역사적으로 척탄병은 17세기 무렵 등장했다. 당시 사용된 척탄은 흑색 화약을 채운 구형 폭탄으로, 도화선에 불을 붙여 손으로 던져야 했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임무였다. 게다가 흑색 화약의 폭발력이 약해 살상 효과는 제한적이었고, 척탄병은 수류탄을 던질 수 있는 거리까지 적진에 접근해야만 했다. 이후 사선 보병 전술이 발달하면서, 적진에 접근하기도 전에 척탄병이 사살될 위험이 커졌다.
이러한 이유로 실제 척탄을 사용하는 경우는 점차 줄어들었다. 하지만 용감하고 체격이 뛰어난 병사들을 모아 편성한 척탄병 부대는 보병 연대 내 최고의 정예 중대로 여겨져, 전술적으로 중요한 국면에 투입되었다. 때로는 여러 연대의 척탄병 중대를 차출하여 별도의 척탄병 대대를 편성하고 정예 부대로 운용하기도 했다.[55][56]
19세기 중반까지 여러 유럽 국가의 보병 연대에는 척탄병 중대가 배치되었으나[57], 점차 실제 전투 역할보다는 명예적인 칭호의 성격이 강해졌다. 프랑스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서 1870년 이후 척탄병 부대를 공식적으로는 두지 않게 되었다.
3. 3. 영국
1700년경, 영국 및 다른 유럽 국가의 척탄병들은 일반적으로 연대 문장이 수놓아진 주교관 모양의 천 모자를 착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수류탄 외에도 플린트락 머스킷으로 무장했으며, 어깨띠에는 수류탄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데 사용되는 솜심지를 보관하는 놋쇠 '성냥갑'을 달고 다녔다. 이 성냥갑은 이후에도 척탄병 제복의 일부로 유지되었다.[10]척탄병은 각 연대 내에서 일반 머스킷병(모자병)과 머리 장식으로 구분되었다. 가장 일반적인 척탄병 머리 장식은 미터 모자(miter cap)나 베어스킨(bearskin)이었다. 이 모자들은 17세기 후반부터 여러 군대에서 등장했는데, 척탄병이 수류탄을 던지기 위해 총을 휘두를 때 당시 보병들이 쓰던 넓은 챙 모자가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15] 18세기 중반에는 영국, 스페인, 프랑스 군대의 척탄병들이 높은 털 장식 모자를 착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사열이나 전장에서 그들의 키를 더 커 보이게 하고 위압적인 인상을 주었다.[17]
영국은 처음에는 끈과 땋은 장식이 달린 키가 큰 천 미터 모자를 선호했으나, 1768년까지는 베어스킨을 채택했다.[21]
나폴레옹 전쟁 동안 영국 척탄병은 주로 본국에서 근무할 때 정복에만 베어스킨 모자를 착용했다. 이는 해외 작전 중 털 모자가 쉽게 손상되었기 때문이다.[26]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제1 보병 근위대가 프랑스 황실 근위대를 격파하는 데 기여한 후, 이 부대는 제1 (또는 척탄병) 보병 근위 연대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연대의 모든 중대가 베어스킨을 착용하게 되었다. 1831년에는 세 개의 보병 근위 연대 모두에게 현대적인 모양과 크기의 베어스킨 모자를 착용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한편, 일반 보병 연대의 척탄병 중대는 1842년 폐지될 때까지 사열 복장의 일부로 베어스킨 모자를 유지했다. 크림 전쟁 동안 근위 보병 연대는 전장에서 베어스킨을 착용했는데, 이는 이 유명한 머리 장식이 실전에서 사용된 유일한 사례로 기록된다.
오늘날 영국 육군의 척탄병 근위대(Grenadier Guards)는 5개의 명문 근위 보병 연대 중 가장 선임 연대이며, 이들 근위 연대는 모두 원래 척탄병과 관련된 베어스킨 머리 장식을 유지하고 있다. 콜드스트림 근위 연대는 척탄병 근위대(1656년 창설)보다 이른 1650년에 창설되었지만, 처음에는 잉글랜드 연방을 위해 복무했고 왕실에 대한 복무는 스튜어트 왕정복고 이후인 1660년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두 번째 선임 연대로 인정받는다.[48]

척탄병 근위대는 버킹엄 궁전 경비 임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단순한 의장 부대가 아니라 실전 부대로서의 임무도 수행한다. 이 부대는 워털루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정예 척탄병 부대를 격파한 공로로 '척탄병'이라는 명칭을 얻었으나, 이는 명예 칭호이며 현재 실전 임무 시의 편성은 경보병이다.
과거 영국령 인도 육군에는 제101척탄병 연대가 존재했으며, 이 부대는 대영 제국 내에서 최초이자 가장 오래된 척탄병 연대(척탄병 중대가 아닌 연대 단위)라고 주장했다.
3. 4. 러시아/소련

러시아 제국의 척탄병은 17세기 말과 18세기 초에 다른 북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미터 모자를 특징적인 머리 장식으로 채택했다.[20] 러시아 척탄병의 미터 모자는 특히 황동 앞판이 달린 키가 큰 가죽 헬멧 형태였다. 이들은 1807년까지 작전 중에도 이 황동 앞판 미터 모자를 착용했다.
나폴레옹 전쟁 중인 1807년,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인 파블로프스키 연대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미터 모자를 계속 착용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고 황실 근위대에 편입되었다. 이 부대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인 1914년까지도 사열 시 미터 모자를 착용했으며, 일부 보존된 모자에는 과거 전투에서 입은 머스킷 총알 자국이 남아 있기도 했다.[20] 러시아 황실 근위대는 러시아 제국의 정예 부대로 명성을 떨쳤다.
3. 5. 오스트리아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오스트리아' 척탄병에 대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해당 섹션의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3. 6. 스페인
스페인의 제1 왕립 불멸 보병 연대에는 의장 행사 시 카를로스 3세 시대의 척탄병 제복을 사용하는 부대가 하나 있다. 이는 현대 스페인 군대에서 척탄병의 전통이 상징적으로 계승되고 있음을 보여준다.3. 7. 이탈리아
이탈리아의 척탄병 부대로는 Granatieri di Sardegna|사르데냐 척탄병ita이 있다. 이 부대는 현재 이탈리아 육군 소속의 사르데냐 기갑여단(Brigata Meccanizzata "Granatieri di Sardegna"|사르데냐 기갑여단ita)의 일부이다. 1659년에 창설된 근위 연대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주로 1년 계약의 지원병으로 구성된다. 역사적으로 피에몬테와 이탈리아 육군에서 가장 선임 연대로 여겨졌으며, 신병 중에서 가장 키가 큰 병사들을 선발하는 전통이 있었다.[46] 의례 행사에서는 19세기 양식의 파란색 제복과 털 모자를 착용하고 행진한다. 제1 사르데냐 척탄병 연대는 2010년 기준으로 이탈리아 육군에서 유일하게 두 개의 대대(제1 "아시에타" 척탄병 대대, 제2 "첸지오" 척탄병 대대)를 보유한 보병 연대였다. 2020년에는 제2 대대를 분리하여 제2 사르데냐 척탄병 연대를 재창설할 예정이었다.3. 8. 네덜란드
네덜란드 육군은 19세기 초 스타일의 곰가죽 모자를 착용하는 척탄병 근위 연대를 현재도 유지하고 있다. 이 연대는 예거 근위대와 통합되어 Garderegiment Grenadiers en Jagers|가르데레지먼트 흐레나디어르스 엔 예허르스nl, 즉 척탄병 및 소총병 근위 연대를 형성했다.
이 부대는 4개 중대로 구성되며, 그중 두 개 중대는 예거(소총수)이고 나머지 두 개 중대는 척탄병이다. 부대원들은 마룬 베레를 착용하며, 공중 강습 및 공수 부대 훈련을 받은 정예 부대이다.
3. 9. 스웨덴
스웨덴의 척탄병 연대는 의장대로서 국가 행사 시 스웨덴 육군 근위대의 임무를 수행한다. 이들의 제복에는 곰가죽 모자와 흰색 띠(가슴띠)가 포함되는데, 이 띠는 원래 수류탄 점화용 도화선을 휴대하던 것에서 유래했다. 역사적으로 스웨덴은 다른 북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주교관 모양의 미터 모자를 착용한 바 있다. 척탄병은 1868년 칼 15세의 배우자인 루이즈 여왕이 부대에 하사한 국왕 직속 근위대 기를 소지한다.[47]3. 10. 노르웨이
노르웨이 육군과 노르웨이 공군에서는 척탄병(grenaderno)이라는 용어를 하사관 아래의 가장 낮은 계급으로 사용한다. 이는 징집병과 직업 군인을 구분하기 위한 명칭이다. 척탄병은 일반 병사보다 더 많은 경험이나 전문성이 필요한 직책에 배치되며, 텔레마르크 대대와 같이 완전히 전문화된 부대는 국제 작전에 투입되기도 한다. 노르웨이 해군에서 이에 해당하는 직업 부사관 계급은 matrosno (수병)이다.3. 11. 스위스
스위스군에서 척탄병은 훈련을 잘 받은 기계화 보병 부대를 의미한다. 이들은 주로 어려운 작전에 투입되며, 훈련은 스위스 남부의 외딴 산악 지역인 이소네에서 이루어진다. 스위스 특수부대의 일원으로 여겨지는 이들은 시가전, 게릴라전, 대테러 작전, 코만도 전술, 저격 임무, 격투술 등 다양한 특수 작전을 전문적으로 수행한다.3. 12.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육군은 현재도 기병 척탄병 연대( Regimiento de Granaderos a Caballo|레히미엔토 데 그라나데로스 아 카바요es )라는 이름의 명성 높은 부대를 유지하고 있다. 실제 편제는 대대 규모이다. 이 부대는 아르헨티나 대통령의 의장대 및 경호 부대로 임무를 수행한다.
현재의 연대는 1903년에 창설되었으며, 이는 1813년부터 1826년까지 아르헨티나의 국민 영웅 호세 데 산 마르틴 장군이 지휘했던 역사적인 부대를 계승한 것이다.
'척탄병'이라는 명칭을 가진 대부분의 다른 부대들과는 달리, 아르헨티나의 기병 척탄병 연대는 이름 그대로 기병 부대이다. 의장 행사 시 말을 타고 창과 기병도를 휴대하는 전통을 지킨다.
3. 13. 칠레
칠레 육군의 대통령 근위 기병 연대 "척탄병"(Regimiento Escolta Presidencial n.1 "Granaderos"es)은 1827년부터 활동해 온 부대이다. 이 연대는 19세기에 칠레 육군이 참전한 모든 주요 전투에 참여했으며, 1840년부터 1907년까지는 중요한 국가 행사에서 칠레 대통령의 호위 연대로 활동했다.연대의 이름은 창설 후원자인 마누엘 불네스 프리에토 장군을 기리기 위해 붙여졌다. 그는 칠레 육군과 반 연합 북 페루 반군을 이끌고 1839년 결정적인 융가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페루-볼리비아 연합의 종말을 가져왔다.
2011년까지 칠레 척탄병의 제복은 칠레 육군의 펠트그라우 제복과 유사했으나 기병에 맞게 개조되었다. 아르헨티나의 척탄병처럼 기병 검 대신 창을 주로 사용했으며, 기병 검은 장교와 기병 깃발 경호대만 사용했다. 2011년부터는 모든 계급이 픽켈하우베를 착용한 밝은 청색의 기병용 정복을 입는다.
3. 14. 에콰도르
"타르키 척탄병"은 에콰도르 대통령의 대통령 호위 기병대 역할을 수행한다. 이 부대는 키토의 카론델레 궁전에서 경비를 서며, 타르키 전투 (1829년) 때 착용했던 제복을 유지하고 있다. 에콰도르 육군의 일부로 보고된다.3. 15. 멕시코
멕시코에서는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가 1841년 12월 7일 최고 권력의 척탄병 근위대(Guardia de Granaderos del Supremo Poderes)를 창설하였다. 이 부대는 1847년까지 운영되었다.[38]3. 16. 캐나다

캐나다 근위척탄병 연대는 캐나다 육군의 예비군 부대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부대 중 하나이다. 현재 이 부대는 예비군으로서의 역할과 함께 의장대 임무를 수행하며 국립 전쟁 기념비, 리도 홀 및 기타 상징적인 장소에서 활동하고 있다.
토론토의 캐나다 민병대 부대였던 제10 왕립 척탄병 연대(10th Royal Grenadiers, 후에 The Royal Grenadiers)는 1881년에 개명되었고, 척탄병 중대의 전통을 이어받아 나중에 캐나다 왕립 연대(The Royal Regiment of Canada)가 되었다.
위니펙 척탄병 연대는 1941년 12월 홍콩 전투에 참전했던 C 부대 소속 캐나다 보병 연대 2개 중 하나였다. 현재 이 연대는 추가 작전 명령에 속해 있다.
3. 17. 인도
영국의 제101척탄병 연대는 영국령 인도 육군의 일부였다. 이 연대는 대영 제국에서 최초이자 가장 오래된 척탄병 연대(척탄병 중대와는 구별됨)라고 주장했다.3. 18. 미국
미국 독립 전쟁 (1775~1783년) 시기, 코네티컷 제1지사 주지사 근위대[34]와 코네티컷 민병대 제11 연대에는 척탄병 중대가 존재했다.[35][36] 뉴욕시에도 척탄병 부대가 있었으며[37],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는 찰스 코테스워스 핀크니가 창설하고 지휘한 정예 부대인 제1사우스캐롤라이나 연대가 활동했다.베트남 전쟁에 이르러 미군 분대에는 일반적으로 최소 한 명의 척탄병이 포함되었다. 이들은 주로 M79 유탄 발사기와 M1911 권총으로 무장했으며, 때로는 권총 없이 M79만 지급받기도 했다. M79는 병사가 직접 던지는 수류탄의 최대 사거리와 박격포의 최소 사격 거리 사이의 화력 공백을 메우기 위해 개발된 무기였다. 미군은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89식 중척탄통(미군 사이에서는 "니 모터"라는 별명으로 불림)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베트남 전쟁 초기에도 일부 사용된 기록이 있다. M79의 후속으로 M16 소총에 부착하는 XM148 유탄 발사기가 1966년 12월에 도입되었으나, 방아쇠 작동의 어려움, 조준의 불편함, 잦은 유지보수 필요성 등 여러 문제점으로 인해 1967년 5월 실전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결국 XM148은 M203 유탄 발사기로 대체되었다.[43] M79와 M203 같은 유탄 발사기는 베트남의 정글 환경에서 효과를 입증했으며, 이는 다른 여러 나라에서 유사한 형태의 유탄 발사기를 개발하고 채택하는 계기가 되었다.

현대의 미국 육군 소총 분대는 각각 4명의 병사로 구성된 두 개의 화력 분대로 나뉜다. 각 화력 분대에는 지정된 척탄병이 있으며, 이들은 M4 카빈이나 M16 소총에 M203 유탄 발사기 또는 더 최신형인 M320 유탄 발사기 모듈을 장착하여 운용한다. 이를 통해 엄폐물 뒤나 참호 속의 적과 같이 직접 조준이 어려운 '사각' 지역에 대해 제한적인 고각 사격을 제공할 수 있다.[49] M203은 2009년부터 점차 M320으로 대체되고 있지만, 여전히 널리 사용되는 장비이다.
미국 해병대의 소총 분대는 4명으로 구성된 세 개의 화력 분대로 이루어진다. 해병대에서는 분대장이 M203 유탄 발사기를 운용하며 척탄병의 역할을 겸임한다. 이는 베트남 전쟁 당시 분대마다 M79 유탄 발사기로 무장한 별도의 척탄병을 두었던 것과는 달라진 편성이다.
한편, 미국 육군 항공대는 공수부대 창설 초기에 이들을 자신들의 통제 하에 두고 "공중 척탄병"으로 명명하려 했으나,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41]
3. 19. 일본
화약이 들어간 척탄이 일본에서 처음 사용된 것은 13세기 여몽 연합군의 일본 침략 때 등장한 "진천뢰"(철포)이다.당시 "철포"의 실물이 남아있지 않아 폭발음과 섬광으로 위협하는 무기 정도로 여겨졌으나, 2001년 나가사키현 다카시마정 (현 마쓰우라시) 간자키항 해저에서 [http://www5f.biglobe.ne.jp/~sans-culotte/20011025ma.jpg 실물의 "철포"]가 발견되어[50] 직경 14cm, 두께 1.5cm 정도의 도자기에 쇠붙이를 넣어 살상력을 높인 척탄이었음이 밝혀졌다.
이후 14세기경 왜구 대책으로 조선에 화약 제조 기술이 도입되어 화통도감이 설치되었고, 화차나 진천뢰와 같은 화약 무기가 제조되었다. 이 시기부터 강남, 조선과의 교역을 통해 일본에도 흑색 화약 제조법이 전래된 것으로 보이며, 문헌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51].
연도 | 사건 | 출처 |
---|---|---|
1409년, 1419년 | 쓰시마에서 소동총 시험 발사 | 『조선왕조실록』 |
1466년 (분정 원년) 7월 | 류큐 관리가 교토에서 "철포 일량성" 발사 | 『음량헌일록』 |
1468년 (오닌 2년) 정월 | 오닌의 난 중 "와주지공"이 "발석목"으로 돌 투척 시연 | 『벽산일록』 |
1468년 (오닌 2년) 10월 | 오닌의 난 중 동군 호소카와 나리유키 진영에 화창 준비 | 『벽산일록』 |
1510년 (영정 7년) | 당(중국)에서 건너온 소동총 사용 | 『호조 오대기』 |
전승에 따르면, 구스노키 마사시게가 농성전에서 "철포"를 사용했으며[52], 오타 도칸은 에도성 축성 당시 천연 초석으로 보이는 "연토"를 발견하고 이를 이용한 봉화나 화전 등 화약 무기 사용의 선구자였다고 전해진다.
센고쿠 시대에 들어 조총이 국산화되어 널리 보급되었지만[53], 단조 중심의 철 가공 기술로는 대형 주조포 제작이 어려웠다. 이 때문에 유탄의 타격력을 보완하기 위해 호로쿠타마라고 불린 척탄이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호로쿠타마는 에도 시대까지 널리 쓰였으며,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이나 영국 공사관 방화 사건에도 사용된 기록이 있다.
일본 육군은 참호 돌파를 위해 전차와 침투 전술을 중시했다. 견고하고 깊어진 참호 진지를 파괴하기 위해 소형 수류탄 외에도 대형 폭약통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 폭약통을 여러 병사가 조를 이루어 적진에 던지는 전술이 제1차 상해 사변에서 사용되었고, 이 과정에서 폭탄 삼용사의 일화가 생겨났다.
침투 전술 도입으로 일본에서도 척탄병의 역할이 중요해졌으나, 전문 병과가 아닌 일반 보병이 척탄 임무를 수행했다. 일본군은 침투 전술을 수행하는 공격 부대를 "육탄"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제2차 상해 사변에서 제크트 라인 돌파의 원동력이 되었지만, 후세에 오해를 낳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말기, 본토 결전이 임박하자 일본은 국민을 전력화하기 위해 조작이 간단하고 효과적인 수류탄을 대량 생산했다. 99식 수류탄 1천만 개와 금속 부족으로 도제 수류탄까지 제조되었다.
전후 자위대는 총열 덮개에 장착하는 애드온식 유탄 발사기 대신, M31 대전차 소총 유탄이나 06식 소총 유탄처럼 소총 총구에 장착하는 방식의 소총 유탄을 채용했다. 이 방식은 소총을 가진 병사라면 누구나 유탄을 발사할 수 있게 하여 특정 유탄 사수에 대한 의존도를 낮춘다. 또한, 여러 외국 군대가 사용하는 자동 유탄 발사기와 유사한 성능의 96식 자동 유탄총을 채용하여 중박격포에 준하는 화력 지원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과 싸운 미군은 노획한 89식 중척탄통의 성능을 높이 평가하여 "니 모터"(Knee Mortar)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이는 무릎에 대고 쏜다는 오해에서 비롯된 이름이며, 실제로 그렇게 사용하다 골절상을 입은 병사도 있었다고 한다. 이 무기는 초기 베트남 전쟁에서도 미군 특수부대에 의해 사용되었다. 스프링필드 조병창 부속 박물관에도 우수한 적성 무기의 예시로 전시되어 있다.
3. 20. 제3세계의 척탄병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전 세계적으로 식민지를 보유했던 유럽 국가들이 약화되고 식민지에서의 민족 자결과 독립 움직임이 거세지면서, 기존 종주국 군대와 독립을 추구하는 현지 세력 간의 무력 충돌이 여러 지역에서 발생했다.근대적인 군사력을 갖추기 어려웠던 현지 세력들은 비교적 제작이 용이한 수류탄과 병사들의 높은 사기를 활용한 척탄 전술을 주요 전투 방식으로 채택했다. 특히, 식민지 해방 투쟁 과정에서 세력을 확장한 공산주의 세력은 뛰어난 조직력을 바탕으로 무장 투쟁의 중심 역할을 했으며, 소련이나 중국과 같은 공산주의 국가들의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이는 종주국을 지원하는 미국과의 냉전 시대 대리 전쟁 양상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독일의 판저파우스트에서 발전한 RPG-7과 MP43에서 발전한 AK-47(칼라시니코프 자동 소총)가 소련형 기본 장비 세트로 공산권의 지원을 받는 제3세계 국가들에 널리 보급되었다. 1970년대부터는 북한이 외화벌이를 위해, 1980년대부터는 중국이 이념과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무기를 수출하면서 중동 국가들과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들도 이러한 소련제 무기를 주요 장비로 사용하게 되었다.
=== 베트남 ===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을 목표로 한 베트민과 이를 지원하는 소련·중국, 그리고 인도차이나 재점령을 노린 프랑스와 이를 지원하는 미국 간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척탄병은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독립에 대한 열정으로 베트민에 합류한 수많은 젊은이들이 척탄병으로 양성되었고, 이들의 척탄 공격은 베트남 독립에 크게 기여했다.
프랑스 정규군에 비해 열세였던 베트민은 도시를 포기하고 산악 지대에서 게릴라전을 펼쳤다. 프랑스군이 거점 방어를 강화하자, 베트민은 평상복 차림으로 접근하여 수류탄을 투척하는 방식으로 프랑스군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그러나 게릴라전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기에 강력한 정규군 육성이 필요했다.
베트민은 자원은 풍부했지만, 신병들에게 충분한 사격 훈련을 시킬 여력이 없었다. 설령 소총수를 양성한다 해도, 제2차 세계 대전을 겪은 프랑스 정규군, 특히 프랑스 외인부대와 같은 숙련된 부대를 상대로 효과를 보기 어려웠다. 반면, 수류탄 공격은 단기간의 훈련으로도 가능했고, 병사의 숙련도와 무관하게 효과적이며 비용도 저렴했다.
베트민이 채택한 척탄 공격은 독소전쟁 당시 소련군의 인해전술과 유사한 방식으로, 대규모 병력 동원이 가능한 베트민에게는 현실적인 선택지였다. 기본적인 운용 방식은 다음과 같았다.
단계 | 내용 |
---|---|
1. 준비 | 척탄병(신병)은 RGD-33 수류탄만 휴대하고 경장 상태를 유지한다. |
2. 접근 | 적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최대한 적진의 취약점까지 은밀히 접근한다. |
3. 대기 | 수류탄 점화 끈을 손목에 감고 공격 신호를 기다린다. |
4. 지원 배치 | 숙련된 기관총 사수와 제압 부대가 척탄병 후방에 위치하여 지원 준비를 한다. |
5. 돌격 개시 | 신호에 맞춰 척탄병 제1진이 프랑스군 진지로 돌격한다. (프랑스군의 방어 사격 시작) |
6. 엄호 사격 | 후방의 기관총 사수들이 프랑스군 진지에 견제 사격을 가해 척탄병의 돌격을 지원한다. |
7. 수류탄 투척 | 적진 취약점 부근까지 도달한 척탄병들이 일제히 수류탄을 투척한다. (수류탄은 손에서 분리됨과 동시에 점화) |
8. 반복 공격 | 프랑스군 기관총 진지가 파괴될 때까지 수류탄 공격을 반복한다. |
9. 진지 점령 | 후방 제압 부대가 전진하여 남은 적을 소탕하고 진지를 점령한다. |
이 공격은 프랑스군의 박격포 반격을 피하기 위해 수 분 내에 완료되어야 했다. 점령한 진지는 프랑스군의 즉각적인 반격으로 오래 유지하기 어려웠으므로, 이곳을 통과점으로 삼아 더 깊숙이 침투한 게릴라 부대가 프랑스군 후방의 사령부나 보급소를 공격하여 전선을 고립시키는 것이 목표였다[59]。 이 전술은 신병의 희생을 감수해야 했지만, '''수류탄의 위력을 자신의 몸으로 전달한다'''는 단순 명료함과 높은 사기가 결합되어 효과를 발휘했다[60]。
결국 장기간의 소모전에 지친 프랑스군은 라오스 국경 산악 지대의 베트민을 소탕하기 위해 미국의 지원을 받아 디엔비엔푸에 대규모 기지를 건설했다. 그러나 베트민은 주변 산지에 야포를 분해해 운반, 설치하여 역으로 프랑스군을 포위 공격했다[61]。 보급이 끊긴 프랑스군 진지에 베트민은 참호를 파며 접근해 척탄 공격을 반복했고, 결국 디엔비엔푸를 함락시켰다. 이 패배로 프랑스는 북부 인도차이나 식민지 유지가 불가능함을 깨닫고, 1954년 남북 베트남 분할 독립을 승인하며 남부에 영향력을 남기는 길을 택했다.
이후 미국의 본격적인 개입으로 시작된 베트남 전쟁에서는 남베트남의 베트콩과 그 지지자들이 미군을 상대로 기습 공격(종종 죽음을 각오한 자폭 공격을 포함하여)과 도시 테러에 수류탄을 광범위하게 사용했다[62]。
미군 철수와 남베트남 정부 붕괴 후, 베트남은 캄보디아 침공에 대한 보복으로 중국군의 침공을 받게 된다(중월 전쟁). 중국군은 베트남 주력 부대의 부재를 틈타 62식 경전차를 앞세워 하노이를 점령하려 했다. 베트남군은 소련의 위성 정보를 통해 중국의 침공을 미리 파악하고, 밀림 지대에서 기동이 둔화된 중국군 기갑 차량을 보병(민병대 포함)이 격파하는 방어 전략을 준비했다. 실제 전투에서 베트남 척탄병들은 RPG-7과 구 일본군의 자돌폭뢰를 모델로 한 대전차 폭뢰를 이용한 육박 공격으로 다수의 중국군 장갑 차량을 파괴했다. 기갑 전력을 잃은 중국군은 인해전술로 전환했으나 큰 피해를 입고 철수했다[63]。 이 경험 이후 중국군은 현대화에 박차를 가했고, 1984년 중월 국경 분쟁에서는 근접전 대신 대규모 포격을 통해 베트남군을 격퇴했다.
=== 말라야 ===
제2차 세계 대전 후 영국이 다시 점령한 영국령 말라야에서는 말라야 공산당(MCP)의 군사 조직이 1948년부터 반영 무장 투쟁을 시작했다. 화교계 주민의 지원을 받던 MCP는 영국의 구르카 부대 투입과 전략 촌락 정책으로 세력이 약화되었다. 말레이시아 독립 후 정부는 MCP가 거의 소멸했다고 발표했으나, 1989년 MCP가 무장 투쟁 포기를 선언하고 외국 언론이 해방구에 들어가면서 여전히 강력한 군사력과 진지를 유지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특히, MCP에는 종전 직후부터 활동을 함께 한 일본인 2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MCP의 주력 소총이었던 M1 카빈에 부착하는 유탄 발사기와 유탄을 개발하여 MCP의 무장 투쟁을 오랫동안 지원했던 것으로 본인들의 증언으로 밝혀졌다.
=== RPG-7과 AK-47의 영향 ===
독일의 판처파우스트와 MP43은 소련에 영향을 주어, 대전차 능력 외에 대인 유탄 발사 기능과 로켓 추진 모터가 추가되는 등 독자적인 개량을 거쳐 RPG 시리즈가 등장했다.[64]
RPG는 구조가 단순하고 병사 혼자 운용 가능하면서도 강력한 화력을 제공했으며, MP43의 영향을 받은 AK 시리즈와 함께 구 공산권과 제3세계로 널리 퍼졌다. 베트남 전쟁에서의 성공적인 운용 이후, RPG와 AK는 21세기에도 전 세계 분쟁 지역에서 핵심적인 무기로 사용되고 있다.
RPG와 AK의 등장은 경무장한 민병대나 게릴라의 전투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켜, 중화기와 기갑 장비를 보유한 정규군의 절대적 우위를 약화시켰다. 이는 제3세계에서의 저강도 분쟁이 장기화되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현재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는 RPG와 AK로 무장한 척탄병들이 NATO 표준 유탄 발사기를 사용하는 병력과 계속 교전하고 있다. 미군은 RPG의 위력을 잘 알기 때문에 RPG 휴대자나 발사 시 발생하는 특징적인 후폭풍을 발견하면 최우선 공격 목표로 삼는다. 발사 시 먼지와 화염으로 위치가 쉽게 노출되어 집중 반격을 받기 쉬운 탓에 RPG는 별명 '자살 병기'(''Suicide Weapon'')라고도 불린다.
4. 현대의 척탄병
각종 수류탄 발사 장치와 사격 능력이 높은 자동 소총의 보급, 그리고 이들을 조합한 유탄 발사기의 발명으로 현대 보병의 대부분은 과거 척탄병의 역할과 SAW 사수의 역할을 겸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앞으로도 계속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대 군대에서 "척탄병"이라는 명칭은 주로 체격과 무용이 뛰어난 병사가 선발되는 정예 부대의 명예 칭호로 사용되고 있다. 수류탄 자체는 보병의 표준 장비가 되었기 때문에, 임무상 대부분의 보병이 실질적으로 척탄병의 역할을 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영국 육군에는 근위척탄병 연대(Grenadier Guards)가 존재한다. 이 부대는 버킹엄 궁전 경비 임무를 맡고 있지만, 단순한 의장대가 아닌 실전 부대로서의 임무도 수행한다. 이 부대는 워털루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정예 척탄병 부대를 격파한 것을 기념하여 이 명칭을 얻었으나, 이는 명예 칭호이며 현재 실전 임무 시 편성은 경보병이다.
독일 연방군에서는 중장비 보병을 척탄병(Grenadiere|그레나디레de), 기계화 보병을 장갑척탄병(Panzergrenadiertruppe|판처그레나디어트루페de)이라고 칭하며, 경보병인 엽병(Jäger)과 구분한다. 또한 벨기에, 스위스, 노르웨이, 러시아 공수군 등 서구 국가뿐만 아니라, 인도, 아르헨티나, 멕시코에서도 척탄병의 호칭이 계승되고 있다.
카라비니에리나 프랑스 국가헌병대와 같이 근위 기병대에서 발전한 국가 헌병 중 일부는 정예 부대의 상징으로 수류탄 문양을 부대장에 사용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같은 시대에 활약했던 흉갑기병 역시 현재는 정예 부대의 명칭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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ベトナム戦争を描いた映画『地獄の黙示録』(''Apocalypse Now'') のドラン橋のシーンで、このベトミン軍の攻撃を彷彿とさせる光景が出てく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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ベトナム人の若者の多くが、この擲弾攻撃に決死の覚悟で挑み、仏軍の防衛手段を崩壊させる事に成功したが、その代償として北部ベトナムの社会は大量の戦死者を出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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フランス・米国にとって青天の霹靂となったディエンビエンフーへの包囲攻撃プロジェクトを実現させたのは、ソ連の援助した野砲・ロケット砲・弾薬・トラックと、砲や重火器を操作して実戦に参加した中国軍事顧問|軍事顧問団、人海戦術で中国国境からの兵站線を切り開き維持したベトミン軍と、ベトナム人との恩讐の歴史を乗り越えてベトナム独立に協力した山岳地帯の諸民族との緊密な連携であり、これを実現させたベトナム人のプロジェクト実現能力は、その後の対米戦でも遺憾なく発揮され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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当時のサイゴン市内の外国人向けレストランは、ベトコンの擲弾攻撃で頻繁に攻撃されたため、窓から投げ込まれる手榴弾を防ぐために、必ず金網が張られてい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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ベトナム軍は対米戦での経験と、米軍が南ベトナムに残した先進兵器と、ソ連の援助した先進兵器で武装しており、文化大革命の影響で現代化が遅れていた中国の人民解放軍に比して大幅に現代化されてい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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参照動画(ロシア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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