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구아 둘체 전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아구아 둘체 전투는 1836년 3월 2일, 텍사스 혁명 당시 호세 데 우레아 장군이 이끄는 멕시코군이 제임스 그랜트와 그의 부대를 기습하여 벌어진 전투이다. 이 전투는 텍사스군의 마타모로스 원정을 좌절시키고, 텍사스 독립 선언과 같은 날 일어났지만, 그랜트와 그의 부대는 이를 알지 못했다. 멕시코군은 텍사스군을 기습하여 그랜트를 포함한 다수의 텍사스군을 사살하고, 일부를 포로로 잡았다. 이 전투의 결과는 골리아드 학살에 영향을 미쳤으며, 텍사스인들이 평원에서 멕시코군에 취약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멕시코가 참가한 전투 - 미국의 베라크루스 점령
- 멕시코가 참가한 전투 - 샌재신토 전투
1836년 텍사스 혁명 중 텍사스 군이 멕시코 군을 기습하여 승리하고 산타 안나 대통령을 포로로 잡은 샌재신토 전투는 텍사스 공화국의 독립을 가져왔으며, 현재 기념탑이 세워져 이를 기념하고 있다. - 1836년 전투 - 샌재신토 전투
1836년 텍사스 혁명 중 텍사스 군이 멕시코 군을 기습하여 승리하고 산타 안나 대통령을 포로로 잡은 샌재신토 전투는 텍사스 공화국의 독립을 가져왔으며, 현재 기념탑이 세워져 이를 기념하고 있다. - 1836년 전투 - 알라모 전투
알라모 전투는 1836년 텍사스 혁명 당시 멕시코군이 알라모 요새를 공격하여 텍사스 의용군을 몰살시킨 전투로, 텍사스 독립 투쟁의 상징이 되었다. - 1836년 3월 - 텍사스 독립 선언
텍사스 독립 선언은 1836년 텍사스 혁명 중 멕시코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문서로, 멕시코 정부의 폭정에 대한 불만을 표명하고 텍사스 공화국의 성립을 알렸으나, 멕시코 정부에 의해 불법으로 간주되었으며 인종차별적 관점에 대한 비판도 있다. - 1836년 3월 - 알라모 전투
알라모 전투는 1836년 텍사스 혁명 당시 멕시코군이 알라모 요새를 공격하여 텍사스 의용군을 몰살시킨 전투로, 텍사스 독립 투쟁의 상징이 되었다.
아구아 둘체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개요 | |
분쟁 | 텍사스 혁명 |
날짜 | 1836년 3월 2일 |
장소 | 샌파트리시오 남서쪽으로 약 40km 떨어진 지점 |
좌표 | 50 |
결과 | 멕시코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멕시코 중앙집권 공화국 |
교전국 2 | 텍사스 공화국 |
지휘관 | |
멕시코군 지휘관 | 호세 데 우레아 |
텍사스군 지휘관 | 제임스 그랜트 |
병력 규모 | |
멕시코군 병력 | 150명 |
텍사스군 병력 | 53명 |
피해 규모 | |
멕시코군 피해 | 1명 사망, 부상자 수 미상 |
텍사스군 피해 | 12~15명 사망, 6명 포로 |
관련 전투 | |
전역 정보 | 골리아드 전역 |
지도 정보 |
2. 배경
1833년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가 권력을 잡으면서 멕시코 여러 주에서 공개적인 반대가 일어났다. 코아우일라 테하스 주도 그 중 하나였는데, 현재 텍사스에 해당하는 지역은 주로 미국 남부에서 온 이민자들이 많이 정착하고 있었다. 산타 안나가 스스로를 독재자로 칭하면서, 1824년 멕시코 헌법을 폐지하고 중앙집권적인 정치를 감행하자, 텍사스 사람들은 봉기를 했다. 샌안토니오, 골리아드 등 일부 멕시코의 요새 도시가 텍사스 반란군의 손에 넘어갔고, 산타 안나는 반란을 직접 진압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6,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멕시코 북부로 진군하여 최대한의 범위에서 부대를 나누었다.
멕시코군 선발 부대가 텍사스군인 제임스 그랜트와 로버트 모리스의 부대를 발견했을 때, 호세 데 우레아 장군은 멕시코 남동부 군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그랜트와 약 50명의 텍사스 병사는 말을 사냥하던 중이었고, 수백 마리의 야생마를 붙잡아 샌파트리시오에 있는 아일랜드인 정착촌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우레아의 군대는 아구아 둘세 크릭에 있던 그들 텍사스군을 함정을 파고 기다렸다.
텍사스 임시 정부는 샘 휴스턴을 텍사스 새 정규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했지만, 존슨에게 보고하는 자원병에 대한 권한은 없었다.[16] 임시 주지사 헨리 스미스는 마타모로스 원정을 반대하고 휴스턴에게 원정을 해산할 방법을 찾으라고 명령했다.[17] 휴스턴은 자원병들에게 열정적인 연설을 하여 대다수의 병사들이 임무를 계속하지 않도록 설득했다. 많은 사람들이 군대를 떠났다. 다른 사람들은 골리아드의 라 바히아 요새에서 휴스턴의 부관인 제임스 패닌 휘하의 병력에 합류했다. 1836년 1월 말까지 존슨과 그랜트와 함께 남은 병사는 70명뿐이었다.[18] 이들 자원병의 대부분은 전투가 시작된 후 텍사스에 도착한 미국인이나 유럽인이었다.[19]
우레아는 1월 31일 마타모로스에 도착했다. 헌신적인 연방주의자였던 그는 곧 이 지역의 다른 연방주의자들에게 텍사스인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분리주의이며, 마타모로스에서 연방주의 반란을 일으키려는 시도는 단지 자신에게서 주의를 돌리는 방법일 뿐이라고 설득했다.[20] 한편, 멕시코 이중 간첩들은 존슨과 그랜트에게 마타모로스를 쉽게 점령할 수 있다고 계속 확신시켰다.[21] 우레아의 부대는 2월 18일 텍사스로 진입했다.[22]
멕시코 군대가 접근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랜트와 존슨은 누에세스 강 남쪽, 타마울리파스주에 속하는 영토로 부하들을 데려가 말 구입, 훔치기 또는 기타 방법으로 말을 구하기로 결정했다. 2월 21일경, 존슨과 소규모 병력은 약 100마리의 말을 텍사스로 몰기 시작했다. 나머지 병사들은 더 많은 말을 찾기 위해 명목상 그랜트와 함께 남았다. 실제로는 연방주의자들이 여전히 멕시코 군대에 대항할 의지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마타모로스 인근의 동맹군과 합류하려 했다.[23]
멕시코 군대는 2월 26일 새벽에 샌패트리시오에 도착했다. 15분간의 전투 후 존슨의 병력은 패배했다. 존슨을 포함한 6명의 텍사스인이 탈출했고 나머지는 사망하거나 포로로 잡혔다.[24][25] 우레아는 골리아드로 진군하기 전에 지원군을 기다리는 동안 그의 선발대는 그랜트와 나머지 텍사스인들을 찾았다.[26] 존슨의 운명을 알지 못한 채, 2월 27일 그랜트와 그의 부대는 그가 구입한 수백 마리의 말을 몰고 샌패트리시오로 북쪽으로 행진을 시작했다.[27] 병사들은 3월 1일 샌 페르난도 크릭을 따라 야영했다. 지역 목장주들은 그들을 환영했지만, 그날 밤 우레아에게 그랜트의 위치와 계획을 알리는 전령을 보냈다.[28]
2. 1. 멕시코의 중앙집권화와 테하스의 반발
1833년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가 권력을 잡으면서 멕시코 여러 주에서 공개적인 반발이 일어났다. 그 중 하나가 코아우일라 테하스 주였는데, 현재 텍사스에 해당하는 지역은 주로 미국 남부에서 온 이민자들이 많이 정착해 있었다. 산타 안나가 스스로를 독재자로 칭하고 1824년 멕시코 헌법을 폐지하며 중앙집권적인 정치를 펼치자, 텍사스 사람들은 봉기했다. 샌안토니오, 골리아드 등 멕시코의 요새 도시 일부가 텍사스 반란군의 손에 넘어갔고, 산타 안나는 직접 반란을 진압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6,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멕시코 북부로 진군하여 최대한 부대를 나누었다.산타 안나의 중앙 집권적 정책에 대한 반발은 텍사스뿐만 아니라 멕시코 전역에서 나타났다. 1829년 노예제 금지, 1830년 이민 금지, 1835년 초 1824년 헌법 폐지와 같은 정책은 이민자, 노예 소유주, 그리고 전국 연방주의자들의 반란을 촉발했다. 멕시코군은 오아하카와 사카테카스에서 민병대를 잔혹하게 진압하며 멕시코 내륙의 반란을 신속하게 진압했다. 멕시코 북동부의 코아우일라 이 테하스 주에서는 불안이 계속되었다. 미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지역인 텍사스는 주로 텍시언이라고 알려진 영어를 사용하는 정착민들이 거주했다. 텍시언 이민자들은 멕시코의 새로운 노예제 금지 조항을 따르기를 거부했으며, 산타 안나가 그들의 노예를 해방하려는 시도를 그들의 "재산"을 빼앗기 위한 "해적 공격"이라고 묘사했다.
10월에 텍시언들은 텍사스 혁명으로 알려진 무장 투쟁을 시작했다. 다음 달 텍시언들은 스스로를 코아우일라에서 독립된 멕시코 주의 일부라고 선언하고 노예제를 허용하고, 노예제 금지 시도를 금지하며, 이민을 허가했던 1824년 헌법의 일부 원칙을 포함하는 임시 주 정부를 창설했다. 그해 말까지 모든 멕시코 군대는 텍사스에서 살해되거나 추방되었다.
멕시코의 주요 연방주의자들은 주요 멕시코 항구인 마타모로스에서 멕시코 군대를 공격하는 계획을 옹호했다. 임시 텍사스 행정부인 총회의 의원들은 마타모로스 원정 아이디어에 매료되었다. 그들은 이것이 다른 연방주의 주들의 반란을 고무하고 지루한 텍시언 군인들이 군대를 탈영하는 것을 막을 수 있기를 바랐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전쟁 지역을 텍사스 외부로 이동시키는 것이었다. 총회는 12월 25일에 공식적으로 계획을 승인했으며, 12월 30일에 자원 군대의 사령관인 프랭크 W. 존슨과 그의 보좌관 제임스 그랜트는 원정을 준비하기 위해 군대의 대부분과 거의 모든 보급품을 골리아드로 가져갔다. 역사가 스튜어트 리드는 그랜트가 영국 비밀 요원이며 그의 노력은 이 지역에서 영국의 이익을 증진하기 위한 비공식적인 계획이었다고 주장한다. 영국은 독립 텍사스라는 아이디어를 환영하지 않았고, 마타모로스 침공은 텍사스를 멕시코에 더 긴밀하게 묶는 방법이었다.
반란을 진압하기로 결심한 산타 안나는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소집하기 시작했다. 12월 말, 산타 안나의 요청에 따라 멕시코 의회는 토르넬 법령을 통과시켜 멕시코 군대에 맞서 싸우는 외국인들을 "해적으로 간주하여 그에 따라 처리하며, 현재 공화국과 전쟁 중인 어떤 국가의 시민도 아니며 인정된 국기도 휘날리지 않고 싸우는 자"라고 선언했다. 19세기 초에 붙잡힌 해적들은 즉시 처형되었으므로, 이 결의안은 멕시코군에게 텍시언과의 전쟁에서 포로를 잡지 않을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산타 안나는 개인적으로 자신의 군대의 주력을 내륙으로 이끌어 산안토니오 데 베하르로 갔고, 호세 데 우레아 장군에게 550명의 군대를 이끌고 아타스코시타 로드를 따라 골리아드로 가라고 명령했다. 우레아의 텍사스 걸프 코스트에서 반란을 진압하려는 노력은 골리아드 작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2. 2. 테하스의 상황과 마타모로스 원정
1833년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가 권력을 잡으면서 멕시코 여러 주에서 공개적인 반대가 일어났다. 코아우일라 이 테하스주 역시 그러한 주 중 하나였다. 현재 텍사스에 해당하는 지역은 주로 미국 남부에서 온 이민자들이 많이 정착하고 있었다.[1] 산타 안나가 스스로를 독재자로 칭하면서, 1824년 멕시코 헌법을 폐지하고 중앙집권적인 정치를 감행하자,[1] 텍사스 사람들은 봉기를 했다.[5] 이에 샌안토니오, 골리아드 등 일부 멕시코의 요새 도시가 텍사스 반란군의 손에 넘어갔고, 산타 안나는 반란을 직접 진압하기로 결정했다.[7] 그는 6,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멕시코 북부로 진군하여 최대한의 범위에서 부대를 나누었다.산타 안나의 새로운 정책은 이민자, 노예 소유주, 그리고 전국 연방주의자들의 반란을 촉발했다.[1][2] 멕시코군은 오아하카와 사카테카스에서 민병대를 잔혹하게 진압하는 등 멕시코 내륙의 반란을 신속하게 진압했다.[3][4]
멕시코의 주요 연방주의자들은 주요 멕시코 항구인 마타모로스에서 멕시코 군대를 공격하는 계획을 옹호했다.[8] 임시 텍사스 행정부인 총회는 마타모로스 원정 아이디어에 매료되었다. 그들은 이것이 다른 연방주의 주들의 반란을 고무하고 지루한 텍시언 군인들이 군대를 탈영하는 것을 막을 수 있기를 바랐다.[9] 총회는 12월 25일에 공식적으로 계획을 승인했으며, 12월 30일에 자원 군대의 사령관인 프랭크 W. 존슨과 그의 보좌관 제임스 그랜트는 원정을 준비하기 위해 군대의 대부분과 거의 모든 보급품을 골리아드로 가져갔다.[10]
반란을 진압하기로 결심한 산타 안나는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소집하기 시작했다.[12] 12월 말, 산타 안나의 요청에 따라 멕시코 의회는 토르넬 법령을 통과시켜 멕시코 군대에 맞서 싸우는 외국인들을 "해적으로 간주하여 그에 따라 처리하며, 현재 공화국과 전쟁 중인 어떤 국가의 시민도 아니며 인정된 국기도 휘날리지 않고 싸우는 자"라고 선언했다.[13] 산타 안나는 개인적으로 자신의 군대의 주력을 내륙으로 이끌어 산안토니오 데 베하르로 갔고, 호세 데 우레아 장군에게 550명의 군대를 이끌고 아타스코시타 로드를 따라 골리아드로 가라고 명령했다. 우레아의 텍사스 걸프 코스트에서 반란을 진압하려는 노력은 골리아드 작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14][15]
텍사스 임시 정부는 샘 휴스턴을 텍사스 새 정규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했지만, 존슨에게 보고하는 자원병에 대한 권한은 없었다.[16] 임시 주지사 헨리 스미스는 마타모로스 원정을 반대하고 휴스턴에게 원정을 해산할 방법을 찾으라고 명령했다.[17]
우레아는 1월 31일 마타모로스에 도착했다. 헌신적인 연방주의자였던 그는 곧 이 지역의 다른 연방주의자들에게 텍사스인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분리주의이며, 마타모로스에서 연방주의 반란을 일으키려는 시도는 단지 자신에게서 주의를 돌리는 방법일 뿐이라고 설득했다.[20] 한편, 멕시코 이중 간첩들은 존슨과 그랜트에게 마타모로스를 쉽게 점령할 수 있다고 계속 확신시켰다.[21] 우레아의 부대는 2월 18일 텍사스로 진입했다.[22]
멕시코 군대가 접근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랜트와 존슨은 누에세스 강 남쪽, 타마울리파스주에 속하는 영토로 부하들을 데려가 말 구입, 훔치기 또는 기타 방법으로 말을 구하기로 결정했다.
2. 3. 제임스 그랜트와 호세 데 우레아
1833년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가 권력을 잡으면서 멕시코 여러 주에서 공개적인 반발이 일어났다. 코아우일라 테하스 주도 그 중 하나였는데, 현재 텍사스에 해당하는 지역은 주로 미국 남부에서 온 이민자들이 많이 정착하고 있었다. 산타 안나가 스스로를 독재자로 칭하면서, 1824년 멕시코 헌법을 폐지하고 중앙집권적인 정치를 감행하자, 텍사스 사람들은 봉기를 했다. 샌안토니오, 골리아드 등 일부 멕시코의 요새 도시가 텍사스 반란군의 손에 넘어갔고, 산타 안나는 반란을 직접 진압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6,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멕시코 북부로 진군하여 최대한의 범위에서 부대를 나누었다.멕시코군 선발 부대가 텍사스군인 제임스 그랜트와 로버트 모리스의 부대를 발견했을 때, 호세 데 우레아 장군은 멕시코 남동부 군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그랜트와 약 50명의 텍사스 병사는 말을 사냥하던 중이었고, 수백 마리의 야생마를 붙잡아 샌파트리시오에 있는 아일랜드인 정착촌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우레아의 군대는 아구아 둘세 크릭에 있던 그들 텍사스군을 함정을 파고 기다렸다.
텍사스 임시 정부는 샘 휴스턴을 텍사스 새 정규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했지만, 존슨에게 보고하는 자원병에 대한 권한은 없었다.[16] 임시 주지사 헨리 스미스는 마타모로스 원정을 반대하고 휴스턴에게 원정을 해산할 방법을 찾으라고 명령했다.[17] 휴스턴은 자원병들에게 열정적인 연설을 하여 대다수의 병사들이 임무를 계속하지 않도록 설득했다. 많은 사람들이 군대를 떠났다. 다른 사람들은 골리아드의 라 바히아 요새에서 휴스턴의 부관인 제임스 패닌 휘하의 병력에 합류했다. 1836년 1월 말까지 존슨과 그랜트와 함께 남은 병사는 70명뿐이었다.[18] 이들 자원병의 대부분은 전투가 시작된 후 텍사스에 도착한 미국인이나 유럽인이었다.[19]
우레아는 1월 31일 마타모로스에 도착했다. 헌신적인 연방주의자였던 그는 곧 이 지역의 다른 연방주의자들에게 텍사스인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분리주의이며, 마타모로스에서 연방주의 반란을 일으키려는 시도는 단지 자신에게서 주의를 돌리는 방법일 뿐이라고 설득했다.[20] 한편, 멕시코 이중 간첩들은 존슨과 그랜트에게 마타모로스를 쉽게 점령할 수 있다고 계속 확신시켰다.[21] 우레아의 부대는 2월 18일 텍사스로 진입했다.[22]
멕시코 군대가 접근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랜트와 존슨은 누에세스 강 남쪽, 타마울리파스주에 속하는 영토로 부하들을 데려가 말 구입, 훔치기 또는 기타 방법으로 말을 구하기로 결정했다. 2월 21일경, 존슨과 소규모 병력은 약 100마리의 말을 텍사스로 몰기 시작했다. 나머지 병사들은 더 많은 말을 찾기 위해 명목상 그랜트와 함께 남았다. 실제로는 연방주의자들이 여전히 멕시코 군대에 대항할 의지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마타모로스 인근의 동맹군과 합류하려 했다.[23]
멕시코 군대는 2월 26일 새벽에 샌패트리시오에 도착했다. 15분간의 전투 후 존슨의 병력은 패배했다. 존슨을 포함한 6명의 텍사스인이 탈출했고 나머지는 사망하거나 포로로 잡혔다.[24][25] 우레아는 골리아드로 진군하기 전에 지원군을 기다리는 동안 그의 선발대는 그랜트와 나머지 텍사스인들을 찾았다.[26] 존슨의 운명을 알지 못한 채, 2월 27일 그랜트와 그의 부대는 그가 구입한 수백 마리의 말을 몰고 샌패트리시오로 북쪽으로 행진을 시작했다.[27] 병사들은 3월 1일 샌 페르난도 크릭을 따라 야영했다. 지역 목장주들은 그들을 환영했지만, 그날 밤 우레아에게 그랜트의 위치와 계획을 알리는 전령을 보냈다.[28]
3. 전투 과정
멕시코군은 약 40명의 소총 부대와 80명의 기병대로 구성되어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가 공격을 개시했다.[28][29] 텍사스군은 기습 공격으로 패배했고, 제임스 그랜트, 모리스와 41명의 텍사스군이 사망했다.[29] 6명은 탈출에 성공했다.[29]
멕시코군은 아구아 둘체 크릭의 교차점인 엘 푸에르토 데 로스 콰테스 데 아구아 둘체로 진군했다.[29] 이곳은 샌 패트리시오 남쪽으로 약 42km,[32] Banquete에서 약 1.6km 떨어져 있었고,[30] 현재 Kingsville 바로 북쪽에 있는 멕시코 병사들은 두 그루의 나무 숲에 숨었다.[32] 우레아는 80명의 기병대를 포함하여 약 150명의 병력을 보유했다.[28]
플라시도 베나비데스의 지휘를 받는 ''테자노스''(텍사스 출생 멕시코인)를 포함, 약 53명으로 구성된 그랜트의 부대는 사기가 좋았고 산 패트리시오를 향해 이동했다.[33] 그랜트, 베나비데스, 루벤 브라운은 텍사스군의 주력 부대보다 약 800m 앞서 말을 타고 갔지만, 멕시코 병사의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34]
오전 10시에서 11시 사이,[35] 텍사스군 대다수가 나무에 도달했을 때, 멕시코 기병대가 공격했다.[32] 텍사스인들은 총을 들기도 전에 총에 맞았고,[36] 도망치려 하자 용기병들이 그들을 추격하여 창으로 찔렀다.[33] 5명의 텍사스인들은 근처 작은 마을로 달려가 은신처를 확보하려 했고, 우레아는 보병을 보내 그들을 뒤쫓았다. 그들 중 두 명이 포로로 잡히고 나머지는 탈출했다.[37]
그랜트, 베나비데스, 브라운은 다른 텍사스인들과 합류하기 위해 돌아섰다. 브라운은 소총을 재장전하거나 말이 죽었기 때문에 말에서 내렸고, 전투에서 졌다는 것을 알게 된 그랜트는 브라운을 다른 말에 태우고 도망치려 했으나 멕시코 기병대가 그들을 막으려 했다. 그랜트는 장교 한 명을 쏘았고, 그와 베나비데스는 그 장교의 말을 지나 질주했다. 이 시점에서 가축 떼가 질주하여 멕시코 기병대를 밀어냈고, 3명의 텍사스인들은 말들을 따라갔다.[38] 멕시코 병사들이 즉시 추격했고,[32] 브라운의 회상에 따르면, 그와 그랜트의 말 모두 부상을 입었다.[39]
세 텍사스인들은 9.7-11km를 달리며 권총을 쏘아 멕시코 용기병들을 물러서게 했다. 멕시코 병사들은 항복하면 살려줄 것이라고 외쳤지만, 텍사스인 중 아무도 그들을 믿지 않았다.[40] 베나비데스는 가장 튼튼한 말을 가지고 있었고, 그랜트는 그에게 앞서 가서 패닌에게 멕시코군이 골리아드에 가까이 왔다고 경고하라고 명령했다.[32][41] 그랜트와 브라운은 포위되어 멈춰야 했다. 그랜트는 브라운의 팔에 창을 꽂은 멕시코 병사를 죽였다. 10명에서 12명의 멕시코 병사들이 그랜트를 포위했고, 그는 여러 번 찔린 후 사망했다.[32][41] 역사가 스튜어트 리드는 멕시코 병사들이 그랜트가 전투에서 살아남지 못하도록 하려는 열의가 있었다고 이론화한다. 그랜트는 마타모로스와 그 주변 지역에서 연방주의 지지자들을 식별할 수 있었고, 그의 지식은 우레아와 그의 연방주의 지지 병력 일부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었다.[42]
브라운은 빈 권총을 멕시코 장교에게 던진 다음, 그랜트가 쏜 남자의 창을 잡고 자신을 방어하는 데 사용했다.[41] 병사들이 그를 lasso로 묶은 후, 브라운은 항복했고 포로로 잡혔다.[32] 브라운은 매복 현장으로 다시 데려와졌고, 심하게 부상당한 텍사스인 조셉 카펜터가 목숨을 구걸하는 것을 보았다. 브라운은 멕시코 병사가 그를 쏘는 것을 보았다.[43]
3. 1. 멕시코군의 기습
멕시코군은 아구아 둘체 크릭의 잘 알려진 교차점인 엘 푸에르토 데 로스 콰테스 데 아구아 둘체로 하룻밤 사이에 진군했다.[29] 이곳은 샌 패트리시오에서 남쪽으로 약 42km,[32] Banquete에서 약 1.6km 떨어져 있었으며,[30] 현재 Kingsville 바로 북쪽에 있는 멕시코 병사들은 두 그루의 나무 숲에 숨었다.[32] 우레아는 약 150명의 병력을 보유했으며, 여기에는 80명의 dragoon이 포함되었다.[28]제임스 그랜트의 부대는 약 53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었으며, 여기에는 플라시도 베나비데스의 지휘를 받는 대규모의 ''테자노스''(텍사스 출생 멕시코인)가 포함되었다. 병사들은 사기가 좋았고 산 패트리시오를 향해 편안한 속도로 말을 타고 갔다.[33] 그랜트, 베나비데스, 루벤 브라운은 텍사스군의 주력 부대보다 0.8km 앞서 말을 타고 갔고 멕시코 병사의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34]
오전 10시에서 11시 사이,[35] 텍사스군의 대다수가 나무에 도달했을 때, 멕시코 기병대가 공격했다.[32] 완전히 기습을 당한 텍사스인들은 총을 들기도 전에 총에 맞았다.[36] 그들이 도망치려 하자, 용기병들은 그들을 추격하여 말에서 창으로 찔렀다.[33] 5명의 텍사스인들이 말에서 내려 근처 작은 마을로 달려가 은신처를 확보하여 소총을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랐다. 우레아는 보병을 그들을 뒤쫓아 보냈다. 그 텍사스인들 중 두 명이 포로로 잡히고 나머지는 탈출했다.[37]
그랜트, 베나비데스, 브라운은 다른 텍사스인들과 합류하기 위해 돌아섰다. 전투에 참여하자 브라운은 소총을 재장전하기 위해 또는 그의 말이 죽었기 때문에 말에서 내렸다. 전투에서 졌다는 것을 알게 된 그랜트는 브라운을 다른 말에 태웠고, 그들 둘과 베나비데스는 도망치기 위해 돌아서서 멕시코 기병대가 그들을 막으려 했다. 그랜트는 장교 한 명을 쏘았고, 그와 베나비데스는 그 장교의 말을 지나 질주했다. 이 시점에서, 가축 떼가 질주하여 멕시코 기병대를 밀어냈다. 3명의 텍사스인들은 말들을 따라갔다.[38] 멕시코 병사들이 즉시 추격했다.[32] 브라운의 나중 회상에 따르면, 멕시코 병사들이 그들을 향해 총을 쏘면서 그와 그랜트의 말 모두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39]
3명의 텍사스인들은 9.7-11km를 달렸고, 때때로 권총을 쏘아 멕시코 용기병들을 물러서게 했다. 멕시코 병사들은 항복하면 살려줄 것이라고 외쳤지만, 텍사스인 중 아무도 그들을 믿지 않았다.[40] 베나비데스는 가장 튼튼한 말을 가지고 있었고, 그랜트는 그에게 앞서 가서 멕시코군이 골리아드에 가까이 왔다고 패닌에게 경고하라고 명령했다.[32][41] 그랜트와 브라운은 포위되어 멈춰야 했다. 그랜트는 브라운의 팔에 창을 꽂은 멕시코 병사를 죽였다. 그런 다음 10명에서 12명의 멕시코 병사들이 그랜트를 포위했고, 그는 여러 번 찔린 후 사망했다.[32][41] 역사가 스튜어트 리드는 멕시코 병사들이 그랜트가 전투에서 살아남지 못하도록 하려는 열의가 있었다고 이론화한다. 그랜트는 마타모로스와 그 주변 지역에서 연방주의 지지자들을 식별할 수 있었고, 그의 지식은 우레아와 그의 연방주의 지지 병력 일부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었다.[42]
브라운은 빈 권총을 멕시코 장교에게 던진 다음, 그랜트가 쏜 남자의 창을 잡고 자신을 방어하는 데 사용했다.[41] 병사들이 그를 lasso로 묶은 후, 브라운은 항복했고 포로로 잡혔다.[32] 브라운은 매복 현장으로 다시 데려와졌다. 그는 심하게 부상당한 텍사스인 조셉 카펜터가 땅에 누워 목숨을 구걸하는 것을 기억했다. 브라운은 멕시코 병사가 그를 쏘는 것을 보았다.[43]
3. 2. 텍사스군의 패배와 그랜트의 죽음
멕시코군은 약 40명의 소총 부대와 80명의 기마병으로 구성되어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가 공격을 개시했다.[28][29] 텍사스군은 기습 공격으로 패배했고, 그랜트, 모리스와 41명의 텍사스군이 사망했다.[29] 6명은 탈출에 성공했다.[29]멕시코군은 아구아 둘체 크릭의 교차점인 엘 푸에르토 데 로스 콰테스 데 아구아 둘체로 진군했다.[29] 이곳은 샌 패트리시오 남쪽으로 약 42km,[32] Banquete에서 약 1.6km 떨어져 있었고,[30] 현재 Kingsville 바로 북쪽에 있는 멕시코 병사들은 두 그루의 나무 숲에 숨었다.[32] 우레아는 80명의 기병대를 포함하여 약 150명의 병력을 보유했다.[28]
플라시도 베나비데스의 지휘를 받는 ''테자노스''(텍사스 출생 멕시코인)를 포함, 약 53명으로 구성된 그랜트의 부대는 사기가 좋았고 산 패트리시오를 향해 이동했다.[33] 그랜트, 베나비데스, 루벤 브라운은 텍사스군의 주력 부대보다 약 800m 앞서 말을 타고 갔지만, 멕시코 병사의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34]
오전 10시에서 11시 사이,[35] 텍사스군 대다수가 나무에 도달했을 때, 멕시코 기병대가 공격했다.[32] 텍사스인들은 총을 들기도 전에 총에 맞았고,[36] 도망치려 하자 용기병들이 그들을 추격하여 창으로 찔렀다.[33] 5명의 텍사스인들은 근처 작은 마을로 달려가 은신처를 확보하려 했고, 우레아는 보병을 보내 그들을 뒤쫓았다. 그들 중 두 명이 포로로 잡히고 나머지는 탈출했다.[37]
그랜트, 베나비데스, 브라운은 다른 텍사스인들과 합류하기 위해 돌아섰다. 브라운은 소총을 재장전하거나 말이 죽었기 때문에 말에서 내렸고, 전투에서 졌다는 것을 알게 된 그랜트는 브라운을 다른 말에 태우고 도망치려 했으나 멕시코 기병대가 그들을 막으려 했다. 그랜트는 장교 한 명을 쏘았고, 그와 베나비데스는 그 장교의 말을 지나 질주했다. 이 시점에서 가축 떼가 질주하여 멕시코 기병대를 밀어냈고, 3명의 텍사스인들은 말들을 따라갔다.[38] 멕시코 병사들이 즉시 추격했고,[32] 브라운의 회상에 따르면, 그와 그랜트의 말 모두 부상을 입었다.[39]
세 텍사스인들은 9.7-11km를 달리며 권총을 쏘아 멕시코 용기병들을 물러서게 했다. 멕시코 병사들은 항복하면 살려줄 것이라고 외쳤지만, 텍사스인 중 아무도 그들을 믿지 않았다.[40] 베나비데스는 가장 튼튼한 말을 가지고 있었고, 그랜트는 그에게 앞서 가서 패닌에게 멕시코군이 골리아드에 가까이 왔다고 경고하라고 명령했다.[32][41] 그랜트와 브라운은 포위되어 멈춰야 했다. 그랜트는 브라운의 팔에 창을 꽂은 멕시코 병사를 죽였다. 10명에서 12명의 멕시코 병사들이 그랜트를 포위했고, 그는 여러 번 찔린 후 사망했다.[32][41] 역사가 스튜어트 리드는 멕시코 병사들이 그랜트가 전투에서 살아남지 못하도록 하려는 열의가 있었다고 이론화한다. 그랜트는 마타모로스와 그 주변 지역에서 연방주의 지지자들을 식별할 수 있었고, 그의 지식은 우레아와 그의 연방주의 지지 병력 일부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었다.[42]
브라운은 빈 권총을 멕시코 장교에게 던진 다음, 그랜트가 쏜 남자의 창을 잡고 자신을 방어하는 데 사용했다.[41] 병사들이 그를 lasso로 묶은 후, 브라운은 항복했고 포로로 잡혔다.[32] 브라운은 매복 현장으로 다시 데려와졌고, 심하게 부상당한 텍사스인 조셉 카펜터가 목숨을 구걸하는 것을 보았다. 브라운은 멕시코 병사가 그를 쏘는 것을 보았다.[43]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우르레아는 42명의 텍사스인이 사망했다고 보고했지만,[44] 20세기 초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12명의 텍사스인만 사망한 것으로 기록했다.[45] 1970년대까지 혁명에 대한 테하노의 참여는 교과서에서 눈에 띄게 누락되었으므로, 역사가들이 베나비데스 휘하의 ''테하노''를 포함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33][46] 6명의 텍사스인이 포로로 잡혔다. 토르넬 포고령에 반하여, 우르레아는 항복한 사람들을 살려 마타모로스의 감옥으로 보냈다.[47] 보고서에 따르면 우르레아가 우르레아의 병사 중 한 명의 정부인 프란시타 알라베스의 개입 후에 관용을 베풀었다고 한다.[48]
6명의 텍사스인이 탈출했다. 이 중 5명은 골리아드에 있는 패닌의 수비대에 합류하여 나중에 골리아드 학살에서 살해되었다. 멕시코 측의 피해에 대한 보고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한 명의 멕시코 군인이 사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전투 후, 멕시코 군인들은 텍사스인들이 몰고 있던 말을 몰아 그들을 붙잡았다.[49] 이 전투는 마타모로스 원정의 종말을 알렸다.[50] 텍사스가 텍사스 독립 선언을 선언한 날과 같은 날에 일어났지만, 그랜트와 그의 부하들은 자신들이 새로운 텍사스 공화국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51]
역사가 스티븐 하딘에 따르면, 이 전투는 텍사스인들이 탁 트인 평원에서 잘 싸우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했다.[53] 이 전투 소식은 3월 4일에 패닌에게 전달되었다.[52] 우르레아의 임박한 도착은 패닌을 불안하게 만들었고, 그는 산타 안나가 그의 군대를 산안토니오 데 베하에서 골리아드로 이끌어 멕시코 군대의 두 갈래 사이에 패닌과 그의 부하들을 가두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53] 패닌은 임시 주지사인 제임스 로빈슨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나의 군사적 능력을 더 잘 판단하며, 만약 내가 군대를 지휘할 자격이 있다면, 아직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54] 그럼에도 불구하고 텍사스 임시 정부는 패닌에게 골리아드 요새를 계속 지휘하도록 하고, 후퇴할지 아니면 저항할지를 결정하도록 지시했다.[55] 패닌은 결정을 미루다가 결국 3월 19일에 골리아드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우르레아의 군대는 탁 트인 평원에서 패닌의 부하들을 가두었다. 텍사스인들은 콜레토 전투 후 항복했고, 패닌 대령을 포함한 대부분은 일주일 후 골리아드 학살에서 처형되었다.[56]
4. 1. 마타모로스 원정 좌절
우르레아는 42명의 텍사스인이 사망했다고 보고했지만,[44] 20세기 초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12명의 텍사스인만 사망한 것으로 기록했다.[45] 1970년대까지 혁명에 대한 테하노의 참여는 교과서에서 눈에 띄게 누락되었으므로, 역사가들이 베나비데스 휘하의 ''테하노''를 포함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33][46] 6명의 텍사스인이 포로로 잡혔지만, 토르넬 포고령에 반하여 우르레아는 항복한 사람들을 살려 마타모로스의 감옥으로 보냈다.[47] 보고서에 따르면 우르레아는 우르레아의 병사 중 한 명의 정부인 프란시타 알라베스의 개입 후에 관용을 베풀었다고 한다.[48]6명의 텍사스인이 탈출했으며, 이 중 5명은 골리아드에 있는 패닌의 수비대에 합류하여 나중에 골리아드 학살에서 살해되었다. 멕시코 측의 피해에 대한 보고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한 명의 멕시코 군인이 사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전투 후, 멕시코 군인들은 텍사스인들이 몰고 있던 말을 몰아 그들을 붙잡았다.[49] 이 전투는 마타모로스 원정의 종말을 알렸다.[50] 텍사스가 텍사스 독립 선언을 선언한 날과 같은 날에 일어났지만, 그랜트와 그의 부하들은 자신들이 새로운 텍사스 공화국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51]
역사가 스티븐 하딘에 따르면, 이 전투는 텍사스인들이 탁 트인 평원에서 잘 싸우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했다.[53] 이 전투 소식은 3월 4일에 패닌에게 전달되었다.[52] 우르레아의 임박한 도착은 패닌을 불안하게 만들었고, 그는 산타 안나가 그의 군대를 산안토니오 데 베하에서 골리아드로 이끌어 멕시코 군대의 두 갈래 사이에 패닌과 그의 부하들을 가두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53] 패닌은 임시 주지사인 제임스 로빈슨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나의 군사적 능력을 더 잘 판단하며, 만약 내가 군대를 지휘할 자격이 있다면, 아직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54] 그럼에도 불구하고 텍사스 임시 정부는 패닌에게 골리아드 요새를 계속 지휘하도록 하고, 후퇴할지 아니면 저항할지를 결정하도록 지시했다.[55] 패닌은 결정을 미루다가 결국 3월 19일에 골리아드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우르레아의 군대는 탁 트인 평원에서 패닌의 부하들을 가두었다. 텍사스인들은 콜레토 전투 후 항복했고, 패닌 대령을 포함한 대부분은 일주일 후 골리아드 학살에서 처형되었다.[56]
4. 2. 골리아드 학살과의 연관성
우르레아는 42명의 텍사스인이 사망했다고 보고했지만,[44] 20세기 초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12명의 텍사스인만 사망한 것으로 기록했다.[45] 1970년대까지 혁명에 대한 테하노의 참여는 교과서에서 눈에 띄게 누락되었으므로, 역사가들이 베나비데스 휘하의 ''테하노''를 포함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33][46] 6명의 텍사스인이 포로로 잡혔지만, 토르넬 포고령에 반하여 우르레아는 항복한 사람들을 살려 마타모로스의 감옥으로 보냈다.[47] 프란시타 알라베스의 개입으로 관용을 베풀었다는 보고가 있다.[48]6명의 텍사스인이 탈출했고, 이 중 5명은 골리아드 학살에서 살해되었다.[49] 멕시코 측의 피해에 대한 보고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한 명의 멕시코 군인이 사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전투 후, 멕시코 군인들은 텍사스인들이 몰고 있던 말을 몰아 그들을 붙잡았다.[49] 이 전투는 마타모로스 원정의 종말을 알렸다.[50] 텍사스가 텍사스 독립 선언을 선언한 날과 같은 날에 일어났지만, 그랜트와 그의 부하들은 자신들이 새로운 텍사스 공화국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51]
역사가 스티븐 하딘에 따르면, 이 전투는 텍사스인들이 탁 트인 평원에서 잘 싸우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했다.[53] 이 전투 소식은 3월 4일에 패닌에게 전달되었다.[52] 우르레아의 임박한 도착은 패닌을 불안하게 만들었고, 그는 산타 안나가 그의 군대를 산안토니오 데 베하에서 골리아드로 이끌어 멕시코 군대의 두 갈래 사이에 패닌과 그의 부하들을 가두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53] 패닌은 제임스 로빈슨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의 군사적 능력을 의심했다.[54] 그럼에도 불구하고 텍사스 임시 정부는 패닌에게 골리아드 요새를 계속 지휘하도록 하고, 후퇴할지 아니면 저항할지를 결정하도록 지시했다.[55] 패닌은 결정을 미루다가 결국 3월 19일에 골리아드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우르레아의 군대는 탁 트인 평원에서 패닌의 부하들을 가두었고, 텍사스인들은 콜레토 전투 후 항복했고, 패닌 대령을 포함한 대부분은 일주일 후 골리아드 학살에서 처형되었다.[56]
5. 역사적 평가 및 논란
5. 1. 텍사스 독립 전쟁에 대한 관점
5. 2. 제임스 그랜트에 대한 논란
참조
[1]
웹사이트
The Transformation of the Texas Economy
https://texaspolitic[...]
University of Texas at Austin
[2]
서적
2006
[3]
서적
2006
[4]
서적
1994
[5]
서적
2006
[6]
서적
2006
[7]
서적
2006
[8]
서적
2006
[9]
서적
2008
[10]
서적
1994
[11]
서적
2007
[12]
서적
1994
[13]
기타
[14]
서적
1994
[15]
서적
1994
[16]
서적
2006
[17]
서적
2006
[18]
서적
1994
[19]
서적
2007
[20]
서적
2007
[21]
서적
2007
[22]
서적
2008
[23]
서적
2007
[24]
서적
2000
[25]
서적
2008
[26]
서적
2007
[27]
서적
2007
[28]
서적
2007
[29]
서적
2007
[30]
서적
2013
[31]
서적
2000
[32]
서적
1994
[33]
서적
2007
[34]
서적
1994
[35]
서적
2000
[36]
서적
2000
[37]
서적
2007
[38]
서적
2007
[39]
서적
2000
[40]
서적
2007
[41]
서적
2007
[42]
서적
2007
[43]
서적
2007
[44]
서적
2000
[45]
서적
2007
[46]
서적
1985
[47]
서적
2007
[48]
서적
2000
[49]
서적
1998
[50]
서적
2008
[51]
서적
2007
[52]
서적
2000
[53]
서적
1994
[54]
서적
1994
[55]
서적
2000
[56]
서적
200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