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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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심일관은 명나라의 문신으로, 1568년에 진사가 된 후 예부상서와 내각대학사 수보를 역임했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조선 파병을 적극 건의하여 성사시켰으며, 반동림당의 영수로서 동림당의 심리와 불화하여 파직되었다. 그는 장거정에게 영합하지 않는 고결한 지조를 보였으며, 사장에도 능하여 여러 저서를 남겼다.
심일관은 1568년 진사가 되었고, 1601년 내각대학사 수보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의 조선 파병을 적극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반동림당 영수로서 동림당 심리와 갈등하다 1606년 함께 파직되었다. 사장(詞章)에 능했다.
심일관은 명나라 때의 문신으로, 자는 견오(肩吾), 호는 용강(龍江), 시호는 문공(文恭)이다. 1568년 진사가 되었고, 장거정에게 아부하지 않아 높은 평가를 받았다. 1594년 남경예부상서, 동각대학사를 거쳐 1601년 수보(내각의 으뜸 벼슬)가 되었다.
2. 생애
2. 1. 초기 관직 생활
1568년(융경 2년)에 진사가 되었다. 이후 사관(史館), 이부시랑(吏部侍郞)을 거쳤다.
2. 2. 내각대학사 수보 시절
1594년(만력 22년)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임명되어 동각대학사(東閣大學士)로서 조정의 기무(機務)에 참여하였다. 이후 호부상서(戶部尙書), 무영전대학사(武英殿太學士), 이부상서(吏部尙書), 건극전대학사(建極殿大學士) 등을 거쳐 1601년(만력 29년) 내각 수보(內閣首輔)가 되어 내각을 총괄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군대의 조선 파병을 적극적으로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2. 3. 동림당과의 갈등과 파직
임진왜란 때 명군의 조선 파병을 적극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반동림당의 영수로서 동림당 예부상서 심리와 불화하여 그를 탄핵하다가, 1606년 심리와 함께 파직되었다.
3. 평가
심일관은 태자 책봉과 광세사(광산 개발 세금 징수 관리) 문제에 대해 백성의 편에서 건의하는 등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동료인 심리와 사이가 좋지 않아 그를 몰아내려 했고, 초종, 요서, 경찰 등 세 가지 일에 반대하여 청의(맑은 선비들의 여론)와 다른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3. 1. 긍정적 평가
장거정에게 영합하지 않아 고결한 지조가 천하에 알려졌으며, 조지고가 죽자 수보가 되었다. 태자를 세우거나 광세사(礦稅使)에 대해 간하는 등 민심을 잘 반영한 정책을 펼쳤고, 임진왜란 파병 결정에도 기여했다. 사장(詞章)에 능했으며, 『역학(易學)』, 『장자통(莊子通)』, 『경사굉사(經史宏辭)』, 『경정초(敬亭草)』, 『오월유고(吳越遊稿)』 등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3. 2. 부정적 평가
심일관은 동림당과의 갈등, 특히 심리를 탄핵하고 파직시킨 점, 초종(楚宗), 요서(妖書), 경찰(京察) 등의 사건에서 청의(淸議)와 어긋나는 태도를 보인 점 등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심리와 불화하여 그를 제지하여 떠나게 하려고 하였고, 1606년(만력 34년) 심리와 함께 파직되었다.
4. 저서
- 《역학》
- 《장자통》
- 《경사굉사》
- 《경정초》
- 《오월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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