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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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림당은 명나라 말기 정치적 혼란 속에서 부패한 정치와 사회 문제를 개혁하고자 일어선 학자들의 정치적 흐름이다. 만력제 시기부터 이어진 사회 혼란과 천계제의 무능함 속에서 동림당은 왕양명 이후의 심학의 무력함을 비판하며 주자학을 신봉했다. 동림서원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웠으나, 환관 위충현 세력과의 대립으로 탄압받아 숭정제 즉위 후 복권되었다. 동림당의 주요 인물로는 고헌성, 조남성 등이 있으며, 그들의 경세치용 학문은 후대 신문학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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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림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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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존속 기간 | 명나라 만력제 말기 ~ 남명 멸망 |
활동 시기 | 17세기 초 |
창립자 | 고헌성 |
주요 인물 | 양련 조남성 좌광두 위대중 황존소 고반룡 목공 장박행 주순창 이방 후순 성기명 오응기 전원경 유종주 |
이념 | 성리학, 양명학, 실사구시 |
정치 성향 | 정치 개혁, 간쟁, 민본주의 |
주요 활동 | 간신 탄핵 세금 감면 요구 국방 강화 주장 |
배경 | |
형성 배경 | 만력제의 태만한 정치, 환관의 전횡 |
주요 근거지 | 강소성 무석시의 동림서원 |
지지 기반 | 지주 계층 일부 관료 성리학자 |
특징 | |
특징 | 청의파적인 성격, 강남 지역 지식인 중심 |
영향 | |
영향 | 명나라 멸망의 한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함 |
기타 | |
관련 항목 | 동림서원 기사지화 환관 위충현 오현 (동림당) 강남 청의파 |
2. 역사적 배경
동림당의 역사적 배경은 명나라 말기의 정치적 혼란과 깊은 관련이 있다. 만력제 때부터 명나라는 점차 혼란에 빠져들었으며, 천계제는 환관 위충현에게 정치를 맡기고 향락에 몰두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양명 이후의 양명학은 현실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등장한 것이 동림학파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주로 강절(江浙) 출신 관료들로, 가정대왜구 당시 절민총독 주환을 탄핵하고, 상해 출신 서계가 엄숭 부자를 몰락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서계를 중심으로 한 강남 관료들은 동림당의 원형으로 불리기도 하며, 가정 말기 당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1]
2. 1. 명나라 말기의 정치적 혼란
만력제(萬曆帝) 시절부터 명은 차츰 혼란 속으로 빠져 들었다. 2대 뒤인 천계제(天啓帝)는 명조 제일의 암군(暗君)으로서, 환관 위충현(魏忠賢)에게 정권을 위임하고 자신은 일락(逸樂)에만 빠져들고 있었다. 혼미한 사회적·정치적 상태에 대하여, 왕양명(王陽明) 이후의 심학(心學) 운동은 이미 공리공론만 일삼고 부질없이 관념적 논의만 전개하였을 뿐 구국경세에는 아무 소용도 없게 되었다. 이때 정치적 문란과 사회적 혼란을 시정하려고 일어난 것이 소위 동림학파(東林學派)의 학자들이었다.2. 2. 강절(江浙) 출신 관료들의 결집
가정대왜구 당시 강남(江南) 관료들은 절민총독(浙閩總督) 주환을 탄핵하여 혁직시켰고, 이에 주환은 분노하여 자살하였다.[1] 이후 상해 출신 서계는 통왜(通倭) 혐의로 엄숭 부자를 몰락시켰다.[1] 서계를 중심으로 한 강남 관료들은 동림당의 원형으로 칭해지기도 한다.[1] 가정 말기 당쟁도 이로 인해 발생하였다.[1]3. 동림당의 전개
고헌성(顧憲成)은 명나라 정부 내 인사 쇄신을 위해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 무석(無錫)으로 돌아와 양시(楊時)가 세운 동림서원(東林書院)을 다시 일으켜 동지들을 모았다. 조남성(趙南星), 추원표(鄒元標), 고반룡(高攀龍) 등이 동림서원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주자학을 신봉하고 위충현 등 환관 일파와 대립하여 관료 사대부의 정통파 그룹을 대표하고 있었다.
그러나 반동림당(反東林黨)이 일어나 정책 논의를 반복하던 중, 환관 일파와 결탁하면서 동림당은 위충현의 탄압을 받아 소멸하였다.[1]
3. 1. 동림서원(東林書院)의 재건과 활동
무석(無錫)의 고헌성(顧憲成)은 정부 부내의 인사 쇄신을 위하여 누누이 용인(用人)의 의서(議書)를 상소하였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관직을 사임하고 향리로 돌아와 송나라의 명유(名儒) 양시(楊時)의 동림서원(東林書院)을 재건하여 동지들을 모았다. 그 중에는 조남성(趙南星), 추원표(鄒元標), 고반룡(高攀龍) 등이 있었다. 그들은 학문적으로는 주자학을 신봉하고 위충현 등 환관 일파와 대항하여 관료 사대부의 정통파 그룹을 대표하고 있었다.3. 2. 동림당과 환관 세력의 대립
고헌성(顧憲成)은 정부 내 인사 쇄신을 위해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송나라 명유(名儒) 양시(楊時)의 동림서원(東林書院)을 다시 일으켜 동지들을 모았다. 조남성(趙南星), 추원표(鄒元標), 고반룡(高攀龍) 등이 동림서원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주자학을 신봉하고 위충현 등 환관 일파와 대립하여 관료 사대부의 정통파 그룹을 대표하고 있었다. 그러나 반동림당(反東林黨)이 일어나 정책 논의를 반복하던 중, 이 당파는 환관 일파와 결탁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동림당은 위충현의 탄압을 받아 소멸하였다.[1]1627년(천계7년), 숭정제(崇禎帝)가 즉위하면서 위충현이 체포되었고, 동림당 인사에 대한 박해는 끝났다.[1]
3. 3. 동림당의 탄압과 와해
동림당원들은 조정의 간신 위충현을 지적하였기에, 당시 전권을 쥐고 있던 엄당의 위충현을 자극하였다. 위충현은 정격안, 홍환안, 이궁안 등 명말삼안을 빌미로 당우(黨羽)를 시켜 『동림당점장록』을 만들어 동림당을 공격하였다.[1] 천계 5년(1625), 천계제는 조서를 내려 전국의 서원을 불태우라고 지시했고, 동림서원도 불탔다. 동림당원들도 타격을 입어 양련과 좌광두 등 동림육군자는 살해되거나 자살을 강요당했다. 천계 6년(1626), 고반룡, 주기원, 황존소 등 동림칠현은 살해하거나 자살을 강요받았다. 천계 7년(1627) 숭정제가 즉위하였다. 숭정제는 천계 연간 위충현 엄당의 악정을 타산지석 삼아, 위충현에게 자살을 강요하고 엄당 관료를 대거 강등 혹은 파직하면서 동림당원들이 비로소 타격을 면했다. 숭정 2년(1629) 숭정제가 신원 구명하여 동림당원들이 명예를 회복하였으며, 조서를 내려 동림서원을 수복하였으니 동림당쟁이라 하였다. 동림당과 엄당의 싸움은 청나라 초기까지 이어졌다.[1]3. 4. 숭정제(崇禎帝) 즉위와 동림당의 복권
동림당 사람들은 조정의 간신 위충현을 지적하였기에, 당시 전권을 쥐고 있던 엄당의 위충현을 자극하였다. 위충현은 정격안(梃擊案), 홍환안(紅丸案), 이궁안(移宮案) 등 명말삼안(明末三案)을 빌미로, 당우(黨羽)를 시켜 『동림당점장록(東林黨點將錄)』을 만들어 동림당을 공격하였다. 천계 5년(1625), 천계제는 조서를 내려 전국의 서원을 불태우라 지시했고, 동림서원도 불탔다. 동림당원들도 타격을 입어 양련(楊漣)과 좌광두(左光斗) 등 동림육군자(東林六君子)는 살해되거나 자살을 강요당했다. 천계 6년(1626), 고반룡(高攀龍), 주기원(周起元), 황존소(黃尊素) 등 동림칠현(東林七賢)은 살해하거나 자살을 강요받았다. 천계 7년(1627) 숭정제(崇禎帝)가 즉위하였다. 숭정제는 천계 연간 위충현 엄당의 악정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위충현에게 자살을 강요하고 엄당 관료를 대거 강등 혹은 파직하면서 동림당원들이 비로소 타격을 면했다. 숭정 2년(1629) 숭정제가 신원 구명하여 동림당원들이 명예를 회복하였으며, 조서를 내려 동림서원을 수복하였으니 동림당쟁(東林黨爭)이라 하였다. 동림당과 엄당의 싸움은 청나라 초까지 이어졌다.4. 동림당의 성원
성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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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헌성 |
고반룡 |
안희범 |
유일경 |
설부교 |
전일본 |
사맹린 |
양련 |
좌광두 |
조남성 |
주기원 |
공내 |
추원표 |
풍종오 |
주순창 |
무창기 |
주종건 |
황존소 |
이응승 |
5. 후대에 끼친 영향
진명하(陳名夏)와 전겸익(錢謙益) 등은 청나라 조정에 들어가 벼슬을 했고, 일부는 청에 대항하는 운동을 전개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이로 인해 방이지(方以智) 등은 지하에서 항청 운동에 참여했다. 동림학파가 주장한 경세치용(經世致用)의 학문은 명나라 말 청나라 초 황종희, 고염무, 왕부지 등에게 이어져 다음 세대 신문학의 원동력이 되었다.[1]
참조
[1]
논문
[2]
논문
[3]
논문
[4]
서적
Confucian Image Politics: Masculine Morality in Seventeenth Century China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5]
논문
[6]
논문
[7]
논문
[8]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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