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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우에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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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리우에가 전투는 1710년 스페인 계승 전쟁 중 벌어진 전투로, 동맹군이 마드리드를 점령한 후 퇴각하는 과정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에 의해 영국군이 포위되어 항복한 사건이다. 방돔 공작이 이끄는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은 빠른 속도로 영국군을 추격하여 브리우에가에서 영국군을 포위 공격했다. 영국군은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결국 항복했고, 이 패배는 이후 비야비시오사 전투로 이어졌다. 이 전투의 결과는 영국 정부가 우트레히트 조약을 통해 프랑스와 평화를 모색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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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우에가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 명칭브리우에가 전투
관련 전쟁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날짜1710년 12월 8일 – 9일
장소스페인 과달라하라 주 브리우에가
좌표40°46′N 2°52′W
결과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프랑스 왕국
교전국 2스페인 왕국 (부르봉 왕조)
교전국 3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지휘관 및 지도자
프랑스방돔 공작 루이 조제프 드 부르봉
영국제임스 스탠호프 (항복)
영국찰스 윌스 (항복)
병력 규모
프랑스-스페인 연합군10,000명
영국군4,000명
피해 규모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사망 또는 부상 1,200명
영국군사망 600명, 부상 또는 포로 3,400명

2. 배경

알메나라 전투(7월 27일)와 사라고사 전투(8월 20일)에서 연이어 승리한 카를 대공 지지 동맹군은 마드리드를 두 번째로 점령했다. 9월 21일, 카를 대공은 마드리드에 입성했다.

그러나 1710년의 마드리드 공략은 1706년의 상황과 같았다. 23,000명의 동맹군은 알메나라와 사라고사 작전으로 2천 명을 잃었고, 게릴라와의 소규모 접전으로 인한 사상자와 질병으로 인해 두 카스티야 지방을 점령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포르투갈은 이 상황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

펠리페 5세의 할아버지 루이 14세는 방돔 공작에게 아일랜드 여단과 함께 비밀리에 스페인군을 지도할 수 있도록 일부 프랑스인을 데리고 오게 했다. 이들은 스페인군의 장교가 되어 무너진 스페인 군대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동맹군은 주민 대부분이 떠난 마드리드에 주둔한 동맹군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11월 9일, 그들은 마드리드를 버리고 카탈루냐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카를 대공은 2,000명의 기병대와 함께 서둘러 바르셀로나로 물러났다. 나머지 병력은 군량 확보의 어려움으로 둘로 나뉘어 진군했다. 12,000명의 주력을 지휘하던 구이도 슈타렘베르크는 스태너프 경이 지휘하는 5,000명의 영국군보다 하루 앞서 출발했다. 이러한 배치는 스페인군을 지휘하는 장군이 현 상황을 이용할 줄 아는 방돔이라는 데서 재난을 불러왔다.

3. 전투

방돔 공작은 탈라베라에서 군대를 이끌고 출발하여, 겨울 스페인 기준으로는 매우 빠른 속도로 영국군을 추격했다. 그는 항상 그랬듯이 기병 선두에 서서 불어난 에나레스 강을 헤엄쳐 건너며, 며칠 만에 스탠홉이 이끄는 대동맹군 좌익을 브리우에가에서 따라잡았다.[1]

스탠홉은 “나를 포함해 아무도 그들이 며칠 만에 따라잡을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우리의 불행은 그들의 군대가 보여준 놀라운 근면성 때문이다”라고 말했다.[1]

3. 1. 전투 과정

방돔 공작은 탈라베라에서 군대를 이끌고 출발하여, 겨울 스페인 기준으로는 매우 빠른 속도로 영국군을 추격했다. 그는 항상 그랬듯이 기병 선두에 서서 불어난 에나레스 강을 헤엄쳐 건너며, 며칠 만에 스탠홉을 추월했다. 스탠홉은 이때 대동맹군 좌익과 함께 브리우에가에 있었다.[1]

스탠홉은 “나를 포함해 아무도 그들이 며칠 만에 따라잡을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우리의 불행은 그들의 군대가 보여준 놀라운 근면성 때문이다”라고 말했다.[1]

3. 1. 1. 포위

방돔은 탈라베라에서 군대를 이끌고 퇴각하는 동맹군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밤낮으로 진군하여 범람하는 헤나레스 강을 건너 며칠 후 브리우에가에서 동맹군 좌익을 담당하던 스태너프를 따라잡았다.[1]

영국 장군 스태너프는 적들이 며칠간의 행군으로 매우 지쳤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동맹군의 불운은 적들이 보여준 놀라운 근면함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스태너프는 방돔이 12월 8일 저녁에 나타나기 전 브리우에가에 일부 부대를 남겨놓은 군대의 주력에게 메시지를 보낼 시간밖에 없었다.[1]

다음 날 아침 도시는 사방에서 포위되었고, 성벽은 포격을 받았다. 갱도가 문 아래에 나타났다. 영국군은 적군의 화약이 다할 때까지 끔찍한 포격을 견뎌냈다. 압도적인 적군에 대항하여 절망적인 육박전을 벌였고, 적군이 점거한 집들을 불태웠으나 소용없었다. 영국 장군은 더 이상의 저항은 오직 시체만 늘릴 뿐이라고 판단하여 항복을 결심했다. 그의 용맹한 병사들은 포로가 되었으나 명예롭게 대우받았다.[1]

3. 1. 2. 영국군의 저항

"저와 함께 있던 아무도," 영국군 장군 스태너프는 말했다. "그들이 며칠 행군 거리 안에 있다고는 상상하지 못했고, 우리의 불행은 그들의 군대가 보인 놀라운 속도 때문입니다."[1] 스태너프는 방돔이 12월 8일 저녁에 그에게 덮치기 전에, 브리우에가에서 몇 리그 떨어진 군대 중앙으로 급히 사자를 보낼 시간밖에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도시는 사방에서 포위되었다.

무거운 대포로 브리우에가의 성벽을 파괴하고, 한 문 아래에 지뢰를 설치했다. 영국군은 화약이 다 떨어질 때까지 맹렬한 사격을 유지했다. 그들은 압도적인 수에 맞서 필사적으로 싸웠고, 도시로 진입하는 방돔의 군대에 총검 돌격을 가하여, 거리마다 피비린내 나는 근접전을 벌였다. 영국군은 적이 점령한 건물에 불을 질렀지만 소용없었다. 영국군 장군은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한 학살만 초래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항복을 결정했고, 그의 군대는 명예로운 조건으로 전쟁 포로가 되었다.

3. 1. 3. 항복

스탠홉은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한 학살만 초래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항복을 결정했다. 그의 군대는 명예로운 조건으로 전쟁 포로가 되었다.[1]:295:342

4. 영향

영국군은 오랫동안 포로로 남아 있지 않았고, 1711년 10월에 포로 교환으로 귀국했다.[1]

이 패배는 하리 정부가 우트레히트 조약에서 프랑스와 타협적인 평화를 맺으려는 계획을 정당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 거래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스페인을 제외한 평화는 없다"는 명분으로 항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은 철수했으며, 최종 작전은 1714년 바르셀로나 공성전에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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