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분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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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덴분의 난은 1542년 다테 가문의 당주 다테 다네무네와 그의 아들 다테 하루무네 사이에서 발생한 내분이다. 다네무네가 가문의 세력을 확장하고 집권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아들 하루무네와 가신들의 반발을 샀다. 하루무네는 아버지 다네무네를 유폐하고 가문을 장악하려 하였고, 이로 인해 주변 다이묘들을 포함한 대규모의 내전으로 번졌다. 1548년 쇼군의 중재로 다네무네가 은거하고 하루무네가 가독을 상속하는 조건으로 화의가 성립되었지만, 다테 가문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이 사건은 다테 가문 내부의 권력 다툼뿐만 아니라 주변 다이묘들의 세력 판도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에치고의 우에스기 가문 겐신의 센고쿠 다이묘로서의 지위 확립에도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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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분의 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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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발생 시기 | 일본 무로마치 시대 덴분 시대 (1542년 - 1548년) |
주요 인물 | 다테 하루무네, 다테 다네무네 |
관련 가문 | 다테 씨, 오다테 씨, 구로카와 씨, 아이즈 아시나 씨 |
배경 | |
원인 | 다테 씨 내부의 권력 다툼, 가신들의 정치적 야망 |
주요 쟁점 | 가문의 후계 문제, 영지 분배, 가신들의 세력 확장 |
전개 과정 | |
초기 단계 | 다테 다네무네의 은퇴 후 다테 하루무네의 가독 상속에 대한 반발 |
주요 전투 | 고케자키 성 전투 오모리 성 전투 다테자키 성 전투 |
종결 |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중재로 화의 성립, 다테 씨 내부의 권력 균형 유지 |
영향 | |
정치적 영향 | 다테 씨의 세력 약화, 주변 다이묘들의 영향력 강화 |
사회적 영향 | 영내 백성들의 생활 불안정, 농업 생산력 감소 |
관련 인물 | |
주요 가신 | 오다테 사다토모, 구로카와 아키나, 나리타 무네야스 |
주변 다이묘 | 아이즈 아시나 씨, 소마 씨, 하타케야마 씨 |
기타 | |
다른 이름 | 다테 가문 내란 (伊達家 внутри乱) |
2. 배경
에이쇼 11년(1514년)에 가독을 상속하여 다테 가문 제 14대 당주가 된 다테 다네무네는 그 후 30년에 걸쳐 많은 자식들을 주변 다이묘에게 보내어(양자·혼인) 세력을 확장하였다.[1] 그리하여 덴분 연간 초두에는 무쓰국 10개 군을 지배하에 두고 무쓰 슈고직을 획득하여 모가미 씨(最上)·소마씨(相馬)·아시나씨(蘆名)·오자키 씨(大崎)·가사이 씨(葛西) 등 오우(奥羽)[3] 남부의 다이묘 대부분을 다테 가문에 종속시키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오우에서 일대 세력을 구축한 다네무네는 일거에 크게 확장된 다테 가문의 통제를 위하여 분국법[4]을 제정하는 등 집권화를 강하게 추진하였다. 또한 한편으로 종속시킨 다이묘에 대해서는 유화책을 펴서, 사위 소마 아키타네(相馬顕胤)에게 영지를 나누어 주려고 하였으나, 이 증여안에 다네무네의 적남 하루무네가 맹렬하게 반발하여 부자 간의 대립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이후 다테 가문의 세력을 더욱 확장하려는 다네무네는 3남 도키무네마루(후의 다테 사네모토(伊達実元))를 에치고 슈고 우에스기 사다자네(上杉定実)의 양자로 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덴분 9년(1540년)에 에치고에서 이 양자 건을 반대하는 고쿠진 영주 혼조 후사나가(本庄房長)등이 거병하여 분쟁으로 발전하였다. 당시 에치고의 실권을 잡고 있던 전 슈고다이 나가오 다메카게는 당초에는 이 혼인을 추진하는 입장을 보였지만, 다네무네의 군사 개입을 계기로 반대를 명확히 하였다. 다네무네는 이러한 반대파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에치고에 입국하는 도키무네마루에게 가신 100명을 선발하여 수행하게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정예 가신과 병사를 선발하여 보내면 다테 가문이 약체화 될 것을 걱정한 하루무네는 나카노 무네토키(中野宗時)·고오리 가게나가(桑折景長) 등 다네무네의 집권화 정책에 반대하는 중신들의 지지를 얻어 부친 다네무네를 연금하기로 결의하였다.
2. 1. 에치고 정세
3. 세력 구도
다테 가문의 내분은 크게 다테 다네무네 파와 다테 하루무네 파로 나뉘었으며, 주변 다이묘들도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양측에 가담했다.
다테 다네무네 파는 다테 다네무네와 그의 직계, 인척 관계의 다이묘들이 중심이었다. 오사키 요시노부, 가사이 하루키요, 소마 아키타네, 다무라 다카아키, 이시카와 하루미쓰 등이 가담했다. 다테 가문에서는 다테 다네무네를 비롯하여, 고야나가와 무네토모・무네히데, 카케다 토시무네・요시무네, 아유카이 모리무네, 카미고리야마 타메이에, 호리코시 오키유키, 토미즈카 나카츠나, 카네자와 무네토모, 아와노 나가쿠니, 이시모다 궁내소보 등이 참여했다. 오사키 가문에서는 오사키 요시노부가, 가사이 가문에서는 가사이 하루키요가, 하타케야마 가문에서는 하타케야마 요시우지가 참여했다. 소마 가문에서는 소마 아키타네를 비롯하여, 코리 히사이에・키요이에, 오카다 나오타네, 호리우치 치카타네, 에이 타네하루, 아오타 타네키요가 참여했다. 그 외에도 타무라 타카아키, 이시카와 하루미쓰, 코쿠분 무네츠나, 쿠로카와 카게우지・타네쿠니, 히로타 무네츠나, 와타리 무네타카・츠나무네・모토무네, 히시누마 토키히사 등이 다테 다네무네 파에 가담했다. 에치고국에서는 슈고인 우에스기 사다자네와 나카조 후지스케가 다네무네 파였다. 이후 다테 사네모토, 하세쿠라 츠네나가는 다테 다네무네 파에서 다테 하루무네 파로 전향하거나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 아시나 모리우지, 니카이도 테루유키, 모가미 요시모리, 이시바시 나오요시도 하루무네 파로 전향했다. 나가에 모리타케와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던 유키 하루츠나도 하루무네 파에 가담했다.
다테 하루무네는 다테 다네무네의 중앙 집권 정책에 불만을 품은 가신들을 이끌었다. 코리 카게나가, 나카노 무네토키, 오니와 요시나오, 가타쿠라 가게쓰나 등이 하루무네 파에 가담했다.
아시나 모리우지는 다테 다네무네의 사위였으나, 다네무네 파에서 다테 하루무네 파로 돌아섰다. 모가미 요시모리는 야마가타성을 거점으로 하는 다이묘로, 처음에는 다네무네 파였으나 이후 하루무네 파로 전향했다. 이시바시 나오요시는 시오마츠성의 성주로, 다네무네 파에서 하루무네 파로 입장을 바꾸었다.
3. 1. 다테 다네무네 파
다테 다네무네와 그의 직계, 인척 관계의 다이묘들이 중심이었다. 오사키 요시노부(大崎義宣), 가사이 하루키요(葛西晴清), 소마 아키타네, 다무라 다카아키(田村隆顕), 이시카와 하루미쓰(石川晴光) 등이 가담했다.다테 가문에서는 다테 다네무네를 비롯하여, 고야나가와 무네토모・무네히데, 카케다 토시무네・요시무네, 아유카이 모리무네, 카미고리야마 타메이에, 호리코시 오키유키, 토미즈카 나카츠나, 카네자와 무네토모, 아와노 나가쿠니, 이시모다 궁내소보 등이 참여했다.
오사키 가문에서는 오사키 요시노부가, 가사이 가문에서는 가사이 하루키요가, 하타케야마 가문에서는 하타케야마 요시우지가 참여했다. 소마 가문에서는 소마 아키타네를 비롯하여, 코리 히사이에・키요이에, 오카다 나오타네, 호리우치 치카타네, 에이 타네하루, 아오타 타네키요가 참여했다.
그 외에도 타무라 타카아키, 이시카와 하루미쓰, 코쿠분 무네츠나, 쿠로카와 카게우지・타네쿠니, 히로타 무네츠나, 와타리 무네타카・츠나무네・모토무네, 히시누마 토키히사 등이 다테 다네무네 파에 가담했다. 에치고국에서는 슈고인 우에스기 사다자네와 나카조 후지스케가 다네무네 파였다.
이후 다테 사네모토, 하세쿠라 츠네나가는 다테 다네무네 파에서 다테 하루무네 파로 전향하거나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 아시나 모리우지, 니카이도 테루유키, 모가미 요시모리, 이시바시 나오요시도 하루무네 파로 전향했다. 나가에 모리타케와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던 유키 하루츠나도 하루무네 파에 가담했다.
3. 2. 다테 하루무네 파
다테 하루무네는 다테 다네무네의 중앙 집권 정책에 불만을 품은 가신들을 이끌었다. 고오리 가게나가(桑折景長), 나카노 무네토키(中野宗時), 오니와 요시나오(鬼庭良直), 가타쿠라 가게쓰나(片倉景綱) 등이 하루무네 파에 가담했다.3. 3. 중립 및 입장 변화 세력
아시나 모리우지(蘆名盛氏)는 다테 다네무네의 사위였으나, 다네무네 파에서 다테 하루무네 파로 돌아섰다. 모가미 요시모리(最上義守)는 야마가타성을 거점으로 하는 다이묘로, 처음에는 다네무네 파였으나 이후 하루무네 파로 전향했다. 이시바시 나오요시(石橋尚義)는 시오마츠성의 성주로, 다네무네 파에서 하루무네 파로 입장을 바꾸었다.4. 경과
1542년(덴분 11년) 6월, 하루무네는 매사냥 후 귀가하던 다네무네를 습격하여 니시야마 성(西山城)에 유폐했다. 그러나 다네무네는 곧 측근에 의해 구출되어 가케타 도시무네(懸田俊宗)의 가케타 성(懸田城)으로 탈출, 소마 아키타네 등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이로 인해 다테 가문의 내분은 오우 지방의 다이묘들을 끌어들인 대규모 전란으로 번졌다. 초기에는 다네무네 파가 우세했으나, 1547년(덴분 16년) 다네무네 파의 다무라 다카아키(田村隆顕)와 아시나 모리우지(蘆名盛氏)의 갈등으로 아시나 가문이 하루무네 파로 돌아서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1548년(덴분 17년) 9월,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중재로 다네무네가 은거하고 하루무네가 가독을 상속하는 조건으로 화의가 성립되었다. 에치고에서도 도키무네마루 양자 건을 둘러싸고 전투가 벌어졌으나, 양자 건은 좌절되었다.
5. 영향
6년간의 내전으로 다네무네가 당주가 된 뒤부터 확대일로를 걸어온 다테 가문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우선, 다테 가문에 복속하였던 오우의 다이묘들 중 아시나 가문, 소마 가문, 모가미 가문 등이 혼란을 틈타 독립하여 세력을 확장하였는데, 특히 아시나 가문은 다테 가문과 대등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또한 오사키, 가사이 양 가문도 양자로 들인 다네무네의 자식들이 축출당하여 다테 가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게 되었다.
다테 가문 내부에서도 다네무네 파였던 가케타 도시무네 등이 화평안에 불복하여 하루무네에게 계속 반항하여, 이들을 진압하는데 5년 여가 걸렸다. 그리고 하루무네 파의 중신 나카노 무네토키가 난중에 아들 히사나카를 마키노 가문의 후계자로 보내는 등 세력을 길러 가문 내 최대 실력자로서 권세를 휘두르게 되었다. 하루무네는 난 종결 후 가문을 추스르고 다시 집권화를 추진하려고하나, 도움을 받은 하루무네 파의 중신들에게 슈고 불입권 등의 특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난의 후유증은 하루무네의 아들 데루무네 대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정리되었다.
에치고에서는 덴분 19년(1550년)에 우에스기 사다자네가 후사를 얻지 못한채로 사망하여, 에치고 슈고 우에스기 가문은 단절되었다. 그 때문에 나가오 하루카게의 동생으로 슈고다이가 된 나가오 가게토라(후의 우에스기 겐신)가 에치고 국주가 되어 명실공히 센고쿠 다이묘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5. 1. 덴분(天文)의 난에 대한 재평가
덴분(天文)의 난은 에도 시대 센다이 번(仙台藩)의 역사 편찬 과정에서 하루무네가 부정적으로 평가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하루무네와 대립했던 무네토키, 가게나가 등의 자손이 몰락하거나 단절되어, 이들을 '간신'으로 묘사해도 반발할 세력이 없었다는 점도 지적된다.6. 한국과의 관계
참조
[1]
서적
福島県史
[2]
논문
上杉謙信の家督継承と家格秩序の創出
[2]
서적
上杉謙信
戒光祥出版
[3]
문서
오슈(奥州, 무쓰 국)과 우슈(羽州, 데와국)의 총칭. 현 도호쿠 지방 전역.
[4]
문서
센고쿠 다이묘가 자신의 영지 지배를 위해 제정한 가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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