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로 (일본공산당)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뷰로는 1924년 일본공산당 해산 후 당 재건을 위해 결성된 조직이다. 아오노 키요시, 사노 후미오, 기타하라 타츠오, 도쿠다 큐이치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재건 조직으로 개편되었다. 1925년에는 사노 마나부 등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자 그룹과 통합하여 재건 뷰로로 재편되었고, 도쿠다 큐이치가 위원장을 맡았다. 후쿠모토 가즈오의 후쿠모토 이즘이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아라하타 칸손이 뷰로에서 이탈했고, 1926년 일본공산당 재건 대회가 열렸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본공산당의 역사 - 일본공산당 제6회 전국협의회
일본공산당 제6회 전국협의회는 극좌 노선에서 선진국형 평화혁명 노선으로의 전환을 결정하고, 노사카 산조를 제1서기로 선출하며, 51년 강령을 사실상 폐기하고 무장투쟁 노선을 종결시켰으며, 이토 릿슈의 제명을 결정한 중요한 분기점이다. - 일본공산당의 역사 - 노사카 산조
노사카 산조는 일본의 공산주의 운동가로, 영국 유학 중 공산주의 활동을 시작하여 일본 공산당 창립에 참여했으며, 제2차 중일 전쟁 기간에는 중국에서 활동했고, 전후 일본 공산당에서 활동하며 국회의원을 지냈으나 과거 동료 살해 연루 의혹으로 제명되었다.
뷰로 (일본공산당) | |
---|---|
개요 | |
명칭 | 뷰로 |
원어 명칭 | 뷰로(ビューロー) |
영어 명칭 | Bureau |
역사 | |
결성 시기 | 1924년 |
해체 시기 | 1926년 |
주요 활동 시기 | 제1차 일본공산당 해산 이후 ~ 제2차 일본공산당 결성 이전 |
특징 | |
성격 | 일본공산당 재건 지도부 |
주요 활동 | 상해 테제 발표, 당 재건 시도 |
주요 사건 | 오타루 고상 군사교련 사건 |
배경 | |
제1차 일본공산당 해산 | 제1차 일본공산당 검거사건으로 인한 조직 와해 |
코민테른의 지시 | 일본공산당 재건 및 테제 작성 지시 |
주요 활동 | |
상해 테제 발표 | 상해 테제를 통해 당의 노선 제시 |
당 재건 노력 | 지하 조직을 통해 당원 규합 및 조직 재건 시도 |
검거 및 와해 | 오타루 고상 군사교련 사건 등으로 조직 와해 |
영향 | |
제2차 일본공산당 결성 | 뷰로의 활동을 바탕으로 제2차 일본공산당 결성 |
일본공산당의 노선 확립 | 상해 테제가 이후 일본공산당 노선에 영향 |
2. 뷰로의 성립과 활동 (1924-1926)
1925년 8월, 뷰로는 확대 회의를 통해 재편되었다. 이 회의에는 뷰로와 별도로 사노 마나부, 이치카와 쇼이치, 기타우라 센타로 등이 결성한 '공산주의자 그룹'도 참여했다. 확대 회의 결과, 이들 그룹은 "재건 뷰로"(혹은 "커뮤니스트 뷰로")로 통합되었다. 재건 뷰로의 위원장에는 도쿠다 큐이치가, 정치부장에는 사노 마나부가, 청년부장에는 기타우라 센타로가, 간사이 담당에는 아라하타 칸손이 취임했다.
1926년 봄,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신진 경제학자 후쿠모토 가즈오가 야마구치 고상(현 야마구치 대학 경제학부) 교수직을 사임하고 상경하여 뷰로에 참여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그는 대중 운동과의 결합보다 당 재건을 우선시하는 '분리⇒결합론'(후쿠모토 이즘)을 주장했고, 이는 뷰로 내에서 급속도로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 과정에서 아라하타 칸손은 후쿠모토 가즈오 이론의 신봉자들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고, 공산당과 거리를 두며 야마카와 히토시 등의 그룹에 접근했다.
같은 해 연말, 고시키 온천에서 일본공산당 재건 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이때 중심이 된 사람들은 모두 후쿠모토 가즈오의 사상에 강하게 영향을 받은 이들이었다.
2. 1. 잔무 정리 위원회로서의 뷰로 (1924년 3월 - 1925년 8월)
1924년 3월, 일본공산당은 '모리가사키 회의'에서 해산을 결정했다. 이때 해산에 반대한 것은 아라하타 칸손 정도였다. 동시에 당 재건 가능성을 고려하여 잔무 정리를 위한 사무국인 "뷰로"가 설치되었다. 뷰로는 아오노 키요시, 사노 후미오, 기타하라 타츠오, 도쿠다 큐이치 4명으로 구성되었다.야마카와 히토시는 방향 전환론을 주장하며 뷰로와 거리를 두었고, 이는 이후 노농파 형성으로 이어졌다.
2. 2. 코민테른의 지시와 뷰로의 역할 변화 (1925년 1월 - 1926년 12월)
1924년 5월, 코민테른 제5회 대회에서 일본 대표 가타야마 센(재소련)과 부대표 사노 마나부, 도쿠다 큐이치, 곤도 에이조 3명은 일본공산당 해산을 보고했지만, 코민테른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즉시 당 재건을 지시했다. 1925년 1월, 보이틴스키는 코민테른 극동 섹션의 상하이 회의를 소집하여, 사노 마나부, 도쿠다 큐이치, 사노 후미오, 아오노 키요시, 아라하타 칸손이 참가한 가운데 '1월 테제'(상하이 테제)를 작성하고 공산당 재건을 결정했다. 이 결과, 본래 '잔무 정리 위원회'였던 뷰로는 재건 조직으로 바뀌었다.3. 뷰로의 재편과 일본공산당 재건 (1925년 8월 - 1926년 12월)
1925년 1월,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보이틴스키가 상하이에서 극동 섹션 회의를 소집하고, 사노 마나부, 도쿠다 큐이치, 사노 후미오, 아오노 스에요시, 아라하타 칸손 등이 참가하여 "1월 테제"(상하이 테제)를 작성, 일본공산당 재건을 결정했다. 이로써 본래 잔무 정리 위원회였던 뷰로는 재건 조직으로 개편되었다.
같은 시기, 뷰로와 별도로 사노 마나부, 이치카와 쇼이치, 기타우라 센타로 등이 당 재건을 목표로 "공산주의자 그룹"을 결성했다. 1925년 8월 "확대 회의"가 개최되었고, 이들 그룹은 "재건 뷰로" (혹은 "커뮤니스트 뷰로")로 재편되었다. 재건 뷰로의 위원장에는 도쿠다가, 정치부장에는 사노 마나부가, 청년부장에는 기타우라가, 간사이 담당에는 아라하타가 취임했다.
3. 1. 후쿠모토 이즘의 영향과 아라하타 칸손의 이탈
1926년 봄,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신진 경제학자·후쿠모토 가즈오가 야마구치 고상 (현 야마구치 대학 경제학부) 교수를 사직하고 상경하여 뷰로에 참가하자, 그가 제창하는 후쿠모토 이즘 ("분리⇒결합론")이 급속히 영향을 확대되었다. 후쿠모토 이즘은 대중 운동과의 결합보다 당 재건을 중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아라하타 칸손은 후쿠모토 이론의 신봉자로부터 강하게 비판을 받아, 일본공산당과의 거리를 두고 야마카와 등의 그룹에 접근하게 되었다. 그해 연말, 고시키 온천에서 일본공산당 재건 대회가 개최되었지만, 이때 중심이 된 사람들은 모두 후쿠모토의 강한 사상적 영향 하에 있는 사람들이었다.4. 관련 단체 및 인물
- 일본공산 청년동맹 (공청)
- 일본노동조합평의회 (평의회)
-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전협)
- 전국농민조합전국회의파 (전농전회파)
- 학생연합회 (학련)
- 전일본 무산자 예술 연맹 (납)
-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화 연맹 (콥)
- 프롤레타리아 과학 연구소 (프로과)
- 재일본 조선노동총동맹
- 전국수평사 청년동맹
- 대만공산당
- 노동농민당 (노농당)
- 일본 적색 구원회
- 산업노동조사소
5. 같이 보기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