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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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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압구정터는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정자리에 있는 조희직의 정자 터이다. 고려 말 문신이었던 조희직은 신돈을 탄핵하다 진도로 유배되었고, 조선 건국 후에도 벼슬을 거절하고 진도에 정자를 지어 생을 마쳤다. 1989년 창녕 조씨 종중에서 유적비를 건립하여 보존하고 있으며, 현재 정자리 108-5번지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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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터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압구정터 정보
압구정터 이미지
압구정터
국가진도군
유형향토문화유산(유형유산)
지정 번호19
지정일2012년 2월 29일
주소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정자리 108-6, 1051, 127
시대알 수 없음
소유알 수 없음
관리알 수 없음
참고알 수 없음
면적알 수 없음
수량알 수 없음
전승지알 수 없음
전승자알 수 없음
설명알 수 없음
웹사이트알 수 없음
문화재청알 수 없음

2. 압구정터

압구정터는 진도군 군내면 정자리에 있는 조선 초기의 정자 터이다. 1989년 진도 현지의 창녕 조씨 종중에서 유적비를 건립하여 보존하고 있다.[1]

조희직(曺希直)은 고려 말의 문신으로, 본관은 창녕이다. 조계룡의 28세손이며, 증조부는 조정통(曺精通), 조부는 조한용(曺漢龍), 아버지는 조경숙(曺景淑)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와는 사촌 동서 관계이다. 부인은 강윤충(康允忠)의 딸이며, 아들 조근(曺謹)과 조심(曺諶)을 두었다.

1356년(공민왕 15) 정언(종6품) 재임 중 정추(鄭樞), 이존오(李存吾)와 함께 신돈(申旽)의 비행을 탄핵하다가 진도로 유배되어 가흥현(嘉興縣)의 호장을 지냈다.

조선 건국 후 조정에서 여러 차례 벼슬을 제안했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키고, 고려 왕조에 대한 은혜에 보답하지 못한 채 새 조정에 나갈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 이후 진도군 군내면 정자리 해안에 압구정(狎鷗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낚시를 하며 여생을 보냈고,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진도에 정착하게 되었다.

3. 조희직의 생애

조희직은 고려 말의 문신으로 본관은 창녕이며, 이성계와는 사촌 동서 간이다.[1] 1356년(공민왕 15) 정추, 이존오와 함께 신돈의 비행을 탄핵하다 진도로 유배되었다. 조선 건국 후 여러 차례 벼슬이 제안되었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키며 거절하였다. 진도군 군내면 정자리에 압구정을 짓고 여생을 보냈으며, 후손들이 대대로 진도에 살게 되었다.[1]

3. 1. 가계

조희직은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창녕이고 시조 조계룡의 28세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조정통(曺精通), 할아버지는 조한용(曺漢龍), 아버지는 조경숙(曺景淑)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와는 사촌 동서간이다.[1] 부인은 강윤충(康允忠)의 딸이며, 슬하에 아들 조근(曺謹)과 조심(曺諶)을 두었다.

3. 2. 관직 생활과 유배

조희직은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창녕이며, 시조 조계룡의 28세손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와는 사촌 동서 관계이다. 1356년(공민왕 15) 정언(종6품) 재임 중 정추, 이존오와 함께 신돈의 비행을 탄핵하다가 진도로 유배되어 가흥현(嘉興縣)[1]의 호장(戶長)을 역임하였다.

조선 건국 후 중앙 정부에서 여러 번 벼슬을 제안했으나, "어찌 불사이군(不事二君)을 할 수 있겠으며, 고려 왕조에서 고관을 배출한 집안으로서 국은에 보답하지도 못했는데 무슨 면목으로 새 조정에 나갈 수 있겠는가?"라며 거절하였다.

3. 3. 불사이군의 절개

조희직은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창녕이고 시조 조계룡의 28세손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와는 사촌 동서간이다. 1356년(공민왕 15) 정추, 이존오와 함께 신돈의 비행을 탄핵하다 진도로 쫓겨나 가흥현(嘉興縣)[1]의 호장(戶長)을 역임하였다.

조선 건국 뒤 중앙정부에서 여러 번 벼슬길에 나오기를 요청하였으나, “어찌 불사이군(不事二君)을 할 것이며, 고려 왕조에서 고관을 배출한 집안으로 국은에 보답하지도 못했는데 무슨 면목으로 새 조정에 나갈 것인가?”하며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진도군 군내면 정자리 해안에 압구정(狎鷗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낚시를 하며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그리하여 조희직의 후손들이 대대로 진도에 살게 되었다고 한다.

4. 압구정 건립과 후손

조희직은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창녕이며, 시조 조계룡의 28세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조정통(曺精通), 할아버지는 조한용(曺漢龍), 아버지는 조경숙(曺景淑)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와는 사촌 동서간이다. 부인은 강윤충(康允忠)의 딸이며, 아들 조근(曺謹)과 조심(曺諶)을 두었다.

1356년(공민왕 15) 조희직은 정언(正言, 종6품) 재임 중 정추(鄭樞), 이존오(李存吾)와 함께 신돈(申旽)의 비행을 탄핵하다 진도로 쫓겨나 가흥현(嘉興縣)[1]의 호장(戶長)을 역임하였다.

조선 건국 뒤 중앙정부에서 여러 번 벼슬길에 나오기를 요청하였으나, 조희직은 “어찌 불사이군(不事二君)을 할 것이며, 고려 왕조에서 고관을 배출한 집안으로 국은에 보답하지도 못했는데 무슨 면목으로 새 조정에 나갈 것인가?”하며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진도군 군내면 정자리 해안에 압구정(狎鷗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낚시를 하며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그리하여 조희직의 후손들이 대대로 진도에 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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