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아즈키자카 전투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아즈키자카 전투는 센고쿠 시대에 오다 가문과 이마가와 가문, 그리고 마쓰다이라 가문 사이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를 통칭한다. 1542년의 제1차 전투는 오다 가문의 승리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역사적 사실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다. 1548년의 제2차 전투에서는 이마가와·마쓰다이라 연합군이 승리하였고, 이 전투는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등장과 오다 가문과의 동맹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아즈키자카 전투는 당시 복잡한 정세와 권력 다툼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542년 분쟁 - 갓산토다성 전투
    갓산토다성 전투는 1542년부터 1566년까지 오우치, 모리, 아마고 가문 간의 세력 다툼으로, 모리 가문이 승리하여 아마고 가문을 멸망시킨 일련의 전투이다.
  • 1542년 일본 - 덴분의 난
    덴분의 난은 1542년부터 1548년까지 다테 가문의 당주 다테 다네무네와 그의 아들 다테 하루무네 사이에서 벌어진 오슈 지방의 대규모 내전으로, 다네무네의 세력 확장에 대한 하루무네의 반발, 주변 다이묘들의 개입,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중재를 거쳐 다테 가문의 쇠퇴와 오슈 지역 정치적 판도 변화를 야기했다.
  • 1542년 일본 - 갓산토다성 전투
    갓산토다성 전투는 1542년부터 1566년까지 오우치, 모리, 아마고 가문 간의 세력 다툼으로, 모리 가문이 승리하여 아마고 가문을 멸망시킨 일련의 전투이다.
  • 오카자키시 - 마쓰다이라씨
    마쓰다이라씨는 기원이 불분명하나 세이와 겐지 닛타씨의 후예로 여겨지기도 하고 가모씨나 스즈키씨의 일족일 가능성도 있으며 미카와국 유래설이 가장 널리 알려진 일본의 무가로, 14세기경 미카와 마쓰다이라 마을에 세력을 확립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배출하고 에도 시대까지 이어졌다.
  • 오카자키시 - 오카자키번
    오카자키번은 에도 시대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출생지인 오카자키성을 중심으로 여러 후다이 다이묘들이 다스린 번으로, 재정난 속에서도 개혁을 시도하고 막부 말기 공무합체 운동에 참여하며 메이지 유신까지 존속했다.
아즈키자카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정보
전투명아즈키자카 전투 (1542년)
일부센고쿠 시대
날짜1542년
장소미카와국 아즈키자카
결과오다 씨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 1이마가와 씨
마쓰다이라 씨
교전 2오다 씨
지휘관 및 지도자
지휘관 1이마가와 요시모토
이마가와 셋사이
마쓰다이라 히로타다
지휘관 2오다 노부히데
오다 노부야스
오다 노부자네
가와지리 히데타카
관련 전투 목록
추가 정보
참고 문헌

아즈키자카 전투 현장

2. 역사적 배경

오다 노부히데1540년에 마쓰다이라 씨의 약점을 틈타 서 미카와 국의 중요 거점인 안조 성(아이치현 안조시)을 점령하고, 마쓰다이라 가문의 본거지인 오카자키 성 바로 앞 야하기 강 바로 서쪽까지 세력을 뻗쳤다.

마쓰다이라 히로타다는 동쪽의 스루가 국 · 토토미 국을 지배하는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후원을 받아 오카자키 성으로 돌아와 가독을 상속했지만, 여전히 세력은 불안정했다.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오다 가문의 서 미카와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1542년 8월(일설에는 12월) 대군을 이끌고 출진하였다. 이에 오다 노부히데도 안조 성에서 출격하여 9월 19일 양군은 오카자키 성 동남쪽의 아즈키자카에서 격돌하였다. (제1차 아즈키자카 전투)[2]

1544년, 미즈노 노부모토가 오다이노카타와의 인척 관계에도 불구하고 마쓰다이라 가문과 절연하고 오다 가문에 합류하면서 오와리·미카와 접경 지대에서 오다 가문의 영향력은 더욱 강화되었다.[2]

2. 1. 오다 가문과 마쓰다이라 가문의 대립

16세기 초, 오와리 국 남부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오다 노부히데는 전국 다이묘로 성장하고 있었다. 한편, 미카와 국의 마쓰다이라 히로타다마쓰다이라 기요야스1535년 모리야마 붕괴로 갑작스럽게 사망한 이후, 가문 내 분쟁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히로타다는 동쪽의 스루가 국과 토토미 국을 지배하는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지원을 받아 오카자키 성으로 복귀하여 가독을 이었지만, 여전히 그의 세력은 불안정했다.

1540년, 오다 노부히데는 마쓰다이라 가문의 약점을 틈타 서 미카와의 주요 거점인 안조 성(지금의 아이치현 안조시)을 점령하고, 마쓰다이라 가문의 본거지인 오카자키 성 바로 서쪽의 야하기 강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2. 2. 이마가와 가문의 개입

스루가 국과 도토미 국을 지배하던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마쓰다이라 가문을 지원하며 오다 가문과 대립했다.[2] 이마가와 가문의 개입은 아즈키자카 전투를 오다 가문과 이마가와 가문의 대리전 양상으로 만들었다.

1544년, 미즈노 노부모토마쓰다이라 히로타다의 정실인 동생 오다이노카타와의 인척 관계에도 불구하고, 마쓰다이라 가문과 절연하고 오다 가문에 붙었다. 이에 마쓰다이라 히로타다는 오다 가문에 대항하여 이마가와 가문과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만들기 위해 적자 다케치요(竹千代, 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슨푸에 인질로 보내기로 하였다.[2]

1547년, 6세였던 다케치요는 인질로 가는 길에 호송을 맡은 도다 야스미쓰의 배신으로 오다 가문에 넘겨졌다. 오다 노부히데는 다케치요를 이용하여 히로타다에게 이마가와 가문을 배반하고 오다 가문의 휘하로 들어올 것을 종용하였으나, 히로타다는 이를 거절하고 이마가와 가문의 지원을 받으며 오다 가문에 대한 항전을 관철하였다.[2]

1548년 3월,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다이겐 셋사이를 대장, 아사히나 야스요시를 부장으로 삼아 약 1만 명의 원군을 파견하여 오다 군과 전투를 벌였다.[2]

3. 제1차 아즈키자카 전투 (1542년)

1542년 오다 노부히데는 서미카와 방면으로 진출하려 하였고,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마쓰다이라 가문을 후원하며 오다 가문의 세력을 몰아내려 하였다. 1542년 8월(일설에는 12월), 양군은 미카와국 누카타군 아즈키자카(현 아이치현 오카자키시)에서 격돌하였다. 이 전투는 오다 군의 승리로 끝났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 전투 자체가 허구라는 설도 있다.[4]

3. 1. 전투 경과

1542년 음력 8월 10일(9월 19일), 오다 노부히데는 서미카와 진출을 위해 출진했고,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마쓰다이라 가문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양군은 아즈키자카에서 격돌했다.[4] 이 전투는 오다 군 무장들의 분투로 오다 군의 승리로 끝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이 1차 전투는 허구라는 설도 존재한다.[4]

1차 전투의 승리로 오와리·미카와 접경지대에서 오다 가문의 영향력은 계속 강화되었다. 1544년에는 미카와 국 헤키카이 군의 카리야 성(刈谷城)을 본거지로 삼아 접경 지대에서 세력을 갖고 있던 고쿠진 미즈노 노부모토가 동생 오다이노카타가 오카자키 성주 마쓰다이라 히로타다의 정실이라는 인척관계에도 불구하고 마쓰다이라 가문과 절연, 이마가와 씨를 배반하고 오다 가문에 붙었다.

이러한 정세 하에 마쓰다이라 히로타다는 오다 가문에 대항하여 이마가와 가문과의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만들기 위해 적자 다케치요(竹千代, 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이마가와 가문의 본거지 슨푸(駿府)에 인질로 보내기로 하였다. 그러나 1547년, 당시 6세이던 다케치요는 인질로 가는 길에 호송을 맡은 다와라 성(田原城) 성주 도다 야스미쓰의 배신으로 오다 가문에 넘겨지고 말았다. 오다 노부히데는 인질 다케치요를 이용하여 히로타다에게 이마가와 가문을 배반하고 오다 가문의 휘하로 들어올 것을 종용하였으나, 히로타다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이마가와 가문의 지원을 받으며 오다 가문에 대한 철저 항전의 자세를 관철하였다.

이 즈음, 오다 노부히데는 적남 노부나가사이토 도산의 딸 노히메의 혼인을 성사시켜, 누대의 적국 미노의 사이토 가문과 화의를 맺었다. 이로써 북쪽의 걱정이 없어져 여유가 생긴 노부히데는 다시 동쪽으로 눈을 돌려, 안조 성을 교두보로 삼아 오카자키 성 공략을 감행하게 되었다.

1548년 3월, 노부히데는 오카자키 성을 무력으로 공략하기 위하여, 장남 오다 노부히로를 선봉으로 삼아 4천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안조 성에서 출진하여 가미와다(上和田)에 포진하였다. 이에 이마가와 요시모토도 가문의 중신 다이겐 셋사이를 대장, 아사히나 야스요시를 부장으로 삼아 약 1만여 명의 원군을 파견하였다. 3월 19일(양력 4월 27일)에 이마가와 군과 오다 군의 선봉 노부히로가 아즈키자카에서 조우하여 전투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이마가와 군이 언덕 정상 부근에 포진하였기 때문에 우세하였으나, 노부히로 부대도 열세를 깨닫고 무리하지 않고 병사를 돌려 노부히데의 본대에 합류하는 데 성공하여 사기가 오른 오다 군의 분투로 마쓰다이라 부대가 무너지고, 점차 이마가와 군의 패색이 짙어져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마가와 군의 복병 부대가 갑자기 오다 본대의 측면으로 치고 들어와 진형을 무너뜨리자, 오다 군은 안조 성으로 패주하게 되었다.

1542년 제1차 아즈키자카 전투에서 오다 노부히데의 부하 7명이 두각을 나타내어 "아즈키자카 칠본창"(小豆坂七本槍)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아즈키자카 7본창
오다 노부미츠
오다 노부후사
오카다 시게요시
삿사 마사츠구
삿사 마고스케
나카노 시게요시
시모카타 사다키요


3. 2. 아즈키자카 칠본창

1542년 제1차 아즈키자카 전투에서 오다 노부히데의 부하 7명이 큰 공을 세워 "아즈키자카 칠본창"(小豆坂七本槍)으로 불렸다. 이들은 다음과 같다.[4]

  • 오다 노부미츠
  • 오다 노부후사
  • 오카다 시게요시
  • 삿사 마사츠구
  • 삿사 마고스케
  • 나카노 시게요시
  • 시모카타 사다키요

4. 제2차 아즈키자카 전투 (1548년)

1542년 첫 번째 아즈키자카 전투에서 승리한 후, 오다 가문은 오와리와 미카와 국경 지대에서 영향력을 강화했다. 1544년에는 미카와 국 헤키카이 군의 카리야 성(카리야시)을 거점으로 하는 고쿠진 미즈노 노부모토마쓰다이라 히로타다의 정실 오다이노카타의 친정 오빠임에도 불구하고, 마쓰다이라 가문과 결별하고 이마가와 가문을 배신하며 오다 가문에 합류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쓰다이라 히로타다는 이마가와 가문과의 관계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1547년 당시 6세였던 아들 다케치요슨푸의 이마가와 가문에 인질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다케치요는 호송을 맡은 도다 야스미쓰의 배신으로 오다 노부히데에게 넘겨졌다. 노부히데는 다케치요를 이용해 히로타다에게 오다 가문에 합류할 것을 권유했으나, 히로타다는 이를 거절하고 이마가와 가문의 지원을 받으며 오다 가문에 대한 항전을 계속했다.

한편, 노부히데는 사이토 도산의 딸 노히메와 아들 오다 노부나가를 결혼시켜 미노국의 사이토 가문과 화친을 맺었다. 북쪽의 위협을 해소한 노부히데는 다시 동쪽으로 눈을 돌려 안조 성을 발판으로 오카자키 성 공략을 계획했다.

1548년 3월, 노부히데는 오카자키 성을 공격하기 위해 장남 오다 노부히로를 선봉으로 4천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안조 성에서 출진하여 가미와다에 진을 쳤다. 이에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중신 다이겐 셋사이를 대장, 아사히나 야스요시를 부장으로 삼아 약 1만 명의 원군을 파견했다. 3월 19일 양군은 아즈키자카에서 격돌했다.

4. 1. 전투 경과

1544년, 미즈노 노부모토가 오다 가문에 가담하면서 오다 가문의 영향력이 더욱 커졌다. 1547년, 마쓰다이라 히로타다는 아들 다케치요를 이마가와 가문에 인질로 보내려 했으나, 도다 야스미쓰의 배신으로 오다 가문에 넘겨졌다.[5][6] 오다 노부히데는 다케치요를 이용해 히로타다에게 오다 가문에 가담할 것을 권유했으나, 히로타다는 이를 거절하고 이마가와 가문의 지원을 받으며 오다 가문에 대한 항전을 계속했다.

1548년 음력 3월 19일(4월 27일), 오다 노부히데는 오다 노부히로를 선봉으로 오카자키성 공격에 나섰고, 이마가와 요시모토다이겐 셋사이를 대장으로 원군을 파견했다. 양군은 아즈키자카에서 격돌, 이마가와·마쓰다이라 연합군이 승리했다.[7] 처음에는 이마가와 군이 언덕 정상 부근에 있어 유리했지만, 오다 노부히로 부대는 병력을 돌려 오다 노부히데의 본대에 합류하여 사기가 올랐다. 오다 군의 분투로 마쓰다이라 부대가 무너지고 이마가와 군의 패색이 짙어졌으나, 이마가와 군의 복병 부대가 오다 본대의 측면을 공격하여 진형을 무너뜨리자 오다 군은 안조성으로 패주했다.

일본어 위키백과에는 마쓰다이라 히로타다가 제2차 아즈키자카 전투 이전에 이미 오다 측에 항복했다는 설이 제시되어 있다.[8][9] 그러나 아즈키자카 전투 단계에서는 마쓰다이라 히로타다가 이미 이마가와 측으로 복귀했다는 견해도 있다.[10]

5. 전투의 결과 및 영향

1548년 마쓰다이라 히로타다가 가신에게 살해당하면서, 2차 전투에서 이마가와·마쓰다이라 연합군이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쓰다이라 가문은 어려움을 겪었다.[8] 다케치요는 오다 가문에 인질로 잡혀 있었고, 오카자키 성은 성주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후 다이겐 셋사이오다 노부히데의 서장자 오다 노부히로를 안쇼 성 전투에서 포로로 잡아, 1549년 다케치요와 교환하는 데 성공했다.

5. 1. 마쓰다이라 가문의 몰락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등장

1548년 마쓰다이라 히로타다가 가신에게 살해당하면서 2차 전투에서 이마가와·마쓰다이라 연합군이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쓰다이라 가문은 어려움을 겪었다.[8] 다케치요는 오다 가문에 인질로 잡혀 있었고, 오카자키 성은 성주가 없는 상황이었다. 다이겐 셋사이오다 노부히데의 서장자 오다 노부히로를 안쇼 성 전투에서 포로로 잡아, 1549년 11월 8일부터 9일에 걸쳐 다케치요와 교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마가와 가문은 다케치요를 슨푸로 데려가 마쓰다이라 가문을 완전히 종속시키고, 오카자키 성에 대관을 파견하여 지배하였다.

안조 성 함락으로 오다 가문의 미카와 진출은 좌절되었고, 1551년 오다 노부히데 사후 노부나가와 그의 동생 노부카쓰(후의 오다 노부유키) 간의 내분이 일어났다. 오와리·미카와 접경지대의 오다 세력은 동요했고, 나루미 성·가사데라 성이 이마가와 가문에 투항하여 이마가와 가문이 오와리를 침식해 들어왔다.

노부나가는 동생과의 분쟁에서 승리하고 오와리 통일을 진행, 가사데라를 탈환하고 오카베 모노토부가 지키는 나루미 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1560년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대군으로 오와리에 침공하여 나루미 성 등 고립된 이마가와 세력을 구원하고 접경지대 열세를 회복하려 했으나,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노부나가의 기습으로 요시모토가 전사했다. 총대장을 잃은 이마가와 군은 미카와에서 철수하고, 마쓰다이라 모토야스(다케치요)가 이끄는 마쓰다이라 가문이 부흥했다. 이후 마쓰다이라 가문과 오다 가문은 기요스 동맹을 맺어 오와리·미카와 접경 지대의 전란은 잦아들었다.

5. 2. 오다 가문과 이마가와 가문의 대립 심화

1549년, 다이겐 셋사이는 인질 교환을 통해 다케치요를 이마가와 가문의 보호 아래 두려고 안조 성을 공격하여 오다 노부히데의 서장자인 오다 노부히로를 포로로 잡았다. 이로써 노부히로와 다케치요 간의 인질 교환 협상에 성공한 이마가와 가문은 다케치요를 슨푸로 데려가 마쓰다이라 가문을 완전히 종속시키고, 서미카와의 거점인 오카자키성에 대관을 파견하여 지배하였다.[3]

한편, 안조 성 함락으로 오다 가문의 미카와 진출은 좌절되었고, 1551년에는 오다 노부히데가 병사하면서 후계자 노부나가와 그의 동생 노부카쓰(후의 오다 노부유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났다. 그 결과 오와리·미카와 접경지대의 오다 세력이 동요하기 시작하여, 나루미 성·가사데라 성이 이마가와 가문에 투항하는 등 이마가와 가문의 세력이 오와리를 침식해 들어왔다.[3]

이후 동생과의 분쟁에서 승리한 오다 노부나가는 오와리 통일을 진행하여 가사데라를 탈환하고, 이마가와 가문의 장수 오카베 모토노부가 지키는 나루미 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이에 1560년,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대군을 이끌고 오와리에 침공하여 고립된 이마가와 세력을 구원하고 접경지대에서의 열세를 회복하려 하였다. 그러나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오다 노부나가의 기습을 받고 요시모토가 전사하자, 총대장을 잃은 이마가와 세력은 미카와에서 급히 철수하였고, 그 대신 마쓰다이라 모토야스(다케치요)가 이끄는 마쓰다이라 가문이 부흥하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쓰다이라 가문과 오다 가문은 기요스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장기간 지속되었던 오와리·미카와 접경 지대의 전란은 어느 정도 잦아들게 되었다.[3]

6. 역사적 평가 및 의의

아즈키자카 전투는 센고쿠 시대의 복잡한 정세와 권력 다툼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전투는 지역 호족 간의 갈등, 중앙 권력의 개입, 그리고 개인의 운명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1542년1548년 두 차례에 걸쳐 벌어진 아즈키자카 전투는 오다 노부히데이마가와 요시모토 간의 세력 다툼을 보여준다. 특히, 2차 전투에서는 마쓰다이라 히로타다의 아들 다케치요(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인질로 보내지는 과정에서 도다 야스미쓰의 배신으로 오다 가문에 넘겨지는 등 복잡한 사건들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당시 센고쿠 시대의 혼란스러운 정세를 반영한다.

이 전투는 봉건 시대의 권력 투쟁과 배신, 그리고 개인의 운명이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민주주의와 평화로운 정권 교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중요한 역사적 교훈을 제공한다.

참조

[1]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o.
[2] 웹사이트 市指定:史跡 小豆坂古戦場跡 https://www.city.oka[...] 2020-09-08
[3] 웹사이트 岡崎まちものがたり 14 小豆坂学区 https://www.city.oka[...] 岡崎市 市制100周年記念サイト 2017-01
[4] 서적 駿河 今川一族 新人物往来社
[5] 간행물
[6] 간행물
[7] 문서 「本成寺文書」『古証文』/『戦国遺文』今川氏編第2巻965号
[8] 논문 織田信秀岡崎攻落考証
[9] 서적 徳川家康 境界の領主から天下人へ 平凡社
[10] 서적 今川義元 戎光祥出版 2019-0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