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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와 요리미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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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와 요리미즈는 1577년에 태어나 1641년에 사망한 인물로, 스와 대사 오호리 직을 물려받아 스와 가문을 계승했다. 그는 오다와라 정벌과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하고, 도쿠가와 히데타다 군을 따라 시나노 국과 고즈케 국의 수비를 맡았다. 이후 스와 번으로 복귀하여 번정을 안정시키는 데 힘썼으며, 오사카 전투에서는 고후 성을 수비했다. 그는 정치 수완이 뛰어나 번정을 안정시키고 백성들의 평판이 좋았으나, 영명사 사건을 통해 강인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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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와 요리미즈
기본 정보
씨명스와 씨
이름스와 요리미즈
로마자 표기Suwa Yorimizu
가명고타로
계명없음
묘소나가노현지노시의 요리다케지
생몰
출생겐키 원년 12월 23일 (1571년1월 18일)
사망간에이 18년 1월 14일 (1641년2월 23일)
관직
관위종5위 하, 이나바노카미
막부에도 막부
주군도쿠가와 이에야스 → 히데타다이에미쓰
고즈케소자 번 번주 → 시나노스와 번 번주
가계
씨족스와 씨
부모아버지: 스와 요리타다, 어머니: 리쇼인 (향산 씨)
형제자매요리미즈, 요리사다, 요리오, 요리히로, 요리모리
배우자데쇼인 (혼다 야스시게의 장녀)
자녀다다요리(다다쓰네), 요리사토, 요리나가, 요리타다, 딸 (도키 사다요시 정실), 딸 (사에구사 모리마사 정실), 딸 (오쿠보 나가시게 정실), 딸 (도쿠나가 마사시게 정실), 딸 (도리이 다다카쓰 실), 딸 (지노 요리요시 실), 딸 (스와 모리마사 실), 딸 (스와 요리히로 실)
경력
스와 씨 당주1592년 ~ 1640년
소자 성 성주 (스와 가)1592년 ~ 1601년
스와 번 번주 (스와 가)1601년 ~ 1640년

2. 생애

스와 요리미즈는 1577년(덴쇼 5년) 6세의 나이로 아버지 요리타다에게서 스와 대사의 오호리(대사) 직을 물려받았다.[1]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히데타다 군에 속해 시나노 국과 고즈케 국의 수비를 맡았고, 제2차 우에다 합전 이후 우에다 성 접수 역할을 수행하는 등의 공을 세워 1601년(게이초 6년) 시나노 국 다카시마 2만 7,000석으로 복귀했다.[1]

1614년(게이초 19년)부터 벌어진 오사카의 진에서는 고후 성 수비를 맡았고, 1616년(겐나 2년)에는 개역마쓰다이라 다다테루의 신병을 맡아 다카시마 성에 구획을 증설하여 그를 유폐하고 평생 보살폈다.[1] 1634년(간에이 11년)에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에게 신임을 받았으며,[1] 1640년(간에이 17년) 아들 요리타다(요리쓰네)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한 뒤 다음 해인 1641년(간에이 18년) 72세로 사망했다.[1]

2. 1. 초기 생애와 스와 가문의 계승

스와 요리미즈는 1577년 (덴쇼 5년) 6세의 나이로 아버지 요리타다에게서 스와 대사의 오호리(대사) 직을 물려받았다.[1] 1590년 (덴쇼 18년)에는 아버지와 함께 오다와라 정벌에 참전하였다.[1] 이후 주군인 도쿠가와 씨가 간토 지방으로 이봉되면서 요리타다 부자는 스와를 떠나 간토로 이주하여 무사시 국 나라나시에 영지를 받았다.[1] 이듬해 고즈케 국 소샤로 이봉되었고, 같은 해에 아버지로부터 가독을 상속받았다.[1]

2. 2. 고즈케 소샤 번주 시대

덴쇼 18년(1590년), 아버지와 함께 오다와라 정벌에 종군했다. 주가인 도쿠가와 씨가 간토로 이봉되면서, 요리타다 부자는 스와를 떠나 간토로 이주하여 무사시 국 나라나시에 소령을 받았다. 그 이듬해 고즈케 국 소샤로 이봉되었고, 같은 해에 아버지로부터 가독을 물려받았다.[1]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히데타다 군을 따라 시나노 국과 고즈케 국의 수비를 명받았다.[1] 제2차 우에다 합전 후에는 우에다 성 접수 역할을 수행했다.[1]

2. 3. 스와 번 복귀와 번정 안정

스와 요리미즈는 덴쇼 18년(1590년) 아버지와 함께 오다와라 정벌에 종군했다. 주군인 도쿠가와 씨가 간토로 이봉되면서, 요리미즈 부자는 스와를 떠나 간토로 이주하여 무사시 국 나라나시에 소령을 받았다. 이듬해 고즈케 국 소샤로 이봉되었고, 같은 해에 아버지로부터 가독을 물려받았다.[1]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히데타다 군을 따라 시나노 국과 고즈케 국의 수비를 맡았다. 제2차 우에다 합전 후에는 우에다 성의 접수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공적으로 게이초 6년(1601년) 10월, 스와 씨의 본거지인 시나노 국 다카시마 2만 7,000석으로 복귀했다.[1]

게이초 19년(1614년)부터 오사카의 진에서 고후 성 수비를 명받았으며, 장남 요리타다가 스와 군을 이끌고 출병했다. 요리미즈는 겨울의 진 때 자신이 성의 루스이(留守居, 유수) 등 한직에 머물러 있는 것에 불만을 품고, 여름의 진에서는 오사카로 종군하게 해달라고 청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고, 여름의 진 때도 고후 성의 수비를 명받았다.[1]

겐나 2년(1616년), 개역마쓰다이라 다다테루의 신병을 맡게 되었다. 다다테루 유폐를 위해 다카시마 성에 구획을 하나 증설했고, 스와 가는 다다테루의 보살핌을 평생 보게 되었다. 간에이 11년(1634년), 제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로부터 술잔과 향응을 받을 정도로 신임을 받았다.[1]

2. 4. 오사카 전투와 고후 성 수비

게이초 19년(1614년)부터 오사카의 진이 벌어졌는데, 요리미즈는 고후 성 수비를 명받았고, 장남 요리타다가 스와 군을 이끌고 출병했다. 요리미즈는 겨울의 진 때 자신이 성을 지키는 루스이(留守居, 유수)와 같은 한직에 머물러 있는 것에 불만을 품고, 여름의 진에서는 오사카로 종군하게 해달라고 청했지만 이루어지지 못하고, 여름의 진 때도 고후 성 수비를 명받았다.

2. 5. 마쓰다이라 다다테루 유폐와 말년

겐나 2년 (1616년), 개역마쓰다이라 다다테루의 신병을 맡게 되었다.[1] 다다테루 유폐를 위해 다카시마 성에 구획을 하나 증설했고, 스와 가는 다다테루를 평생 보살피게 되었다.[1] 간에이 11년 (1634년), 제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로부터 술잔과 향응을 받을 정도로 신임을 받았다.[1] 간에이 17년 (1640년), 요리타다(요리쓰네)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하였으며,[1] 다음 해인 간에이 18년 1월 14일 (1641년 2월 23일) 72세로 사망했다.[1]

3. 인물됨과 일화

스와 요리미즈는 뛰어난 정치 수완으로 번정 안정에 힘썼으며, 가신과 영민들에게 평판이 좋았다. 전 영주의 "칠공삼민"[1]과 높은 세율 때문에 도망쳤던 백성들을 불러들여 신전 개발을 장려했다.[2] 또한, 히네노 씨의 통치 후에 입봉했기 때문에 재지 세력과의 지연·얽매임과 인연이 끊어져, 이것이 원활한 번정으로 이어졌다고도 한다. 요리미즈의 강인함을 보여주는 일화로는 영명사 사건이 있다.

3. 1. 영명사 사건

스와 요리미즈의 강인함을 보여주는 일화로 '''영명사 사건'''이 있다. 요리미즈의 막내딸 가메히메가 요리미즈에게 보낸 서신[3]을 가진 하인이 심부름 도중 다른 하인과 싸움이 붙어 고로와타리 강[4]에 서신을 버렸다. 서신을 버린 하인은 후환을 두려워하여 스와 가문의 보제사였던 영명사로 도망쳤다. 요리미즈는 죄인을 넘겨주도록 명령했지만, 승려는 불개입 특권과 보제사로서의 격식을 내세워 거부했다. 이에 격분한 요리미즈는 절을 불태워 죄인을 붙잡아 목을 베었고, 숨겨준 승려도 이유를 묻지 않고 처형했다. 당시 승려는 권위가 있었고, 보제사를 불태우는 것은 선조에게도 두려운 일이었지만, 요리미즈는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는 성격을 보여주었다.

영명사는 우에하라 성 근처에 있던 절로, 당시 가마쿠라 오산을 본떠 우에하라 오산이라 불린 다섯 절 중 하나였다.[5] 영명사 외에 극락사(유일하게 현존), 금강사(폐사), 법명사·광명사(이 두 절은 나중에 합병하여 방광사가 되어 가미스와로 옮겨짐)가 있었다. 현재 영명사 터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6][7]

3. 2. 번정 개혁과 평가

스와 요리미즈는 뛰어난 정치 수완으로 번정 안정에 힘썼으며, 가신과 영민들에게 평판이 좋았다. 전 영주의 "칠공삼민"[1]과 높은 세율 때문에 도망쳤던 백성들을 불러들여 신전 개발을 장려했다.[2] 히네노 씨의 통치 후에 입봉했기 때문에 재지 세력과의 지연·얽매임과 인연이 끊어져, 이것이 원활한 번정으로 이어졌다고도 한다.

스와 요리미즈의 강인함을 나타내는 일화로 '''영명사 사건'''이 있다. 요리미즈의 막내딸 가메히메가 요리미즈에게 보낸 서신[3]을 가지고 있던 하인이 심부름 도중 다른 하인과 싸움이 붙어 고로노와타리 강[4]에 서신을 버렸다. 서신을 버린 하인은 후환을 두려워하여 스와 가문의 보제사였던 영명사로 도망쳤다. 요리미즈는 죄인을 넘겨주도록 명령했지만, 승려는 불개입의 특권과 보제사로서의 격식을 방패 삼아 넘겨주지 않았다. 이에 격분한 요리미즈는 절을 불태워 죄인을 붙잡아 목을 베었다. 게다가 숨겨준 승려도 이유를 묻지도 않고 처형했다고 한다. 이 시대의 승려에게는 권위가 있었고, 또한 보제사를 불태우는 것은 선조에게도 두려운 일이지만,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는 요리미즈의 성격을 나타낸다.

영명사는 우에하라 성 근처에 있던 절로, 당시 가마쿠라 오산을 본떠 우에하라 오산이라 불린 다섯 절 중 하나였다.[5] 영명사 외에 극락사(유일하게 현존), 금강사(폐사), 법명사·광명사(이 두 절은 나중에 합병하여 방광사가 되어 가미스와로 옮겨짐)가 있었다. 현재 영명사 터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6][7]

4. 계보


  • 아버지: 스와 요리타다
  • 어머니: 리쇼인 - 무카이야마 씨
  • 정실: 혼다 야스시게의 딸 테이쇼인
  • 자녀

이름생모비고
스와 타다츠네 (장남)테이쇼인(정실)
스와 요리사토 (차남)테이쇼인(정실)기하타. 이후 코후번 도쿠가와 쓰나시게 가로. 6000석
스와 요리나가요리야스. 도쿠가와 타다나가에게 섬기며 이후 기하타.
스와 요리타쿠다카시마번 가신이 됨. 요절.
셋쓰국 다카쓰키번주 토키 사다요시 정실
기하타 이후 아와국 미에다번주 미에다 모리마사 정실. 차남이 스와 요리마스라고 이름하고 기하타 3000석.
오쿠보 나가시게 처막부 기하타. 딸이 타다츠네의 양녀가 되어 번 가로 스와 모리스미에게 시집가 스와 요리이를 낳았다.
도쿠나가 마사나리 처막신. 도쿠나가 히사마사의 차남
토리이 타다카츠 처토리이 모토타다의 넷째 아들. 도쿠가와 요리후사에게 붙어 미토번사. 타다카츠의 딸이 오이시 요시타카에게 시집가 요시타카의 적손이 오이시 요시오.
치노 요리요시 처가신
스와 모리마사 처스와 가문 가로. 가신
스와 요리히로 처스와 대사 가미샤 오오호리


  • 양녀: 오자와 마사무네 처 - 가신. 스와 모리마사 딸, 즉 요리미즈의 외손녀.

5. 묘소

스와 요리미즈는 새로운 보제사로 온천사를 건립할 예정이었지만, 이를 이루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따라서 1631년에 먼저 창건되어 있던 뢰가쿠지에 장례를 치렀다.[8] 묘소에는 요리미즈와 그의 아버지, 어머니가 함께 모셔져 있다.

본존인 목조 석가모니불은 폐사된 에이메이지에서 옮겨온 것으로, 운케이와 탄케이의 합작으로 전해진다.[9] 다카시마번주 스와가 묘소는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요리미즈가 잠든 "스와 씨 뢰가쿠지 묘소"는 시 지정 사적이기도 하다. 같은 부지 내에는 스와 가문을 지탱한 가신단의 묘지도 많이 남아있다.

참조

[1] 문서 その年の収穫高の7割を年貢として領主に納め、3割を農民の所得とする高い税率。
[2] 웹사이트 諏訪市博物館 なんでも諏訪百科 https://suwacitymuse[...]
[3] 문서 嫁ぎ先で起きたトラブルを告げ口した内容。
[4] 문서 諏訪湖に流れ込む川。
[5] 문서 永明寺は向富山と号し、開創は永正年間(1504年 - 1521年)で、開基は諏訪頼水の曾祖父にあたる諏訪頼満(永明寺殿西周宗昌大居士)であった。開山は慈山永訓(静岡県真珠院二世)。
[6] 서적 永明寺遺跡「市道藤ノ森線」改良工事に伴う埋蔵文化財発掘調査報告書 茅野市教育委員会編 1996-03
[7] 서적 復刻諏訪史料叢書 諏訪史談会「諏訪史蹟要項 茅野市ちの篇」 諏訪教育会編、 中央企画 1983
[8] 웹사이트 小林山 頼岳寺 http://www.raigakuji[...]
[9] 웹사이트 国史跡高島藩主諏訪家墓所 https://www.city.suw[...] 諏訪市 2018-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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