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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 규칙과 사적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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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트겐슈타인 규칙과 사적 언어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에서 제시된 규칙 따르기 역설과 사적 언어 논증을 다룬다. 규칙 따르기 역설은 언어 사용에 있어서 규칙이 어떻게 적용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며, 크립키는 이 역설을 수학적 예를 들어 설명한다. 크립키는 'quus' 함수를 제시하며, 과거의 덧셈 경험만으로는 125가 답이라는 것을 보장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크립키는 비트겐슈타인이 회의주의적 해결책을 제시한다고 보았으며, 맥도웰은 비트겐슈타인이 이해와 해석을 동일시하여 역설을 거부한다고 주장한다. 윌슨은 크립키의 해석을 의미론적 실재론과 양립 가능하다고 보았으며, 친숙성 개념을 통해 이를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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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 규칙과 사적 언어 - [서적]에 관한 문서
서지 정보
제목규칙과 사적 언어에 대한 비트겐슈타인
원제Wittgenstein on Rules and Private Language
저자사울 A. 크립키
삽화가해당 사항 없음
표지 미술가해당 사항 없음
국가미국
언어영어
시리즈해당 사항 없음
주제언어 철학
출판사하버드 대학교 출판부
출판일1982년
영어 출판일해당 사항 없음
미디어 유형해당 사항 없음
쪽수150쪽
ISBN0-674-95401-7
OCLC해당 사항 없음
선행 작품해당 사항 없음
후속 작품해당 사항 없음

2. 크립켄슈타인: 크립키의 비트겐슈타인 해석

크립키는 자신의 저서에서 비트겐슈타인의 '규칙 따르기' 개념을 독자적으로 해석하여 제시했다. '크립켄슈타인'은 크립키의 해석에 따라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이해하는 가상의 인물을 지칭한다. 대부분의 논평가들은 크립키가 제시한 대로 《철학적 탐구》에 규칙을 따르기 역설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크립키의 회의적인 해결책을 비트겐슈타인의 탓으로 돌리는 데는 거의 동의하지 않았다. 크립키는 자신의 책이 비트겐슈타인의 견해를 정확하게 요약하려는 시도로 읽혀서는 안 되며, 오히려 "크립키에게 문제를 제기한 것처럼"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에 대한 설명으로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7]

2. 1. 크립키 해석에 대한 논란

대부분의 논평가들은 크립키가 제시한 대로 《철학적 탐구》에 규칙을 따르기 역설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크립키의 회의적인 해결책을 비트겐슈타인의 탓으로 돌리는 데는 거의 동의하지 않았다. 크립키는 자신의 책이 비트겐슈타인의 견해를 정확하게 요약하려는 시도로 읽혀서는 안 되며, 오히려 "크립키에게 문제를 제기한 것처럼"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에 대한 설명으로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1] 혼성어 '''"크립켄슈타인"'''은 《철학적 탐구》에 대한 크립키의 해석이 표현하는 견해를 가진 가상의 인물을 지칭하는 용어로 만들어졌다. 이러한 방식으로 크립키 자신의 견해,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비트겐슈타인의 견해, 그리고 크립켄슈타인의 견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편리하다. 비트겐슈타인 학자 데이비드 G. 스턴은 크립키의 책을 1980년대 이후 비트겐슈타인에 관한 가장 영향력 있고 널리 논의된 작품으로 간주한다.[1]

3. 규칙 따르기 역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 §201a에서 규칙 따르기 역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어떤 행위 과정도 규칙에 의해 결정될 수 없다. 왜냐하면 어떤 행위 과정도 그 규칙에 부합하도록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1] 즉, 규칙 자체가 그 규칙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 명확하게 지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설은 규칙의 해석에 관한 문제로 이어진다. 규칙을 따르기 위해서는 규칙을 해석해야 하지만, 그 해석 자체가 또 다른 규칙을 필요로 한다. 이 과정은 무한히 반복될 수 있으며, 결국 규칙 따르기는 불확실하고 자의적인 행위가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어떤 해석도 그것이 해석하는 것과 함께 여전히 공중에 떠돌고 있으며, 그것을 뒷받침할 수 없다. 해석 자체는 의미를 결정하지 않는다."(''철학적 탐구'' §198a)라고 말한다.[1]

(하위 섹션에서 크립키의 수학적 예시와 언어 적용 문제가 상세하게 설명되므로, 여기서는 간략하게 언급만 한다.)

3. 1. 크립키의 수학적 예시

크립키는 비트겐슈타인의 규칙 따르기 역설을 설명하기 위해 수학적 예시를 제시한다. 57보다 크거나 같은 숫자를 더한 적이 없는 사람이 '68 + 57'을 계산하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가정해 보자. 이 사람은 이전처럼 덧셈 함수를 적용하여 125라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이때 회의론자가 나타나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 있다.

# 125가 정답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 과거의 덧셈 경험은 '덧셈'이 아닌 다른 규칙을 따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회의론자는 이전에 57 이상의 숫자를 더한 적이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따라서 과거의 덧셈은 '덧셈' 함수가 아닌 'quus' 함수를 따랐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quus' 함수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x\text{ quus }y= \begin{cases} x+y & \text{for }x,y <57 \\[12pt] 5 & \text{for } x\ge 57 \text{ or } y\ge57 \end{cases}

즉, 두 숫자 중 하나라도 57 이상이면 결과는 항상 5가 된다. 회의론자는 57보다 큰 수를 더한 경험이 없으므로, 과거의 덧셈이 'quus' 함수를 따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68 + 57'의 답은 125가 아니라 5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덧셈 함수의 과거 사용이 무한히 많은 다른 'quus'와 같은 해석에 취약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새로운 덧셈을 할 때마다 엄격한 규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어둠 속에서 임의로 선택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크립키의 예시는 수학에서 표현식 사용 규칙이 명확하게 정의된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 함수의 수학적 타당성이 아니라, "plus"라는 단어가 수학적 함수 '+'를 지칭한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지, 즉 메타 언어적 사용에 대해 질문한다.

3. 2. 'Quus' 함수

크립키는 '+'(덧셈)와는 다른 'quus' 함수를 정의하여, 과거의 덧셈 경험이 '+' 규칙이 아닌 다른 규칙을 따랐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x\text{ quus }y= \begin{cases} x+y & \text{for }x,y <57 \\[12pt] 5 & \text{for } x\ge 57 \text{ or } y\ge57 \end{cases}

이 함수에 따르면, 두 수 중 하나라도 57 이상이면 결과는 5가 된다. 예를 들어, 이전에는 57보다 큰 수를 더한 적이 없다면, 68 + 57의 답은 125가 아닌 5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과거의 덧셈 경험이 '+' 함수가 아닌 'quus' 함수를 따랐을 가능성을 보여준다.[1]

3. 3. 언어 적용의 문제

비트겐슈타인은 ''철학 탐구'' §201a에서 규칙 따르기 역설을 다음과 같이 명시한다. 크립키는 이 결론에 이르는 추론을 설명하기 위해 수학적 예를 사용한다. 57보다 큰 숫자를 더한 적이 없다고 가정하고, 68 + 57 계산을 요청받았을 때, 우리는 이전처럼 덧셈 함수를 적용하여 125가 정답이라고 계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회의론자는 이전에 57 이상의 숫자를 더한 적이 없으므로, 125를 정답으로 결정하는 덧셈 함수를 과거에 사용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한다.[1]

회의론자는 "plus"의 이전 사용이 "quus" 함수와 완벽하게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quus" 함수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x\text{ quus }y= \begin{cases} x+y & \text{for }x,y <57 \\[12pt] 5 & \text{for } x\ge 57 \text{ or } y\ge57 \end{cases}

즉, quus 함수에서 더한 두 숫자 중 하나가 57 이상이면 합은 5가 된다. 회의론자는 57보다 큰 숫자를 더한 적이 없고 이전의 모든 덧셈이 덧셈 함수 대신 quus 함수와 호환되기 때문에, 125가 아닌 5로 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덧셈 함수의 과거 사용은 무한한 수의 다른 quus와 같은 해석에 취약하다. 따라서 "plus"의 모든 새로운 적용은 엄격하고 모호하지 않은 규칙에 의해 통제되기 보다는 어둠 속의 도약처럼 보인다.[1]

이러한 회의적 추론은 인간 언어의 모든 단어에 적용될 수 있다. 크립키의 예시는 수학에서 표현식 사용 규칙이 명확하게 정의된 것처럼 보이는 경우에도, "plus"가 수학적 함수 "+"를 참조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실을 지적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1] 규칙을 해석하기 위한 규칙도 다른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어떤 해석도 그것이 해석하는 것과 함께 여전히 공중에 떠돌고 있으며, 그것을 뒷받침할 수 없다. 해석 자체는 의미를 결정하지 않는다."(''철학적 탐구'' §198a)라는 비트겐슈타인의 결론에 이르게 된다.[1]

4. 크립키의 회의주의적 해결책

크립키는 데이비드 흄을 따라 회의주의적 역설에 대한 해결책을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하나는 역설로 이어지는 전제들을 거부하여 역설을 해소하는 정통적 해결책이고, 다른 하나는 역설의 진실성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이 우리의 통상적인 믿음과 관행을 훼손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회의주의적 해결책이다. 크립키는 비트겐슈타인이 회의주의적 역설을 지지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이 정통적인 해결책이 아닌 회의주의적 해결책을 제시한다고 해석한다.[8]

규칙 준수 역설은 어떤 표현이나 문장이 의미하는 바와 같은 것이 없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에 의미에 관한 우리의 통상적인 믿음과 관행을 위협한다. 존 맥도웰은 우리가 의미를 계약적인 용어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개"라는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면, 고양이가 아닌 개를 지칭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규칙 준수 역설이 보여주듯이, 단어 사용을 지배하는 규칙이 없다면 의미에 대한 직관적인 개념은 훼손된다.

크립키는 언어 사용자가 규칙을 올바르게 따르는 것은, 특정 경우에 규칙의 후보 적용과 추정되는 규칙 자체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어떤 사실에 의해서도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한 해결책이 회의주의적 해결책이라고 보았다. 오히려 규칙을 따르고 있다는 주장은 (후보 규칙 준수자에 의한) 규칙 준수 후보 인스턴스 주변의 행동이 다른 언어 사용자의 기대를 충족한다는 사실에 의해 정당화된다.

4. 1. 흄의 영향

데이비드 흄의 회의주의적 역설에 대한 해결책은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정통적인 해결책은 역설로 이끄는 전제 중 하나 이상을 거부하여 역설을 해소한다. 반면, 회의주의적 해결책은 역설의 진실성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이 우리의 통상적인 믿음과 관행을 훼손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크립키는 비트겐슈타인이 회의주의적 역설을 지지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이 정통적인 해결책이 아닌 회의주의적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견해를 옹호한다.[2]

크립키의 회의주의적 해결책에 따르면, 언어 사용자가 규칙을 올바르게 따르는 것은, 특정 경우에 규칙의 후보 적용과 추정되는 규칙 자체 사이의 관계에 대해 발생하는 어떤 사실에 의해서도 정당화되지 않는다. 이는 데이비드 흄의 경우에서처럼, 두 사건 ''a''와 ''b'' 사이의 인과적 연결이 ''분리된 상태''로 취해진 그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어떤 특정 사실에 의해서도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오히려, 규칙을 따르고 있다는 주장은 (후보 규칙 준수자에 의한) 규칙 준수의 후보 인스턴스 주변의 행동이 다른 언어 사용자의 기대를 충족한다는 사실에 의해 정당화된다. 이 해결책은 의미, 해석 또는 의도의 어떤 정신 상태에 근거한 것과 같이 추정되는 규칙 준수의 ''특정 인스턴스''에 대한 사실에 근거하지 않으므로, 크립키가 명시한 의미에서 회의주의적이다.

4. 2. 사적 언어 논증과의 관계

크립키는 비트겐슈타인의 사적 언어 논증이 《철학적 탐구》 §243 이후가 아니라 §202에 명시적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한다.[9] §202는 "따라서 '사적으로' 규칙을 따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규칙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규칙을 따르는 것과 같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즉, 언어의 의미는 개인의 내면이 아닌, 공동체 내에서의 사용 맥락에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크립키는 규칙 따르기 논증과 사적 언어 논증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규칙 준수 역설은 표현이나 문장의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암시하여 의미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인 믿음을 위협한다. 존 맥도웰은 이를 의미를 계약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특정 단어 사용을 강제한다고 여기지만, 규칙 준수 역설은 이러한 직관을 훼손시킨다고 설명한다.

크립키는 비트겐슈타인이 회의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고 보았다. 언어 사용자가 규칙을 올바르게 따르는 것은 규칙 자체와의 관계가 아닌, 다른 언어 사용자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행동에 의해 정당화된다. 이는 의미가 정신 상태에 기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회의적인 해결책이다.[10]

5. "직선적" 해결책과 비판

존 맥도웰크립키가 제시한 회의주의적 해결책에 대해 비판하며, 비트겐슈타인이 "정공법적 해결책"을 제시했다고 해석한다.[5] 맥도웰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은 역설을 제시하지만, 이해와 해석을 동일시함으로써 그 역설을 거부한다. 무언가를 이해하려면 해석이 필요하며, 이는 회의론이나 상대주의로 이어진다.

맥도웰은 규칙 준수를 관습이나 관행에 주입된 결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덧셈을 이해하는 것은 덧셈 연습에 주입된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맥도웰의 입장은 "반(反)실재론"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5. 1. 존 맥도웰의 비판

맥도웰은 비트겐슈타인이 역설을 제시한다고 주장하지만(크립키가 주장하는 것처럼), 비트겐슈타인이 이해와 해석을 동일시한다는 이유로 역설을 거부한다고 주장한다. 무언가를 이해하려면 해석이 있어야 한다. 즉, "더하기"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려면 먼저 "더하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해석이 있어야 한다. 이는 회의론—어떻게 당신의 해석이 올바른 해석인지 아는가?—또는 상대주의로 이어진다.[5] 상대주의에 따르면 우리의 이해, 즉 해석은 우리가 그것들을 사용해왔다는 범위 내에서만 결정된다. 크리스핀 라이트의 해석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지지하는 이 후자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수의 덧셈에 대한 사실은 없으므로, 우리가 그러한 상황에 직면할 때, 우리는 우리의 해석을 더 발전시킬 수 있다. 맥도웰에 따르면, 이 두 가지 대안 모두 상당히 만족스럽지 않다. 후자의 대안은 우리가 아직 더해지지 않은 숫자에 대한 사실이 있다고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맥도웰은 또한 규칙 준수를 이해하기 위해 이를 관습이나 실천의 주입의 결과로 이해해야 한다고 썼다. 따라서 덧셈을 이해하는 것은 단순히 덧셈의 실천에 주입된 것이다. 이 입장은 종종 "반-반-실재론"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그가 규칙 준수 역설과 같은 회의론적 논증의 결과가 철학적 이론을 실재론으로 유혹하여 대담한 형이상학적 주장을 펼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맥도웰은 정공법적 해결책을 제시하므로, 규칙 준수 역설을 실재론과 양립하게 만드는 것은 의미는 종종 사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비트겐슈타인의 기본적인 요점을 놓치는 것이다. 이는 철학적 이론이 단지 양분법만을 초래하며 의미 이론의 개념은 무의미하다는 견해인 고요주의와 일치한다.[5]

5. 2. 크리스핀 라이트의 해석

크리스핀 라이트는 맥도웰과 유사하게, 우리의 이해와 해석은 우리가 사용한 범위 내에서 결정되며, 새로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 우리의 해석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5] 라이트의 해석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지지하는 이 견해에 따르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수의 덧셈에 대한 사실은 없으므로, 그러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해석을 더 발전시킬 수 있다.

5. 3. 침묵주의 (Quietism)

맥도웰은 철학적 이론이 양분법만을 초래하며 의미 이론의 개념은 무의미하다는 고요주의와 일치한다고 본다.[5] 그는 회의론적 논증의 결과가 규칙 따르기 역설의 경우처럼 철학적 이론을 실재론으로 유인하여 대담한 형이상학적 주장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맥도웰은 직선적인 해법을 제시하므로, 규칙을 따르는 역설을 실재론과 양립시키는 것은 의미가 사용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기본 요점을 놓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6. 의미론적 실재론과 크립켄슈타인

조지 M. 윌슨은 크립켄슈타인을 의미론적 실재론과 양립할 수 있는 철학적 입장으로 제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6] 윌슨에 따르면 크립키의 회의론자는 급진적 회의론적 결론(RSC)에 동의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기본 회의론적 결론(BSC)을 받아들이고 RSC를 반박한다.

윌슨은 크립키가 비트겐슈타인을 해석하며 제시하는 '친숙성' 개념을 통해, 화자 S가 용어 T를 사용할 때 그 정확성은 S에 관한 사실이나 T와 대상 간의 일치에 의해서가 아니라, T가 다른 유사한 대상들을 술어하기 위해 사용되는 친숙성에 근거한다는 환원 불가능한 사실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 이 친숙성은 S와 독립적이며 외부적이어서 의미론적 실재론의 근거가 된다. 그럼에도 윌슨이 제시한 실재론은 최소한으로, 맥도웰의 비판을 부분적으로 수용한다.

6. 1. 기본 회의론적 결론 (BSC)과 급진적 회의론적 결론 (RSC)

조지 M. 윌슨은 크립켄슈타인을 의미론적 실재론과 양립하는 철학적 입장으로 제시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주장한다.[6] 이는 규칙 따르기 역설의 결과로 나타나는 두 종류의 결론을 구분함으로써 가능한데, 화자 S가 용어 T를 사용할 때 이를 통해 설명된다.

  • BSC (기본 회의론적 결론): S가 T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정확성 기준을 고정하는 S에 관한 어떤 사실도 존재하지 않는다.

  • RSC (급진적 회의론적 결론): 아무도 어떤 용어에 의해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윌슨은 크립키의 회의론자가 실제로 RSC에는 동의하지만, 크립키는 비트겐슈타인이 BSC를 받아들이고 RSC를 반박하는 것으로 읽는다고 주장한다. 윌슨은 이것이 친숙성의 개념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S가 T를 사용할 때, 그 정확성은 S에 관한 사실에 의해 결정되지 않으며(규칙 따르기 역설을 수용), T와 용어 대상 간의 일치에 의해서도 결정되지 않는다(대응 이론의 생각을 부정). 대신, T가 다른 유사한 대상들을 술어하기 위해 사용되는 친숙성에 근거한다는 환원 불가능한 사실에 의해 결정된다. 이 친숙성은 S와 독립적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외부적이며, 친숙성을 의미론적 실재론의 근거로 만든다.

그럼에도 윌슨이 제시한 실재론은 최소한으로, 맥도웰의 비판을 부분적으로 수용한다.

6. 2. 친숙성 개념

조지 M. 윌슨은 크립켄슈타인을 의미론적 실재론과 양립하는 철학적 입장으로 제시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주장한다.[6] 이는 규칙 따르기 역설의 결과로 나타나는 두 종류의 결론을 구분함으로써 가능한데, 화자 S가 용어 T를 사용할 때 이를 통해 설명된다.

  • BSC (기본 회의론적 결론): S가 T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정확성 기준을 고정하는 S에 관한 어떤 사실도 존재하지 않는다.

  • RSC (급진적 회의론적 결론): 아무도 어떤 용어에 의해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윌슨은 크립키의 회의론자가 실제로 RSC에 동의하지만, 크립키는 비트겐슈타인이 BSC를 받아들이고 RSC를 반박하는 것으로 읽는다고 주장한다. 윌슨은 이것이 친숙성의 개념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S가 T를 사용할 때, 그 정확성은 S에 관한 사실에 의해 결정되지 않으며(규칙 따르기 역설을 수용), T와 용어 대상 간의 일치에 의해서도 결정되지 않는다(대응 이론의 생각을 부정). 대신, T가 다른 유사한 대상들을 술어하기 위해 사용되는 친숙성에 근거한다는 환원 불가능한 사실에 의해 결정된다. 이 친숙성은 S와 독립적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외부적이며, 친숙성을 의미론적 실재론의 근거로 만든다.

그럼에도 윌슨이 제시한 실재론은 최소한으로, 맥도웰의 비판을 부분적으로 수용한다.

7. 한국 사회에 대한 함의

(이전 출력이 비어 있으므로, 수정할 내용이 없습니다. 원본 소스와 요약이 제공되면 해당 내용을 바탕으로 위키텍스트를 작성하겠습니다.)

참조

[1] 서적 Wittgenstein's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An Introduc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6
[2] 서적 Saul Kripke McGill-Queen's University Press 2004
[3] 서적 Wittgenstein on rules and private language : an elementary exposition Blackwell 2004
[4] 서적 Wittgenstein on rules and private language : an elementary exposition Blackwell 2004
[5] 간행물 Wittgenstein on following a Rule https://doi.org/10.1[...] 1984-03
[6] 간행물 Semantic Realism and Kripke's Wittgenstein 1998-03
[7] 서적 Wittgenstein's Philosophical Investigations: An Introduc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6
[8] 서적 Saul Kripke McGill-Queen's University Press 2004
[9] 서적 Wittgenstein on rules and private language : an elementary exposition Blackwell 2004
[10] 서적 Wittgenstein on rules and private language : an elementary exposition Blackwell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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